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1월 68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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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철원 들녘에 사는 두루미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이름이 있어. 우리도 각자 이름을 짓는 게 어때?”
길라잡이 두루미가 이런 말을 하기 전까지 우리는 아무도 이름이 없었습니다.
“그것 참 좋은 생각이야. 난 재학이라고 할래.”
“재학이? 그게 무슨 뜻이야?”
내게 늘 곁을 주던 친구가 물었습니다.
“우리 두루미를 사람들은 학이라고도 부른대. 잿빛 두루미라는 뜻이지.”
“너도 이름을 지어 봐. 사람들이 기르는 개나 고양이도 다 이름이 있대.”
“개, 고양이…. 어휴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쳐.”
마음이 여린 친구가 몸서리를 쳤습니다.
“넌 누구보다 예쁘니까 재미라고 하면 어때? 사람들은 아름다운 것을 표현할 때 ‘미’자를 넣는대.”
“내게 멋진 이름을 지어줘서 고마워.”
내 눈에는 재미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두루미였습니다.
철원 평야는 우리 두루미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입니다. 많은 무리 중에는 우리 같은 잿빛 날개를 가진 재두루미, 몸빛이 눈처럼 하얀 백두루미, 까만 흑두루미도 있습니다. 사람들도 피부 빛깔이 다르듯이 말이지요.
우리는 봄꽃이 다투어 피어나는 4월이 되면 북쪽 나라 우수리강 근처로 날아갑니다. 여름철이 되면 날씨가 무더우니 북쪽 나라로 피서를 가는 것입니다. 그곳에도 철원 평야처럼 넓은 들도 있고, 먹을 것이 많은 갈대밭도 있습니다.
우리는 우수리강 부근에서 여름과 가을을 지내다 겨울 추위가 찾아오기 전에 다시 철원 평야로 돌아옵니다. 헤이룽강 부근의 겨울은 너무 춥기 때문입니다.
“더 추워지기 전에 어서 함께 남쪽 나라로 날아가자.”
내 말을 듣고 재미도 날개를 크게 파닥였습니다.
나는 우수리강 부근보다는 철원 평야가 더 좋습니다. 먹을 것도 많지만 경치가 아주 좋기 때문입니다. 철원에는 금강산에서 내려오는 남대천도 있고 한탄강도 흐릅니다. 남대천에는 우리가 좋아하는 고동이나 미꾸라지도 많습니다.
들녘에는 볍씨나 풀뿌리도 널려 있습니다.
“자, 이제 출발합니다. 절대로 뒤처지면 안 돼요.”
길라잡이 재두가 힘차게 날갯짓을 하며 소리쳤습니다.
후드득 푸다닥 푸드득 푸다닥…. 모두들 힘차게 날았습니다.
뚜루르 뚜르르 뚜루르 뚜르르…. 재두는 큰소리로 외치며 앞장서 날았습니다.
“와, 울긋불긋 경치가 정말 좋다.”
금강산은 보면 볼수록 아름답고 경치가 좋습니다. 우리는 떨어져 쌓이는 단풍잎을 보며 눈을 빛냈습니다.
“바위들 모양이 너무 멋지고 봉우리들도 하나같이 아름다워.”
사람들이 철조망으로 만들었다는 휴전선을 넘었습니다.
휴전선 위를 지날 때 우리는 더 높이 날았습니다.
“장애물에 부딪치지 않도록 조심해.”
누군가가 외치는 소리가 바람결 따라 들렸습니다.
철조망에 부딪쳐 날개를 다친 친구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점점 한탄강이 가까워졌습니다. 그럴수록 우리들의 날개도 지쳐 힘이 빠졌습니다.
내 뒤를 바짝 따르던 재미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습니다.
“조금만 더 힘을 내. 이제 거의 다 왔어.”
나는 재미를 향해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갈대들도 힘을 내라고 손을 젓는 모습이 보입니다. 우리는 재두를 따라 한탄강가로 내려앉을 준비를 했습니다.
저만치 승일교라고 부르는 쌍둥이 다리도 보입니다. 모두들 강가 모래톱에 내려앉으며 고단한 날개를 접었습니다.
“자, 이곳엔 먹이가 많으니까 천천히 많이 드세요.”
길라잡이 재두가 힘차게 소리쳤습니다.
우리 두루미들은 저마다 먹이를 찾아 물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재미야, 배고프지? 많이 먹어.”
“그래. 천천히 많이 먹자. 빨리 먹으면 체하니까.”
재미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그 목소리에 나의 피곤함은 봄눈 녹듯이 사라졌습니다.
“이제 자유 시간을 즐기다가 철원 평야에서 만나요.
가을걷이를 마친 논벌마다 볍씨가 많으니 겨울을 잘 날 수 있어요.”
재두의 말을 듣고 우리는 둘씩 혹은 서넛이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나는 용기를 내어 재미의 귀에 대고 가만히 속삭였습니다.
“재미야, 난 네가 좋아. 늘 너랑 둘이만 있고 싶어.”
“넌 내 마음속에 들어와 있나 봐. 내 마음을 다 알고 있네.”
재미의 발그레한 정수리가 더 붉게 물들었습니다.
“철조망이 있는 쪽으로 가볼까? 위험할지 몰라도 그곳엔 맛있는 먹이가 더 많을 것 같아.”
“좋아, 난 재학이가 가자면 어디라도 따라갈 거야. 너와 있는 시간은 늘 행복하니까.”
그 말에 나는 숨이 멎을 것처럼 가슴이 뛰었습니다.
밝은 달밤, 나는 호젓한 곳에서 재미와 시간을 보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철조망이 있는 곳으로 앞장서 날았습니다. 재미도 예쁜 날개 소리를 내며 나를 따라왔습니다.
나는 실개천으로 가기 위해 철조망 위를 사뿐히 통과했습니다.
푸드득, 아야 윽! 깜짝 놀라 돌아보니 재미가 철조망에 날개를 부딪쳐 퍼덕거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별안간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재미야, 많이 다쳤어? 천천히 걸어가 봐.”
“나, 날개를 다쳤나 봐. 움직일 수 없어. 많이 아파.”
재미는 고통스러움에 긴 목을 떨구었습니다.
나는 재미 곁에 앉아 뜬눈으로 밤을 새웠습니다. 재미는 날개를 많이 다쳐 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나는 재미의 날개와 다리가 되어 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재미가 좋아하는 달팽이도 잡아다 주고, 부드러운 실지렁이도 잡아다 주었습니다. 맛있는 빨간 열매도 따다 부리에 물려주었습니다.
날이 갈수록 재미의 날개 상처도 점점 아물어 갔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날개를 퍼덕이며 날 수는 없었습니다.
추운 겨울이 지나가고 봄이 왔습니다. 겨우내 쌓였던 눈이 녹고, 버들개지도 피어올랐습니다. 나는 재미를 부축해 논벌로 데려나갔습니다.
“여보, 힘들어도 나는 연습을 열심히 해야 해. 진달래꽃 피기 전에 우수리강으로 날아가야 하니까.”
“난, 갈 수 없어. 당신 혼자 떠나. 무리지어 같이 가야지 혼자 갈 수는 없잖아.”
재미의 눈에 눈물이 고였습니다. 우수리강의 흐린 물빛 같은 눈물입니다.
“자, 이제 떠나야 해요. 마냥 기다릴 수가 없어요.”
길라잡이 재두가 냉정한 눈빛으로 외쳤습니다.
“나는 여기서 잘 버티고 있을 테니까 빨리 따라나서요. 제발 내 말 들어요.”
나는 재미를 놓아둔 채 우수리를 향해 떠나야 했습니다.
“여보, 내 걱정은 하지 말아요.”
재미가 슬픔을 감추며 외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우수리강의 물결은 늘 슬픔으로 일렁였습니다. 강가에서 쳐다보는 하늘빛은 늘 눈물빛이었습니다. 나는 어서 빨리 가을이 오기만을 목을 빼고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강물처럼 느리게 가을이 찾아왔습니다. 나는 재두 대신 길라잡이가 되어 맨 앞에서 날았습니다. 남쪽 나라 그리운 한탄강을 향해서….
드디어 꿈에 그리던 한탄강이 내 눈에 펼쳐졌습니다. 나는 무리와 함께 재미와 헤어졌던 논벌로 정신없이 날아갔습니다.
그런데 재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재미야∼ 재미, 어디 있니?”
나는 큰 소리로 울부짖었습니다. 나는 재미를 찾기 위해 허둥지둥 날아다녔습니다.
뚜루르 뚜룩뚜룩, 뚜루르 뚜룩뚜룩…. 어디선가 바람결을 타고 익숙한 재미의 울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천연기념물 203호 두루미 보호 센터’, 이런 간판이 붙어 있는 철망 사이로 재미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나는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그곳 우리를 향해 달려갔습니다.
재미도 나를 보고 철망 사이로 부리를 흔들며 울부짖었습니다.
“자기야, 무사히 돌아왔구나. 고마워.”
재미를 돌봐주던 사람이 출입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나는 성큼성큼 우리 속으로 들어가 재미를 안아 주었습니다.
“보고 싶었어. 늘 자기 생각만 했어.”
“나도 마찬가지야. 이제 날개도 많이 좋아졌어.”
재미가 내 날개 속으로 파고들며 말했습니다.
“와, 부부 두루미구나. 떨어졌다 다시 만나니 얼마나 좋을까?”
지켜보던 보호 센터 일꾼들이 박수를 보내며 좋아했습니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두루미가 되었습니다. 하얀 낮달이 우리를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