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1월 68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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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녹차를 숨 깊숙이 들이마신다.
한 모금, 두 모금, 세 모금…. 몸으로 들어가자 더위도 식고 몸이 열린다. 장마가 끝나고 습한 더위로 가마솥처럼 달궈졌던 나는, 더위가 먼 과거의 일이었던 것처럼 마냥 편하게 하릴없이 부드럽고 따듯한 차를 즐겼다.
절 주인은 꽃처럼 지긋한 미소와 꽉 찬 정성으로 차를 만들어 찻잔이 비면 따라주기를 반복한다. 나는 차를 한 모금 입에 물고 혀를 지그시 누르며 천천히 목넘김을 하면서 차의 맛에 빠지려고 애쓴다.
그때야 환하게 열린 문으로 주변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고 나의 숨도 열리게 한다. 수국과 나리꽃, 능소화 그리고 알지 못하는 작은 꽃들이 눈에 들어왔다. 띄엄띄엄 들리는 산새들의 소리도 한가하다. 뜨거운 여름과 가장 많이 닮은 꽃 능소화가 화려하고 탐스럽게 울타리에 착 달라붙어 옹골찬 자태를 빛내고 있다. 그 옆에 있는 작은 꽃들은 더 작아 보인다.
마루에는 누가 있거나 말거나 고양이가 앉아서 눈을 끔뻑이며 졸고 있다. 몸과 마음이 열린 우리가 마루로 나가 녀석을 응시해도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가까이 가서 손을 뻗쳐도 앙증스러운 입을 벌려 하품만 할 뿐이다. 고양이도 우리가 별다른 해코지를 안 할 걸 아는 것 같다. 그러는 사이 뱀 한 마리가 도량을 가로질러 우리 앞을 빠르게 지나친다. 적성산과 뱀은 원래부터 있었고 사람들의 손으로 지어진 절인 안국사가 방해꾼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소스라치게 놀라는 것은 나뿐이다.
오랜만에 만난 두 도반 스님은 저 멀리 보이는 천왕봉을 가리키며 담소를 나눈다. 선방에서 정진할 때는 용상방(龍象榜)이라 이름 붙여진 큰 방에서 여럿이 함께 공동생활을 했다. 그 큰 방은 크기만큼이나 이러저러한 지켜야 할 까다로운 규칙이 많았다. 스님마다 자리가 다 정해져 있어서 출가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 스님은 모든 게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대중 스님들과 함께 정진하고 같이 잠을 자면서 얻은 또 다른 배움이 많았다고 한다. 노장 어른 스님들이 잠을 자야 할 시간에도 잠을 자지 않고 앉아서 정진하는 모습을 보면서 젊은 스님들은 신심이 흐트러질 때 경각심을 냈다. 같은 시기에 출가한 인연으로 선방을 같이 다니며 어렵고 힘들 때 서로 스승이 되어 지금까지 왔다고 한다. 그러면서 말한다. 요즘 선방에 오는 젊은 중들이 혼자 방을 쓰려고 하는데, 같이 생활해 봐야 혀, 노장들도 모셔봐야 하고 그래야 혀. 혼자는 안 되는 게 수행이여. 힘들 때 다독거려 준 도반 덕분에 지금까지 왔고, 한 방에서 같이 잔 추억이 많아 언제 만나도 형제처럼 반갑고 할 말이 많다고 한다. 천왕봉에서 눈을 돌려 울타리에 핀 수국을 나란히 만지는 두 노장의 뒷모습. 50년의 세월이 둥글게 순하여 얼른 사진을 찍었다.
그러다 작은 아주 작은 꽃에서 엉덩이를 치켜들고 열심히 날갯짓하는 벌이 보였다. 복슬복슬한 엉덩이가 어찌나 귀여운지 큰 엉덩이에 비해 작은 날개가 돋보였다. 우리의 호들갑에도 꽃 속에 얼굴을 묻은 채 날갯짓 소리를 내며 본연의 일에만 열중했다. 옆에 커다란 꽃들이 많은데 하필이면 그렇게 작은 꽃에 얼굴을 묻고 통통한 엉덩이는 하늘을 향해 들어 올리고 있는지. 치명적인 매력이었다.
스님은 사라져 가는 많은 생명 중 하나인 호박벌은 날개가 작아서 오랜 비행은 어렵지만 혀가 길어 다른 벌이 일하기 어려운 꽃이 작고, 꽃술이 깊은 일터에서 몸 전체를 떨며 강한 날갯짓을 한다고 했다. 몸에 비해 귀엽게 작은 날개로 강하게 진동해 꿀벌보다 4∼5배 많은 꽃가루를 방출할 수 있단다. 스님의 설명으로 더위에도 열심히 일하는 호박벌에 대한 사랑을 놓지 못했다. 그러면서 호박벌이 꽃가루를 따느라 지쳤으니 쉬어야 한다며 이제, 그만 괴롭히란다. 우리에겐 귀여운 곤충일 뿐인 벌이 쉬어야 할 때를 알아주는 스님의 말에 우리의 유별난 관심이 벌에게는 방해가 되었을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호박벌이 꽃가루를 따다가 고단하여 꽃잎 속에 얼굴을 묻고 엉덩이를 꽃 밖으로 내민 채 꿀잠을 잔다. 상상만으로도 즐거웠다. 하늘의 토실토실한 구름도 잠을 자는 듯하다.
숲속의 풍경들과 잘 어울리는 스님과 헤어져 내려오면서 나 자신에게 물었다. 그 작은 꽃 이름이 뭐라고 했지요. 나는 그런 거 잘 몰라요. 그래 뭘 알겠니. 산속의 풍경으로 스며든 두 스님이 꽃 이름도 알려주면서, 큰 방 이야기를 하면서 뭔가 이야기를 한 것 같은데, 금세 잊어버린 꽃 이름처럼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