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트맵

영혼이 머무는 곳

한국문인협회 로고 조인순(이채)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1월 683호

조회수21

좋아요0

시간의 여신이 자정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을 때 긴 여행에서 돌아왔다. 짙은 어둠을 뚫고 버스는 달려 내가 사는 도시에 내려놓고 바람처럼 다시 어둠 속으로 달려가 버렸다. 검은 입 속으로 사라지는 버스의 뒤꽁무니를 쳐다보며 나는 한동안 차가운 바람이 부는 황량한 밤거리에 혼자 서 있었다. 모두가 잠든 깊은 밤거리에 혼자 서 있으니 꾹꾹 눌러 가슴에 묻어둔 그리움이 밀려와 쓸쓸한 생각이 든다.
가로등 불빛도 추위에 몸을 떠는 밤, 간간이 취객들이 옷깃을 여미고 흐느적거리며 골목길로 자취를 감춘다. 거리를 누비고 다니던 택시는 날이 추워서인지 보이지 않았다. 간신히 택시를 잡아타고 집에 도착하니 또 다른 어둠이 기다리고 있다. 젊은 시절 혼자서 자취를 할 때부터 따라다닌 어둠은 가장 친한 친구일 수도 있는데 난 아직도 이 어둠이 익숙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눈앞에 서성거리는 어둠을 저만큼 밀어놓고 현관문을 열었다. 순간 어둠 속에서 집을 지키고 있던 사물들이 잠에서 깨어나 부스스 고개를 든다. 현관에 서서 어둠 속에 잠시 몸을 맡기니 여행길에 긴장으로 무장했던 몸과 마음이 스르륵 흘러내리고, 몸과 영혼이 머무는 곳으로 무사히 돌아왔다는 안도감에 집채만 한 피로가 파도처럼 밀려와 꼼짝을 할 수가 없다.
주인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군자란은 쌍꽃대가 올라와 보름달처럼 환하게 비추며 예쁜 꽃을 피워 혼자서 빈집을 지키고 있고, 집 안을 활개 치며 돌아다니던 먼지들은 움직임을 멈추고 조용히 엎드려 있다. 무엇이 그리 바쁜지 오직 거실 벽에 걸린 시계만이 재각재각 소리를 내며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추억 속으로 걸어가고 있다.
달팽이처럼 끌고 다닌 무거운 캐리어를 현관에 그대로 세워두고 애벌레가 허물을 벗듯 몸에 두른 껍데기들을 하나둘 벗어 놓고 욕실로 들어갔다. 몸과 영혼에 묻어온 먼지들을 따뜻한 온수로 씻어내고 꾸물꾸물 침대로 기어들어가 천근의 무게인 몸을 눕혔다. 평상시보다 몇 배나 나가는 무거운 몸을 침대는 말없이 품어 안는다. 오랜만에 안기는 침대의 품속은 사랑하는 이의 품속처럼 따뜻하고 아늑하다. 역시 나의 영혼이 머무는 곳인 집이 최고다. 여행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돌아올 집이 있기에 떠나는 것이고, 여행은 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것 같다. 돌아올 곳이 없다면 그것은 여행이 아니고, 노숙자가 아니겠는가.
긴 잠을 자고 일어나 물 한 잔을 데워 마시니 몸속의 세포들도 움직인다. 속이 비어 등허리에 붙어 있던 위는 배가 고프다고 꼬르륵거린다. 아침밥을 대충 챙겨 먹고 일주일 동안 닫혀 있던 베란다 창문을 열어젖혔다. 거실에 머물고 있던 먼지들이 일제히 아우성을 치며 바람을 타고 하늘로 날아간다. 나의 흔적들과 함께 영혼에 묻은 먼지도 날아간다. 먼 우주로 날아간 나의 흔적들과 향기는 누구를 만나 무슨 이야기를 전할까? 그립고 보고픔을 남기고 먼저 떠나간 사랑하는 이와 가족을 만나고, 잠시나마 내 곁을 스쳐간 인연들을 만나 조우하지는 않을지 궁금해진다.
집 안 구석구석에 상큼하고 싱그러운 공기들이 들어와 새롭게 자리를 잡는다. 덕분에 집 안이 활기가 넘친다. 봄바람이 싣고 온 남쪽의 매화 향기와 여러 가지 봄꽃 향기도 물씬 풍긴다. 나는 현관에 세워둔 캐리어를 열어 짐들을 정리했다. 또 언제 떠날지도 모르는 시간들을 생각하며 캐리어 속에 마구잡이로 쑤셔 넣어둔 물건들을 꺼내 거실 가득 늘어놓았다. 여행길에 따라온 온갖 잡동사니와 사연들이 캐리어 속에서 튀어나와 거실에 제멋대로 나뒹군다. 때가 되면 나는 또 이 사물들을 챙겨 바람처럼 물처럼 목적지도 없이 미지의 세계로 여행을 떠날지도 모른다. 나의 영혼이 머무는 곳을 홀로 남겨두고….

광고의 제목 광고의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