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4년 7월 66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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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둣빛 이파리 가득한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린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헐벗었던 나무들은 언제 저렇게 잎을 틔웠을까요. 새들이 지저귀며 하늘은 파랗고 구름은 하얀 오월 속으로 아카시아 향긋한 내음을 뽑아내며 맞이한다.
신록의 계절. 어느 오후 우리 여류 문인 셋이서 성북동 한정식 집에서 오랜만에 만나기로 약속하였다. 반가운 만남과 맛있는 식사를 하면서 세월의 이끼를 벗어날 수 없는 실버들의 수다는 한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주로 요즈음 글 쓰는 이야기가 주제이지만 나이 들어갈수록 잘 쓰여 지지 않는다는 한탄과 그래도 우리는 문학인이라는 사명을 가지고 죽는 날까지 펜을 놓지 말아야 한다고 다짐하였다.
우리의 글은 영혼과 감성으로 쓰는 작가가 되어야만 하며 우리가 쓰는 작품들에 울고 웃으며 감동받는 독자들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자고 하였다. 헤어지기 아쉬워할 때쯤 한 친구가 이곳에서 멀지 않은 길상사를 탐방하자고 제안을 하기에 모두가 찬성하였다.
길상사로 올라가는 길은 참으로 상쾌한 5월의 훈풍에 사방에 흐드러 지게 피어난 이름 모를 꽃들의 향연을 이루었다. ‘삼각산 길상사’ 현판이 높게 걸려 있는 일주문을 통해 경내로 들어가니 고즈넉하고 아늑한 모습들이 참으로 평화스러웠다.
길상사는 서울 성북구 성북동 삼각산 중턱에 아담하게 자리 잡고 있다. 대한민국 제3 공화국에서 제5 공화국 시절 정계와 재계의 밀실 정치의 요람이었던 서울 장안의 삼청각 청운각 대원각과 더불어 3대 요정 집이라 할 만큼 이름있는 집이었다.
대원각의 주인은 고 김영환 여사이며 슬프도록 아름다운 여사님의 인생 여정 애달픈 사랑의 장소에 우리는 찾아왔다. 한세대를 풍미하였던 여성 사업가로서 그 시대의 멋진 여성 로맨티스트였던 고 김영환 여사의 발자취를 찾아 기록해 보려는 문학적인 목적도 함께 있었다.
사찰 경내를 천천히 걸어가면서 각자 저마다의 환상과 상념에 젖어 침묵하였다. 시주 길상사의 공덕비가 있고 위 언덕에 사당이 있다. 김영환의 초상화와 공덕비 옆에는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현판이 있다.
김영환은 1916년 민족사의 암흑기에 서울 관철동에서 태어났다. 집안의 몰락과 결혼의 실패로 16세의 꽃다운 나이로 진향이라는 기생이 되었다. 당대의 꽃미남이며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지식인이며 천재 시인 백석과 기생 진향의 이야기를 지면을 통해 글을 써 보려 한다.
1936년 함흥에서 영생여고 교사들의 회식 자리에서 둘은 운명처럼 만나 한눈에 반한 백석은 김영환에게 자야라는 아명을 지어주고 한동안 사랑에 빠져 3년간 동거하였으나 6·25동란과 휴전으로 남북으로 갈라지는 생이별을 하고 말았다.
그후 김영환은 평생 백석을 그리워하며 살았으며 혼자 월남 후 열심히 식당 사업을 하며 돈 모으는 데 성공하였다. 1955년 성북동 배밭골 일대의 땅을 사들여 대원각이라는 한식당을 창업 후 40여 년간 이름난 요정집을 운영하였다. 대지 7000여 평 건물 40여 채, 당시 싯가 1000여억이 넘는 재산을 모았다.
부를 이루워 놓았지만 법정 스님의 무소유 책을 읽고 크게 감동하여 평생 일군 전 재산 대원각을 시주하여 절로 만들어 주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법정 스님의 삶의 철학 무소유로 받아들여지지 않다가 결국 1997년 요정 대원각이 아름다운 변신을 하여 길상사로 창건되었다. 대원각을 시주한 김영환은 염주 한 벌과 길상화(吉相華)라는 불명(佛名)을 받았다.
그 많은 재산이 아깝지 않느냐는 질문에 천억 원이 그 사람 시 한 줄 보다 못하다면서 한 치의 미련도 두지 않았다고 한다.
이토록 아름답고 애달픈 사연이 담겨 있는 길상사에서 나는 가슴 뭉클한 그들의 사랑의 힘과 숭고함을 느껴본다. 어떻게 보면 세대의 플라토닉 사랑 같기도 하고 어찌보면 애달픈 비련의 흔적 같기도 한 이들의 사랑의 종말을 보면서 내 마음 한편에서는 말 못 할 아쉬움이 일렁인다. 머문 듯 가는 것이 세월인 것을 청춘이 영원하지 않듯 우리 인간 만사 잠시 찰나에 불과하다는 허무를 진하게 음미한다.
분단 이후 뒤늦게 들려온 백석의 소식은 1950년 중반 압록강 인근 농장으로 추방당해 힘든 생활을 하다 1996년 생을 마감하였다고 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억겁의 인연이 두 사람을 만나게 했고 또한 헤어지도록 했다. 그림같이 아름다운 정원을 이동하여 사찰 경내의 울창한 수목으로 둘러 쌓여 있으며 북한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작은 도량의 물소리와 새소리 정원의 각가지 꽃들이 경내의 풍광을 더욱 빛내주고 있다.
김영환의 첫사랑은 백석, 마지막 사랑은 부처다. 나 죽으면 화장해서 눈이 많이 내리는 날 길상현 뒤 뜰에 뿌려 달라고 한 유언을 남기고 질곡의 생애를 마감했다. 20대 초에 백석을 만나 평생 한 남자를 죽을 때까지 사랑했던 자야가 백석보다 3년 뒤 이승의 옷을 벗었다.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듯이 김영환은 길상사를 남겼다. 자식도 없이 빈몸으로 명예와는 먼 삶으로 세상을 떠났다. 극락전에 김영환의 영정이 모셔져 있고 길상사 가장 위쪽에 자리한 법정스님의 진영각이 있다.
법정스님, 보살 길상화, 백석 시인, 한 시대와 시대의 삶이 인연과 인연 속에서 인걸들은 한줌의 흙으로 사라졌다.
대원각은 우리 부부에게 아름답고 아련한 추억을 안겨주는 장소다. 이곳 대원각은 1990년대 초부터 한정식 집으로 일반인들도 이용하였으며 그 당시 서울 장안의 특급 한정식 식당으로 중요한 행사나 기념일에 많이 이용하였던 장소이다. 오래 전 아들이 결혼할 당시 양가 부모님들과 상견례 장소로 첫 만남을 하였던 잊지 못할 곳이다.
고즈넉하고 운치 있는 이곳 특실에서 양가 부모님들과 첫 인사를 나누며 자식들의 장래를 위해 마음속으로 무언의 축복을 소망하였던 뜻깊었던 장소다. 양가 부모님들의 바람대로 아들은 행복한 가정을 이루어 잘 살며 지금은 결혼 적령기에 있는 두 딸을 둔 가장이다.
만 가지 감회와 아련한 추억들을 회상하며 길상사 경내를 걸으며 인생이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채워가는 것이라는 것을 음미해 본다. 우리 모두 가는 세월 속에 성숙과 완숙으로 곱게 물든 나뭇잎같이 아름답게 살아가기를 바란다. 법정스님의 철학 무소유의 근본 도량과 같이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인생’과 같이 잠시라도 마음을 비우고 나 자신의 삶을 돌아 볼 수 있는 오늘 하루는 또 하나의 나의 일상을 부여하는 마중물이 되었다.
내 찬란하였던 유년의 뜰에서 맑게 울려 퍼지는 소나타와 같이…. 해가 서산에 기울 때쯤 우리는 애달픈 사랑의 전설이 깃든 길상사를 뒤로하고 정문을 걸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