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인
이천이십오년 겨울호 2025년 12월 73호
9
0
38선 바로 밑에 있는 우리 마을은 6·25전쟁의 안마당이었다. 꽝! 꽝! 두 방의 포성에 이어 바로 들이닥친 공산군은 벌써 마을을 뒤로하고 앞산을 넘었다. 마을 사람들은 피란을 갈 틈도 없이 그냥 고양이 발톱 밑의 쥐가 되었다. 그런가 하면 3개월쯤 뒤엔 미군 탱크가 밀고 들어와서 자유를 찾아주었고, 그리고 또 그다음엔 한밤중에 중공군이 떼로 몰려와서 마을의 집들을 마치 제 집처럼 들락거리다가, 미군 폭격기가 들이닥치면 “후이지 라이라이!” 를 외치며 아무 데나 머리를 쑤셔 박곤 했다.
이렇게 밀고 밀리는 고물개질 전쟁이 계속되다가, 휴전 전에는 꽤 오랜 동안 우리 마을에 국군이 주둔해 있게 되었다.
이때 나는 중학생이었다. 춘천 읍내에 있는 학교들 모두가 휴교 상태여서 집에 머물고 있었다. 독서를 좋아했지만 모두가 쑥대밭인 전쟁터에서 책을 구할 수도 없었고, 절기에 따라 이어지는 농사일이 제대로 진행될 수도 없으니 할 일도 없었다. 공산군 총부리 앞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아버지는, 마을 공회당에 인공기가 꽂히자마자 위원장 완장을 차고 눈이 시뻘개 가지고 돌아다니는 아랫동네 최씨네 머슴 밑에서 기로 임명되어 일을 보다가 어느 날 흔적을 감추었다.
이때 나는 안채와 행랑채가 모두 불타 버린 잿더미 속에서도 용케 살아남은 재봉틀을 발견했다. 그 시대에는 구경도 하기 힘든 물건이었지만, 춘천 큰댁에서 보내주신 손틀 재봉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쓸 줄 몰라서 그냥 보물처럼 아껴온 물건이었다. JANOME라는 일제 재봉틀이었다.
남달리 손재주가 있는 나는 그 재봉틀을 가만두지 못했다. 요리조리 살피고 만지작거리다가 작동에 성공하기는 했지만, 무언가 잘못 삐거덕하는 바람에 뚜꺼덕 부속 하나가 부러졌다. 나는 그것을 자루에 넣어 짊어지고 50리 길을 걸어 읍내로 갔다. 수리점에서 수리를 하면서 작동법도 자세히 익혀 가지고 왔다.
그 후로 재봉틀로 무엇이든 꿰매는 놀이에 폭 빠졌다. 이것저것 드르륵 드르륵 박아 내는 작업이 내가 봐도 참 신기했다. 집에 있는 헌옷가지들을 모두 쓸 만하게 수리해 놓았다. 어머니와 할머니가 우물가에서 아들 녀석의 재봉 솜씨를 자랑했고, 동네 아낙네들이 헌옷가지들을 가지고 와서 부탁하기도 했다.
이 소문은 인근 군인부대에도 퍼졌다. 산골짜기 마을에서 군복을 몸에 맞게 줄여 입는 것은 생각지도 못하던 군인들이, 하사관 한 사람이 다녀간 뒤로 줄지어 군복을 들고 찾아왔다. 처음에는 엄두를 못 냈지만, 때마침 친정에 다니러 온 서면 고모가 나서며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는 그 군인이 말하는 치수를 가늠하여 연필로 금을 그어 자르고 뜯고 하더니 내게 이리저리 박으라고 했다. 군인은 입어 보더니 기분 좋은 웃음을 띠며 얼마냐고 했다. 고모와 나는 두 손을 내저었지만 군인은 지폐를 땅바닥에 놓고 도망치듯 가버렸다. 이렇게 해서 나는 동네에나 군인부대에 ‘중학생 재봉사’로 소문이 났다.
이때 드나들던 군인들 중에 박 상사라는 분이 있었다. 그는 북한에서 혈혈단신 남하하여 하사관으로 입대하였다고 했다. 처음에는 나 때문에 우리 집에 드나들게 되었지만 나중에는 할머니와 더 친하게 되어 어머니라고 부르며 따랐다. 아마 북에 두고 온 어머니를 보는 듯함이 있었는가 보다. 할머니도 그를 극진히 대해 주셨고 박 상사는 정말 어머니처럼 대했다. 그리고 끝내는 수양엄마로 삼겠다고 하여 할머니는 이를 허락하셨다. 하나밖에 없는 삼촌이 전쟁통에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행방불명인 외로운 나도 그를 친삼촌처럼 아저씨 아저씨 하며 따랐다.
휴전 이후 군인들이 많이 떠났다. 나는 읍내에 있는 학교를 다시 다니기 시작했다. 주말에 집에 오면 여전히 중학생 재봉사였다. 고모는 집으로 가셨지만 나는 고모 없이도 혼자서 너끈히 해냈다. 돈도 꽤 생겼지만 농사도 제대로 못 짓는 미수복 지구에서 우리 여섯 식구 먹고사는 문제와 내 학비 등을 충당하기도 바빴다. 더구나 내가 읍내에 나가 있으면서 고등학교를 다니게 된 뒤에는 재봉사로서의 수입은 끝났다. 미군부대 하우스보이 일도 하면서 근근이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대학을 가고 싶었지만 학비를 조달할 방도도 없거니와 당장 상경할 여비도 구할 수가 없어서, 담임이 써주는 S대 지원서도 찢어버리고 실의에 빠졌다. 그러던 참에 동기생 하나가, 자기는 어떻게 하든지 서울로 대학을 갈 것인데 자기와 같이 가자고 했다. 하숙비도 둘이서 나누어 내면 부담이 적을 것이고, 마침 장학생을 선발하는 대학이 있으니 거기 응시해 보자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용기를 내어 상경하여 응시했고, 장학생 선발에 합격했다. 그러나 아무리 장학생이라도 기본적으로 납부해야 하는 입학금이 만만치 않았다. 나는 그걸 감당할 길이 없었다. 우리 여섯 식구가 연명해 나가는 것도 벅찬 형편이었다. 땅은 많지만 미수복 지구라 매매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이때에 생각난 사람이 박 상사 아저씨였다. 나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른다. 중학생 재봉사와 박 상사 아저씨….
박 상사 아저씨는 부대 이동으로 어디론가 떠났고, 그리고 삼사 년이 지났다. 그동안 할머니에게 더러 문안 인사를 와서 반갑게 만난 적이 있었지만 어디에 사는지는 몰랐다. 수소문해 보니 읍내에 방을 얻어 살고 있었다. 나는 느닷없이 아저씨 댁을 방문했다. 반갑게 맞아주었다. 부인도 있었다. 나는 그동안 지낸 이야기를 하고 대학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아저씨는 곧바로 등록금에 대해서 물었다. 사실 이야기를 했더니 댓바람에 부인에게 선반에 있는 박스를 꺼내 오라고 하고는, 거기서 돈을 꺼내어 척척척 세더니 내게 주었다. 나는 너무나 고마워서 큰절을 하며 받았다. 그 도움은 내 평생 진로의 주춧돌이 되었다.
박 상사 아저씨, 그는 그때 어떤 마음으로 그 돈을 내게 선뜻 내주었을까? 양엄마에 대한 고마움이었을까, 한 젊은이의 앞날을 응원하는 의미였을까, 아니면 북에 두고 온 가족의 무탈을 위한 기도였을까?
그건 내 마음속에 지워지지 않는 어쭙잖은 의문일 뿐이고, 사실 내가 박 상사 아저씨를 생각만 하면 가슴을 두드리게 하는 후회! 고맙다는 인사도 제대로 드리지 못한 그 이후, 그 은혜에 보답하지 못하고 반세기를 넘긴 이 ‘중학생 재봉사’의 자책감이 내 가슴을 허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