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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추(晩秋)의 상념

한국문인협회 로고 이대범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1월 68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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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동리 여락서재(餘樂書齋)에도 가을빛이 완연하다. 깎고 돌아서면 곧 무성해져 서재 지기를 지치게 했던 잔디도 누렇게 변했다. 백일홍을 제외한 화단의 꽃들도 시들었다. 꽃 무게를 이기지 못해 바닥까지 늘어졌던 흰 수국은 제 색깔을 잃어 가고, 대신 울타리 철망을 덮은 장미가 새로 난 가지에 듬성듬성 작은 꽃송이를 매단 채 가는 계절이 아쉬운 듯 바람에 몸을 떤다. 몽우리를 터뜨리기 시작한 국화는 저마다 고운 빛깔을 뽐내고, 고추잠자리 무리가 새똥 세례로 얼룩진 조각상 주변을 맴돌다 무엇에 놀란 듯 흩어졌다 모이기를 반복한다. 누거(陋居) 앞을 장막처럼 가렸던 아카시아 고목들이 잎을 떨구니 건넛마을 풍경이 동양화 화폭처럼 다가온다. 서재 앞을 흐르는 요란하던 시냇물 소리도 풍경 소리에 밀려 아련하다. 어김없고 한결같은 계절의 변화가 경이롭다. 대청에 앉아 오감으로 느끼는 가을 정취가 더할 나위 없이 푼푼하다. 자연의 변화는 저리도 여유롭고 아름답건만, 만추(晩秋)의 나이에도 정체 모를 허기를 주체할 길이 망연하니 자괴감이 엄습해 온다.
부쩍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비록 필부의 삶이지만, 세월의 더께만큼이나 삶의 흔적이 축적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 어머니는 당신의 신산했던 삶을 넋두리하듯 늘어놓으며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책으로 쓰면 『동아전과』 로열권도 넘을 거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했었다. 어린 마음에도 엄마는 뻥(?)이 세다고 생각했었다. 1960년대의 『동아전과』. 그 시절 『완전학습』과 쌍벽을 이루었던 가공할 두께의 학습지가 아니었던가. 식솔들을 외면하고 집 밖을 전전하는 남편을 원망하며 어린 자식들을 보살피느라 마음고생이 많았음을 조금 과장해서 표현한 것이리라. 『동아전과』의 쓰임새가 기발하다. 그런 노모의 사연에 견줄 수는 없겠지만, 롤러코스터 위를 달리듯 부침이 컸던 삶을 살아온 내 삶의 자취도 노모 못지않을 것 같다.
돌아본다는 것은 단순히 기억을 소환하고 회상하는 일이 아니다. 지난 삶에 만족하든 못하든 살아온 날의 흔적을 반추하고, 자기 성찰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천착하는 과정이다. 여생의 길고 짧음을 가늠할 수는 없지만, 성찰을 통해 새롭게 구성한 의미망을 바탕으로 남은 생의 청사진을 그려보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다.
지난 삶을 돌아보는 것은 좋은데, 문제는 아름다운 추억보다 상처받았던 일들을 더 자주 떠올리게 되는 점이다. 대학 시험에 합격하고, 아내를 만나 결혼하고, 두 아이를 낳고, 집을 장만하고, 남부럽지 않은 직장을 구하고, 이순을 훌쩍 넘긴 나이에 등단했던 기쁘고 감격스러웠던 기억들은 빛바랜 사진처럼 가물가물하다.
좋았던 기억과는 달리 상처에 대한 기억은 단순한 회상에 멈추지 않는다. 상처를 남긴 인생 사건과 관련된 사람들을 다시 호명하고, 사연의 실타래를 눈덩이처럼 부풀리며, 잊었던 상처를 소환한다. 이미 아문 상처의 딱지를 후벼 파면서 속을 끓이고, 끊임없이 새로운 상처를 만든다. 한때 대중의 사랑을 받았던 유행가 노랫말과 달리 세월은 약이 아닌 것 같다. 망각은 신이 인간에게 내린 소중한 선물이란 말도 공허하기만 하다. 망각의 시계가 고장 난 늘그막의 마음속 풍경은 툰드라와 방불하다.
경륜이 쌓이면 세상사에 익숙해지고 수월해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이치라고 여겼었는데, 아닌가 보다. 사소한 일에도 예민하게 반응하고 시비를 가리려고 목청을 높인다. 성찰하기보다는 독선과 오만에 쉽게 빠지는 것 같다. 차이를 견디는 일이 점점 어렵다. 종종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이 불편하다.
인문학 열풍이 불었던 수상한 시절, 치유 담론과 맞물리면서 인문학이 상종가를 칠 때였다. 모 기관에서 주관하는 인문학 강좌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각급 학교, 군부대, 교정 기관 등을 전전하며 열변을 토했었다. 그 시절 나는, 냉전 종식 이후 길을 잃은 세계화 시대의 참스승으로 존경받았던 조너선 색스의 신도를 자처하며, ‘차이의 존중’을 외치고 다녔다. 다양성을 무너뜨리면 우리가 공유하는 삶의 풍부한 질감이 훼손될 거라며, 차이가 다툼으로 이어질 때는 모두가 패배할 거라고 청중을 협박했다. 거꾸로 차이를 존중하고 차이가 서로의 삶을 풍요롭게 할 때는 모두가 승리할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세계화 시대에 우리가 배워야 하는 대화의 기술은, 우리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며 세상을 해석하는 타자들을 용인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다고도 했다. 자아의 존재를 규정하는 것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가능하다고도 목소리를 높였다. 영국 왕실의 근친상간이 초래한 생물학적 비극을 예로 들면서, 생각의 동종 교배는 전체주의적인 사고를 낳는다는 경고도 빼놓지 않았다. 사공이 많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토론을 통해 합의에 이르는 성숙한 시민의식이 부족한 것이 문제라고, 오히려 사공이 많은 것은 자산이라고 강변했다. 청중의 박수 소리에 취해 목청을 한껏 높였었다.
그 시절을 회상하면 얼굴이 화끈거리고 몸이 스멀대는 것 같다. 나는 단상이 아니라 청중석에 앉아 있어야 했다. 귀는 닫고 목청을 높이는 일이 부쩍 잦아졌다. 솔깃한 말에만 너그러운 ‘이순(耳順)’과 편향된 아집에 기울어진 ‘종심(從心)’ 때문에 자가당착에 빠지기도 한다. 생각의 균형이 무너지니 박제된 의식이 더 완고해지고, 말은 거칠어질 수밖에. 사람들과의 관계가 소원해지고 소통이 단절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군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나잇값 정도는 할 줄 알았는데, 함량 미달의 존재로 전락한 것 같아 씁쓸하다.
긍정 심리학자 에드 디너와 마틴 셀리그먼은 ‘아주 행복한 사람들’과 ‘덜 행복한 사람들’을 비교 관찰한 결과, 이 두 그룹의 차이는 ‘풍부하고 만족스러운 사회적 관계의 유무’라고 결론지었다. 이들의 말대로라면, 풍부하고 만족스러운 사회적 관계가 실종된 내 삶은 총체적 난국에 빠진 셈이다.
사람뿐만 아니라 삼라만상과도 조화를 이루며 사는 지혜가 그립다. 물아일체의 경지는 아니더라도 고추잠자리에 어깨를 내주고 만개한 국화의 색깔과 향에 물들고 싶다. 가을 정취가 충만한 여락서재의 서안 앞에 좌정할 때가 되었나 보다. 더 늦기 전에 여남은 권의 책을 쌓아 놓고 동안거를 시작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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