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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인협회 로고 최명임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1월 68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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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계사 대웅전에 부처 좌정하셨다. 동백과 차나무가 청아하게 경을 읽는다. 날짐승이 경건히 날개를 접고 네 발 달린 중생이 멈추어 선다. 아랫말에서 온 두 발 중생은 합장하고 몸을 낮춘다. 허겁지겁 산으로 올라오는 저이는 무슨 탈이 생겼나, 번민에 싸여 얼굴이 벌겋다.
쌍계사 입구 드므에 물이 콸콸 넘친다. 소리 저렁저렁 화기를 누른다. 중생들 심화 끄라고 바가지를 걸어두었다. 저마다 청정수 한 바가지 들이켜고 속계에서 붙어 온 불을 끈다. 대웅전 아래 드므는 육중한 몸집만도 화마가 가위눌릴 것 같다. 어림잡아 길이 석 자 반에, 폭은 자 반을 넘을 것 같은데 그 깊은 속이야 눈으로 가늠하랴. 물귀신 작전으로 미리 엄포를 놓는다. 공양간 앞 드므는 평수 작은 집채만 하다. 내 일찍이 이렇게 큰 드므를 본 적이 없다. 물이 철철 넘친다. 흘러 흘러서 넓은 뜰로 가려나.
두 골짜기가 만나 쌍계라 하였는데 오늘은 물소리 서로 잔잔하다. 절을 둘러싼 동백과 차나무가 사방으로 경계의 눈초리를 보낸다. 이들은 불에 잘 타지 않는 물성을 가져서 방화목으로 심었다니 좀처럼 꺾이지 않는 결을 가진 듯. 드므와 나무가 함께 파수를 선다. 영산은 절을 품어 더없이 웅숭깊고 고찰은 예스러운 풍치로 산을 껴안는다. 쌍계사 드므가 유달리 큰 까닭을 알겠다. 속이 얄팍해서야 명산과 고색 짙은 유물들을 화마로부터 지키겠는가.
중생은 불과 물 양극을 이용하며 편리를 도모하였다. 잘 다스리지 못하는 날은 재앙으로 돌변하였다. 궁이나 사찰, 민가에 이르기까지 드므에 물을 담아 예비하였으니 유비무환의 정신이다. 해태와 드므는 화기를 누르는 비복 풍수이다. 해태가 먼저 화마를 쫓았고 그래도 놓쳐 건물에 번진 불은 물이 제격이렷다.
바람이 많거나 수기와 화기 강한 터는 사람이 살 곳이 못 된다. 예컨대 고향마을은 머리맡에 저수지가 있어서 장마철만 되면 잠을 못 이루었다. 장정들이 횃불을 들고 수마의 행패를 지켜보다가 오밤중에 확성기로 피난 가라고 소리쳤다. 사람들은 이불 보따리 둘러메고 잠이 덜 깬 새끼 재촉해 산으로 도망쳤다. 밤새 횃불을 밝혔다. 그 불이 비방이었나, 내가 다 자라도록 탈은 없었다. 피치 못할 사정이라면 누르고 보하고 사하는 비방으로 우환을 잠재웠다.
예전 사람들은 드므의 물을 자주 맑혔다. 화마가 불내러 왔다가 물에 비친 괴물을 보고 기겁해서 도망가라고. 아둔한 화마가 서너 번은 속았을 테지. 인간이 눈먼 화마에 속수무책 당한 적이 한두 번인가. 중생의 속도 다르지 않아서 저 혼자 불을 내고 활활 타거나, 누군가가 불을 지르거나 한다.
하루는 그가 화기에 뻗쳐서 들어왔다. 세상을 향해 육두문자를 날렸다. 울면 남자 아니라더니, 술기운을 빌려 펑펑 울었다.
“끝났어.”
온 식구가 우두망찰하였다.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등만 쓰다듬었다. 고리(高利)를 감당 못하자 집이 날아가고 건물과 땅이 하나둘 사라졌다. 하늘이 노랬다. 급한 불을 끄는 무엇이라도 예비해 두었더라면 초가삼간 다 태우지 않았을 것을.
어느 날 그가 비를 흠뻑 맞고 돌아왔다. 주머니를 뒤졌더니 오백 원 동전 하나 달랑 남았더란다. 애마를 타고 달리던 날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공연히 화가 치밀었다. 순간, 손끝에 느껴지는 금속의 차가움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버스를 보내고 걸어왔는데 눈물인지 빗물인지 줄줄 흘러내렸다. 1997년 산 오백 원은 나중을 위한 예비심이었고 다시 시작하려는 다짐이었다.
남편의 가슴은 불덩어리가 끓어오르는 화산이었다. 늘 조마조마하였는데 아내와 자식들 앞에서 목을 세우고 권위를 부렸다. 그 성질머리 다 맞추고 살자니 내 속에서 불이 났다.
사람 안에도 쌍계와 같은 두 줄기가 있으니 감정과 이성이다. 감정이 불덩어리면 이성은 드므다. 욕망의 화신에 사로잡혀 활활 타오르다 정신을 차리면 이성이 깨어난다. 그는 속에서 불이 나면 냉수 한 사발 마신다. 이도 안 통하면 산을 찾는다. 그와 내가 산을 떠돈 지 수십 년째다. 절을 만나면 거기가 출세간, 불은 어느새 꺼지고 말아 물도 불도 없는 시점에 닿는다. 그의 전생은 법계는 받았으나 속계에 한 다리 걸친 땡중이었을 거다.
마음의 불은 끄는 것이 아니라 가라앉힌다. 늘 이성의 드므에 물을 채우고 예비해 두어야지. 마음이 메마르면 공공연히 불씨가 살아날 테니. 세상은 온통 불구덩이고 사람은 화염을 품고 산다. 이성의 드므가 경계하므로 세상도 우리도 살고 있지 않은가. 쌍계사 드므에 물결이 잠잠하다. 진감선사탑비 머리에 용 두 마리 똬리를 틀고 앉았다. 저 수신(水神)이 눈을 부라리고 지붕 그림자 물에 잠겼으니 불날 일 없겠다. 드므에 얼굴 비추고 속 붉히는 중생은 어디서 왔는고. 찾아온 중생도 늘 거기 사는 중생도 오늘 하루 무사히 치르라 염불 소리 경건하다.
공양간 앞 드므에 손을 담근다. 열감에 놀라 파문이 인다. 냉기가 번쩍, 뇌리를 타고 이성을 깨운다. 내 속에 불난 줄 어찌 알고. 우린 서로의 가슴에 얼마나 불질렀을까. 그의 손을 이끌어 함께 담근다. 사내 속이라 내색도 못하고 오죽하였으랴. 드므에서 물 한 바가지 얻어 그에게 건넨다.
질곡의 세월을 달려와 말에서 내린 사내, 넙죽 받아 벌컥벌컥 들이켠다. 체할라, 나뭇잎 하나 띄워 줄 걸. 언제나 한발 늦는 지어미를 향하여 괜찮소! 하는 표정이다. 내 속 눈치챈 그의 한마디에 화기가 스러진다.
“부인, 물맛 참 좋소그려!”
한동안 내 집에 불날 일 없겠다. 드므에 넘치도록 물을 담고 절을 떠나는데 속에서 출렁출렁 물소리 들린다. 부처께 화두를 받고 영산에서 기를 받았으니 속에 불난다고 나를 다 태우랴.
산속 중생들이 잘 가라 손 흔든다. 불길 거세지거든 다시 오마, 합장하고 허리 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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