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인
이천이십오년 겨울호 2025년 12월 7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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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을 넘길 때 손끝에 느껴지는 감촉을 사랑한다. 검지손가락으로 다음 장을 넘길 때 종이 결에 따라 다르게 나는 여러 가지 소리가 좋다. 소리는 낱장의 질감에 따라 다르게 난다. 새 책이나 두꺼운 종이는 소리조차도 꼿꼿하다. 세상에서 첫선을 보이는 종이의 결이기에 손가락 끝에 닿는 감촉이 서컹하다. 이럴 때 책 페이지를 엄지와 검지로 슬쩍 들면 부드럽게 넘어간다.
헌책방에서 구입하거나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의 질감은 노글노글하다. 사람 손을 많이 탔던 낱장이기에 넘기는 것도 손가락의 압력만으로도 수월하다. 종이책은 페이지를 넘기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활자가 일어나서 이야기 속으로 데려가 편안하게 독서의 세계로 이끌고 간다.
딱 한 번 전자책을 구매한 적이 있다. 남편의 칠순을 맞이하여 가는 서유럽 가족여행 날짜와 내가 속한 작가들의 독서모임 주제 발표 날짜가 맞물렸을 때였다. 독서회는 매달 선정 도서를 정해서 각자가 읽은 다음에 셋째 주 화요일에 만나서 작가가 말하는 함의에 대해 자유롭게 토론하는 방식이다.
그때 나는 책을 구입하지 못해서 읽지 못했다. 안데르센이 1834년에 발표한 자전적 소설 「즉흥시인」이었다. 마침 이 소설은 19세기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즉흥시인 안토니오의 유년기와 청년기의 사랑을 그린 소설이다. 안데르센 자신이 이탈리아 전역을 여행하며 묘사한 소설이기에 마침 베네치아와 로마 여행을 앞두고 있는 나에게도 꼭 맞는 책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마침 『즉흥시인』은 서점에도, 인터넷 서점에도, 인터넷 헌책방을 수소문해도 구할 수 없었다. 그래서 택한 대안이 전자책인 e북이었다. 제법 종이책 값에 버금갈 정도의 금액을 주고 구입한 걸로 기억한다.
전자책은 도무지 책이라는 실감이 안 난다. 내 소유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서가에 꽂혀 있어 언제라도 꺼내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핸드폰의 작은 화면을 검지와 중지 손가락으로 밀면서 읽어야 했다. 이런 고된 손의 노동은 프랑크푸르트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종이 결의 감촉을 느끼고, 되새기고 싶은 문장에 연하늘색 연필으로 밑줄 긋는 것과 여백에 나의 단상을 끄적거리는 소소한 나의 책 읽기의 즐거움이 사라져 버렸다.
앞좌석에 붙어 있는 탁자를 내려서 왼손으로는 핸드폰을 누르고 오른손으로는 글자를 키우면서 눈으로 읽으며, 두 손가락으로는 화면을 넘기는 지난한 전자책 읽기를 하였다. 여기에 책장 여백에 쓰던 단상을 수첩에 적으면서 읽어내기란 가히 노동이었다. 금세 눈이 흐릿해지고 머리가 아파 전자책을 켰다 껐다를 반복하며 씨름을 했다.
새 핸드폰으로 바꾼 지금은 아예 앱이 사라져서 내가 산 소설이 사라졌다. 종이책이었다면 서가에서 다시 불러줄 날을 기다리며 얌전히 내 손길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신문 지면에 난 신간 소개나 작가 소개, 아니면 평소에 흠모했던 인물이 권하는 책을 메모해 두었다가 서점 나들이 가는 일은 즐겁다. 심지어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수북하게 쌓인 책들과 대면을 할 때는 두근거리기조차 한다. 그러면서도 까다로운 심사위원이 된다. 신간이 내 취향에 맞는지, 내 생각을 확장시킬 수 있는지, 문체가 늘어지지 않고 간결한지 중간중간 페이지를 넘기면서 검증을 한다.
마지막 순례 후에는 유일하게 망설이지 않고 덥석 집는 것은 언제나 고전이다. 고전은 이미 한 세기에 걸쳐 검증된 책이고, 저작권 문제에도 자유로운 터라 책 가격도 합리적이다. 서점 깊숙이 안쪽에 들어가면 대형 책장 두 개를 차지하고 있는 ‘세계 명작’ 코너에서 많이 머무르는 것도 나의 서점 순례의 백미이다. 이 코너에 서서 대문호들의 이름과 작품 제목을 읊조리기만 해도 잠들어 있던 창작 욕구가 부스스 일어난다.
나이가 익어 가는 것은 느리게와 친해지는 것이다. 사물을 관조하며 주위를 돌아보고 새삼스레 자연을 들여다보게 되는 그런 마음이 커졌다는 반증이다. 현재 나를 옭아매고 있는 잡다한, 혹은 기꺼이 맡고 있는 중차대한 소임도 몸이 부대끼면서 내려놓게 되는 시점이, 스스로가 노년을 자각하면서부터 일어나는 현상이다.
독서도 그렇다. 활자 중독에 속하는 나는 요즘 신간을 고를 때 세간에 입소문이 나서 많이 팔리는 도서나, 주위 독서 모임에서 회원들 간에 평이 좋았던 도서에 손이 간다. 그러면서도 기준은, 술술 책장이 넘어가면서도 사회를 향한 통렬한 비판 의식이 살아 있는 책을 선호한다. 꽝꽝 얼어 있는 얼음을 날 선 도끼날로 쩡하고 내리찍을 때의 그런 울림이 있는 도서가 좋다. 아무 때라도 포스트잇으로 표시해 둔 페이지를 찾아 읽는 재미가 요즘 내가 선호하는 독서 방식이다. 그러면서도 엄격한 기준으로 나를 옭아매지 않고 도락으로 가볍게 읽는, 그리하여 나의 정신을 훨훨 날게 해주는 독서 방식이 좋아졌다.
쳐다보기만 해도 밀린 숙제를 보는 것 같은 부담스러운 책 읽기도 있다. 고작 하루에 한 부 읽기를 그나마도 소화해내지 못하여 책상 위에는 문학지의 키 높이도 께름칙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나이가 익어 간다는 것은 읽기와의 거리를 열 걸음 스무 걸음 뒤로 물리는 일이 아닐까. 그러다가 마음속에서 독서 욕구가 부르면 읽고, 안 부르면 냉해지는 그런 변화 말이다. 점점 이런 간격이 길어지면서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하면 이제는 마음의 서재에서 책을 덜어내야 할 시점이 온 것이다. 그래서 요즘 내가 넷플릭스를 기웃거리나 보다.
그래도 여전히 나는 첫 페이지를 넘길 때 손끝에 빳빳한 질감이 느껴지는 종이책을 사랑한다. 아무리 전자기계를 잘 다루는 젊은 독자층이 OTT 미디어 콘텐츠와 브런치 앱 등 전자책 시장으로 옮겨갔다고 하지만 손가락 끝에서 바스락거리며 생겨나는 소리에 견주지 못한다. 그 소리는 책이 나에게 말을 걸면서 어서 읽어보라고, 책 속 세계로 들어오라고 유혹하는 소리이다. 손가락만이 불러모으는 책의 소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