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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진솔함을 담는 그릇이다

한국문인협회 로고 김태경

시인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1월 68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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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때 정비석의 「산정무한」을 읽으며, 무한 감동에 나는 내 고향 진부 오대산 단풍의 아름다움을 수필로 써 강원일보에 기고한 적이 있었다. 이때 막연하나마 글을 쓰는 즐거움이 몸속으로 스며드는 것이다. 그런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은 나의 문학의 뿌리요, 치유의 마데카솔 같은 공간이다. 또 새마을운동으로 초가집이 헐리고, 주택 개량한 우리 집에 작은 다락방이 있었다. 그 다락방에서 바라본 앞산 ‘뫼필봉’에 할아버지, 할머니의 산소가 있다. 어린 나는 가끔 할아버지께서 너는 어떻게 살고 있느냐? 그렇게 물음을 던지는 듯한 느낌이 들어, 오랫동안 뫼필봉을 나의 기둥으로 삼았다.
그 다락방에서 아버지께서 읽으셨던 책, 김소월의 『진달래꽃』, 한용운의 『님의 침묵』, 그리고 한국의 명시 모음 등을 처음 접했을 때 아버지가 본 그 낡은 시집을 통해 나도 모르게 시를 꿈꾸고, 시를 습작했었다.
산골짜기에 들어가 소꼴을 베면서 암송한 시는 김소월의 「초혼」이었다.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지금에 생각하면, 왜 김소월의 대표작인 「진달래꽃」보다 「초혼」을 먼저 암송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의 문학에 자리 잡은 ‘한(恨)의 정서’가 그때 생겼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생각하면, 아카시아 가로수 아래서, 미루나무가 흔들리는 시냇가에서 읊조린 「초혼」은 나의 등단 이야기에서 빠질 수 없는 시다. 또 암송한 시는 청마 유치환의 「그리움」이었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물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이 시를 암송할 때마다 아련한 그리움이 무엇일까? 나의 습작시에 그리움이 많았던 것도 이러한 까닭에서 온 것일 거다.
1981년도 나는 관동대학교 국어교육과에 입학했다. 그때는 시국이 어수선할 때였지만, 그때 국어교육과에서 시를 지도하시던 엄창섭 교수님을 만났다. 엄창섭 교수님을 통해 시문학사의 흐름, 시작법과 작품 감상 등을 배웠다. 시에 관심이 많은 81학번 동기, 훗날 KBS에서 근무하고 정년퇴직한 김석건, 감수성 짙은 시를 쓴 이인화, 그리고 나 이렇게 세 명이 그 당시 선배들의 모임 ‘섬동인’에 들어갔다.
그 당시 ‘문청(문학청년)’으로 살고 있던 박남철은 『문학동네』로 등단하고 지금은 ‘박세현 시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또 『창비』로 등단한 강세환 시인, 신춘문예로 등단한 박수찬 시인, 『심상』으로 등단한 박용재 시인, 염산국 시인, 박명희 시인, 홍극표 시인 등과 어울리게 되면서 시에 대한 고민도 많이 했고, 매월 안목 해망산 아래 횟집에서 합평회를 할 때가 좋았다.
그 당시 밤새워 고민하고 퇴고한 시를 가지고 합평회를 할 때마다 선배들의 고뇌와 시에 대한 열정을 뛰어넘을 수 없었고, 점차 시에 대한 나의 한계가 왔다. 그래도 꾸준히 살아온 나는 대학 4학년 때 관동문학상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았다. 그 후에 선배들은 세상 밖으로 떠나고, 나는 더 이상 시를 쓰지 못했다. 아마 나는 시재(詩才)가 없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그래도 그 당시 강릉서점에서 지금 한국 문단사의 한 획을 긋고 계시는 시인들의 시집을 사서 읽는 즐거움이 있었고, 구매한 시집에 밑줄을 긋고, 메모하면서 시에 대한 갈증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졸업 후에 나는 학교가 아닌 학원을 선택하여, 서울 대형 입시학원에서 국어 강사로 살아왔다. 거의 날마다 수험생에게 시를 가르치다 보니, 자연스럽게 시를 분석하고, 시의 구성과 특징, 시의 구성 요소 등을 알게 되었다. 교학상장(敎學相長)이란 말이 있듯이, ‘가르치고 배우고’를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나도 모르게 교과서에 실린 수백 편의 시를 알게 되었다. 어쩌면 시의 문리(文理)를 알게 된 것이 직업이 준 선물이었다.
2003년 학원 옆자리에서 만난 이병초 시인, 또 하나의 운명이었다. 이병초 시인의 「밤비」를 읽으면서, 노트북에 틈틈이 쓴 천 편 이상의 시 중에 몇 편을 골라 이병초 시인에게 주었다. 아마 세상에서 나의 시를 읽은 두 번째 독자가 이병초 시인일 것이다. 그때, 이병초 시인이 왜 등단하지 않고 사냐고 물었지만, 나는 세상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느낌이었다. 왜냐하면 옛 선비처럼 물질보다 정신적으로, 가난해도 시를 쓰고, 시를 사랑한 치열한 삶이 내게 있을까 회의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를 논하던 이병초 시인이 대학으로 직장을 옮기고 난 후, 나는 또 홀로 습작시를 쓰면서 살았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갔다.
2008년 겨울날, 청솔기숙학원 옆자리에 있던 황동상 시인이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이란 시를 써 수험생에게 프린트하여 나눠준 것을 읽게 되었다.
“시가 참 좋네요? 황 선생이 쓴 시인가요?” 하고 확인하고, 나도 모르게, “우리 황 선생, 시인이신가 봐요?” 또다시 물었다.
“네, 지금 시인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들으면서, 나도 모르게, “나도 오랫동안 시를 쓰고 있지만, 시로 세상에 나간 적은 없어요”라고 말하니, 나에게 그동안 쓴 시를 볼 수 있느냐고 했다.
며칠 후, 황동상 시인이 요즘처럼 포스트모더니즘이 주류를 이루는 문학 세계에서 이처럼 극서정시를 쓰는 사람을 본 적이 없는데, 김 선생은 특이하게 강원도의 투박한 정서, 산골 냄새가 풀풀 나는 서정시가 너무나 좋았다고, 그러면서 시 공모전에 응모하면 어떻겠느냐고 했다.
시인의 삶을 살고 싶어도, 응모에 망설이던 나는 시집 한 권이라도 출간해서 무학(無學)이었지만 그 누구보다 땅을 사랑하고 살았던 할아버지, 할머니의 삶을 써 부모님께 드리고 싶었다. 또 나의 유일한 독자, 첫사랑인 아내에게 보낸 연애편지가 500여 통. 이사 다닐 때마다 들고 다닌 것을 나중에 알고, 젊은 날의 사랑을 지켜온 아내에게 시로 연서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2009년 1월에 월간 『모던포엠』에 시 작품을 응모했다. 전형철 발행인이 발간하는 『모던포엠』 5월호를 통해 드디어 나는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 것이다. 등단 대표작은 「세탁소」였다. 세탁소 사장의 삶을 객관적 시점에서 쓴 노동의 희망시였다 이 푸른 별에서 존재하는 내가 깨어 있으면 언제나 시가 나에게 온다는 믿음을 준 시였기 때문이다. 그 시를 통해 나는 인간의 보편적 정서를 노래하고, 희망의 노동시를 쓰는 시인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젊은 날, 함께 공부했던 문청 선배들은 세상에 나가 어느새 중견 시인으로서 활동하고, 여러 권의 시집을 출간하고 있었다. 뒤늦게 세상에 시인으로 이름을 올리면서 과연 시인으로서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 그동안 시적 교류가 없었던 선배 시인의 전화번호를 찾아, “이제 부족하지만 선배께서 걸어가고 있는 시로 세상에 나가겠습니다” 하고 강세환 시인께 전화를 드렸다.
“너, 아직도 시를 쓰고 있었냐? 그래 이번에 등단한 작품을 보내줄 수 있느냐?”
그래서 강세환 시인에게 등단작을 보냈다. 시인이 격려와 함께 축하의 말을 보내왔다.
“함께 공부할 때 너의 모습이 눈에 선한데, 시를 쓰지 않고 사는 줄 알았는데…. 시가 좋았어. 정말 꾸준히 잘 살아왔네. 작품도 잘 읽었네. 이제부터 시인의 막중한 삶의 무게를 견디면서 좋은 작품 많이 써야 하네.”
시인의 삶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생각하며 나는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지난날의 삶. 나의 등단 이야기를 쓰면서 등단 후 10년 만에 『별을안은사랑』의 시집을 부모님께 드린 것으로 나의 등단 이야기를 마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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