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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뿌리가 된 수필문학

한국문인협회 로고 아이콘 김혜숙(은평)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이사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4년 7월 66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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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나도 지금처럼 수필가가 되고 싶습니다. 현재 도달한 최선 이상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내야 하겠다는 다짐입니다. 글은 곧 그 사람이라 했고, 사람이란 이내 정체되기 마련일 테니까요.

등단하던 무렵, 흠모하던 위대한 작가들의 글이 벅차서, 우선 삶의 태도부터 닮으려 애썼습니다. 이웃의 마음 빈 곳을 채우고 가난한 영혼을 따뜻하게 보듬는 일에 우직하게 골몰하다 보면 비슷하게 닮아가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이런 생각이 싹튼 건, 내게 글쓰기의 기회가 찾아오기도 전, 그러니까 사십대 중반 무렵이었습니다.

어느 해 삼월, 서울 초등학교 교사 정기 인사 발령이 있던 날, 나는 서울 연은초등학교에 부임하였지요. 운명처럼 김지상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김 선생님과 나는 햇병아리 같은 신입생 아이들을 담임하게 되었지요. 그는 나와 띠동갑인 어른이었고 1학년 부장 선생님이었어요. 중앙 일간지에 교단일기를 연재했던 중견 문인이었고요. 이미 동화책, 수필집, 소설책 등 여러 권의 저서를 발간한 문단의 어른이었어요. 아무도 모르게 학교 부근에서 일하는 청소미화원 아저씨들의 점심을 대접하고, 자원 재활용, 쓰레기 줍기 등 환경교육의 전문가이기도 했습니다. 서울시 환경상을 수상한 적도 있는, 어쨌든 특별한 분이었죠.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인간적으로도 선망의 대상이었고 존경하는 마음이 우러나왔지요. 그뿐만 아니라 신입생 지도의 달인이었고 오랜 교직 경험에서 축적된 비기를 1학년 선생님에게 아낌없이 전수했습니다. 생일을 맞은 신입생에게 생일카드를 써서 전했고, 그날 아이들은 왕자나 공주가 되어 특별하고 섬세한 보살핌을 받았지요.

김 선생님의 글이 벅차서, 우선 삶의 태도부터 닮으려 애썼습니다. 선생님으로부터 생일카드를 받은 아이들은 정말로 그날의 주인공처럼 생기가 넘치고 활짝 웃었습니다. 교사로서 얼마나 큰 보람을 느꼈는지요. 엄마처럼 포근히 품어 준다는 느낌을 받았는지, 아이들은 학교를 놀이터이자 쉼터로 삼아 제 기분을 맘껏 드러냈습니다. 어린 제자들뿐만 아니라 학부모의 반응도 뜨거웠지요.

이렇게 애쓰던 내가 기특했는지, 몇 달이 지난 후 김 선생님은 뜻밖에도 문학 단체를 결성하자며 참여를 권했습니다. 문학이라니! 나와는 너무나 멀리 떨어진 별세계처럼 느껴졌어요. 한동안 주저했습니다. 1학년 교사로서, 삼 형제의 엄마로서 학교와 집만을 오가며 숨 가쁘게 살아가던 시절이었으니까요. ‘너무 늦은 게 아닐까’하는 걱정도 많았어요. 하지만 선생님은, ‘수필은 40대 이후의 글’이라고 답하며 용기와 희망을 북돋아 주었습니다. 스스로 삶을 음미할 수 있어야 수필다운 수필을 쓸 수 있다면서, 지금이 최적기라고 자신 있게 말하더군요.

마음 한구석에서 설렘과 기대와 호기심이 스멀스멀 피어올랐습니다. 그가 적극적으로 이끌어주어서 1992년부터 백미문학에서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회원 대부분은 초등학교 문예반을 담당하거나 학교 교지나 학교통신을 발행하는 등 글쓰기에 관심이 많았던 선생님이었습니다. 우리 문학회에서는 초등교사 문예창작연구회가 운영되고 있어서 방학 연수프로그램기획과 운영으로 문학적 토양을 넓혀갔지요. 조경희, 정연희, 황금찬, 김용택, 문태준 등 문단의 대가들을 초빙하여 알찬 연수를 이어갔습니다.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에는 버스를 몇 대씩 대여하여 문학기행을 떠났어요. 태백산맥문학관, 박경리문학관, 소록도, 섬진강 주변, 고창읍성, 최명희 혼불박물관 등 전국의 문학 관련 지역을 오래도록 찾아다녔지요.

소록도로 떠나기 전에는 수십 쪽의 문학기행 자료를 준비하고 소록도 한센인을 돌봤던 김범석 공중보건의를 초빙해서 연수했지요. 문인인 그는 소록도 한센인의 삶을 담은『천국의 하모니카』를 요약해서 들려줬습니다. 그의 자만 없는 의로움과 친절하고 자세한 안내에 매료되어 우리도 덩달아 몸과 마음을 곧추세우며 소록도 기행에 나섰지요. 그곳 단종대와 수탄장에선 한센인의 통곡이 들리는 듯해서 나는 머리를 감싸 쥐었어요. 그곳에선 누구나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서 작품을 탄생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4년 동안의 습작기를 거쳐서 1996년에 『한국수필』의 문을 두드렸지요. 마침내 수필가의 이름표를 달 수 있었습니다. 떨림으로 맞이한 ‘꿈의 세계’였지요. 내 글에 삶의 의미와 가치를 담아보려 애썼고, 그 글이 독자에게 선한 영향력이 미치길 바라며 열심히 썼지요. 내가 가르치던 어린 학생들도 글쓰기 창작 의욕과 실력을 쌓는데 많은 도움이 되길 바랐습니다. 해마다 학급문집을 발간하고, 학교 전체가 참여하는 교지 출간을 주도하고, 문예반을 담당했지요. 재능이 특출한 아이들을 만나게 되면 개인 문집을 펴낼 수 있게 힘껏 조력했지요. 동시쓰기와 일기쓰기 지도에 힘을 쏟을수록 제자들의 자신감도 자라났고, 그 아이들은 교내 글쓰기 대회와 규모가 큰 지역 백일장 행사에서 상을 탈 때마다 나에게 달려와 기쁨과 고마움을 전했습니다. 교사라는 직업을 택한 보람을 이보다 강렬하게 느낄 수 있는 순간이 또 있었을까요. 세상을 다 얻은 듯했던 그 아이들의 표정이 지금도 기억 속에 선명합니다.

제자들이나 독자에게 내 글이 나침반이 되고 영감이 되는 일은 보람이자 두려움이었습니다. 내 글만큼 새 삶이 성장해야 했습니다. 모자란 곳을 채워야 한다는 조바심에 마음 졸였습니다. 허겁지겁 책을 읽었어요. 민감해진 감성이 치달아 나갈 때 지성이 균형을 잡아주어야 했으니까요. 책 속에서만 가능할 법한 간접 체험에 몸을 떨었던 적도 있었죠. 아름다운 문장을 마주치면 밑줄을 그었고 그럴싸한 생각이 떠오르면 서둘러 메모했습니다. 전시회나 공연장을 찾았고 문학이 비롯된 국내외 여러 곳을 여행했습니다. 안테나를 바짝 세우고 부지런히 세상 속을 새로이 들여다보던 시절이었습니다. 한눈팔지 않고 문학적 근력을 위해 햇살과 자양분을 얹어 주려고 무던히 애썼습니다.

글을 잘 쓰기 위해, 내게 꼭 필요했던 경험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삶의 체험과 정신의 수확을 알맞은 자리에 부여하고 섬세하게 조각하여 내놓는 일일 테니까요. 그러기 위해서는 체험을 게으르게 할 수 없었고, 정신이 부지런히 체험을 해석해야 했습니다. 내 마음을 관통하고 나를 인도하는 초월적인 힘이 존재하는 듯했습니다. 작가 이전의 나와 비교하며‘상전벽해’란 말을 실감했어요. 나는 원고지에 새로 창조되는 소우주에서 해방의 자유를 맛볼 수 있었지요. 학교와 가정과 문학 활동 모두 빈틈없이 맞물려 돌아가게 하느라 눈이 핑핑 돌아가는 상황인데도 그랬어요.

피카소는‘내게 그림 그리는 일은 휴식’이라 했습니다. 자기가 하는 일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많은 명작을 창작해 낼 수 있었을까요. 그에게 그림을 그리는 일은 일이면서 놀이이고 유희였겠지요. 그런 대단한 예술적 몰입의 경지를 동경하던 어느 날, 나에게도 밤새워 글을 쓰는 날이 찾아왔습니다. 일곱 시간을 내리 의자에 앉아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으며 글쓰기에 매달렸지요. 허리가 조금 아픈 듯해서 창밖을 내다보니 동이 트고 있었어요. 어디에서 그런 에너지가 흘러나왔을까요. 이렇게 몰입했던 적이 있었던가, 글쓰기를 멈추고 한동안 생각했어요. 내 감정의 주인이 되어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몰두하며 시간을 잊다니… 놀랍고 신비한 체험이었지요.

문학의 힘을 절감하는 시간은 성장한다고 느끼는 순간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문학이 내게 주는 진정한 구원은 추락과 절망의 순간이 닥쳤을 때 경험할 수 있었죠. 세상의 고통을 혼자 짊어지게 되는 순간, 발아래가 푹 꺼진 듯 외로움에 빠지는 순간, 믿었던 사람들에게서 형언할 수 없는 서운함을 느끼는 순간이야말로 구원이 간절했습니다. 다행히 나에게는 문학이라는 든든한 처방전이 발급되어 있었지요. 글쓰기는 내 감정과 생각에 제목을 붙이는 일이었습니다. 적당한 제목을 붙이기 위해서는 내 감정의 맥락과 내 생각의 갈래를 파악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 작업은 곧‘나’를 이해하고 나 자신과 화해하는 작업이었어요. 내가 타인을 수용하는 방식과 내 생각이 지나가는 길을, 그런 방식으로 깨달을 수 있었지요. 그 고된 작업이 끝나고 나면, 알 수 없는 평정심이 찾아왔습니다.

지금까지 일곱 권의 수필집과 수필선집이 탄생했습니다. 부모님의 기념집과 추모집 두 권도 엮어냈고요. 그때마다 문학의 길을 걷게 한 김지상 선생님의 공로와 은덕이 크게 다가왔습니다. 그분과의 만남이 없었더라면 오늘 내가 누리는, 독자와 함께 동행하는 기쁨과 풍요는 언감생심이지 싶어요.

이렇듯 나에게 삶은 누군가와 함께 걷는 길이었습니다. 그 삶의 궤적에서 그들과 함께 길어 올린 이야기들이 나의 문학이 되었습니다. 그 작품들은 다시 나의 인생 걸음에 햇살이 되고 단비가 되고 별빛과 달빛이 되었지요. 나의 글은 나의 삶을 키우고 나의 삶은 나의 글을 영글게 했어요. 인생길에 폭풍우를 마주치면 내 글에 의지할 수 있었고, 글을 쓰다 마주치는 벽 앞에서는 인생길 살아온 깨달음 한 조각이 돌파구를 열어주었습니다.

다시 어떤 글을 써야 하나, 골몰히 생각해 봅니다. 사람 냄새 풀풀 풍기는 글이면 좋겠네요. 독자에게 시원한 한 잔의 물처럼 갈증을 풀어줄 수 있는 글, 마음 아픈 이의 눈물을 닦아주는 글을 쓰려고 해요. 마음을 모으고 세상을 향해 품을 넓혀가면 이를 수 있을까요. 타인의 삶에 애정을 가지되 인간적 예의라는 거리는 유지해야 좋은 글이 탄생하겠지요. 타오르는 애정과 주제를 넘지 않는 절제를 동시에 품는 일은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저 높은 인격의 경지일까요. 그 가느다란 균형의 끈을 아슬아슬 잘 타보려고요. 욕심내지 않고 뭉근하게 쓰려고 해요.

다시 오늘, 내 문학의 뿌리가 되어, 수많은 가지를 키워 준 김지상 선생님에게 무한한 사랑과 감사의 편지를 띄웁니다. 웃음꽃 만발하고 평화와 건강이 함께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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