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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웃지요

한국문인협회 로고 박순자(통영)

책 제목한국문학인 이천이십오년 겨울호 2025년 12월 7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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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바라보는 것도 기회와 선택인 것 같다. 봄이 시작될 때면 수십 년간 해온 낯설지 않은 몰입을 지켜보는 익숙한 현실과 뒤따라오는 침묵이 참 무겁다. 숱한 경험들이 한순간에 새로운 영역을 변화시킬 수 있고, ‘거기에 있음’이라는 기대 때문에 고뇌하고 끓어오르는 열정을 화산처럼 폭발시키는 3월이다.
두어 달 전부터 제주도 갈 계획을 꼼꼼하게 준비했다. 선주들을 만나고 큰 가두리를 끌고 갈 운반선의 경비 지불도 끝냈다. 선단들과 숱한 말들이 오갔다. 지켜야 하는 분명한 규칙은 있지만 우리가 찾는 확실한 답이 없는데도 용감하게 도전한다. 영등바람이 세차게 불어오는 블랙홀 속으로 깊게 빠져 들어가는 음력 2월 초이렛날.
작년에 제주 바다를 다녀온 경험이 있으니 잘될 것이라는 기대로 배를 띄웠다. 우리 바람은 자연과 바다, 용신님의 도움으로 다랑어 치어를 잡아 오기를 기원할 수밖에.
배는 이틀 밤낮으로 바다를 달려 제주에 도착했다. 열흘이 넘도록 태풍처럼 강하게 부는 연등바람에도 가두리가 잘 견디고 있다는 연락이 수시로 왔다. 물 흐름 탓인지 기대하던 다랑어 치어 떼들은 잡지 못하고 대신 방어 1만 마리를 가두리에 실었단다. 제주 바다는 바람이 많고 위험했지만 험한 파도를 이겨내고 순조롭게 제주를 출항했단다. 된바람(북동풍)에 배는 80여 시간 만에 도착한다는 반가운 소식까지 날아왔다. 
새벽에 욕지 어장까지 잘 도착했다는 전화를 받고 그의 얼굴은 환해졌다. 어장으로 갈 준비를 서둘렀다. 몇 년째, 쿼트 문제로 다랑어 치어 구입이 어려워 가두리를 비워 놓고 있었기에 다랑어 대신 방어를 싣고 온 것이다. 가두리를 어장에 붙여 바로 세우고, 잠수부들이 그물 확인을 위해 가두리 속으로 들어갔다. 무탈하게 도착했다더니 어찌….
그물이 찢어졌단다. 희망과 기대가 한꺼번에 사라지는 순간이다. 갑자기 정신이 까무룩해졌다. 잿빛 하늘을 바라보며 허탈해하는 그를 보면서 내가 잘못을 저지른 것 같아 입을 꾹 다물고 섰다. 20여 일 만의 엄청난 손실이다. 한 번 사는 인생, 한 번밖에 없는 무대, 그것이 삶이라며 그냥 웃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누가 시켜서 생긴 일도 아닌데 병날 것 같아 한마디 건넸다.
“당신의 숱한 경험과 열정에 답은 없지만… 내년에 한 번 더 믿어봅시다.”
“…….”
해수부에서 다랑어 양식용 쿼트를 받을 때만 해도 동기 부여는 확실했다. 희망이 있기에 기대를 갖는 것은 사람을 살리는 묘약이다. 수십여 년 경험으로 잘될 것이라는 확신으로 힘이 솟구쳤다. 남편은 부푼 설렘으로 지름 50m(수영장 한 바퀴를 돌아오는 거리)의 큰 가두리를 끌고 마파람을 맞으며 제주도 선상에 배를 띄웠다. 어느 누가 상상할까? 바다에 미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도전이었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까짓것! 해 보고 후회하리라’ 하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바다 위에 출사표를 던졌다. 머릿속에 온통 시퍼런 파도가 출렁거렸다. 사랑하는 연인을 흠모하듯 열정으로 바다를 품었다. 그렇게 한 곳을 진정으로 바라보는 남자를 나는 믿을 수밖에 없었다. 생각처럼 결과가 나오지 않을 때도 있지만 그것은 본인의 인생이라며 바다 바라기를 해왔다. 살아 있고 살아가는 모습을 확인하고 싶다는데 무슨 말이 필요할까.
잘 살아보겠다는 일념으로 몸부림친 결과물이잖은가. 큰아들과 전화를 주고받는 옆에서 그는 검지를 입에 대고 자식한테도 말하지 말라는 몸짓을 한다. 그 마음을 누가 알려나. 가슴에 불잉걸을 안고 있기에 스스로 털고 일어날 때까지 기다려주는 수밖에. 되돌릴 수 없는 일들은 빨리 잊어야 편안해진다고 말들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긴 한숨으로 시간을 죽인다.
‘삶에서 가장 필요하고 가장 소중한 것은 건강과 사랑’이라고 했다. 스티브 잡스도 죽기 전에 깨달았다는 말이다. 지금 우리가 건강하게 살아 있는 것만도 감사한 일이다.
입 안 까끌하고 속 헛헛할 그를 생각해서 부엌으로 들어가 서성거린다. 냉동고 저장한 조갯살이며 새우를 꺼내 시원한 국물을 끓여야 하는데도 머릿속은 봉두난발이다. 뭘 해 먹을까? 무엇이든지 만들어 먹고 기운 차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여러 가지 채소를 썰어 불 위에 올린다.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그의 옆에 앉아 슬며시 손을 잡는다.
“보소, 작년에는 그물도 못 내렸지만, 올해는 참다랑어 성질과 비슷한 방어 떼를 싣고 왔으니 큰 공부했심다. 제주와 욕지 바다의 물 흐름과 바람 세기도 알았응게 비싼 수업료 냈다고 생각하이소. 그동안의 경험으로 내년 삼월에 또 도전해 보입시다. 바다를 떠나지 못하는 것도 당신의 숙명이니 얼릉 일어나 밥 한술 묵고 힘내 보이소.”
자기 제어가 확실했고 자기 삶을 최선으로 지향하는 사람이기에 그동안의 경험을 믿어 보자고 말한다. 말 한마디에 살아야 할 용기를 얻는다면, 다시 살아갈 의미를 찾는다면 그 한 번으로 용기를 낼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그에게 건넨 말이지만 나를 위한 말이기도 하다. 속내를 들킬까 봐 위로하다 엄지를 세우며 그냥 웃어준다.

 

바다에 미친 남자가
또 도전이다
어찌 감당해야 할지

 

선단들과 주고받는 말! 말! 말! 
지름 50m 가두리 띄워 놓고 
마파람 부는 블랙홀 속으로 
깊게 빠져들어 가는데

 

한 번 사는 인생 
한 번밖에 없는 무대 
그것이 삶이라면 
그냥 웃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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