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인
이천이십오년 겨울호 2025년 12월 73호
9
0
철모르고 뛰놀던 시절이 엊그제 같기만 한데 노래 가사처럼 ‘늙어 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 가는 중’이라고 애써 자위해 보며 날을 보낸다. 우리는 살아가며 좋고 나쁠 때가 항상 있어 왔다. 나이와 세대 구간 구간 따라서 주위 환경과 처지에 따라 변하고 생각이 바뀐다.
요즈음 일로는 지난여름 혹독한 배탈인지 코로나 변형인지 잘 모를 병세가 내 몸을 습격해 와 열흘 정도를 사경을 헤맨 듯한 느낌과 고통을 겪었다. 아무래도 내 몸 어딘가에 고장이 난 것도 모르고 지내냐고 의심이 되어 CT 촬영을 받아 보니 방광에 혹이 보이고 내시경과 조직 검사를 해봐야 암인지 아닌지 판별이 난다고 한다. 혹시 암이면 암세포를 죽이는 방사능 투사 시설이 설치된 큰 병원이 좋을 듯싶어 대학병원으로 옮겼는데 내시경 검사를 해보고는 조직 검사 않고서도 암은 아니라는 말을 들었다. 나이 탓이런가, 암일 수도 있다는 말에 별 느낌이나 두려움이 없었던 것은 몇 년 전부터인가 이제는 살 만큼 살았는데 하는 마음이 들어 생명의 애착이나 장수를 갈구하는 욕망이 얇아졌다.
한창 청장년 시절이었다면 얼마나 무섭고 생이 다할 암이란 생각만 들어도 무척이나 공포감에 휩싸였을 것이 틀림없다. 젊었을 시절에는 생활 전선에 쫓겨서 만남과 회식 자리 갖기가 힘들더니 이즈음은 남아도는 것이 시간뿐인지라 일주가 멀다고 만나서 먹고 떠들고 차 마시는 즐거움은 노령에 갖게 된 즐거움의 하나이다.
마음속으로는 아직도 혈기왕성하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친지나 자식들은 노령에 몸조심하라며 운전대도 고만 잡으시라는 권고와 근심을 보낸다. 오히려 운전대 놓으라는 말보다는 운전을 더 편하고 힘 안 들게 할 수 있는 최신형 좋은 차를 사주거나 권고함을 받지 못함에 무척 서운하고 서글퍼진다.
그러나 그들은 나를 생각해 주는 조치라고 우겨 댄다. 어쨌든 어김없이 세월은 흘러가고 죽음의 시각이 다가옴에 대해서 이 좋은 세상을 더 누리지 못하고 작별해야 한다는 사실에 아쉬워하는 마음과, 살 만큼 살았으니 미련을 버리자는 의연한 생각이 반반으로 갈라져서 언제까지 내 안에서 싸워 가려는지 알지 못한다.
자식들이 사회생활을 잘하고 지내며 명절이나 생일에는 잊지 않고 찾아와서 대접해 주는 맛난 음식을 먹으며 정이 오가는 말을 주고받는 시간은 이 또한 노령에 갖는 즐거움이다.
한 가지 불만스럽고 부족한 점이라면 뒤늦게 수필 작가가 되어 그런대로 글씨도 소재도 맵시 있게 써본 것은 잠시이고, 이제는 생각 속에는 확실하고 마음에는 명확하게 자리 잡혀 있는 것 같은데도 마음에 드는 유려한 문장은 도통 떠오르지 않는다. 또 막상 표현과 설명을 명확히 하려 하면 무슨 제품 설명문 같다는 판단이 앞질러 내 마음에 다가오는 두려움에 점점 더 글쓰기를 멀리하다가 이제는 게으름에 지루함까지 느껴 이 모든 것이 나이 탓이려니 하는 핑계로 접어 놓았다.
이런 점은 나의 노령으로 살아가게 되는 좋지 않은 일이지만 어쩌랴! 이제는 글자도 오래 보면 어릿어릿하고 눈도 점점 침침해져서 지속이 어려우니 내 능력껏 체력이 받쳐 주는 한도 내에서 생활 방식을 맞춰 나가는 삶을 살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