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1월 68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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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을 ‘사물의 이면에 존재하는 또 다른 모습을 보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훌륭한 시는 조각 작품 같은 것이어서 앞에서 볼 때, 뒤에서 볼 때, 옆에서 볼 때, 그리고 위에서 내려보거나 밑에서 올려다볼 때마다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매너리즘에 빠진 관념적 시각으로 사물을 바라보게 되면 늘 보아 왔던 뻔한 모습으로 보이기 때문에 숨겨진 또 다른 진실을 찾기 위해서는 다양하고 낯선 시선이 필요하다.
르네 마그리트(Rene Magritte, 1878-1967)는 그림으로 시를 그리는 시인이다. 눈에 보이는 세계를 캔버스에 재현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세계를 변형하고자, 세계로 하여금 몸을 열게 하였다. 그의 회화는 눈에 보이는 것을 시적이고 마술적으로 배열함으로써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고 싶어 했다. 이러한 배열은 관람자의 시선이 세계의 가장 깊숙한 곳, 몸, 감각을 꿰뚫어 볼 수 있게 한다. 그의 주된 관심사는 현실의 묘사, 즉 세계 속 대상의 현시(顯示)를 찬미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깊숙이 감춰진 본성을 드러내는 그림을 창조하는 것이었다.
마그리트의 회화에서 이미지는 통속적 재현이 아니다. 사물을 보는 방식과 그리는 기법, 즉 자신의 눈과 손을 통해 포착된 자신의 몸, 화가 자신을 묘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회화는 증명사진처럼 동일성의 의미를 전하지 않는다. 그의 회화는 외형적으로 눈에 보이는 현실 자체가 아니라 현실 이면에 있는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비밀에 시선을 돌린다. 이러한 그의 이미지는 언제나 사유를 불러일으킨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 마그리트는 그것이 이미지로서 갖는 고유한 상황을 반성할 것을 요구한다.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구현하기 위해 그는 말〔言〕에 깊이 천착한다. 말은 가시적인 영역에 속하지만, 마그리트에게 말은 시적인 기민함의 관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한강’이라는 말은 서울을 떠올린다. 그러나 실제적인 한강을 눈앞에서 만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동안 보았던 한강의 이미지만을 떠올릴 뿐이다. 이렇듯 실제의 한강과 비교되는 언어의 무기력함을 알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는 거기에서 엄청난 힘, 즉 놀라운 기만적인 능력을 발견하게 된다. 말로써는 “나는 달에 있다”와 같은 거짓 주장을 할 수 있다. 마그리트는 이러한 언어의 시적 능력에 사로잡히고 매혹하였다.
마그리트 회화의 또 다른 일면은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그리고 사유 사이에 생기는 간극을 인식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해를 200m 정도 떨어져 있는 크고 붉은 원반처럼 그리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수만 광년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럼에도 석양에 서산으로 지는 해가 그렇게 보여지기도 한다. 그러나 마그리트는 작품에서 가시적인 것 내에서 이러한 현시를 무시한다. 캔버스라는 형이상학적 표면에 보는 것과 사유하는 것의 상호 배제를 해소하기 위해 반성과 모방, 성찰과 거울 이미지라는 이질성을 드러낸다. 이러한 그의 작품들에서 회화의 대상은 일상세계에서 사물 사이에 존재하는 구속으로부터 자유롭다. 구속되기는커녕 인공적 능력과 물리적 잠재력을 소유하고 있으며 사유 자체의 특징이 그런 것처럼 멀리 달아나려는 충동을 드러낸다. 단 사유가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것과의 적극적이고 격렬한 대결에 한해서 그러하다.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마그리트는 예술의 가장 중심에는 보이는 것 이면에 깃든 보이지 않는 것을 이미지화시킨다. 그러므로 그의 그림은 구상화이면서도 난해하다. 관념으로 바라보면 의미를 쉽게 짐작하기 힘들다.
그의 그림을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그림 제목을 이해해야 한다. 이들 제목은 현실적 인식과 병치를 이루는 대조적인 요소를 제공한다. 제비꽃 다발에 얼굴을 가리고 깃털 장식이 달린 모자를 쓴 여자는 대상들이 서로를 은폐하는 <대전쟁>(1964년)에서는 눈에 보이는 것과의 끊임없는 투쟁으로 보아야 한다. 하나의 대상은 자신을 드러내는 동시에 은폐하며, 그에 의해 다른 사물에는 드러나는 정면과 어두운 뒷면이 있다. 마그리트가 논리에 도전하면서 아주 날카롭게 포착하여 가시화하는 것은 뒷면이다. 따라서 그의 그림 제목은 결코 설명이나 확인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러기는커녕 그것을 추가적인 위반, 한층 불성실한 단서를 작동시킨다. 그 목적은 논리 내에, 그림에서 발생하는 것과 유사한 대립을 만들어 낸다.
이러한 마그리트의 그림은 구상적이지만 동시에 예술의 재현 법칙을 끊임없이 공격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그려 내는 형상들은 시적이지만 서정시의 원리를 전복하는 초현실주의풍의 서정시와 같다.
어린 시절 시골 공동묘지에서 여자아이와 함께 철문을 들어 올리고 지하 납골당으로 내려가 놀다가 다시 묘지 위로 올라오니 쏟아지는 눈부신 햇빛, 그리고 그 햇빛 속에서 어떤 화가가 그리고 있던 부서진 묘지들의 풍경에서 예술에 마술이 깃들어 있다고 인식한 것처럼, 그는 관습과 가장 거리가 먼 그림들을 그리며 자유의 기쁨을 경험했다.
<빛의 제국>(1954년)에서는 밝은 대낮의 하늘과 어두운 밤의 숲과 집이 동시에 있다. 밤과 낮의 공존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다른 세계는 어린 시절 지하 봉안당에서 밖으로 나왔을 때 쏟아지던 빛처럼 충격적이다.
<유리열쇠>(1959년)는 바위가 공중에 떠 있는 그림이다. 암석의 무거움과 이 그림이 암석에 부여한 무거움의 대비가 두드러진다. 이 작품에서 알 수 있듯 마그리트는 어떤 불가능성을 또 다른 불가능성에 의해 묘사했다. 암석의 무거움은 이 그림이 암석에 부여한 가벼움과 서로 융화될 수 있다. 이처럼 화가는 일반적인 인식의 법칙에 모순되는 논리를 대상에 부여할 수 있다.
마그리트는 끊임없이 현실에서 일탈하는 가능성, 즉 예술에 내재하는 비현실성을 이용했다. 그려진 파이프로는 담배를 피울 수 없으며(<이미지 배반>, 1928년) 캔버스와는 사랑을 나눌 수 없음(<검은 마술>, 1933-1934년)을 작품을 통해 보여준다.
1967년의 작품인 <백지>에는 밤 풍경이 그려져 있다. 화면 아래쪽에는 집집마다 불이 켜진 마을이 어둠 속에 잠겨 있다. 그런데 하늘을 거의 절반 차지하고 있는 나뭇잎 앞에 달이 배치돼 있다. 이는 원근법을 무시한 정도가 아니라 달이 불가능한 자리에 떠 있는 배치이다. ‘백지’라는 제목이 암시하듯 모든 글쓰기는 관습이나 문화 등이 전제된다는 의미를 담아내고 있는 이 그림은 상식과 관념의 일탈을 은연중에 말한다. 사실 ‘백지’라는 그림의 제목을 도저히 붙일 수 없는 이 작품에는 보이는 것 이면에 사유가 깃들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마그리트의 생각이 반영된 것이 <백지 위임장>이다. 여성 기수가 말을 타고 숲속을 가고 있다. 말을 탄 사람은 나무를 가리고, 나무는 여자를 가린다. 하지만 우리의 사고 능력은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파악한다. 그래서 마그리트는 회화를 이용하여 이러한 사유를 가시화한 것이다.
<향수>(1940년)에는 다리 위에 사자와 날개를 접은 남자가 있다. 사자와 남자가 다리 위에 함께 있을 아무런 이유가 없다. 그들은 진정한 삶이란 언제나 현재의 삶과는 다른 어떤 것임을,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임을 아는 사람들의 우울을 구현하고 있다.
나는 일찍이 마그리트의 이 그림에 매료된 적이 있다. 성서적으로 인간이 타락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떠나온 낙원을 그리워하는 것쯤으로 이해하였다. 물론 나의 이러한 사유는 마그리트가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긴 하나 그의 그림을 또 다른 면에서 바라볼 수 있다는 측면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는 마그리트의 효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초현실주의 회화를 그렸던 마그리트의 그림은 형상적으로 보았을 때는 초현실적이지 않다. 우리가 일상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일상적인 것, 신변의 것들인데, 악기, 하늘, 숲, 총, 파이프, 유리창, 구두, 사자, 새, 악기, 빗, 방울, 병, 사과, 사람의 몸 등이 그것들이다. 그러나 그것들을 그리되 배치와 크기, 그리고 원근이 상식을 뛰어넘는다. 구두의 끝은 발가락이 되고, 대리석 여자의 얼굴에서 피가 흐르고, 악기가 불타고, 공중을 사람이 산책한다. 보여야 할 것이 사라지고, 숨겨진 부분이 보인다. 방이 인물과 함께 갑자기 돌이 되고, 날개 치는 새가 흰 구름이 있는 창공이 되어 투명해진다. 이처럼 물체의 비현실적인 배치, 자연의 원근 역전과 서로 섞여 엉클어짐, 물체의 재질의 전환 등에 의하여 마그리트는 고정화된 상식에 도전하고, 정신에 충격을 주고, 동시에 미지의 세계를 현시(顯示)하여 보여준다.
마그리트는 몽롱한 본능이나 정념의 초현실주의를 보여준 달리와는 달리 야릇한 정적에 가득 찬 초현실주의 세계가 사람의 일상에 있음을 인식시킨다. 그러므로 그의 초현실주의는 ‘현실’을 초월하는 대단함을 보여준 것이 아니라 ‘현실’의 뒤통수를 친다. 이러한 그의 ‘현실’은 자연의 사물, 즉 외부 세계의 일인 동시에, 사람의 시각과 체험 등 내부의 ‘현실’이기도 하다. 그의 인식 태도는 “우리가 날마다 바라보는 유리창을 통해서 바라보는 경치가 어쩌면 유리에 진짜와 똑같이 그려진 그림이 아닐까 하고 스스로 질문하게 하고, 또 방의 도어를 열면 뜻하지 않은 풍경이 보일지도 모른다”는 그의 말을 떠오르게 한다.
초현실주의적 회화는 시인들에게 낯선 상상력을 자극한다. 텍스트 자체가 낯설기 때문이다. 사실주의적 기법으로 그린 마그리트의 그림 역시 많은 시인에게 다양한 질문을 하게 한다. 김형술의 「말과 구름과 나무」, 조말선의 「마그리트」, 조용환의 「전원의 열쇠」, 조영서의 「대가족」, 강경호의 「향수」 등이 그것들이다. 이들 작품은 대부분 초현실주의풍의 모더니즘 경향의 작품들이다. 김형술과 조말선의 작품들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에 놓여 있는 어떤 것을 그린 마그리트의 사유를 닮았다. 이들의 「말과 구름과 나무」 「마그리트」는 상식적인 언술로는 쉽게 이해하기 힘든 구조로 쓴 작품들이다.
김형술과 조말선은 부산에서 ‘세드나(Sedna)’라는 동인에 참여하는 시인들이다. 특히 김형술은 미술과 영화에 관심이 많아 이와 관련된 저술을 해 온 시인으로 영화와 그림을 본 후 쓴 시편들이 많은 편이다. 「말과 구름과 나무」 역시 그중의 한 편으로 이 작품 어디에도 마그리트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지만, 시의 제목을 통해 서양 미술을 섭렵하고 있는 그가 틀림없이 마그리트의 그림을 보고 난 후 이 작품을 썼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가 관심 있게 본 그림은 <백지 위임장>과 <아름다운 세계> <황금의 전설> <상아탑> <거짓 거울> <회화술> 등 구름과 나무가 등장하는 작품들로 짐작된다.
무슨 말로 나무를 그릴 수 있나
어떤 주문으로 나무 속에 들어갈까
나무는 말을 버리고
말은 나무를 이해하지 못한 채
그저 숲가를 서성이는데
그림자를 머리에 이고
그림자도 없이
세상을 떠나는 구름들
구름 속에 커다란 벽들이 있네
어떤 날은 읽히고,
어떤 날은 캄캄한
불타는 도서관이 숨어 있네
절반은 물, 절반은 돌인
저 이상한 경전(經典)들
가벼워라 가벼워
구름 속엔
세상 모든 바람에 흔들리면서
열리지 않는 완강한 서랍들
아무 말 없이도
세상 모든 바람을 읽는 몸이
나무 속에 숨어 있네
말의 몸을 가진 나무
벽의 얼굴을 가진 구름들
아아! 나는 열 수 있을까
—김형술, 「말과 구름과 나무」 전문

마그리트, <위임장>(1965년)
이러한 마그리트의 말〔言〕과 이미지에 매료되어 시적 발화를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마그리트는 말〔言〕을 수단으로 사용하지만 실은 언어의 본성과 그것을 언급하는 사물 사이에는 실재와 허구라는 차이가 있다. 말의 진실과 추상성에 대해 마그리트가 탐색했듯이 김형술도 「말과 구름과 나무」에서 실재와 허구의 차이가 지닌 진실을 모색하고 있다.
그래서 화자는 “무슨 말로 나무를 그릴 수 있나” 하고 질문을 하는 것이다. 나무를 그릴 수 있다면 “나무 속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화자는 나무 속으로 들어갈, 다시 말해 “나무를 그릴” 어떤 주문이 있는지를 생각할 수밖에 없다. 나무에 들어가기 위해서 택한 방법은 말〔馬〕을 타고 가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나무는 말을 버”린다. 나무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시인은 ‘말’이라는 언어가 지닌 이중적 의미를 교묘하게 이용한다. 우리 말 표기법상 ‘말’이라고 적지만, 그러나 각기 다른 의미를 지닌 ‘말〔言〕’과 ‘말〔馬〕’을 한문으로 표시하지 않고 사용함으로써 말의 모호함, 말의 추상성과 다의성을 통해 시적 효과를 높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무는 말을 버리고/ 말은 나무를 이해하지 못한 채/ 그저 숲가를 서성이는데”에서 ‘말’이 말〔言〕이 될 수도 있고 말〔馬〕도 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화자는 말이라는 기호가 지칭하는 것을 정확하게, 가리키지 못하고 “그저 숲가를 서성”인다고 말한다. ‘숲’은 나무들이 모인 것이지만 그것을 ‘나무’라고 말하기가 곤란하다. 분명히 “나무”와 “숲”은 그 의미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는 산을 바라보면서 “숲만 보고 나무는 보지 못했다”는 말과 같다. 나무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숲가에서 서성일 때 구름들은 “그림자를 머리에 이고/ 그림자도 없이/ 세상을 떠나”고 있다. 구름이 하늘에 떠가는 것은 지극히 일상적인 풍경이지만 그런데 구름은 “그림자를 머리에 이고” 있다. 태양이 지상에서 비춘다면 가능한 풍경이다. 그러나 태양은 언제나 하늘에 떠 있는 것이어서 구름의 그림자는 지상에 드리워질 수밖에 없다. 이처럼 우리가 아는 상식적인 세계가 아닌 곳에 나무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말은 나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구름 속에 커다란 벽들이 있”다. ‘벽’은 불통을 의미하는데 “어떤 날은 읽히고,/ 어떤 날은 캄캄”하다.
구름 속에 “불타는 도서관이 숨어 있”다. 도서관은 책들이 모여 있는 장소이며, 많은 의미가 깃든 책이 있는 곳이다. 도서관이 숨어 있는 구름은 “절반은 물, 절반은 돌”로 “이상한 경전(經典)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자는 가볍다고 한다. 커다란 벽이 숨어 있는 구름 속엔 “세상 모든 바람에 흔들리면서/ 열리지 않는 완강한 서랍들”이 있다. 그림자도 없이 떠나올 구름들 속에는 “커다란 벽”과 “불타는 도서관”, “열리지 않는 완강한 서랍”들이 있는 셈이다. 이것들은 ‘열리지 않는 상황’을 암시하는데 ‘나무 속에 들어가기 힘든 상황’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화자는 “무슨 말로 나무를 그릴 수 있나”에 대한 질문 끝에 “아아! 나는 열 수 있을까” 하고 절망하는 것이다. “말의 몸을 가진 나무”이며 “벽의 얼굴을 가진 구름”이기 때문에 “나무는 말을 버리고/ 말은 나무를 이해하지 못한 채/ 그저 숲가를 서성이는” 것이다. 다시 말해, 말로써 사물의 모습을 직접, 그리고 정확하게 드러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초현실주의풍의 이 작품은 소통이 쉽지 않다. 특히 ‘말〔言〕이라는 언어’와 ‘사물의 실재’의 차이를 모색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난해하고 추상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그리트가 한때 그림을 통해 깊이 천착했던 문제를 이 작품에서는 시를 통해 탐구하고 있어 비교 예술적 관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정원에는 정원을 그린 화가가 없다
정원은 정원을 그려나가는 방법뿐이다
정원은 까다롭다
정원을 그려들어간 화가는 정원에 있다
정원에 갇히기 싫은 화가는 정원을 그려나간다
정원은 단순하다
정원은 정원사가 그리는 게 낫다
—조말선, 「마그리트」 전문

마그리트, <통찰력>(1936년)
조말선의 「마그리트」는 발칙한 상상력을 지닌 예술가 ‘마그리트’를 시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조말선은 마그리트의 삶을 모티브로 하여 시를 썼다기보다는 마그리트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이미지들을 시 작품 속에 녹였다. 특히 조말선이 관심을 가진 마그리트의 그림은 <통찰력>(1936년)의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마그리트는 1936년에 「통찰력」이라는 그림을 두 편 그렸다. 새의 알을 보고 새를 그리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는 것과 새의 알을 보며 새를 그리는 <통찰력>이라는 그림을 그리고 있는 이중 자화상을 그린 그림이다. 알은 모티브가 되지만 화가에 의해 번역되어 캔버스에 현시될 때는 새의 형상을 취하는 그림을 통해 마그리트는 예술가라는 직업에 내재된 상상력의 과정에 대한 생각을 전하고자 한다. 고정화된 관습을 타파하고 자유로운 상상력을 구현하고자 하는 예술가의 정신이 투사된 작품들이다.
알을 보며 새를 상상하는 자유로운 영혼에서 시인은 커다란 매력을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정원에 갇히기 싫은 화가는 정원을 그려 나간다”고 진술했던 것은 아닐까.
조말선의 「마그리트」는 상식적인 관념으로는 읽어낼 수 없다. “정원에는 정원을 그린 화가가 없다”는 말은 당연한 말이다. 정원을 그린 화가의 눈에는 정원만 보이기 때문에 자신을 그려 넣지 않았을 터이다. 그러나 마그리트의 <통찰력>식으로 바라보면 정원을 그린 그림 속에는 화가가 없지만, 정원을 그리고 있는 화가의 모습을 또 다른 캔버스에 담아낸다면 “정원을 그려 들어간 화가는 정원에 있다”는 진술이 이해가 간다.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논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 작품은 “정원은 까다롭다”라는 말처럼 까다롭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정원은 단순하다”는 말처럼 단순하다. 앞에서 보았듯이 “정원에는 정원을 그린 화가가 없다” 그리고 “정원을 그려 들어간 화가는 정원에 있다” 등에서 보았듯이 모순어법을 구상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골치 아프지 않게 화자가 진술한 것처럼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해했을 때 의외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작품을 바라보는 여러 가지 시각이 요구된다. “정원에 정원을 그린 화가가 없”기 때문에 “정원은 정원을 그려 나가는 방법뿐이다” 마치 아무것도 없는 겨울의 삭막한 풍경이 봄·여름·가을 동안 푸르고 울긋불긋한 풍경을 만들어 가듯이 정원이 스스로를 그려 나가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그린”과 “그려 나가는”의 주체는 각기 다르다. 1행에서의 “그린”의 주체는 화가이지만 2행에서의 “그려 나가는”의 주체는 정원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원을 그려 들어간 화가는 정원에 없다”는 진술이 설득력을 갖게 되는데 “정원을 그려 들어간 화가”가 “정원”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정원에 갇히기 싫은 화가는 정원을 그려 나간다” 이때는 정원이 아니라 화가가 주체가 된다.
이 작품의 말미에서 “정원은 정원사가 그리는 게 낫다”고 진술한다. 주지하다시피 정원사는 정원을 가꾸는 사람이다. 즉 정원을 그려 나가는 어떤 주체이다. 화가가 정원을 캔버스에 아름답게 옮기는 것 또한 정원사라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가꾸는 정원 역시 정원사라고 할 수 있다.
얼핏 보기에 말장난하는 것 같은 조말선의 「마그리트」는 세계와 사물의 진실을 밝혀내는 데 일생을 바친 마그리트라는 예술가를 정원사에 비유하고 있는 작품이다. 일상적인 상상력을 뛰어넘어 언제나 새로운 인식과 이미지를 통해 참신한 예술 세계를 연 마그리트라는 화가를 그려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