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1월 68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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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읽기의 근거
가. 젊은 세대
식민지 절정기인 1940년대 소설 이근영의 「고향 사람들」(1940)과 곽하신의 「신작로」(1940)까지만 해도 마을에는 사의 세계를 떠올리는 상여집 또는 신당 하나쯤은 마을 입구 또는 외진 곳에 있었다. 북해도 탄광 노동자로 가기로 한 젊은 농민들은 송별연을 마치고 풍물패를 앞세워 춤을 추면서 성황당 앞에서 “그저 대판을 꼭 가게 해 달라”며 소원을 빈다. 면 서기의 설득에 넘어갔든 말든 일제 탄광지에 가서 일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극한 상황에서 농민들의 선택은 제한적이다. 곽하신의 「신작로」의 돌쇠 역시 신작로를 따라 화물차를 타고 서낭당 고개를 넘어 탄광지로 가게 된다. 그러나 탄광지 노동자로 갔던 그들은 해방 후 어떻게 되었는가. 어느 소설과 시에서도 그들의 귀환을 문제 삼은 적이 없다. 역사는 아이러니인가. 일본인 어느 승려 작가는 『70년 만의 귀환』(2021)에서 북해도 한국인 노동자의 뼈를 안고 한국의 가족을 찾는다. 그들의 억울한 죽음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들의 해원(解)은 누가 해줄 것인가. 지금은 시골 마을에서 서낭당을 찾아보기란 어려운 일이다. 부여 원중산 마을의 산제당이 방화로 불에 탄 것도 당산제 자체가 ‘미신’이라는 이유에서였다.〔이광복, 「당산(堂山)」〕 전통성과 근대화, 미신과 과학이 대립된 시대 우리는 후자를 선호했다. 그러나 MZ 세대들은 한국 무속을 재해석하고 있다. 젊은 작가 성해나는 「혼모노」(2025)를 통하여 한국의 무속 문화 현장을 객관적으로 비판하여 주목을 받는다.
나. 두 개의 문, 원형(原形)
어느 목회자에게 기독교 성서를 가장 잘 해석한 시인은 누구인가를 물은 적이 있다. 그 성직자는 17세기 영국의 존 던의 시를 읽어보라고 권유한다. 존 던의 시집 번역본 『존 던의 거룩한 시편』(김선향 편역, 2001)을 읽었다. 성서에는 두 개의 문이 있다는 것이다. 예수가 골고다 해골산에서 죽음을 당하는 예수의 수난과 선녀가 마리아에게 수태고지를 고지한 날이 겹쳐지는 두 개의 문 그리고 “그들 둘 다를 하나의 원형(原形)으로 만들었다”는 신화에서 인간은 태생적으로 두 개의 문을 가진 모순적 존재다. ‘나를 일어서도록 나를 넘어뜨리고’, ‘나를 겁탈함으로써 정숙해지’는 모순, 죽음과 탄생, 빛과 어두움, 있음과 없음 등의 이항 대립은 인간 해석의 기본적 틀이 된다.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1852-1926)가 돌로 지은 스페인 바로셀로나 파밀리아 성당에도 두 개의 문이 있다. 죽음의 문과 탄생의 문이다. 죽음 뒤에는 탄생이, 탄생 뒤에는 새로운 수난이 동시적이다. 그것은 모순의 태제이면서 운명적 원형이다.
다. 초혼(招魂)
중국 춘추시대 굴원(屈原, 340BC-277?BC)은 위대한 시인이요 사상가이며 정치가다. 그는 귀족 출신으로서 초기에는 초국(楚國) 회왕의 신임을 얻어 좌도(左徒)까지 올라 초국의 위기를 뚫었고 내정개혁을 주장한다. 그러나 정적들의 모함을 이기지 못해 자결한다. 굴원은 자신의 억울함과 괴로움을 죽은 자를 불러내는 초혼의 형식을 통하여 해원한다. 상제 가무양(巫陽, 무당)을 불러 “저 아래 한 사람이 있으니 내가 그를 돕고자 한다. 그의 혼백이 흩어져 있으니 너는 빨리 점을 쳐 그를 불러오너라” 고 한다. 김소월의 시 「초혼」도 있지마는 죽은 자의 혼을 불러 억울함을 해원하는 시는 굴원의 「초혼」에서 그 원형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생과 사 두 개의 문전을 드나들 수 있는 초월적인 무양의 존재를 생각한다. 무가(巫歌)는 구비문학으로서 주술성과 신성성, 전승의 제한성 등 특징이 있는데 중요한 것은 무가의 청자는 신이고 사람은 ‘굿을 보는’ ‘구경’하는 관계다. 따라서 굿판은 신과 사람이 만나는 공간이다. 태생적인 상징성에서 볼 때 ‘신성의 늪을 기르는 여자는 신과 인간의 사이를 왕래하는 데 비교적 자유롭다’.〔『신동엽전집』, 「여자의 삶」(1975)〕 그러나 신내림 또는 현실 초월의 의식에는 그 자신이 인간으로서 갖은 고통을 경험해야 한다. 김혜순의 『죽음의 자서전』(2016)과 『피어라 돼지』(2016)에서다.
2. 「여자의 삶」과 「피어라 돼지」, 「죽음의 자서전」
일반적으로 여성의 사회적 도덕적 해방을 페미니즘이라고 한다. 그러나 진정한 여성의 해방은 자신의 ‘집’을 뛰쳐나가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사회적 해방과 더불어 타고난 숙명으로부터의 해방까지를 포함해야 한다.
가. 시인 신동엽은 「여자의 삶」(1975)에서 존재의 숙명성을 말한다
(1) 밭의 단계: 여자는 누워서 ‘씨’를 기다리는 ‘밭’이다.
“나는 밭, / 누워서 기다리고 있어요 / 씨가 뿌려질 때를, // 하늘 나는 구름이든 / 여행하는 씀바귀꽃이든 / 나려와 쉬이세요 / 씨를 뿌려 보세요 // 선택하는 자유는 저한테 있습니다. 좋은 씨 받아서 / 좋은 신성(神性) 가꿔보고 싶으니까.
(2) 집의 단계: 빨래, 남자의 피 묻은 죄까지
“女子는 / 집. / 집이다, 여자는, / 남자는 바람, 씨를 나르는 바람, / 여자는 집, 누워 있는 집, // 빨래를 한다, 여자는 양말이 아니라 남자의 마음, 전장에서 살육하고 돌아온 / 남자의 마음, / 그 피 묻은 죄까지 / 그 부드러운 손길로 / 그 신비로운 늪에서 / 빨래를 시켜준다.
(3) 물의 단계: 있을 것이 없는 자리를 충만시키는 물이다.
“껍질만 벗겨 던지면 / 女性은 / 神... 여성의 알몸은 平和
(4) 신성의 단계: 남자와 보물을 사유하는 단계를 초월하여 여자의 껍질을 벗을 때
“여자여, 神性의 늪을 기르는 여자여, / 그대 호수가 맑으면 / 사내들은, 求道하는 / 聖者가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 시에는 출옥하는 남편을 위해 ‘두툼한 솜바지 두툼한 솜저고리’를 준비하는 여인상을 포함한다. 여자는 ‘집과 밭’이라는 숙명적인 껍질을 벗긴다면 신성의 단계에 이른다는 말을 주목한다.
나. 김혜순 시인의 『피어라 돼지』(2016)에서 여성의 어떤 숙명성을 본다
여자는 돼지라는 것, 남자에 의해 잡아먹히는 피해자다. 김혜순 시인은 온몸으로 시를 쓴다. 그것도 한 편의 시에 그의 한 생애의 무게를 담고 있다. 권혁웅 시인이 해설에서 말했듯이 ‘단 한 편의 시로서 세상의 모든 것’을 말하고 있다. 여자를 우리에서 나올 수 없는 갇힌 존재로 의식하면서 남자에 의해 먹히는 돼지의 해방 문제를 『죽음의 자서전』으로 쓴다. 『죽음의 자서전』(2016)에서 『싱크로나이즈드 바다 아네모네』(2025)까지 시인의 ‘날개 달린 시상’(오은)과 ‘말〔馬〕이 된 언어’(유희경)는 「몸에서 나가는 연습」으로 ‘귀신’이 되는 연습을 한다.
귀신들과 반인반수의 새들을 초대해 밥을 먹고 / 빗줄기들을 초대해 식탁 곁에 커튼처럼 둘러놓는다 / 물 속에서도 죽은 사람들과 티타임 시간을 마련해보자 / 하나님은 잠들지 않는다 하니 초대하지 말기로 하자 // …… // 다큐멘터리 보는데 / 대학 들어간 김에 집을 떠나 서울로 간 / 영험하다는 무당 손녀에게 / 무당일을 전수한 할머니가 전화를 걸어 하는 말 / 어디 돌아다니면 할머니가 먼저 아는 거 알지? // …… // 나는 돌아가고 싶지 않아 울었다.(「몸에서 나가는 연습」 부분)
자신의 몸으로 돌아가지 않다면 갈 곳은 어디인가. 우선 김혜순 시인의 자아는 영혼 없는 돼지라는 비하에서 세계가 만든 운명적인 폭력성을 고발한다. 나는 불안한 존재거나 슬픔의 존재다. 그래서 퍼먹는 존재가 된다. “나 본래 돼지거든.”
“나 태어날 때부터 돼지였어. … 영혼? 나 그런 거 없다니까.” 그러나 나는 늘 불안과 슬픔을 안고 산다. 그래서 퍼먹는 존재가 된다. ‘도무지 밖을 본 적 없는 돼지’는 ‘우울한 돼지’다. 돼지는 여성을 포함한 ‘우리’와 ‘벽면’에 갇힌 사람들을 포함한다. 「지뢰에 붙은 입술」에서는 ‘두들겨 맞고 버림받은 년 / 돼지 같은 년’으로 추방된다. 어디로 갈 것인가. 귀신들이 읽는 부적 「글씨가 아프다」에서 그는 글쓰기의 고통을 앓는다. 무녀가 신내림을 받을 때의 고통과 같은 아픔이다. 시대와 맞지 않는 글, 종이 뭉치가 쓰레기통에서 발견되기도 한다.
현실에서 추방된 돼지는 본질적으로 불안과 슬픔의 상징적 존재다. 흙 너머로 갈 수 없는 존재적 숙명성은 현실에서 추방되지만 추방은 불안과 슬픔으로부터의 해방이고 글쓰기는 신내림을 받을 때의 아픔이고 그 결과물이다. 인간은 두 개의 문을 두드린다. 탄생의 문과 죽음의 문, 시인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두 개의 문이 동시적이고 모순된 하나임을 깨닫는 일이다. 하여 시인은 “탄생이란 항상 추락이고 / 죽음이란 항상 비상이라 하니 / 절벽에서 몸을 날려 보”는 것이다.
탄생과 죽음, 추락과 비상의 이항 대립은 모순의 논리이면서 신이 동의한 인간의 원형이다. 시인은 『죽음의 자서전』을 통하여 삶의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을 두드린다. 그것은 신내림을 받은 무녀만이 할 수 있는 영역이다. 시인은 초월로써 신령과 내통한다. 그것이 죽음과 삶의 시학이고 무녀의 엑스타시스(Ekstasis)적 경지다.
『죽음의 자서전』의 「출근-하루」는 지하철에서 목도하는 어떤 ‘죽음’으로 열리는 시적 세계 그리고 이튿날에는 죽음이 뿌린 하얀 피 붉은 피를 본다. 「우글우글 죽음」의 서른나흘을 거쳐 마흔아흐레에서 지나온 세월의 그리움과 상처들을 금기인 「마요」로 언표한다. 시인이라고 하여 누구나 신과 내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몸과 운명을 부수지 못하는 진정성 없는 언어의 조작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시의 극치가 엑스타시스(忘我)적 경지이고 무당의 극치가 망아적 세계라는 점에서 초월적인 극치의 유사성을 생각할 수 있다.
3. 「무녀도」에서 「혼모노」까지
가. 김동리 「무녀도」(1936)
(1) 두 개의 문
김동리의 「무녀도」를 한국 무속 문학의 고전이라고 말한다. 이 시기에는 카프 문학의 잔류가 있었고 일본의 근대 문화와 미국의 선교 문화가 유입될 때 상대적으로 민족의 전통문화는 상처를 받게 된다. 김동리 작가는 등단 초기부터 「화랑의 후예」(1935) 「산화」(1936) 「무녀도」(1936) 「산제」(1936) 「황토기」(1937) 등에서 당시 회자된 계급과 이념 문제보다 어두운 시대 조선 문학이 지향할 바를 고뇌한 작가였다. 문학평론 「순수문학의 진의」(1946)와 「조선문학의 지표」(1946) 등에서 평론가 김동석과 논쟁하면서 ‘순수’와 ‘조선문학’이란 계급 문학이 아니라 민족 문학이어야 함을 일깨운 것이다.
「무녀도」는 일제의 한국 지배 극성기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중일 전쟁(1937)을 준비하던 음울한 시기 무녀의 딸 낭이(琅伊)가 그린 「무녀도」의 배경은 ‘어둑어둑한 산’과 ‘검은 강’ 그리고 ‘이슥한 밤중’이다. 일제 지배기 음울한 시대를 ‘어둠’의 배경으로 처리한 것이다. 미국의 선교사가 한국에 들어오고 교회가 작은 마을에 들어설 무렵의 조선의 풍경들은 안으로 침잠하는 원근적 요인으로 요약된다.
첫째는 종교로서의 기독교와 토속 신앙인 무속과의 충돌이다. 무녀 모화(毛火)에게는 사생아인 아들 욱이와 딸 낭이가 있다. 집을 나갔다가 청년이 되어 돌아온 욱이는 신약성서를 읽는 기독교인이고 어머니는 직업적인 무당이다. 서로의 믿음이 다른 것을 확인한 두 사람은 어느 날 충돌하게 되고, 욱이는 모화의 칼에 상처를 입는다. 이 단계에서 모화는 말한다.
“예수 귀신이 진짠가 신령님이 진짠가 두고 보자”라고. 성해나의 『혼모노』에서 누가 진짜 무당인가를 거듭 묻는 장면과 유사하다. 이 대목은 고유의 전통문화가 외세 또는 내부에 의해 도전을 받고 있다는 위기의식이다.
둘째, 전통적인 무속은 소멸되어야 할 낡은 집이고, 청년 욱이를 통하여 들어온 기독교는 새로운 정신의 집이다. 전통성과 근대화는 모화의 낡은 집과 현 목사와 이 장로의 건물로 비교된다. 현 목사와 이 장로의 집은 음악과 기도, 웃음이 넘쳐나는 집이고 모화의 집은 동굴 같은 등불도 꺼진 낡은 집이다. 거기엔 모기, 지렁이, 잡풀이 넘쳐날 뿐이다. 낡음과 새로움은 그렇게 비교된다.
셋째, 죽음과 탄생의 동시성이다. 욱이는 병으로 죽지만 욱이로 하여 경주의 작은 마을에 교회가 들어서게 되고 모화가 죽음으로 하여 낭이는 말을 하게 된다. 또는 근친상간을 암시하는 대목과 낭이의 배가 불러온다는 소문에 의하면 욱이의 죽음과 낭이 뱃속의 아이는 탄생의 의미가 된다. 죽음과 탄생은 두 개의 문이면서 인간에게는 하나의 원형이다.
(2) 모화의 엑스타시스
소설은 모두와 결미 부분에서 모화의 굿을 보기 위해서 전국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강변에 친 모래밭 차일 안에 모여 있음을 재현한다. 무당 모화는 벌써 “청승에 자지러져 뼈도 살도 없는 혼령으로 화한 듯 가벼이 쾌자 자락을 날리며 돌아가는 형국”이고, 시나위 가락에 취해 있는 상황이다. 자신의 굿으로도 아들을 구하지 못한 모화는 마지막 굿을 하기 전에 “우리 아들은 예수가 잡아갔소”라고 큰 소리 친다. 모화가 ‘흥, 예수 귀신이 진짠가 신령님이 진짠가 두고 보지’라고 장담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소설 어디에도 모화의 굿이 실패했다는 대목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욱이의 병을 고치고 욱이의 잡귀를 쫓아내지 못한 것과, 수국 꽃님의 화신인 낭이의 말문을 열지 못한 것뿐이다.
“그는 지금까지 이 경주 고을 일원을 중심으로 수백 번의 푸닥거리와 굿을 하고 수백 수천 명의 병을 고쳐 왔지만, 아직 한 번도 자기의 하는 굿이나 푸닥거리에 ‘신령님’의 감응을 의심한다든가 걱정을 해 본 적은 없었다.”
모화의 마지막 굿이란 ‘예기소’에 몸을 던진 부잣집 며느리의 혼령을 불러 ‘초혼 그릇’에 망자의 머리카락을 담는 일이다. 모화의 전성기에는 그러한 초혼이 가능했다. 이번 굿에는 두 가지를 겨낭한다. 망자의 머리카락을 초혼 그릇에 담는 일과 동시에 딸 낭이 입을 열게 한다는 소문이다. 그러나 징과 꽹과리가 울리는 가운데 모화는 점점 예기소 깊은 물 속으로 들어가고 허리와 가슴이 물에 잠겨 끝내는 넋대만 물 위에 빙빙 돌다가 내린다. 딸 낭이는 모화가 죽은 열흘쯤 후 돌아온 아버지를 보고 “아버으이”라고 말문을 연다. 모화의 영검인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어머니 모화는 죽고 딸 낭이는 말문도 열고 병도 나아 아버지의 나귀를 타고 떠나게 된다. 낭이는 소설의 모티브가 되는 모화의 ‘무녀도’를 남긴다. 모화는 검은 강물에서 나올 수 있었음에도 자신의 신빙(神憑)을 믿은 것인가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 무녀가 자신을 이끌어준 신령님을 믿고 최선을 다하였으나 사자를 초혼의 그릇에 담을 수 없다면 죽음을 두려워해야 할 이유는 없다는 의미다. 그것은 진짜와 가짜의 문제를 초월하는 엑스타시스의 세계일 것이다. 「무녀도」는 기독교에 내포된 근대화 의식과 전통적인 무속을 대립시켜 시대정신의 변화를 보여준다는 측면과 모화라는 무녀의 죽음은 스스로 신령님의 절대성을 의심하지 않으며 죽음의 엑스타시스는 재생의 신화적 의미임을 확인한다.
“봄철이라 이 강변에 복숭아꽃 피그덜랑, 소복 단장 낭이 따님이 내 소식 물어주소.”
나. 이태원 『객사』(1994)
식민지 시대 무당 신 씨는 한 번도 굿을 한 일이 없다. 그럼에도 신교육을 받은 아들과 딸은 어머니가 무당 노릇을 못하도록 압력을 가한다. 굿은 비과학적인 미신이며 남을 속이는 사행 행위라는 것이다. 자식인 태조와 태석은 어머니에게 아편을 먹이고 시댁의 어른들은 압력을 넣는다는 소문이 자자하다. 한국의 샤머니즘은 고대 사회로부터 전승되어 온 것이고 고려의 불교 조선시대의 유교 시대를 거쳐 오면서도 무속은 유교 사상에 억압되어 온 여성들의 신앙으로서 꾸준히 명맥을 이어 온 것이다. 누구나 종교를 선택할 수 있고 더구나 신탁은 아무나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인위적으로 막으려 한 것은 무속을 모르는 처사다. 신내림을 약으로 막을 수 있을까. 신 씨는 억압된 주변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었다. 신 씨는 어느 날 밤, 인달이와 대달이가 사다 준 징과 북을 치고 두드리며 훨훨 무당춤을 춘다. 요란한 방 안 불상이 있는 신단에 양촛불을 켜놓고 징 소리를 내며 혼자서 무아의 지경에 빠진다. 그간 무당으로서 한 번도 굿판을 열지 못한 것이다. 하룻밤 황홀한 망아의 경지에 빠졌던 신 씨는 이튿날 새벽에 승천하듯이 죽음을 맞는다. 식민지 시대 조선 여인의 한풀이다. 억압된 시대 조선 무녀는 죽음으로써 자기 시대를 부정한다.
다. 정소성 「산그늘」(2014)
산마을의 무당 할미
태백산 줄기 20호 남짓한 하오리 마을은 이젠 7가구가 살고 있다. 환갑을 맞을 나이인 ‘나’ 순달은 하오리에서 지금껏 살고 있는 유일한 본 토박이다. 동네 사람들은 대부분 화전을 일구어 살거나 영월이나 태백 사람들의 땅을 얻어 경작해서 살았다. 가난한 시절을 상기시키는 잡곡 밥, 소작, 화전농, 구리분, 비누 등의 어휘에서, 잉어, 모래무지 이야기, 시골 오지의 무당 할미와 그 손녀인 숙자와 신랑각시 놀이까지 어린 시절 기억을 상기한다. “쉬어빠진 행주 냄새 같기도 하고, 썩은 고구마 냄새" 같기도 한 숙자를 꼬시기 위하여 온갖 방법을 동원하는 친구들의 두뇌 싸움은 지금 생각해도 가관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서당을 하는 서당집 아들이라 약간의 신임을 받기도 했고 그중 잘한 일은 소년들이 지서 주임인 영구 아버지와 이장에게 말하여 숙자가 장마철에도 개울을 건너올 수 있게 나무다리를 놓게 한 일이다. 어느 날 우연히 마을에 들어온 엿장수 할아버지가 하오리에 정착하게 되고 무당 할미와 눈이 맞아 복상사 사건이 터지게 된다. 파출소 순경이 무당 집에서 시신을 이리저리 살피고 귀신 할매와 우리 아버지, 영달이 어른, 오록 어른, 구동 할배와 물야 어른을 지서로 데리고 간다. 물야 마을 어른들은 온종일 조사를 받았는데 쉽게 풀려나지 못한다. 산업화 시대를 맞아 친구들은 떠나고 나는 서울 출입이 많은 숙자와 결혼한다. 숙자는 나와 결혼 후 피부가 검은 아이를 낳기도 했지만 그러한 숙자와 고향을 지키고 있다. 복상사는 ‘위대한 사랑은 심장과 뇌와 성기가 하나로 결합된 사랑’이라고 말한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뇌』(2002)를 상기시키는 대목이다. 관능의 파도는 ‘8헤르츠의 우주적 에너지’를 발산하는 것으로, 그 역시 미망에 빠진 상태다. 산업화 시대 농촌이 빈집 같이 공동화되던 시절, 고향을 떠나지 않고 마을을 지키고 있는 무당 할미와 손녀 숙자의 고향 이야기는 한 시대의 진실성으로 다가오는 어린 시절의 이야기다.
라. 오정희 「옛 우물」(1994)
어린 시절의 무속 체험으로 오정희의 「옛 우물」을 들 수 있다. 소설은 무속 세계를 직접 거론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십대 중년 부인이 회상하는 기억에는 옛 우물에서 두 가지 상반된 회상을 한다. 동생이 옛 우물에서 금빛 잉어로 탄생하는 환상과 동네 염쟁이의 딸 정옥이가 우물에 빠져 죽은 기억이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굿을 하던 기억과 우물가에서 들리는 설명할 수 없는 소리가 있었고 소녀가 느끼기에는 우물에는 ‘어떤 존재’가 있음을 경험한다. 무속은 한 소녀로 하여금 성장과 맞물려 불안이라는 어떤 심리적 역기능과도 연관됨을 시사하는 것으로 위의 「산그늘」이 소년들의 남성적인 체험이라면 「옛 우물」은 한 소녀의 무속적 기억이다. 전자가 무속의 사회적 순기능이라면 후자는 개인의 심층적인 불안 심리를 물의 양상으로 의미화한다.
마. 성해나 「혼모노」(2025)
1) 진짜와 가짜
성해나는 동아일보 신춘문예(2019)로 등단한 작가다. ‘샤머니즘을 가운데 두고 라이벌 관계에 놓였던 박상룡 작가와 이문구 작가’ 이후, 중견 작가들도 관심을 두지 않은 무속과 무당들의 생활을 직접 취재한 것은 그의 ‘사회적 아픔을 열린 귀로 경청하고 싶다’는 의지에 다름 아니다. 삼십 년 무당 생활을 한 ‘나’(巫覡)와 대학생 티의 갖 무당이 된 신애기와 대립하게 된 것은 신애기가 앞집으로 이사를 오고부터다. 나는 버거 전문점에서 버거를 먹고 그것도 양상추와 토마토를 빼둔 채 패티만 여러 장 든 채 너겟을 소스에 찍어 먹는 신애기를 목도한다. 그것은 신애기가 먹는 것이 아니라 나의 신주였던 ‘늙은 이’가 먹는 것이다. 세대 간의 차이를 간편한 복장과 이어폰, 식성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어쨌든 보름 전에 앞집으로 이사 온 신애기는 할멈의 신내림을 받고 음기가 가득한 점집 골목으로 이사를 온 것이다. 문제는 삼십 년 신주로 모셨던 할멈이 아무런 언질도 없이 나를 떠나 신애기로 갔다는 사실이다. 신당에 생화 목단꽃을 갖다 놓을 때만 해도 “역시 혼모노는 다르다”고 칭찬하던 장수할멈이 ‘나’도 모르게 돌아섬으로써 나는 혼모노가 아닌 니세모노가 된다. 눈치도 없는 나에게 신애기는 비웃으며 말한다.
“장수 할멈이 점지해줬어, 네놈 앞집에 들어가라고.”
무당은 전승의 제한성은 물론, 신내림을 받아야 하는 특수한 직업이다. 신애기의 부모도 신애기가 신내림을 받을 때의 고통을 털어놓는다. 신애기는 카톨릭 집안에서 태어나 무속을 귀신으로 여겼는데 결국 신내림을 받게 되었다는 것과 신애기의 아버지는 보이차 향기에도 진짜의 향과 가짜의 향이 있다고 무속계를 에둘러 비판한다. 이후 나에게는 불길한 흉패만 나오게 되고 번아웃 증세로 극도의 피로를 느끼게 되어 ‘오늘의 운세’ 출연까지 거부한다. 언론에서 하는 운세가 진실이 아니라는 판단에서다. 이후 힘들게 얻은 큰 재수굿마저 실패로 끝나고 사람들로부터 조소를 받는다. 신굿을 하고 닭 모가지 피를 먹었으나 소용이 없다. 치아가 빠지는 흉몽을 꾼 이튿날 황보 의원을 만나게 된다. 무속인과 정치인의 밀착 관계는 선거 현수막이 붙는 선거철이면 절정을 이룬다. 지금까지 황보 의원이 지방의 조상의 묘를 경기도 용인으로 옮긴 것, 경기도의 비싼 땅을 헐값에 산 것, 몇 번의 낙방 끝에 국회의원이 되고 당 최고의원이 될 수 있었던 것도 할멈의 신기와 나의 부적에 의한 것임을 인정한다. 그러나 ‘나’는 불길한 짝수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지방선거를 준비하는 황보 의원에게 굿을 해야 한다며 할멈이 싫어하는 니세모노도 하지 않는 짓을 한다. 황보 의원과 인연을 맺은 것이 십여 년에 이르러 호형호제하는 사이이지만 내일이 없는 신세가 된 나는 황보에게 굿을 권하고 황보는 “굿보다 더한 것이라도 해야 한다면 해야지”라며 쾌히 승낙한다. 무당과 정치인의 밀착 관계다. 신내림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애기의 집에서는 크게 다투는 소리가 들리고, 그 아버지에게서 ‘돈’이라는 말이 나온다. 무당은 돈을 벌어야 한다는 가족들의 억압이다. ‘나’가 무당이 된 초기에 겪었던 과정과 흡사하다. 가짜 무당이 된 나는 유튜브를 통해 접신(接神) 연습을 하고, 모형 작두와 칼을 주문한다. 해원경을 틀고 칼춤을 연습한다. 신기 없는 연습 과정이 황보 의원의 귀에 들어가고 ‘넌 너무 늙었어, 욕심만 가득해’ 하는 것이 할멈의 생각인데 나는 눈치를 채지 못한다. 가짜를 통해서 진짜를 본다는 두 개의 상반된 시선은 인간과 신의 세계, 현실과 초월의 문제가 어떻게 허위 의식으로 포장되어 있는지를 보려는 것이고 나는 ‘나’가 주체적으로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는 점에서 비극적이다.
2) 피의 엑스타시스
소만(小滿), 대 길일이다. 나는 그간 준비한 소품들을 들고 고급 주택과 아파트가 들어선 황보의 집을 찾아간다. 황보의 집 택지도 내가 품을 든 것이다. 신애기는 벌써 다른 무당과 판수, 악사들을 데리고 굿판을 벌이고 있다. 나는 모형 작두가 아닌 밤새 벼린 신칼과 쌍작두를 들고 신애기의 굿판에 끼어들자 황보 의원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은 놀란다. 판수가 독경을 읽는다.
금일 영가 저 혼신은 혼이라도 오셨으면
만반진수 흠향하고 일배주로 감응을 하야
신애기는 신칼로 자신의 혓바닥과 팔다리를 긋는가 하면 칼날의 사다리를 오른다. 장수할멈이 작두 위에서 역신을 쫓는 대대적인 굿거리다. 작두 위에서 할멈을 부른다. 판수의 독경과 악사의 자진모리 장단에 따라 작두 타는 몸짓이 다급해진다. 나와 신애기는 작두날 위에서 누가 더 오래 버티나를 싸우는 모양새다. ‘나’는 온몸에 전율을 느낀다. 발바닥은 뜨겁고 끈적한 피로 흥건하다. 평소 호형호제하던 배신자 황보가 경악하며 내 쪽을 보고 있다. 피범벅에 몰골도 흉하겠으나 시야가 환하고 입가에 미소가 드리워진다. 신령 근처에라도 가 닿은 것처럼 몸이 가볍고 신명이 난다. 자진모리 장단에 따라 고조되는 감정이다. 삼십 년 박수 생활에 이런 순간이 있었던가 싶은 것이다. 모든 것에서 놓여 나듯 이제야 진짜 가짜를 넘어 몸도 마음도 가벼워지는 것이다. 신애기도 나를 보고 아연실색하며 나가떨어진다. ‘할멈, 어떤가, 이제 당신도 알겠지’ 하는 몸짓이다. 삼십 년 무당 생활을 한 ‘나’는 비로소 망아적 죽음의식을 통해 나를 해방시키는 것인가. 그러나 소설의 말미는 조롱으로 끝을 맺는다. “하기야 존나 흉내만 내는 놈이 뭘 알겠냐만, 큭큭, 큭큭큭큭”이라고. 삼십 년 무당 경력을 가진 ‘나’가 신애기에 의해 가짜 무당으로 전락한 이유는 무엇일까. 『혼모노』의 할멈은 신통한 신령이고 매우 정결한 신이다. ‘나’는 삼십 년 동안 돈과 권력에 빌붙어 가짜도 하지 않는 술수로 굿판을 해온 터다. ‘늙은 것이 욕심만 많다’는 지적은 무형문화재 욕심까지도 포함하는 말이다. 그것이 할멈이 떠난 이유인데도 나는 눈치채지 못하고 할멈만 원망한 것이다. 신령의 뜻을 눈치채지 못한 것 자체가 가짜라는 의미다. ‘나’가 할멈의 신당을 깨뜨리고 기물을 던지는 행위로 신을 부정하고 소리쳤지만 무당으로서 부활할 것인가는 미지수다. 소설의 구조는 ‘나’의 가짜 행위를 통해서 무당 세계의 진짜를 보겠다는 반어적 의미다. 그 반어적 의미 속에는 주술성과 신성성을 특징으로 하는 세습적인 무(巫)의 세계를 줄타기하는 곡예사 정도로 비하하는 것은 타당한가를 포함하는 것이다.
4. 마치면서
요즘 미술관에서는 ‘강령, 영혼의 기술’이라는 제목을 달고, 동시대 미술 발전에 영적인 경험이 어떤 역할을 해왔는가를 묻는 전시가 있었고, MZ세대는 젊은 무당이 펼치는 작두 굿을 보려고 전국에서 모여든다. 이는 젊은 세대에게는 한국 무속을 재해석하는 계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여성과 해방감 그리고 무당의 엑스타시스를 통해 인간은 어두운 현실과 시대의 허위 의식을 어떻게 벗어나고자 하였는가. 신의 세계는 인간이 살아온 시대정신과 무관하지 않으며 무(巫)의 세계도 신령함에서 ‘구경하다’는 놀이의 굿판으로 재해석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신화에서 묵시하는 두 개의 문, 사자의 초혼, 초월과 세속화라는 키워드에서 무속의 파괴성과 구원성의 이원적 의미를 들여다보고자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