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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나무의 시선

한국문인협회 로고 조현숙(대구)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1월 68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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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부탁이 있다. 나를 애처롭게 바라보는 시선을 거둬주길 바란다. 나는 어디서건 살아남을 테니까. 학교 기숙사를 신축하느라 내가 파헤쳐진다는 소문이 있다더군. 그래서 날 걱정한다는 걸 안다.
설혹 둥치가 잘리고 뿌리가 파헤쳐진들 어떤가. 열매와 잎은 약재로 쓰임이 있겠지. 가장이는 바둑판이 되어 어느 심심한 아비의 벗이 되어줄지도 모른다. 널빤지로 잘려서 작은 책상이 되어도 좋겠다. 당신은 알고 있는지? 우리가 공룡의 포식에 맞서 2억 년 동안 끈질기게 살아남은 종족임을, 그러니 이제 당신은 나를 향한 연민을 거두고 내 말을 들어주길 바란다.
당신은 아직도 깊은 한숨을 내쉬는군. 인부들이 시멘트 가루와 모래, 돌멩이들을 마구잡이로 담아 포대째 화단에 버리고 그 바람에 채송화며 천수국, 장미가 함부로 밟히고 뽑히고 있으니. 그럴 때마다 당신은 울컥, 눈이 뜨뜻해진다. 당신이 날 보고 중얼거렸지. 저 꽃들은 어떡하냐고. 나는 식물학자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으로 당신의 물음에 답하려고 한다.
당신도 알고 있듯이 꽃이 피는 이유는 씨를 남겨 후손을 잇기 위함이다. 그런데 꽃을 피우는 가장 큰 힘은 스트레스라고 한다. 식물은 갑자기 환경이 바뀌면 생존 위기를 느끼게 되지. 죽을지도 모른다는 절박감이 꽃대를 올리는 거다. 꽃을 피워야 열매를 맺고 씨앗을 남길 수 있으니까. 하여 당신이 지금 본 꽃들의 죽음은 또 다른 생명의 피어남을 이제 막 수행한 후이니 안심하길. 꽃들은 떠나도 그 자리에서 다시 피어날 테니.
당신도 마찬가지다. 풀과 나무가 지구를 푸르게 만들 듯 당신이 지금 서 있는 그 공간의 책들이 이전에도 그랬듯 앞으로도 인류를 푸르게 만들 것이다. 당신의 손길이 아니어도 그러할 것이다. 그러니 훌훌 털고 마음 편히 떠나길 바란다. 허허, 새치름해지기는. 당신의 쓸쓸함을 안다. 당신이 그 공간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도. 그곳에 화사한 햇살의 틈과 솔솔바람의 길을 트느라 애써온 당신의 손길을 내내 봐 왔으니까.
당신이 지금 서 있는 그곳, 도서관은 내가 이곳에 뿌리내린 이듬해 문을 열었다. 그 옛날의 아이들이 졸업하고 그 아이들의 아이들이 이 학교를 거쳐 가는 동안 나 또한 낭창낭창한 어린나무에서 달이라도 딸 것 같은 우람한 나무가 되었지. 까치발을 해야만 보였던 도서관 안이 이제는 허리를 잔뜩 구부려야만 보인다. 그 세월 동안 내가 아이들을 향해 도서관 안으로 이파리를 날려 보낸 게 얼마나 되는지 당신은 안다. 낙엽이 들어온다고 모두가 문을 꽁꽁 닫아걸 때, 당신은 활짝 창을 열고 나를 받아들였거든. 내 잎을 주워 오래된 책갈피에 넣곤 했지.
“얘들아, 책갈피에 은행나무 잎을 넣어 말리면 책벌레가 안 생긴단다.”
당신이 그렇게 말할 때마다 나는 안다. 당신에게는 내 이야기가 들리리라는 것을.
우듬지에 쏟아지는 여름 햇발이 나를 달군다. 빈 가지 사이로 후려치는 된바람이 나를 흔든다. 그래도 저만치에 있는 숲이 서늘하게 품고 있던 기운과 따뜻한 햇살을 때맞춰 내주어서 견딜 만하다. 당신은 먼지를 뒤집어쓴 채 장서 정리를 한다. 찢어져 너덜거리는 책 표지를 테이프로 바르고 구겨진 채 처박힌 책, 나동그라져 뒹구는 책을 번호에 맞춰 제자리에 꽂는다. 큼큼하고 아릿한 내음, 오래 가라앉은 먼지내가 함께 뒹군다.
신간이 들어오는 날이면 당신은 책의 냄새를 맡곤 했지. 날 선 신간의 냄새가 당신이 뿌리는 웃음에 담겨 나한테도 전해진다. 아이들 시선을 끌기 위해 당신은 꽃집 주인처럼 한 권 한 권 책을 늘어놓는다. 세워도 보고 눕혀도 본다. 꽃밭에 가득한 꽃들의 향연 속에서 어느 꽃에 눈길을 줘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해도 꽃향기가 아이들의 어깨 위로 떨어지는 것처럼 책의 향기 또한 시나브로 아이들의 마음결에 스며든다고 당신은 생각한다.
때가 되면 당신과 아이들은 이곳을 떠나지만, 책은 언제나 그 자리에 서 자신을 찾는 마음들을 슬기로운 눈으로 알아채고 우직한 손을 들어 위로와 즐거움의 목록을 펼쳐줄 것이다. 그러니 이제 정말 떠나도 좋다. 때를 알고 다 비워냈을 때 무엇보다 풍성한 열매를 품을 수 있는 거라고, 당신은 스스로 담금질하는 중 아닌가. 그러면서도 당신은 또 속절없는 소망을 품기도 한다. 그곳에 주저앉을 방법을 궁리하다가 얼굴이 붉어지며 고개를 내젓는다. 내 마음도 당신과 같이 흔들린다. 그 마음결을 헤아리는 내 마음도 보이는가?
당신은 아는지 모르겠지만 사실 나는 좀 외로운 나무다. 우리는 인간이 개입하지 않으면 서로 어울려 숲을 이루지 못하거든. 야생에서 살던 친구들도 거의 다 사라져 버렸고. 그래서 나는 꿈꾼다. 내가 잘리거나 뽑혀 땅으로 쿵, 쓰러질 때, 나의 씨앗이 저 숲으로 튕겨 날아가길. 연두색 볕이 가득 쏟아지는 산에서 스스로 순을 틔우고 튼실하게 자라나길, 내 자손이 숲에서 번성하길.
기숙사가 완공되는 신학기면 아이들은 떠나고 또 새로운 아이들이 들어오겠지. 도서관에도 신간이 들어오고 묵은 책들이 떠날 테고. 새로 부임하는 사서를 나는 볼 수 있을까? 이제 당신을 배웅한다. 그리고 믿는다. 어디서건 푸른 씨눈 같은 꿈을 붙들고 살아갈 우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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