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4년 7월 66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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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이 스마트 교실에 모여 앉아 있다. 신기한 장면이 펼쳐진다. 어느 학생의 태블릿 PC 화면이 교실 전면의 전자 칠판에 떠올라 있다. 신기하고 대단한 기술이다. 자기 차례가 된 다른 학생이 자신의 태블릿 pc화면을 전자칠판에 공유한다. 선생님이 자신의 태블릿에 스마트 펜으로 글씨를 쓰자, 이 역시 실시간으로 그대로 전자칠판에 표현된다.
4차 산업혁명시대로 일컬어지는 지금, 우리 교실은 미래 사회의 기술이라는 것을 앞당겨 들여오는 중이다. 뉴미디어 기술이 놀랍다. 스마트 안경을 쓴 아이들이 빈 공간에 서성거리며 허공을 허우적대고 있는데, 그들의 입에선 연신 감탄사가 터져 나온다. 아이들은 지금 아마존 정글이나 바닷속을 탐험 중일 것이다. 그런가 하면 교과서 위에 스마트폰을 들이대자 그림 속 공룡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 목을 빼며 포효한다. 영어 교육에도 VR 기술이 시도되고 있다고 했던가. 요즘 광고에선 AI 기술로 개인의 언어 수준을 축적하고 기억하여 맞춤형으로 교육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광고가 한창이다.
적지 않은 미래 교육, 미래 사회 전문가들도 스마트한 미래 사회의 기술을 속히 당겨다가 학교에서 아이들이 미래 사회의 삶의 기술을 익혀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중요한 지적이다. 하지만 너무 몰아 붙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한편 생각하면 사실 우리는, 이미 어떤 정보 기술은 과도하게 누리고 있어서 걱정일 정도다. 버스 운전자 사고나 고속도로 자동차 사고의 적지 않은 원인이 스마트폰(특정 콘텐츠로 유튜브 영상을 지적하기도 한다)이라는 뉴스도 심심치 않다. 어른들까지도 이미 미래(이미 와 있는?) 기술의 수혜자일지도 모른다.
아직 갓난아기 태를 다 벗지 못했음에도, 유모차엔 아기를 위해 태블릿이 꽂혀있다. 아침에 등교하는 적지 않은 수의 초등학생들은 스마트폰에서 눈길을 거두지 못한 채 옳지 못한 걸음을 걷고 있다. 그런 아이들을 스마트폰 좀비라 한다던가. 어려서부터 우리의 아기들은 정보통신 기술 문명을 공기만큼이나 과하게 제공받고 있는 게 현실이 아닌가.
미래교육 관련 시범학교가 몇 곳이나 운영되고 있는지 모르겠다. 지금까지 개발된 기기나 수단이 아이들의 실력을 얼마나 향상시키는지, 아이들이 스스로 얼마나 찾아오고 꾸준히 관심 있게 활용하는지 초미의 관심을 기울이고 있을 것이다. 뉴미디어 기술이나 인터넷 교육 환경 등 미래 기술교육에 신념이 강한 연구자들이나 교육 당국은 태블릿 PC나 전자칠판, 디지털 교과서, 스마트 교실 환경 등이 아이들의 학력을 얼마나 향상시키고, 선생님들의 교수 활동에 얼마나 획기적이고 다양
한 방법을 제공하는지 긍정적인 평가 결과를 고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연구 과정과 연구 결과는 오염이 없어야 한다.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상관없다. 어쩌면 그렇게 미래 기술로만 방향을 잡아 치달으면 분명히 무엇인가 중요한 것을 떼어 놓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우리는 여전히 아이들을 학교에 모아서 가르치고 있다. 학교의 사회적 목표인 건강한 사회인의 재생산을 위해서다. 사회란 두말 할 것도 없이 사람들의 모임이다. 그러니 건강한 사회인이란 모임 사회에서의 삶, 즉 모둠살이을 잘 해내는 사람인 것이다. 바로 그것이 학교교육의 사회적인 목표인 것이다(교육의 목적은 보는 방면에 따라 달리 정의되고 있지만). 그러니 학교는 아이들의 사회적 역량을 키우는 것을 중요한 과업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아이들에게 사회적 역량을 길러주려면, 아이들이 함께 만나는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아이들이 만나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좋은 사이를 발전시켜 나아가며, 서로 믿고 좋아하는 감정을 기르는 기회 말이다. 여럿이 만난 아이들이 자연스레 순서를 정하고, 정한 그 순서를 지키며 질서 의식을 기를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 어떤 아이의 생각은 나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두 생각을 조율하고 양보하고 설득하고 이해하는 경험을 가져야 한다. 타협의 경험도 있어야 한다. 의견이 팽팽할 때, 불편한 다수결에 의해 나와 반대쪽 생각이 결정되더라도 수용하고 따르는 경험도 해봐야 한다.
다행히도 아이들은 개인 맞춤형 어학기 장치보다 서로 좋아하는 친구를 만나길 더 좋아한다. VR 영상이 신기하긴 해도, 친구와 함께 얼른 점심을 먹고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자는 약속을 한다. 놀이터에서 만나 낄낄거리길 좋아하고, 그늘에 나란히 앉아 별것도 아닌 이야기에 까르르 웃음을 터뜨린다. 비교적 조용한 것을 좋아하는 아이도 혼자서 책을 읽을지언정 어학실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AI 영어 학습기기를 찾아 나서진 않는다. 아이들의 수다가 스마트폰 게임이나 유튜브 동영상에 관한 것이라도, 아이들은 서넛이 모여 앉아 자기가 본 것과 자기 경험을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해야 직성이 풀린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지 않은가. 사람이 사람에게 끌린다는 것이 정말 다행이다. 아무리 휘황찬란한 기술과 오묘한 수완으로 아이들의 눈을 현혹시켜도 아이들은 결국 친구와, 친구들과 함께 모여 수다 떨기를 좋아한다. 달음박질을 하더라도 함께 웃으며 달음박질한다. 그것이 다행인 것이다. 인간 세상은 어디까지나 인간이 주인공이어야 한다. 인간을 위한 수단들(그것이 인간의 역량을 향상시키는 고도의 교육적 수단이라도)은 어디까지나 인간, 혹은 인간 삶의 보조적인 수단이면 되는 것이다.
스마트폰이 카톡 메시지 당도 음향을 까칠하게 퉁겨낸다. 그렇잖아도 친구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사람 노릇 못하고 산 것 같아 마음 불편했던 터였다. 불참 이유가 각각 타당했으나 어쨌든 수 개월간 모임에 발을 들이지 못한 것은 미안한 일이다. 그동안 무슨 꿍꿍이가 꾸며졌었나 보다. 다짜고짜 이번 모임엔 참석할 거냔 총무 녀석의 질문이다. 앞뒤 잴 것 없이 이번엔 ‘참석’ 두 글자를 얼른 먼저 전송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