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인
이천이십오년 겨울호 2025년 12월 7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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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8살 때 6·25전쟁이 터졌었다. 1·4 후퇴 때 피난을 떠날 때는 아버지는 직장 따라 먼저 대구로 떠나셨고, 고등학생이었던 오빠는 나의 손을 잡고, 중학생이었던 언니는 혼자 걸어서, 다섯 살이었던 남동생은 짐꾼을 사서 짐 위에 얹어서, 두 살인 남동생은 어머니가 포대기로 업고 떠났던 피난길이었다.
수원에 왔을 때 밀려온 탱크의 괴뢰군들이 보따리를 빼앗아 귀금속을 빼앗았고, 가다 보면 피난민 중에는 온 식구가 배가 고파서 울고 있었고, 길을 가득 메운 피난민들 속에 밀리고 밀리면서 그렇게 충북 옥천까지 걸어갔었다. 그리고 오빠는 피난처에서 미군부대 장성의 통역을 했고 그때부터 독립을 했다. 대학교에 입학한 오빠는 아르바이트로 학원 강사를 하며 다녔고, 미국으로 건너가 박사 학위도 취득했으며, 그곳 대학교수가 되었고,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고도 맏형으로 생계비 일부를 몇 년을 더 고국 집에 보내준 효자다.
1983년에 형제 중 셋째였던 내가 남편 직장을 따라 미국의 미시간 대학의 교환 교수로 일 년 동안 거주하게 되었다. 부부와 딸, 아들, 우리 네 식구는 오빠가 계신다는 것에 위안을 삼으며 오하이오주에 있는 신시내티에 우선 도착했고, 나라 사이의 교류나 여행 따위가 어려웠던 시기였던 그때 이산가족 상봉을 했다. 웬 중년 신사가 마중을 나와 오빠라고 했다. 옛 얼굴을 찾아 서로 그렇게 흘깃거리면서 낯선 인사를 했다. 오빠의 집에서 올케 언니와 두 조카의 인사를 받았다.
오빠는 동생 식구들의 타국 생활을 염려하여 당신 집에 데려다 놓고 다섯 시간을 고속도로로 달려서 미시간주의 대학 주변의 앤아버 마을에 데려다 놓고 아파트 세 얻어 주고, 살림살이 챙겨 주고, 아이들 학교 전학 절차 밟아 주고, 생필품도 장만해 주고, 오하이오로 다시 돌아간 오빠 내외. 세심하고 자상한 오빠다.
그해 크리스마스 때 오빠 댁으로 놀러 간 우리 식구들. 20년 동안의 서울 식구들의 안부와 오빠는 유학 시절에 힘겨웠던 추억담, 미국 생활에서의 고충들로 회포도 풀었다.
학생 장학금에서 매달 100불씩 따로 서울 집에 보내느라고 생활비가 모자랐던 오빠는 식권을 한 달 치씩 사 놓고 겨우 연명했던 이야기며 그래서 지금은 안정된 생활을 한 오빠의 헌신적인 노력이 피붙이인 고국의 동생들에게 그렇게 버팀목이 되었던 역할을 힘겹게 감당해 주었던 오빠. 그랬던 오빠였다. 당뇨병으로 많이 고생하시던 오빠가 그래도 생을 잘 마감하시고 얼마 전 돌아가셨다.
내리사랑이라고 보살펴 준 사랑을 오빠도 부모님같이 생각하고는 자기들 살 길 바빠 모두 잊고 살았던 고국의 식구들은 이제는 어엿한 고국의 국민이 되어 잘들 살고 있다.
전쟁을 치르고 어려운 시대를 거쳐 온 우리. 내가 이제 80세의 나이가 되어 보니 지금도 세계 속에서는 전쟁도 치르고 가난과 싸우고 기후와 싸워 가면서 힘들게 생활하는 지구인들이 옛 시절의 우리처럼 어려움을 겪고 살고 있다.
한 핏줄 타고난 국민이고, 한솥밥 먹고 살던 식구라서, 함께 가난과 굶주림을 겪었던 이웃들과 서로 나눔과 베풂으로 연명하고 살아가고 있다.
그때의 모두는 다 힘들었다. 그때 베풀어 준 분들의 뼈를 깎는 노고에 고맙다고 꼭 인사를 해야 한다. 항상 베푸는 사람은 뼈를 깎아 주듯 애틋하고 받는 사람은 잊기 쉽다. 그리고 봉사한 분에게 꼭 인사 보답도 잊지 말아야 한다.
어려웠던 식구들을 위해 돌봄의 보답도 꼭 있어야겠다. 식구들 모두 전쟁 이후의 또 한 번 삶의 전쟁 속에서 서로 돕고 사는 것이 당연시되었었다.
나에게 베풀었던 그분들께 꼭 한마디 위로해 주어야 한다. 수고하셨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고마웠습니다.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지금은 그렇게 배곯았던 부모님들 오빠들 언니들 저세상 가시고 꼭 해드려야 했던 위로의 말들을 세월이 지난 후에 후회해도 대답 없는 메아리뿐. 파도만 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