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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사연

한국문인협회 로고 아이콘 류인석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4년 7월 66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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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의 내 삶은 바람이다. 정처 없이, 향방 없이 이곳저곳 쏘다니는 것이 하루의 삶이다. 전형적인 3월 초순의 날씨이듯, 오늘도 봄바람이 거칠게 불어 댄다. 연료 빵빵하게 채운 친구의 차를 타고 행선지도 없이 무작정 바람처럼 나선다. 전북 완주 어느 산골 마을을 지날 무렵이다. 주인의 손길을 잃은 지 오래된 듯한, 꽤 나 큰 비닐하우스가 흉물스럽게 찢어져 마치 문명 시대에 밀려난 농경시대의 마지막 풍경이듯, 요란스럽게 휘날린다.

시대와 세태에서 외면된 농촌 마을을 지나, 자동차가 멈춘 곳은 대둔산자락 뒤편 노송 푸른 숲속에 자리한 현대식 사찰이다. 30여 년 전에는 탁발승 혼자 기거하며 아랫마을 보살들의 시주로 겨우 연명하던 암자였다는 것이다. 어느 날 바람같이 나타난 큰 손의 투자로 갑자기 절의 명성이 뜨게 됐다는 것이다.

망하는 것도, 흥하는 것도 바람의 운명이다. 대웅전 처마 끝에 매달린 명경 소리마저 오늘따라 요란하다. 오늘은 바람의 운명을 체험하고 깨닫는 날인가? 험상궂게 찢어져 펄럭이던 비닐 하우스처럼 쇠락해가는 농촌의 거친 바람과, 겨우 탁발시주로 유지되던 가난한 암자가 일약 현대 사찰로 변신한 돈바람의 운명이 허공에서 교차한다.

우리들 삶도 바람의 운명과 무엇이 다르랴. 넘어지고 자빠지고, 또 때로는 주저앉고…, 연신 부대끼며 수없이 겪는 우여곡절들 모두가 바람의 운명이다. 돌아보면 내 삶도 바람 같았다. 살아온 날 거의가 굴곡이고 요철이었다. 생애구책(生涯救策)의 세월 행복도, 불행도 무상하게 넘나들었다. 큰바람도 작은 바람도 잠들 날 없이 스쳐 지났다.

때로는 절망 속에서 희망을 만나고, 행운 속에서 불행을 만나고…

모두가 희로애락으로 점철된 바람의 운명이었고, 또 때 없이 스쳐 지난 바람의 굴곡이었다. 생각해보면 바람은 조작되지도 않고 가공되지도 않은 순수다. 바람 속에는 삶의 흥망성쇠가 동반한다. 석가는 일찍이 인생 삶을 가리켜 ‘고해(苦海)’라고 설파했다.

꽃 피고 새 우는 화창한 봄을 맞기까지는 혹한 삼동(三冬)의 모진설 한풍을 겪어내야 한다는 진실을 가르친다. 또 태양이 작열하는 염천의 무더운 바람을 이겨내야 오곡백과 풍요로운 청풍명월의 결실도 만나게 된다. 세월은 오늘이 어제 되고, 또 어제가 과거로 쌓여 인생의 추억이 되고 역사가 된다.

내 인생도 어느덧 산수(傘壽)를 넘어 졸수(卒壽)를 바라본다. 이젠 육신이 생각을 따르지 않고, 생각이 육신을 따르지 못한다. 삶의 순간마다 스치고 지나간 바람의 자국들이 온몸에 누더기 졌다. 모두가 세월의 역사고 바람의 사연들이다. 돌아보면 내 뜻대로 이루어진 삶은 거의 없다. 글쟁이를 자처하면서 남들에게 박수받을 글 한 줄도 제대로 못 써내고 있다.

시대의 바람, 세태의 바람, 또 진실의 바람, 위선의 바람들… 삶은 온통 바람의 사연들이다. 일제 식민치하에서 해방의 감격도 겪었고, 동족상잔의 처절했던 6·25남침 전쟁역사도 겪었다. 또 초가삼간에서 초근목피로 연명하며 허기지고 배고팠던 시대의 바람도 겪었다. 변화의 바람은 초고속 태풍이 되어 아날로그 시대에서 디지털시대로 뒤집어졌다.

시대 차이, 세대 차이가 넓어지고 깊어졌다. 인간 정서나 윤리 도덕이 휩쓸려 무너졌다. 개나리꽃 진달래꽃들이 산야를 덮던 어릴 때 봄바람 추억이 아련하다. 돌아보면 한계에 부닥쳐 스스로가 절망의 심연에서 허우적댈 때도 있었지만, 내가 오늘까지 살아온 것은, 바람의 힘이다. 가난이 휩쓸던 바람은 나를 시련과 고통으로 단련시켰다.

스스로가 일어서고 지탱할 수 있는 인내력을 훈련 시켰다. 바람은 천심의 제왕처럼 언제나 당당하고 의연한 용기를 주었다. 고산준령도 비단길이듯 거침없이 넘나들고, 험난했던 칠흑의 바다도 내 길이듯 주저없이 달려왔다. 어느 문필가는 “바람은 우주의 영혼”이라고 했다. 어릴 때 내가 자라던 고향 집은 바람과 함께 살던 집이었다.

뒤편 헛간집 양철문은 밤낮없이 열려 있는 바람의 문이었다. 어느 땐 덜컹대고 삐거덕대는 소리가 요란해서 나가 보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허무의 바람소리였다. 산 넘고 강 건너 허겁지겁 달려와 한바탕 소란스런 사연들을 쏟아놓고는 또다시 어디론가 휑하니 사라지곤 했다. 바람개비 돌리고, 연 날리던 밭둑 언덕에 불던 봄바람은 내 친구였다.

가슴 뻥 뚫린 방패연을 띄우며 꿈도 띄웠고 이상도 띄웠다. 뒤란에 무성한 왕대 숲이 밤새도록 소나기 퍼붓듯 울어댄 날 새벽 일찍 나가보면, 바람의 소리였다. 바람은 언제나 혼자 울지 않고, 또 그냥 울지 않았다. 바람은 항상 삶에 지친 우리네 마음을 관통한다. 햇빛은 음지를 놔두고 그냥 지나가도, 바람은 한 곳도 빠짐없이 살폈다. 바람의 사연은 곧 삶을 관통하는 인생 사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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