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1월 68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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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_ 서연|민준|지훈|예진|형사|후드티 외
무대에는 탁자와 의자 4개가 있다.
서연 (나오며) 저는… 고등학교 때부터 투명인간으로 지냈습니다. 있으나 없으나 한 사람,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사람. 모르겠어요. 돈 없으면 죄인처럼 고개가 숙여져요. 아뇨, 돈 없으면 죄인이죠.
예진, 선생님, 엄마, 지훈, 민준, 후드티는 서연 주변으로 나와 나름의 분주한 일상을 보여준다.
서연 (독백)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먹고 사는 것 외에는. 돈의 감옥. 거기엔 비상구가 없어요. 희망을 갖지 말자. 희망고문이다. 하지만 세상이 평등하다는 것도 알아냈어요. 돈으로 살 수 없는 절망이라는 평등. 전 절망에 익숙해요. 그 깊이를 알죠. 개인적인 분노와 욕망이 얼마나 삶의 본질을 망가뜨리는지.
예진 네가 유리창 깼다고 해!
선생님 이서연! 이 담배 네 거 맞지?
엄마 거지가 돼도 강남거지가 나아!
지훈 갚을게. 누가 그 돈 떼어먹는데?
민준 네가 의뢰했잖아! 알았어, 더블로 줄게! 기다려!
후드티 돈도 마약과 같아.
예진, 선생님, 엄마, 지훈, 민준, 후드티는 한 마디씩 던지고 퇴장한다.
서연 (독백) 하지만 말씀드렸다시피 전 투명인간입니다. 있으나 없으나 한 사람.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사람.
회상으로 들어간다. 젊은 민준이 모니터 앞에서 코딩에 열중하고 있다.
서연 밤샘 작업이야? 좀 쉬면서 해.
민준 약속한 납품 날짜는 맞춰야지
서연 대단하다. 게임만 하더니 이런 기술이 있을 줄 몰랐어.
민준 게임하는 사람이 답답하면 게임프로그램도 만드는 법이야
서연 괜찮겠어? 지금 일주일째 밤새고 있는데?
민준 밤새는 건 괜찮은데 너랑 데이트를 못하잖아
서연 데이트?
민준 너, 나 좋아하잖아!
서연 어, 언제부터 알았어?
민준 야 그거 모르면 어떡하냐? 꼭 말해야 아냐?
서연 그, 그랬구나.
민준 빨리 끝내고 영화 한 편 보자.
서연 그래.
민준 (푸념) 이 부분도 누가 해줬으면 하는데 말야.
서연 내가 도울 일 있어?
민준 아니, 외주 주면 시간 단축되거든.
서연 무슨 얘기야?
민준 프로그램도 여러 파트가 있는데. 분업해야 빨리 끝내거든! 웹마스터한테 돈이 들어가서 그렇지.
서연 내가 빌려줄까?
민준 그럼 좋지.
서연 얼마 정도면 돼?
민준 삼천?
서연 그렇게나 많이?
민준 아니, 스타트업 본격적으로 하려면 그 정돈 있어야지.
서연 구해볼게.
민준 그래? 그럼 잠깐 쉬자.
서연 허리 펴. 거북이목 되겠어. 차 한 잔 타줄까?
민준 눈도 침침하다.
서연 대단하다. 다크 웹의 암호화된 메시징 웹도 다를 줄 알고.
민준 이제 NFT라는 걸 모르면 안 되는 세상이야.
서연 그래… 이거 해내면 돈 많이 주라고 할게.
민준 그분 돈이 많은가 봐.
서연 평범한 아저씨 같던데.
민준 대부분 재산 도피시킬 데 사용하거든. 근데 무슨 상관이냐. 나야 돈만 많이 받아서 씨드머니 만들면 되지.
서연 네가 잘 되는 모습 봤으면 좋겠어.
민준 요새 배달한다며?
서연 응.
민준 오토바이도 없잖아.
서연 그냥 서류봉투나 작은 소포 같은 거 배달이라 괜찮아.
민준 얼마 줘?
서연 많이 받아. 편해. 나한텐 키다리 아저씨지. 학교 공부도 할 수 있으니까.
민준 혹시 너한테 흑심 품고 있는 거 아냐?
서연 설마! 그런 분 아니야. 만나기도 어려워.
민준 나도 소개시켜 줘.
서연 그래. 기회가 되면.
민준 우리 밖에 공기 좀 마시러 나가자.
민준은 서연을 손잡고 나가다 혼자 퇴장한다. 서연은 민준이 손을 잡았던 그 기억을 붙잡고 있고, 그 상태에 형사가 수첩 들고 들어온다.
형사 이서연 씨, 강민준 씨와 어떤 관계죠?
서연 동창입니다.
형사 아니 동창이 아니라 거래 관계를 묻는 겁니다.
서연 거래라뇨?
형사 강민준 씨 프로그래머라는 거 아시죠?
서연 네.
형사 NFT 프로그램 의뢰했죠?
서연 무슨 말씀이신지?
형사 불법 자금 계좌, 가상 지갑 프로그램 의뢰를 이서연 씨가 했다고 하는데.
서연 전 모릅니다.
형사 계좌추적 결과, 5년 전 이서연 씨가 강민준 씨 앞으로 3천만 원 입금했던데요. 의뢰 금액 아닙니까?
서연 그건 민준이가 스타트업 초창기에 필요하다고 해서 빌려준 돈입니다.
형사 그 돈은 어디서 났죠?
서연 제가 고등학교 때부터 알바해서 모은 돈입니다. 근데 아직도 돌려받지 못했습니다.
형사 5년이 지나도 돌려받지 못했다구요? 흑자 회사인데.
서연 돈이 늘 모자란대요. 다른 아이템 개발해야 한다고.
형사 회사 운영에 쓰라고 단순하게 빌려준 돈이다? 어떻게 증명하죠?
서연 증명은 좀 그러네요. 돈이 필요하다고 해서 그냥 빌려줬지 어디 다 쓴 건 잘 모르죠.
형사 아무 대가 없이 줬다?
서연 차라리 갚기 어려우면 그 돈으로 일러스트 AI를 개발해 달라고 부탁했어요.
형사 강민준 씨 얘기는 최근에 역추적할 수 없는 데이터, 보안 기능을 넣어 달라고 했다고 하던대요.
서연 무슨 말씀이신지.
형사 지금 문제가 되는 건 암호화된 화폐나 가상 지갑으로 마약 불법 자금의 범죄 은닉처가 발견되어 추적 중입니다.
서연 대포통장 같은 걸 얘기하시는 건가요?
형사 비슷한 얘기예요. 해외에서 거래가 된다는 게 문제죠. 강민준 씨가 이서연 씨를 프로그램 의뢰인으로 지목했기 때문에 지금 피의자 대상으로 조사 중입니다. 다시 연락드리죠. 그럼 이만….
(퇴장)
서연 (독백) 돈은 가끔 또 다른 얼굴로 찾아온다. 천사의 얼굴로 또는 악마의 얼굴로. 어쨌든 돈은 돈이 없는 사람보다 항상 돈이 많은 사람들이 더 필요로 한다. 고기 먹어본 사람이 고기를 많이 먹는 것처럼. 그게 부익부 빈익빈인 건지 모르겠다.
나이트클럽. 사이키 조명 아래, 빠른 템포 음악이 쿵쿵 울리는 클럽 내부. 홀과 룸으로 구분되어 있다. 예진은 숨을 헐떡이며 룸으로 들어온다. 지훈도 뒤따라 들어온다.
예진 죽돌이 죽순이, 다 죽었네! 그래도 옛날 생각난다.
지훈 넌 미국 가서 클럽만 다녔냐? 어떻게 더 쌩쌩해?
예진 여기 오면 산다는 거 느끼지 않아? 활기찬 에너지! 현란한 조명!
지훈 클럽 다니면서 박사는 어떻게 땄대? 허기사 호텔재벌 딸, 어렸을 때부터 보고 배운 게 그거니까.
예진 코넬마피아라고 들어봤어?
지훈 코넬마피아?
예진 호텔 산업계에 강력한 코넬대학교 동문 네트워크.
지훈 미국이나 여기나 똑같구나 동문 네트워크. 혹시 넌 클럽마피아 아니야?
예진 빙고! 호텔경영의 핵심! 클럽에 얼마나 사람들이 모여드느냐에 성공의 키가 달려 있지.
지훈 네 전공! 클럽마피아 대모! 인정!
예진 클럽에 오면 새로운 친구들과 어울리기 좋잖아. 대화 필요 없어. 가깝게 부닥칠 듯 거리감 없이 춤추니 거리낌 없이 친밀해지지. 유대감이랄까 존재감 같은 거 느끼지 않아? 야, 너도 좋다고 죽자고 따라다녔잖아.
지훈 옛날이다. 너 미국 간 다음부턴 끊었어.
예진 야, 그럼 그동안 내가 오자고 해서 온 거야?
지훈 그 뜻이 아니고, 알잖니, 아버지 부도 나고 난 다음 먹고 살기 바쁜 거. 그리고 전공이 다르잖아.
예진 살아가는 데 전공은 달라도 전념은 해야지 않아? 돈으로 자유도 살 수 있으니까.
지훈 그래, 돈! 자유! 근데 직장생활하면서 돈으로부터의 자유가 가능할까?
예진 오늘만큼 춤추는 데 전념하자. 스트레스 해소! 해방감 충만! 인생 다른 거 없어. 아드레날린하고 도파민이야.
지훈 부전공 의학했냐, 많이 유식해졌다?
예진 이 세상에 도파민 없으면 무슨 재미로? 근데 술이 약한가, 흥이 안 난다. 이제 홀보다 룸이 더 좋네.
지훈 술탓이 아니라 그건 나이 탓이다!
예진 벌써 졸업한 지 10년이다. 민준인 자주 만나?
지훈 졸부 만나기 힘들어.
예진 졸부? 걔 별명 흥부 아니야?
지훈 흥부가 졸부 됐지. 제비표 박씨 물고 와서 졸지에 부자 됐잖아.
예진 로또?
지훈 뭐 그런 셈이지. 스타트업, 요새 한참 AI 딥테크.
예진 딥테크면 딥페이크? 생성형 AI?
지훈 그래 요새 난리잖아. 새로운 경험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 돈 버는 거지.
예진 잘 생각했네. 요샌 경험이 돈이잖아. 직접 자기가 해야 주머니에서 돈이 나온다니까. 돈은 그리로 몰리게 되어 있다니까.
지훈 역시 재벌 딸, 생각하는 게 다르다.
예진 돈 가는 길을 알아야 돈 벌지.
지훈 근데 돈이 있어야 돈을 벌지.
예진 야야. 돈은 자기 돈 갖고 버는 게 아니야. 남의 돈 갖고 벌지.
지훈 알아. 은행에서 빌려줘야 말이지.
예진 은행도 자기 돈 아니니까.
지훈 하나 물어볼 게 있어. 원래 돈 있는 사람들은 대인기피증 있어?
예진 아니, 그 반댄데.
지훈 근데 자식 누가 돈 달랄까 봐 전화도 안 받아.
예진 누가? 민준이?
지훈 졸부라 그런가?
예진 오히려 사람들 많이 만나는데? 파티? 사교계 알잖아? 인적 네트워크! 뭐 나도 돈하고 먼 사람은 잘 안 만나긴 해. 너도 그렇지 않아?
지훈 그렇긴 해. 좀 벌었다고 통화도 힘들어, 원 재수!
예진 걔 원래 재수였잖아. 근데 서연이는?
지훈 요새 출판사하다 뭐 잘못됐는지.
예진 디자이너 아냐?
지훈 디자인 출판 잘 나갔지. 근데 생성형 AI가 나오니 폭싹 망했수다.
예진 전화 좀 해봐.
지훈 (피하며) 나 화장실 좀.
예진 좀 하라니까! (전화 걸고 나가며) 응 서연아!
민준의 IT 스타트업 사무실. 민준은 컴퓨터 자판을 열심히 두드리고 있다. 직원 핸드폰 들고 등장.
직원 사이버수사대 박 경감 전환데요?
민준 그냥 끊어.
직원 찾아오겠다는데요?
민준 내가 피의자도 아니고.
직원 열두 번째예요. 직접 만나서 얘기해야 된대요.
민준 없다고 해.
직원 (핸드폰 받으며) 네 강 대표님요? 네. 강남 키즈요? 동창이라고 하는데요.
민준 좀 쉬고 싶어.
직원 미국에서 어제 온 친구라는데요.
민준 이리 줘, 전화. 응 그래 예진아. 어제 들어왔어? 그렇잖아도 전화하려고 했지. 졸부는 무슨? 놀아도 부자인 놀부, 네가 더 낫지. 비교가 안 되지. 그래 흥보와 놀보. 어디? 청담동? 그래 알았어. (퇴장)
호텔 로비. 예진은 아무도 안 왔는지 짜증스런 표정. 민준 들어오며 예진 보고 긴가민가 한다.
예진 어이 흥부!
민준 놀부? 난 다른 사람인 줄 알았어!
예진 신세 훤해졌다?
민준 야, 너 턱 깎았지?
예진 숙녀한테 말버릇하곤?
민준 훨씬 예뻐졌다.
예진 너, 여전히 재수 없다?
민준 재수? 하루 이틀도 아닌데 뭐. 이제 아주 돌아온 거야? 미국에 할 일 많을 텐데. 해외지사도 있다며?
예진 일하다 죽을 일 있어?
민준 넌 노는 게 일이잖아.
예진 바로 그게 트랜드야. 재미가 돈이다. 와서 보니 있는 빌딩 관리하는 것도 그렇고, 그렇다고 클럽 만들자고 빌딩 세워 달라고 하는 것도 그렇고
민준 있어도 고민, 없어도 고민. 허기사 돈 지키려면 부지런해야지.
예진 없으면 고민할 거 없잖아.
민준 야, 그건 있는 사람 이야기고 돈 없으면 먹고살려고 새벽부터 부지런 떨어야지. 돈 있으면 하고 싶은 거 할 수 있어 좋다 그거지 안 그래?
예진 아 재수! 하고 싶은 거 해서 돈 버는 거 봤어? 하고 싶지 않은 걸 해야 돈 벌지?
민준 그래 맞다 그거 진리다.
예진 뭔데?
민준 내가 지금 하고 싶지 않은 걸 하고 있거든.
예진 뭔데?
민준 지금 너 만나는 거?
예진 야!
민준 음, 아냐. 지금 개발하는 딥페이크 탐지 기능.
예진 딥페이크 탐지?
민준 지금 딥페이크 여부를 12분, 짧은 영상은 57분 걸리거든. 그걸 동시에 판별할 수 있는 앱. 합성 얼굴과 정상 얼굴을 학습시켜 딥페이크 여부를 판별하는 AI 솔루션을 개발 중인데, 문제는 말야. 너같이 성형수술하면 오작동이 난다 이거지. 지문이 바뀌게 된 것처럼.
예진 재수! 누가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 그런 얘기하래?
민준 네가 말 시켰잖아.
예진 간단명료! 그래서 얼마 벌 수 있는데?
민준 역시 넌 빨라서 좋아! 주식 투자해 봐야 은행 이자보다 조금 나은 거뿐이잖아. 그거 세금 빼고 물가상승률 따지고 보면 남는 게 없어.
예진 그럼? 너한테 투자하라는 거야?
민준 빙고!
예진 진짜 재수 없다!
민준 재수 있다니까! 흥부! 흥하라 흥부! 졸지에 졸부! (재테크) 재물 수백억 생긴다 재수!
예진 어, 진짜 재수!
지훈 (급히 들어오며)
민준 너 진짜 전화 안 받고.
민준 오랜만이야 지훈.
지훈 하마터면 과장한테 붙잡힐 뻔했네.
예진 (옆자리를 가리키며) 이리 앉아.
지훈 늦었지? 눈치 보며 사는 월급쟁이 이해해라.
민준 그래도 월급쟁이가 훨씬 나아.
지훈 이제 오너라고 오냐오냐 하네.
민준 야 솔직히 회사 일 집에 가서도 하고 화장실에서도 하고 밥 먹을 때도 하고 하루 종일 회사 생각하는 사람이 오너밖에 더 있냐? 월화수목금금금.
지훈 월월월월월 알았어. 개 짖는 소리, 오너와 똑같은 얘기.
예진 난 토일토일일일인데?
지훈 그렇잖아도 주말에도 일한다. 요새 투잡 안 뛰는 사람 있냐? 나도 재밌게 살자구! 민준아, 뭐 없어?
민준 전공이 다르잖아.
지훈 전공은 달라도 전념은 해야지. 돈 버는 거.
예진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다.
지훈 서연인?
민준 저기,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예진 언제 왕따께서 호랑이 되셨나?
지훈 왕따도 왕이다. 따자 빼.
서연 (나오며) 와 다 모였네?
예진 넌 백조라며, 너무 우아하게 늦는다?
서연 미안! 선약이 있어서.
예진 이렇게 만나기 힘든 졸부도 나오셨는데.
서연 안녕 얘들아!
민준 항상 밝아서 좋아 서연이는.
서연 바쁜데 나와줘서 고마워. 참, 주인공이 예진이지. 또 미안. 예진이 혼자 나올 줄 알았거든.
예진 그래서 늦었어?
서연 아니 그 뜻이 아니고, 반가워.
지훈 오랜만에 인사치곤 너무 친숙한데?
예진 근데 서연인 여전히 수수하다. 디자이너라면 좀 더 화려하게 자신을 치장해야 마땅할 텐데. 패션은 곧 자신감의 표현 아니겠냐? 이렇게 입고 다니면 누가 너를 디자이너로 알겠냐?
서연 가야 할 길이 멀어. 겉모습보다 내면의 충실함을 추구해야지. 민준이 여기서 또 보네?
예진 자주 만나 둘이?
민준 서연이하고는 여기 오기 전에 일러스트 변환 앱에 대해 얘기했거든.
예진 일러스트 변환 앱이 뭐야?
민준 요새 많이 나와 있잖아. 사진을 애니메이션 만화 스타일 일러스트로 변환해 주는 웹서비스. 서연이 디자인하고 내가 AI 기반 스타일 전이 기술을 활용하고.
서연 그래 툰미(ToonMe)라고 사진을 카툰으로 많이 하잖아.
예진 재밌겠네. 근데 사무실 닫았다며?
지훈 요새 종이 출판 누가 봐?
서연 AI가 디자인도 하니까. 직원 월급도 못 줘.
예진 근데 뭐가 바빠서 늦어?
서연 희한해. 일이 있을 때보다 일 없을 때가 더 바빠.
민준 근데 돈은 없을 때보다 있을 때가 더 바쁘다.
지훈 그래서 전화 안 받았냐 하자슥!
민준 그러니까 봉급쟁이가 편하다는 거야.
지훈 민준이 너 자꾸 불편한 쪽으로 몰고 간다?
민준 (비아냥) 맞아. 돈 없으면 불편해지기 시작하거든.
지훈 너 회사 다녀봤냐? 직장생활 안 해 봤으면 말을 하지 말어.
서연 그래 돈 없으면 더 불편해. 민준이 기술 있어도 활용 못했잖아.
지훈 너도 초창기에 서연이가 투자해서 그때부터 힘 받은 거잖아?
민준 (머쓱) 그렇긴 하지.
서연 그래서 그러는데 요즘 내 사정이 영 안 좋은 거 알지?
민준 거의 다 됐어. 알다시피 지금 새로 개발하는 아이템 끝나면….
서연 끝나면 또 시작이잖아.
민준 그건 그렇고, 그거 그때 프로그램 개발한 거 네가 의뢰했잖아. 근데 경찰한테 아니라고 말했다며?
서연 난 모른다고 했잖아. 내가 아는 건 삼천만 원 꿔 준 거밖에 생각 안 나.
민준 아 정말 미치겠네.
예진 야! 니네들 얘기 나중에 따로 해! 근데 서연인 어디서 그렇게 돈이 나서 민준이도 주고 지훈이도 꿔줬대?
지훈 고등학교 때부터 알바 뛰었잖아.
예진 알바 뛰어서 얼마 돼? 자자 그럼. 내가 있는 주식 조금 팔아서 민준이한테 투자할까? 아니면 서연이에게 투자할까?
지훈 야, 난?
예진 월급쟁이한테 투자하는 사람도 있니?
지훈 (서연 눈치보며) 주식 고수한테 무슨 말을? 한국의 워런 버핏 몰라? 개왕! 개미의 왕!
예진 서연인 얼마면 돼?
서연 난 투자랄 것도 없거든. 조그만 사무실 보증금 정도?
예진 1억?
서연 아니, 오피스텔 보증금 정도 3천?
예진 너 그 정도도 없어?
서연 직원 퇴직금 정리하다 보니 그렇게 되던데.
민준 맞아. 요새 사무실 월세가 한 사람 인건비야.
지훈 아무튼 경이롭다.
예진 그럼 민준이한테 투자 결정!
지훈 왜? 얘 돈 많잖아!
예진 왜냐? 돈은 돈을 따라가게 되어 있거든.
지훈 사람은?
예진 사람도 돈 따라가지. 서연이한테 미안해서 어쩌지?
서연 괜찮아. 난 늘 없었으니까. 그냥 프리랜서로 일하면 돼.
예진 우리 민준이는 다크웹 기반 암호화 가상 지갑 플랫폼 만들 줄 안다며?
민준 그건 어떻게 알았어?
예진 나도 필요해. 자 우리 민준이 한국의 일런 머스크가 되라는 의미에서 건배!
민준 나야 밤낮없이 코딩만 했을 뿐인데 뭐, 오늘 내가 쏠게.
예진 와 그럼 민준이 벗겨먹자! 캐비아든 푸아그라든, 최고급 와인으로! 그리고 오늘 죽돌이 죽순이 시절로 돌아가 볼까?
지훈 도파민 맞으러?
예진 담배 한 대 피고.
민준 실내에서 금연!
예진 아 그렇지! 끊었어?
민준 아니! (담배 꺼낸다)
예진 오랜만에 고향초 펴볼까?
지훈, 민준 퇴장. 예진은 담배 하나 꺼내 들고 담배를 테이블 위에 놓고 간다. 서연은 그대로 앉아 담배를 바라보고 있다.
<장면 축약>
1. 예진에 대한 회상. 고등학교 시절. 예진이 갖고 온 담배를 서연이 대신해서 선생님에게 징계를 받는다.
2. 지훈에 대한 회상. 고등학교 졸업 후 3년. 서연의 직장인 매장에 나타난 지훈은 마지막 대학 등록금을 꿔달라고 한다. 서연은 본인도 대학을 가기 위한 돈이라며 적금을 털어서 빌려준다. 하지만 막상 대학 입학금을 내려고 할 때 지훈은 연락을 받지 않는다. 절망한 서연은 죽을 결심을 하지만 매장에 자주 나타나 안면이 있는 후드티의 도움으로 대학을 들어가고 일상을 되찾는다.
3. 현재. 클럽 룸 안으로 누군가에 의해 마약이 배달되고, 코카인을 본 예진은 오랜만이라며 함께 즐기자고 한다. 하지만 서연은 그들의 시선을 피해 마약하는 척만 한다.
마약의 환상 속에서, 각자 알 수 없는 불안과 행복한 모습이 교차된다. 예진은 3차를 하자며, 자신의 호텔로 운전하고 가던 중 오토바이를 피하다가 교통사고를 낸다.
경찰 사이렌 소리.
예진 (혼잣말) 내가 운전한 게 아니야… 아니어야 해….
민준 야! 그러지 말고 렉카차 불러!
지훈 괜찮아! 너 피! 119 신고할까?
예진 안 돼! 멍청아! 약했잖아!
지훈 어떡하지?
예진 서연아… 나 좀 살려줘… 내가 너한테 투자할게….
서연 무슨 얘기야?
예진 서연아… 네가 운전했지? 그래, 네가 운전한 거야….
서연 내가? 네가 운전했잖아! 예진아!
예진 비용은 내가 다 처리할게. 너희들도 알았지?
민준 경찰이다! 피하자!
예진 (전화 걸며) 변호사… 우리 변호사… 예진이에요. 차 사고요 응급차 보내줘요. 여기 청담사거리요. 부탁해 서연아!
지훈 서연아, 먼저 갈게.
서연 야, 김지훈!
지훈 나 경찰 들어가면 회사 짤려! 그러면 너 꾼돈 못 갚잖아!
민준 그래, 우리 먼저 갈께! 나도 갚을께 니 돈!
서연 너희들 왜 그래 또? 왜 하필이면 나야! 왜 또 내가 책임져야 해?
사이렌 소리가 가깝게 들려오며 암전.
무대 밝아지면 경찰서 조서실. 형사가 들어온다.
형사 허위 진술은 공무 집행 방해로 형량이 가중될 수 있습니다. CCTV에는 남자 2명과 여자 1명이 차 안에서 나온 게 확인되었습니다. 다시 묻겠습니다. 정말 혼자 운전했습니까?
서연 (망설이다가) 아니요.
형사 (끄덕이며) 다른 친구들은 계좌 추적에서 마약 거래와 연관된 이상 징후를 발견했지만, 이서연 씨는 깨끗하네요. 사고 현장에 있었고 클럽에도 함께 있었는데 약물을 하지 않았다는 것도 이례적이고요.
서연 (혼자말) 전 투명 인간입니다.
형사 네 뭐라구요?
서연 아닙니다.
형사 마약 행위를 묵인한 방조 혐의를 적용할 수도 있지만, 여러 정황상 이서연 씨는 오히려 오랜 시간 친구들에게 이용당한 피해자로 보이네요?
서연 참는 건 오래된 습관입니다.
형사 무슨 얘기죠?
서연 오래 동안 참았다는 말입니다.
형사 아 그래서 투명 인간이라고 했던 거군요. 귀가하셔도 좋습니다.
서연 (독백) 돈의 감옥에 갇히면 비상구가 없어. 더 이상 내가 너희들의 비상구가 되어 줄 이유는 더더욱 없지. 이제 너희들 각자가 만들어낸 욕망의 감옥에서 잘 지내. 미안, 나 혼자 비상구로 나갈게.
카페에 후드티를 깊게 눌러 쓴 남자가 앉아 있다. 테이블 위에는 USB 드라이브가 놓여 있다. 서연 들어와 앉는다.
후드티 자, 30개. 근데 10년 동안 찾을 수 없는 계좌야.
서연 있어도 없는 돈이네요.
후드티 알잖아. 공소 시효도 10년이라는 거. 돈을 좇지 마. 거기엔 비상구가 없어.
서연 걱정 마세요. 제 계획은 완벽하니까. 이제 돈 앞에서 죄인처럼 살지 않아도 돼요. 엄마 말처럼 통장에 돈이 있으니 밥 안 먹어도 든든하니까. 그러고 보니 돈이 마음이네요.
후드티 억 자에는 마음 심자가 있어.
서연 이제 그 마음으로 편히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이제 편한 사람만 옆에 있으면.
후드티 편한 사람? 돈이 더 편해.
서연 돈으로 사람도 살 수 있다고 보세요?
후드티 글쎄. 그러고 보니 이제 마지막 인사가 되겠군. 이제 뭐 할 거야?
서연 출판 계속해야죠.
후드티 그래 잘 생각했어.
서연 (USB 드라이브를 후드티에게 되돌려 준다)
후드티 왜?
서연 저 필요 없어요. 있어도 없는 돈.
후드티 혹시 10년 뒤 못 찾을까 봐?
서연 아뇨. 10년 뒤엔 안 찾아도 억만 부자가 되어 있을 건데요.
후드티 무슨 뜻이지?
서연 억 자에 마음 심자가 있다면서요. 그건 그렇고 어디로 가실 예정이세요?
후드티 거기. 길바닥에서 자도 든든한 곳.
서연 파나마요?
후드티 익명성 계좌가 보장된 곳.
서연 저도 자리 잡히면 파나마로 놀러 갈게요.
후드티 (퇴장)
서연 (독백) 억 자에는 마음 심자가 있다. 각자의 마음속에 억만 금이 있다는 얘기다. 돈이 우리 미래를 위한 보험인지 자유의 크기인지는 몰라도, 돈 앞에 결코 죄인처럼 살 필요는 없다. 돈의 감옥에 갇히면 비상구가 없다. 마약에도 비상구가 없고 죽음에도 비상구가 없듯이.
서연은 USB 드라이브를 필요 없다는 듯 탁자에 두고 나간다. 발걸음은 당당하다. 마치 혼자 비상구를 빠져나간 사람처럼. 뒤이어 종업원이 쓰레기통을 들고 나와 탁자에 있는 USB와 휴지를 걸레로 쓸어 담고 깨끗이 닦고 들어간다.
-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