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4년 7월 66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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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세상은 하루가 멀다고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일들이 일어난다. 신문 기사나 TV에 부정한 사회상이 그것이다. 평온한 아침, 우리네 마음밭을 우박처럼 쏟아져 갈기갈기 찢어 놓지 않는가?
날마다 아침저녁으로 배달되는 신문의 대문짝만한 활자는 우리를 고통과 분노 속으로 끌어들인다. 그런데도 어제처럼 오늘도 습관적으로 신문을 펼쳐 든다. 행여나 한 줄기 실낱 같은 기대감이 있기 때문이다.
지난날을 뒤돌아보아도 각계각층이 온통 흙탕물투성이다. 고위 공직자·입법·행정·교육계까지 뇌물 사건으로 뒤범벅이 되어 맑은 날이 없었다.
숨을 멈추고 푸른 하늘을 바라볼 여유 한번 없었다. 잠잠하다 하면 또다시 충격적인 사건이 새롭게 터진다. 설상가상으로 ‘보이스피싱’까지 성행하여 여기저기서 수많은 사람이 피해를 보고 있다. 그 대상은 노약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뿐인가. 굴지의 재벌 총수가 세상을 떠나면 어떠한가. 자식 간에 재산 다툼이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기사를 간간이 보아왔다.
심지어 어떤 가정에서는 자식이 부모를 살해하고 재산을 강탈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러한 행위는 일벌백계로 법정 최고형인 사형에 처해야 함에도, 무기수로 관대하게 처벌하니 재범행이 발생하여 안타깝기에 그지없다. 날이 갈수록 사회 곳곳에서 도덕관념은 사라지고, 악취가 풍기는 세상이 되고 만 것이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두서너 명만 모였다 하면, 저마다 시사 평론가나 추리 소설가가 된 양, 입에 거품을 물고 앞다투어 비아냥거린다. 그런데도 속이 후련한 대책은 나오지 않고, 늘 부도덕한 악행만 반복되고 있으니 그 끝이 어디까지인지 실로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그 옛날에 학덕이 높은 선비와 ‘청백리(淸白吏)’가 그리운 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청백리 하면 황희(黃喜) 정승과 맹사성을 떠올린다. 황희 정승은 조선 초기에 유명한 재상이며, 청백리로 명성이 높은 정승이다. 27살에 벼슬길에 올라 정승으로 24년을 봉직하였으며, 영의정으로 네 임금을 잇달아 섬긴 분으로, 관후정대(寬厚正大)하여 어질기로 유명한 선비다. 정승의 관직에 있으면서도 비가 새는 오두막집에서 세간살이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살아갔다는 아주 청렴한 정승으로 명성이 나 있다.
황희 정승은 우리 고장 장수 출신이다. 호는 방촌으로 장수군에서는 군청 앞에 방촌 공원을 조성하여, 오고 가는 모든 이에게 청백리 정신을 본받게 하고 있다. 사후에는 세종대왕 묘정(廟庭)에 배향되어 높은 대우를 받기도 하였다고 한다.
또한, 경기도 파주시 임진강변 부지 8천여 평에 ‘반구정(伴鷗亭)’을 우람하게 건립하고, ‘앙지대’라는 팔각정자 등 건물 6채, 동상 1점을 세워 많은 방문객에게 청백리 정신을 이어받도록 하고 있다.
한편, 맹사성(孟思誠) 호는 고불(古佛)이다. 정승은 충남 온양 출신으로, 세종대왕 때 우의정과 좌의정에 올랐으나, 집이 너무 협소하여 비 오는 날이면 손님들이 그냥 비를 맞고 기다려야 했다 하니 이 또한 청백리로 추앙받을 만한 인물이 아니던가?
맹사성의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태종실록’을 편찬한 학자이기도 하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온양 집에 맹씨행단을 조성하고 많은 후학을 양성하였으며, ‘청백’을 강조하는 강론을 펼쳐 칭송이 자자한 정승이다.
퇴계·율 곡·다산 같은 거목의 학자가 그립고 , 정몽주·박팽년·유흥부처럼 대쪽 같은 절개로 한평생 살아온 공직자는 찾아볼 수 없다.
옛날에만 그런 존경스러운 인물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자유당 때 국무총리를 지낸 변영태는 외무장관 시절 쓰고 남은 출장비를 반납했던 청백리였다. 관직에서 퇴임한 뒤, 영어학원 강사로 생계비를 마련했으며 손수 연탄을 가는 청빈한 삶을 누리다가 연탄가스 중독으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에 반대하여 초대 부통령이란 자리를 과감히 버렸던 이시영은 조그만 셋방에서 여생을 보냈다지 않던가! 이처럼 청렴과 결백과 절개를 공직자 윤리의 으뜸으로 여겼던, 고결한 선비정신은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지…
고조선 고종 때, 발간한 『증보문헌비고』에는 청백리 142명의 사례가 기록되어 있다. 또한 『역대 청백리상』이란 책에는 고조선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청백리 216명의 거룩한 이름이 올라와 있다. 하기야 반만 년의 역사에 고작 200여 명의 청백리뿐이라면 청백리의 길이 쉽지 않음을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정부는 오래 전부터 청백리상을 제정하여 포상해 오고 있다. 그간 수상자는 겨우 21명뿐이고, 그중 장관이나 차관은 단 한 명도 없다고 한다. 그나마 1988년부터는 찾지도 못하고 있다 하니, 사회 구석구석에 부정·비리가 만연해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사회의 부정과 비리를 바로잡아야 할 사정기관에서는 과연 몇 명이나 청백리를 배출하였는가?
돌이켜보면, 예로부터 우리나라는 ‘동방의 등불’이요, ‘동방예의지국’으로 칭송받고 있었다. 이러한 전통을 이어받고,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우리 조상들의 선비정신을 숭앙하며 살아가야 마땅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