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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형의 유리수조

한국문인협회 로고 아이콘 조경진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4년 7월 66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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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우는 누운 자리에서 손을 뻗어 휴대폰을 집어 든다. 자줏빛 휴대폰은 언제 보아도 앙증맞다. 은색 테두리, 초록빛 보조화면에 AM 4:30이 떠 있다. 휴대폰을 열어 일어날 시각을 06:00로 설정하고 새벽닭 멜로디를 선택한다. 날마다 일상은 닭 우는 소리로 시작되리라. 초등학교 일학년 국어 책을 거꾸로 들고 마당 가 돌확에 걸터앉아 왼종일 울던 어린 선우. 휴대폰 주 화면에 뜬 바다풍경 위로 선우의 열없던 웃음이 번진다. 휴대폰을 닫아 볼에 대고 비빈다.

차이코프스키의 현악 6중주 마지막 악장 기억나?

눈을 감는다. 제일 비올라의 가늘디가는 음률이 고막을 거쳐 혈류로 스민다. 온몸이 떨린다. 떨리는 몸에서 세포가 분열한다. 산산조각조각.

도저히더견딜수가없었어.

선우의 메마른 목소리가 허공에서 똑 똑 끊어진다.

현악 6중주 작품 70번의 피날레는 두 박자의 격렬한 러시아 춤곡 풍을 주제로 시작하여 현란한 대위법을 구사하는 이중주가 부분적으로 돌입한다. 정열과 유희가 공존하는 복잡한 전개를 거쳐 빛나는 대단원으로 향하는 마지막은 숨 가쁘다. 두 개씩의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가 한꺼번에 빠르고 힘차게 울부짖다가 갑자기 정지한다. 알레그로 비바체.

몸을 벌떡 일으킨다. 미세한 음 조각이 창틈을 비집는다. 뿌윰한 빛이 창유리를 넘본다. 음과 빛의 만남. 그리고 떨림. 휴대폰을 놓친다.

끊김과 이어짐의 반복. 창틀에 걸린 버디 컬 그림자가 거실에 꺼꾸러진 휴대폰을 도막낸다.

띵뚱땅 띵뚱띵땅 땅띵뚱띵땅 뚱띵땅땅똥띵땅…. 끊일 듯 끊어질 듯 이어지던 산조가락, 법금(法琴) 12줄이 한꺼번에 우짖는다.

서너 살 됨직한 여아의 손을 이끌고 여인이 대문 안을 기웃거렸다.

“박주형 씨 댁이지요? ”

“아버지…, 안 계시는데…요”

현우는 대문 쪽으로 목을 길게 빼고 어설프게 대답했다.

여인은 여아를 올려 안으며 마당으로 들어섰다.

“엄마, 손님 왔어요.”

현우가 안방을 향해 소리치자, 어머니가 방문을 열고 나오며 물었다.

“뉘신지? ”

여인이 머뭇거리자, 어머니가 여아를 살핀다. 여인의 목을 틀어 안은 여아는 어머니를 뚫어지게 바라보다 선하품을 한다. 물기 어린 동그란 눈이 유리구슬 같다.

“얘 좀 봐, 어린 것이 천연덕스럽게도 하품까지 하네.”

어머니가 여아의 볼을 살짝 잡았다 놓으며 눈으로 웃는다. 여아는 여인의 목덜미에 볼을 비빈다.

“마루에 좀 눕혀도 될까요? ”

“잠깐만, 담요라도 깔아야지. 어린애가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어머니는 건둥건둥 말꼬리를 자르며 방으로 들어가 담요를 들고 나왔다. 동그란 수조 안에 금붕어 두 마리가 마주보며 노니는 모습을 그린 무릎담요다. 특히 금붕어가 밭아내는 보글보글한 물방울이 보석같이 빛났다. 현우가 마루로 뛰어 올라 담요자락을 움켜쥐고 잡아당겼다.

여인이 현우의 손을 덥석 잡았다.

네 동생이란다. 이제부터 사이좋게 지내야지.

저렇게 귀여운 아기가 내 동생? 현우가 훌쩍훌쩍 뜀박질을 시작하더니 동글동글 크고 작은 원을 그리며 열두 평 남짓한 마당을 빙글빙글 돌았다.

“어지럽잖니? 넘어지면 어쩌려고….”

현우는 돌확으로 쓰러질 듯 내려앉아 뾰족하고 길쭉한 돌멩이를 주워 동그라미를 그렸다. 어머니동그라미, 아버지동그라미, 나동그라미, 아기동그라미 그리고 여인동그라미도 그렸다.

여인이 현우에게로 다가가서 물었다.

“뭘 그리니? ”

“사람요.”

현우는 짧게 대답하고 대문 쪽을 건너다보았다. 마세라티 르반떼 엔진소리가 마을 어귀에서 붕 들렸다. 지역구위원 공천의 희망을 싣고 떠났던 아버지의 애마 소리다. 어머니는 깜냥도 안 되는 주제에 지역구위

원 공천경선에 또 나섰다고 아버지를 닦달할 테지. 현우는 두 사람이 다툴 때마다 어머니의 매서운 눈매를 피해 뒤란으로 숨는다. 어머니는 결코 잔소리를 길게 늘어놓지 않는다. 눈을 한두 번 매섭게 치떴다 감으면 싸움의 승부는 끝나고 만다.

아버지가 돌아오자 여인이 벌떡 일어서서 몸을 도사렸다.

“어쩔수없었어요.”

당황한 아버지가 여인을 끌고 건넌방으로 들어갔다. 싸움은 사흘이 멀다하고 계속되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여아는 선우라고 이름 지어져 아버지의 호적에 올랐고, 현우는 예쁜 여동생을 갖게 되었다.

현우가 대학에 진학하여 서울로 거처를 옮기고 원룸에서 생활하게 되기 전까지, 현우와 선우는 사이좋은 오누이로 자랐다.

“오빠네 동아리와 우리 기숙사 친구들, 소개팅 어때? 다음 주말쯤.”

“굳 아이디어, 땡큐 쏘 마치.”

겨울을 갓 지난 바다에는 투명한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현우는 일행과 함께 모래사장을 지나 오솔길을 걸어서 송림을 향해 언덕배기로 올라갔다. 가파른 길 빼곡한 소나무 사이로 바람이 불었다. 짭짤한 갯내를 풍기며 부는 바람은 병원생활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말끔히 씻어 주었다. 언덕을 오르니 산 능선으로 이어지는 소나무 숲에 넓은 분지가 있었다. 둥글넓적한 바윗돌도 군데군데 있어서 여러 사람이 모여 놀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우리는 바윗돌 틈새로 웃자란 억새가 짓이겨져 있는 곳에 짐을 풀었다.

“오시느라 수고가 많았습니다. 오늘의 주제가를 배웁시다. 이 노래는 팔 분의 육 박자로 요즘 유행하는 애창곡에 제가 가사를 지어 붙였습니다. 외로운 마음, 끝없는 사랑, 잿더미 속에서 영원히 타는 것. 그대 향한 이 몸은, 거미줄 속에 몸, 망망한 대해 위에, 어이 잊으리. 사랑 사랑은 속절없다 해도, 사랑 사랑은 살 수도 팔 수 없네. 허밍으로 1연과2연을한번더부른후, 다시후렴을붙여서부릅시다. 아시겠죠? ”

키가 후리후리하게 크고 눈꼬리가 처져서 다소 싱겁게 보이는 현우가 리더를 자처했다. 일행은 약간 상기된 분위기로 현우를 따라 노래했다.

“가사가 외워졌으면 감정을 넣고 표정을 살려서 몸을 흔들며 흥겹게 부릅시다.”

현우는 제 흥에 취해서 거들먹거리며 진행했다.

“웃옷을 벗어 든 여성분 주목. 짝짓기 순서입니다. 혹시 한눈에 필이 통한 분은 미리 신고하세요. 십 초. 시간 초과. 짝짓기에는 껌이 있어야 하지요. 처음에 나누어 드린 껌 모두들 가지고 계시죠? 껌껍질 은박지 안쪽에 그림이나 글자가 있습니다. 오우 예, 바늘에는 실을 꿰어야 꿰매죠. 바늘의 짝은 실이 맞습니다. 맞고요. 참새는 초가지붕, 달걀은 둥지, 꽃은 꽃밭, 제비는 꽃뱀이 짝이죠.”

선우는 헌칠한 키에 호리호리한 몸매를 유연하게 흔들면서, 서글서 글하게 행사를 진행하고 있는 현우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담청색과 청록색이 반반씩 섞인 줄무늬 남방셔츠에 카키색 면티시로 만든 나팔바지를 입고 은회색 트레킹화를 신은 현우. 그의 허리를 졸라 맨 은색 버클이 바지춤에서 유난히 번쩍거렸다. 선우는 번쩍거리는 버클이 차라리 무광이었으면 더 좋았겠다고 생각하며 손에 쥐고 있던 껌 껍질을 벗겼다. 물고기, 번쩍거리는 버클처럼 은청색 비늘로 온몸을 휘감은 물고기 그림이 어릴 적 엄마를 생각나게 했다.

“인어를 찾습니다.”

현우가 은박지를 흔들며 좌중을 헤집고 다녔다.

“왜 가만히 앉아만 있지? ”

선우에게로 다가온 현우가 그녀의 은박지를 낚아챘다.

“인어잖아. 새끼를 틀어 안은….”

“아니, 이걸 어떻게…? 직접 본 적 있나요? ”

“생물 도감에서 찾아 그렸지.”

선우는 현우의 껌껍질을 빼앗아 펴보았다. 백지였다. 의아했다. 현우의 장난기 어린 눈이 싱글거렸다.

“공기는 여백이 맞잖아? ”

오랜만에 만난 현우의 유창한 언변과 스스럼없는 몸짓에 비해 제멋대로 생긴 이목구비가 불량감자를 연상하게 하여 선우는 열없이 웃고 말았다.

점심을 먹고 한 시간 남짓 파트너와 개인 시간을 가진 후, 단체 놀이로 들어갔다. 게임은 쌍쌍을 다시 홀짝으로 나누어 진행했다.

“오늘의 하이라이트. 남자 대 여자의 대결입니다. 팀 전원이 각자의 소지품을 총 망라해서 길이를 재는 경기지요. 긴 쪽이 이깁니다. 승자는 파트너를 업고 뛰는 영광을 드리기로 하겠습니다. 제가 오른팔을 높이 들었다 내릴 때 시작하십시오. 이 게임에는 파트너와 함께 저도 참여하겠습니다.”

남자들은 자신감에 넘쳐 있었다. 혁대, 모자, 손수건, 구두, 구두끈, 양말, 셔츠, 런닝셔츠, 심지어는 바지까지 벗어 잇대어 나가다가 급기야는 여섯 명의 남자들이 머리와 머리, 발과 발을 맞대고 벌렁 누워 버렸다.

여자들은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포기할 수도 없었다. 스카프, 머리핀, 머리띠, 손지갑, 핸드백, 루주, 마스카라, 콤팩트, 액세서리용 벨트와 목걸이, 스웨터, 덧저고리, 재킷, 그 이상은 없었다. 여자들의 소지품은 하나같이 작고 가늘고 짧았다. 그렇다고 남자들처럼 벗어 제칠 수도, 드러누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옳지, 이것이면 됐다. 오색실을 꼬아서 넣어 둔 휴대용 바늘 쌈지 속의 실타래. 선우는 실타래를 풀었다.

실은 솔숲을 두 바퀴나 돌고도 남을 길이였다.

미팅이 있은 다음 날부터 기숙사의 분위기는 술렁이며 달뜨기 시작했다. 주말이 되면 전화를 받고 외출을 나갔다. 외출에서 돌아올 때는 오징어를 비롯한 수박, 과일, 떡 등을 들고 들어왔다. 선우는 그들 틈에서 부쩍 외로움을 느꼈다. 책을 읽다가 이따금씩 고개를 들어 창을 바라보면 눈부신 금빛 햇살이 자신을 향해 쏟아지고 있었지만 그녀의 가슴은 언제나 허방일 뿐이다.

대로 생긴 이목구비가 불량감자를 연상하게 하여 선우는 열없이 웃고 말았다.

점심을 먹고 한 시간 남짓 파트너와 개인 시간을 가진 후, 단체 놀이로 들어갔다. 게임은 쌍쌍을 다시 홀짝으로 나누어 진행했다.

“오늘의 하이라이트. 남자 대 여자의 대결입니다. 팀 전원이 각자의 소지품을 총 망라해서 길이를 재는 경기지요. 긴 쪽이 이깁니다. 승자는 파트너를 업고 뛰는 영광을 드리기로 하겠습니다. 제가 오른팔을 높이 들었다 내릴 때 시작하십시오. 이 게임에는 파트너와 함께 저도 참여하겠습니다.”

남자들은 자신감에 넘쳐 있었다. 혁대, 모자, 손수건, 구두, 구두끈, 양말, 셔츠, 런닝셔츠, 심지어는 바지까지 벗어 잇대어 나가다가 급기야는 여섯 명의 남자들이 머리와 머리, 발과 발을 맞대고 벌렁 누워 버렸다.

여자들은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포기할 수도 없었다. 스카프, 머리핀, 머리띠, 손지갑, 핸드백, 루주, 마스카라, 콤팩트, 액세서리용 벨트와 목걸이, 스웨터, 덧저고리, 재킷, 그 이상은 없었다. 여자들의 소지품은 하나같이 작고 가늘고 짧았다. 그렇다고 남자들처럼 벗어 제칠 수도, 드러누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옳지, 이것이면 됐다. 오색실을 꼬아서 넣어 둔 휴대용 바늘 쌈지 속의 실타래. 선우는 실타래를 풀었다.

실은 솔숲을 두 바퀴나 돌고도 남을 길이였다.

미팅이 있은 다음 날부터 기숙사의 분위기는 술렁이며 달뜨기 시작했다. 주말이 되면 전화를 받고 외출을 나갔다. 외출에서 돌아올 때는 오징어를 비롯한 수박, 과일, 떡 등을 들고 들어왔다. 선우는 그들 틈에서 부쩍 외로움을 느꼈다. 책을 읽다가 이따금씩 고개를 들어 창을 바라보면 눈부신 금빛 햇살이 자신을 향해 쏟아지고 있었지만 그녀의 가슴은 언제나 허방일 뿐이다.

법금을 바라보며 인어를 연상했다. 열두 갈래로 땋아 길게 늘어뜨린 머리를 쥐어뜯으며 적벽부 가락에 목멘 삭발의 여인. 그 인어는 언제나 어머니였다.

“잘 자라야 한다, 선우야. 제발 이 엄마를 닮지 마라.”

어머니는 울고 있었던 모양이다. 또 큰어머니의 역정 때문이었으리라. 어린 선우는 생각했다. 한 아버지에 두 어머니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 안채에는 오빠가 있고 큰어머니는 또 배가 불렀다. 어머니는 여윈 몸으로 매일 일만 했다. 그러다가 한 번씩 가야금을 뜯었다. 밤이 이슥하도록 떨고 떨리며 흐느끼던 어머니의 가야금 소리를 자장가 삼아 선우는 자주 잠들었다.

어린 그녀는 꿈속에서 안개에 둘러싸인 인어를 만난다. 안개가 인어를 싸고돌며 비늘을 벗겼다. 비늘 속에서 나온 어머니.

“청승맞은 년, 한밤중도 모르나? ”

큰어머니가 별채로 뛰어든 일은 순식간이었다.

“이런 년을 집구석에 들여놓으니 잘 되는 일이 없지.”

큰어머니는 어머니의 머리채를 낚아채고 마루로 끌어냈다. 어머니는 허둥거리며 섬돌 위로 쓰러졌다. 선잠 깬 어린 선우가 놀라 오줌을 지렸다. 축축히 젖은 팬티의 고무 말을 만지작거리며 마루로 나왔을 때, 그녀가 마주친 큰어머니의 눈에서는 저주의 불꽃이 장작불 타듯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사위가 조용해진 한밤이었다. 싹뚝싹뚝 가위 소리가 들렸다. 눈을 떴다. 어머니가 가위로 자신의 머리를 자르고 있었다.

복도 끝에서 전화벨이 길게 운다. 슬리퍼 끄는 소리가 전화벨 소리를 바쁘게 쫓아간다. 기숙사에 남아있는 학생은 서너 명에 불과하다.

“박선우, 전화 받아요.”

누굴까, 혹시 엄마. 선우는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린다. 복도 끝에 있는 전화기까지는 너무 멀다. 지난번에도 숨가쁘게 뛰어가서 전화를 받자마자 사정없이 끊어져 버려 난감해 하지 않았던가. 하릴없이 전화기만 들었다 놓기를 얼마나 반복했든지, 아직도 멜라닌의 딱딱하고 매끄러운 감촉이 볼에 남아 있다. 그녀는 뛰다시피 걷는다. 초조하다. 초조해 하는 만큼 한편으론 자신이 우습게 느껴진다. 걸음을 조금 늦춘다. 마음이 또 바빠진다. 그녀는 다시 뛴다. 그녀에게 걸려오는 전화에는 호기심과 설렘이 반반씩 섞여 있다.

“여보세요? ”

선우는 전화를 받을 때마다 여보세요 다음에 엄마냐고 묻는 말을 속말로 덧붙인다. 막연한 기다림은 파장으로 흐르다가 호시탐탐 전화소리에 껴묻는 모양이다.

“말씀하세요. 누구시죠? ”

“저, 저는 유창한입니다.”

더듬거리는 말소리가 귀에 설다. 선우는 한참 뒤에야 그가 누구인지를 알아차린다.

“네, 창한 씨.”

“기숙사 정문 앞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선우는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끌며 중앙 현관을 지나 계단을 내려서려다가 아래 층계참에서 그녀를 올려다보고 서 있는 그를 만났다.

“우리 대학 필하모니 클럽 아시죠? 꽤 유명한 클래식 음악 동아린데,

문학동아리 넝쿨회와 협연하기로 했어요.”

필하모니 클럽장인 창한은 다짜고짜로 초대장 뭉치를 내밀었다.

“아, 네. 다들 시간이 될는지 모르겠네요.”

“연주회는 이번 주 토요일 오후 2시에 의과대학 대강당에서 갖기로 했고요, 좌석은 특별석을 준비했으니 바쁘시더라도 모두 꼭 참석해 주십사 하고 이렇게 제가 직접 찾아왔습니다.”

연주작은 차이콥스키의 <플로렌스의 추억>이었다.

제1악장(알레그로 콘 스피리토)이 시작된다. 선우는 현우가 그려준 인어를 연상한다. 포유류의 해우목 듀공과에 속하며 방추형 몸을 가진, 입가에 드문드문 난 이백 개의 감각모로 입술을 움직여 풀을 뜯어 먹고, 가슴지느러미로 새끼를 안고 젖을 먹이며, 산호초가 있는 맑은 바다에서만 산다는. 또한 낮에는 해면에 가만히 숨어 있다가 저녁만 되면 먹이를 찾아 헤매는 야행성 바다 동물인 인어.

제2악장(아다지오 칸타빌레 에 콘 모토), 지느러미를 늘어뜨리고 할딱거리는 물고기 한 마리를 수조에서 건져 올린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물고기는 인어가 되어 파닥거린다. 인어는 아가미가 없다. 아가미가 없어서 물로 돌아갈 수 없는 물고기.

제3악장(알레그레토 모데라토), 정지해 있어도 소용돌이치던 기류는 마침내 기포가 되어 옆줄로 파고든다. 비늘에 가린 옆줄 세포는 오돌토돌 일어나서 뒤틀며 항거한다.

제4악장(알레그로 비바체), 인어는 표피가 딱딱하게 굳어버린다. 기포는 미세한 포말이 되어 끊임없이 몸속을 헤집는다. 수조 안은 비로소 정적이 감돈다. 이제 텅텅 빈 수조다.

연주회는 그렇게 끝났다.

여름은 심한 가뭄으로 불사를 듯한 폭염을 쏟아붓고 있다. 성당 안은 사람들의 수군거림으로 이상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죽은 이를 위한 미사였다. 자살한 자는 하느님의 뜻을 거역한 죄로 끝내 용서 받지 못한다 하여 성당에서 연미사를 올릴 수 없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연미사를 허락한 데는 주검의 형제 중, 오누이가 모두 신부, 수녀가 된 연고로 특별히 베푸는 은혜라 했다. 미숙의 주검은 보라색 옷자락에 싸여 송정 바닷가의 솔숲, 나무와 돌과 하늘과 파도가 한데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는 산등성이, 바위 틈에서 썩고 있었다고 했다. 이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상해 버린 육체에 구천을 떠도는 영혼이 되어 미숙은 성당으로 돌아왔다. 누고, 누가 이랬노. 미친 가스나들아. 오데 갔노. 야들아. 대체 너거가 우짤라꼬 이카노. 쎄고 쎈 머스마들 다 놔 두고 하필 임자 있는 놈한테 붙어 가꼬 요런 일을 요로코롬 맹글었노. 세상이 참말로 우찌 댈라 카노. 요새 가스나들은 쏘가지도 없제. 아

이구, 무시라이. 욕지거리는 거칠 줄 모르고 여기저기서 친구들을 향해 터져 나왔다. 친구들은 주위에서 퍼붓는 욕지거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서로를 마주보며 눈만 멀뚱거렸다.

미숙은 한때 현우의 애인이었다. 깊숙한 반달 눈에 오똑 선 코와 도톰한 입술이 갸름한 윤곽에 알맞게 어우러진 그녀는 늘 살며시 웃음지었다. 살며시 웃으며 조곤조곤 말하고 사뿐사뿐 걷는 품은 르노아르의 그림(la lecture du role 1874년경) 속 여인처럼 신비롭고 아름다웠다.

“선우씨, 오늘내방에놀러올래요? 내가커피맛있게타줄게.”

그녀는 기숙사 이층의 제일 끝 방에 살고 있었다. 남쪽 창가에 조그마한 책상이 있고, 시집 같은 작은 책이 어슷비슷 꽂혀 있는 책꽂이 사이에서, 마른 들꽃과 풀잎으로 가장자리를 앙증맞게 꾸민 사진틀이 눈에 띄었다. 잇몸이 드러나도록 함박 웃음을 터트리고 앉은 미숙의 어깨를 양팔로 넌지시 끌어안은 현우가 그녀와 볼을 맞대고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응시하는 현우의 눈빛이 어찌나 강렬하고 열정적이던지 선우는 온몸을 옹크리고 엉거주춤 선 채 꼼짝달싹도 하지 못했다.

“앨범 구경하실래요? ”

미숙이가 꺼내 주는 앨범은 세 권이었다. 스무 장이나 되는 두꺼운 앨범 속에는 그녀와 현우의 얼굴이 꽉 들어 차 있었다. 통도사, 내원사, 쌍계사, 용화사, 해인사를 비롯해서 해운대, 경포대, 대진, 낙산, 일광해수욕장은 물론이거니와 속리산, 설악산, 태백산, 신불산, 내장산 등 멀고 가까운 절경의 자연은 계곡과 숲과 바위와 하늘을 제각기 뽐내며 그둘의 배경이 되었다. 계절은 오색으로 곱디곱게 물들어 두 연인의 모습을 여러 폭의 그림으로 남겨 주었다.

선우는 사랑하는 감정이 그토록 아름다운 색깔로 채색되어 빛나리라고는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했다. 사진 속에서 웃고 있는 두 남녀의 모습은 바로 에덴 동산의 아담과 이브처럼 순결과 신비로 가득 차 있었다. 세 권의 앨범이 말하고 있는 내용은 모두 사랑의 찬미였다.

선우는 넋을 잃었다. 어느 새 밤이 어둠을 끌어와서 유리창을 거울로 만들었다. 내다뵈는 거울 속에서 미숙은 미묘한 웃음을 흘리며 서 있었다. 소름 끼쳤다. 선우는 그곳을 도망치듯 황망히 빠져나오고 말았다.

희연은 작고 포동포동하고 귀여운 여자였다. 잘 웃고 소프라노로 재잘 거리며 거리낌 없이 행동했다. 언제나 친구들과 어울렸고 혼자서는 잠시도 견디지 못했다. 천성이 명랑하고 상냥하여 붙임성이 많았다. 온몸에 아양과 교태가 흘러 같은 여자끼리라도 꼭 껴안아 주고 싶을 정도로 예뻤다. 그런 희연을 선우는 현우에게 소개했다. 현우의 마지막 학창시절 아름다운 추억을 남겨주기 위해 그녀가 일부러 주선한 미팅이었다.

미팅이 있었던 날 밤에 현우가 희연에게 사랑을 고백했다고 들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미숙은 유명을 달리했고, 갓 스무 살의 선우 친구들은 사랑과 배신, 배신과 죽음, 죽음과 영혼 등의 어렵고도 긴 명제를 밤이 새도록 번민해야 했다.

선우는 현우를 용서할 수 없었다. 친구들은 희연을 심하게 질타했다.

한 번 변심한 자는 또다시 그럴 수 있다고 충고하며 그런 나쁜 남자는 절대 만나지 말라고 여러 번 다그치기까지 했다. 희연은 현우를 피했다. 피하면서도 이끌리는 느낌을 주체하지 못해 안절부절못했던 모양이다.

가을 날씨는 잔인할 정도로 청명했다. 나뭇잎이 노랑, 빨강, 주홍색으로 혹은 초록과 담황색을 넘어 갈색으로 변하면서 떨어졌다. 바람이 떨어지는 나뭇잎을 되받아 창공을 향해 불어 올렸다. 불어 올려진 낙엽의 윤무. 바람에 휘날리는 들국화의 보랏빛 꽃잎 속으로 가을 햇살이 스산하게 부서지고 있었다.

토요일 저녁, 기숙사 휴게실은 여전히 텅 비어 있었다. 창문 밖으로 내다보이는 뜰에, 성모마리아상 앞으로 노란 장미 한 송이를 가슴께에 받쳐 든 미숙이 비밀스러운 웃음을 머금고 지나가고 있었다. 미숙 언니. 창을 열고 큰 소리로 부를 뻔할 때였다. 복도 끝에 있는 전화 대에서 선우를 부르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현우였다.

“희연이 바꿔줄께.”

“아니, 오늘은 너랑 얘기하고 싶어.”

“나랑? ”

“함께 갈 데가 있어.”

선우는 내키지 않았지만 현우가 모처럼 원하는 동행을 거절하지 못했다.

“달포 전에 아버지가 넘어지셨다.”

“아버지가…? ”

아버지는 시립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었다. 병원 앞에는 꽃집이 많았다. 선우는 백국 한 다발을 사서 현우에게 내밀었다. 현우의 눈이 촉촉히 젖는 듯하더니 얼굴을 치켜들며 입속말로 지껄였다.

“사람이 죽으면 환생한다는데 너는 그걸 믿니? ”

“믿어. 엄마가 그랬어. 죽어서 꽃으로 피고 싶다고.”

선우는 병원건물 꼭대기에 걸려 있는 뭉게구름을 바라보았다. 물 위에 뜬 부유물. 뿌리도 줄기도 없는 헛헛한 삶을 현우 넌 알기나 해? 선우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입을 꼭 막는다.

“너 그거 아니? 사랑할 때마다 나는 진심이었다.”

선우는 걸음을 멈추고 현우를 올려다본다. 그의 눈에 어렸던 물기가 방울방울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선우는 문득 현우가 측은하게 느껴진다. 요즘 들어 유난히 우울해 보이던 희연의 얼굴이 현우의 얼굴에 겹친다. 둘은 다른 모습의 닮은꼴.

떠난 이는 떠남으로서 끝이 된다. 그러나 그 끝의 자국은 흉터로 남아 살아가는 이를 끈질기게 따라다닌다. 살아남은 이는 끊임없이 방황하며 괴로워해야 한다. 죽음도 완전한 끝이 아니므로.

선우는 미숙의 죽음이 가져다 준 의미를 유추해 본다. 잔인한 복수.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었다고 생각한다. 집착은 심각한 우울증의 원인이 된다고도 말할 수 있다. 번번이 되살아나는 애증은 아직도 살아 가야 할 날들이 많은 사람에게 남겨진 무겁고도 가혹한 멍에가 아닐까.

선우는 아버지를 죽도록 미워했다. 그래서 기숙사로 거처를 옮긴 후에는 단 한 번도 집을 찾지 않았다. 현우는 또 한 명의 아버지였다.

현우는 바다와 돌과 나무와 함께 영원히 살고 싶다는 선우의 편지를 받았다. 그 편지를 받은 지 꼭 일주일째 되는 날, 이번에는 자줏빛 휴대폰이 원룸으로 배달되었다.

새벽 닭이 운다. 현우는 행장을 준비하여 선우를 찾아 나선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부패한 미숙의 시신은 보라색 데트론직 원피스를 입고 솔숲 바위 틈에 널부러져 있었다. 언덕배기 소나무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바다를 바라보며 마지막 편지를 썼을 선우….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 현우의 가슴속에 남은 미숙을 덮씌운다.

선우는 현우의 저린 가슴속에 또 한 명의 미숙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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