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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에서는 캐쉬넛 카레를 드세요

한국문인협회 로고 이영백

책 제목한국문학인 이천이십오년 겨울호 2025년 12월 7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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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네쉬는 인도 서부 G시의 주립 명문 S대학에서 화학공학으로 석사 학위를 거의 마쳐 가고 있었다. G시 인근은 사탕수수와 캐쉬넛으로 유명한 지역이었다. 유명한 대도시인 뭄바이와 아주 가깝지는 않으나 그 영향권에 있는 도시였다.
사탕수수 수확 철이면 도시 인근의 크고 작은 도로들은 집채만큼이나 사탕수수를 싣고 이동하는 소달구지, 경운기 그리고 낡은 화물차들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자기 몸보다 더 큰 크기의 사탕수수 더미를 머리에 메고 도로 가장자리를 따라 줄을 만들며 이동하던 사리를 입은 인도 여인들의 모습도 그랬다.
캐쉬넛 농장과 공장도 많았다. 다네쉬도 당연히 고소한 캐쉬넛을 좋아했다. 캐쉬넛 공장이란 수확한 캐쉬넛 껍질을 벗겨 알맹이를 추출하는 곳을 부르는 말이었다. 이 일은 수작업으로 많이 진행되었다. 싼 여인들 인건비 때문이었다. 시멘트 바닥 넓은 방에 백 명 안팎의 여인들이 바닥에 행과 열을 맞추어 앉아 그 껍질을 벗겨 내었다. 이 고생하면서도 보수가 싼 작업을 자주 보며 다네쉬는 캐쉬넛을 점차 아주 좋아하지는 않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캐쉬넛을 갈아 만든 특산 캐쉬넛 카레까지 싫어하기에는 그 고소하면서도 담백한 맛을 물리칠 수는 없었다. 
그는 요새 자신의 갈 길에 대해 여러 생각이 많았다. 박사학위를 위한 공부를 지속하고 싶었다. 이곳 주(州) 내에서 편하게 공부를 지속할까도 생각했다. 집안끼리 소개한 같은 카스트(신분)의 여인이 마음에 들어 여기서 편하게 박사학위 공부하며 기회를 봐서 결혼이나 할까 하는 마음도 강하게 들었다. 그러나 공부 좀 하고 도전적인 친구들은 공학연구와 교육 면에서 더 나은 선진 외국에서 공부를 하려고 했다.
다네쉬도 이런저런 생각 끝에 동창이나 친구들에 뒤질 수는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공학 분야에서는 선진 외국들 박사과정이 영어 위주로 진행이 되어 거기에서 공부하더라도 학위과정을 밟은 데 큰 언어 문제는 없을 것을 자신했다. 인도에서는 영어가 거의 공용어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적어도 세 가지 언어를 공부하고 있었다. 인도 표준어인 수도 델리 지방 언어인 힌두어와 영어 그리고 그 지방 언어. 물론 전공 실력도 탄탄한 편이었다. 적어도 본인 생각에는.
인도에서 과학이나 공학 전공하는 학생들의 외국 유학 시 첫 번째 희망은 옛 식민지 시절 종주국인 영국의 유서 깊은 대학에 가는 거였다. 그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뭔가 자격도 안 되고 실력도 밀리는 것 같았다. 그러다 보니 최근 신흥강국으로 이름이 난 나라 중 한국을 고려하기 시작하였다. 최근 적지 않은 인도 학생들이 한국을 고려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있었다.
인터넷 등을 이용하여 한국의 화학공학 분야 대학원에 대한 정보와 순위 그리고 조교로 일할 수 있는가 등의 사항들을 수집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한국 M대학의 정 교수에게 지원해 보기로 1차 정했다. 교수에게 이메일로 연락을 취했다. 자세히 자신을 소개하고 한국에서 공부와 연구를 했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얼마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만일의 경우에 대비한 다른 대학에 대한 지원 준비를 하려는 찰나에 그 교수로부터 연락이 왔다. 너무 다행이었다. 괜찮은 내용이었다. 그러나 인터넷 영상통화로 인터뷰를 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영어로. 왠지 자신이 있어 다른 대학에 대한 조사를 하지 않기로 하였다.
며칠 후 약속한 날과 시간에 인터넷 영상통화를 하였다. 정 교수는 왜 한국에서 공부를 하려고 하는가 등 일반 사항과 전공 공부의 준비 정도를 파악하기 위한 간단한 질문을 두 개 정도 하였다. 다네쉬는 진땀을 흘렸으나 나름 할 설명은 성실히 한 거 같았다.
대학 실험실로 돌아왔다. 기분이 은근히 좋다 보니 갑자기 얼마 전 소개받은 여인이 생각나 연락했다. 사실 그가 한국에 가게 되면 영향을 받을 사이였기에 상황을 알리고 싶었을 수도 있었다. 이따 저녁때 만나기로 하였다. 다네쉬는 다시 출국 준비와 하던 연구 실험을 지속했다.
그리 오래되지 않아 한국의 정 교수부터 한국으로 올 준비를 본격적으로 하라는 꽤 예상했던 이메일 답이 왔다. 다시 기뻤다. 차질 없이 준비를 하여 떠오른 신흥강국에서 제대로 배우고 많은 발전이 필요한 인도에 돌아와 기여를 하고 싶었다.
한국은 초가을이었다. 무더운 날씨가 많았던 인도 G시에 비해 너무 쾌적한 날씨라 처음에는 어색하기까지 하였다. 한국 오기 전에 시간적으로도 무리고 양가의 준비가 다 되지 않아 결혼은 나중으로 미루고 혼자 왔다. 처음 접하는 외국 생활 그것도 생소하기 짝이 없는 한국에서의 생활에 좀 익숙해진 후에, 결혼을 하는 것이 나을 듯하였다.
한국에서의 공부와 연구는 못 감당할 정도는 아니었으나 그리 만만치는 않았다. 사회생활이라고 해봐야 대학 근처의 편의점과 쇼핑몰이나 식당 등에 가는 정도였다. 사회 인프라가 인도에 비해 훌륭해서 생활이 너무 편했다.
한국에서 대학원 공부 한 학기가 잘 지나갔다. 한국에 오기로 한 선택은 너무 잘한 거 같았다. 첫 겨울방학에 인도를 잠시 방문하는 거는 그만두기로 했다. 결혼을 전제로 만나기 시작했던 여인이 많이 보고 싶긴 했으나 공부 관련하여 할 것이 많았고 교수나 같은 실험실 선배들한테도 눈치가 보였다.
대학 기숙사로 돌아와 노트북으로 이런저런 인터넷 뉴스를 보고 있었다. 중국에서 작년 말에 발생했던 원인을 알 수 없던 호흡기 전염병에 대해 세계보건기구(WHO)가 이 폐렴의 원인이 새로운 유형의 코로나바이러스라고 밝혔다는 뉴스였다.
‘이름도 왠지 장난이 아니네.’하면서도 그런가 하고 넘어갔다.
대학 실험실에서 의자에 앉아 좀 쉬고 있는데 옆 책상의 한국인 대학원생인 인호가 쳐다보며 말했다.
“다네쉬, 한국에도 코로나바이러스 환자가 생긴 거 알아?”
한국을 방문한 중국 교민이 최초의 감염자로 확진을 받았고, 한국에도 이제 그 바이러스가 들어왔다는 얘기였다.
뭔가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틈나는 대로 인터넷 뉴스를 모니터하고 같은 실험실의 한국인 선배들에게도 자주 묻곤 하였다. 곧이어 중국 정부는 관련 의료진 여러 명이 확진 판정을 받았다며 코로나바이러스의 사람 간 감염 가능성을 공식 확인했다. 이제 정신이 바짝 들었다. 한국에서도 코로나바이러스 위기 경보 수준을 ‘경계’ 수준으로 격상하였다.
감염 확산세가 이어지자, 세계보건기구도 ‘국제적 공중보건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한국 정부는 코로나바이러스가 많이 퍼지고 있던 중국 도시의 교민 이송을 위해 전격적으로 전세기를 여러 차례 투입하였다.
중국을 비롯한 세계 그리고 한국의 코로나바이러스 확대 상황이 빠르고 걷잡을 수 없게 전개되어 갔다.
‘그래도 이번 겨울 아니 늦어도 다음 학기 끝나고 여름이 되면 나아지겠지. 바이러스가 더위에 약하다고 하니.’
다네쉬는 멋대로 인터넷 등에서 얻은 얄팍한 지식을 바탕으로 그렇게 짐작해 버렸다. 그리고 한국의 의료나 방역 역량이 상당히 우수한 것으로 경험하고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인도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사실 그러기를 바랐는지도 몰랐다. 여름 방학이면 인도에 가서 그 여인과 결혼도 하고 상황을 봐서 그녀를 한국으로 데려오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바이러스는 보통이 아니었다. 어느 종교 단체 대구 교회 중심으로 엄청나게 확산이 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2019년에 발생한 코로나바이러스라 해서 세계적으로 코로나-19라고 공식적으로 부르기 시작하였다.
심지어 대구와 경북 일부 지역이 봉쇄까지 되었다. 무슨 전쟁이나 반정부 시위 세력을 차단하는 데나 사용하던 얘기였다. 안정된 사회와 체제의 외국에서 공부하게 된 것을 자랑스러워하던 그로서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 나라만 그런 거가 아닌 모양이었다.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었다. 거기다 더 무서운 사실은 바이러스가 변이를 계속 만들어 내고 있었다. 이에 세계보건기구는 코로나-19에 대해 팬데믹 (세계적 대유행)을 공식 선포했다. 이제 전 세계적 문제이고 세계가 같이 대응을 하여야 한다는 말 같았다.
갑자기 모두 마스크를 써야만 하는 상황으로 되어 버렸다. 소설이나 영화에서나 보던 모두 마스크나 방독면을 쓰고 생활하던 그 비현실적인 얘기들이 현실이 되어 버렸다. 기가 막힌 일이었다. 갑자기 엄청난 마스크 수요가 생겼으니 당연히 마스크를 쉽게 구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한국 정부는 출생년도 끝자리에 따라 지정된 요일에만 1인당 2매씩의 공적 마스크를 구매할 수 있는 황당한 제도를 실시하기 시작하였다. 대학도 개학을 해야 하나 아직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고향 인도도 난리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한국보다 시원찮던 사회와 방역 체제 때문에, 별 대책이 적시에 벌어지는 거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한국에 있는 다네쉬가 특별히 해 줄 일도 없었다. 그와 같은 외국인이 우려하던 국제 이동에 대한 제한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모든 입국자 2주 자가격리 등의 조치가 행하여졌다. 격리란 익숙하지 않던 단어가 일상생활 용어처럼 등장하였다.
‘여름에 인도를 방문할 수 있을까? 결혼을 제대로 하고 신부를 한국으로 계획대로 데려오는 것이 가능할까?’ 등의 여러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누가 확실히 답해 줄 사람도 없었다. 그가 인터넷 등으로 판단하기에는 모두 쉽지 않은 일 같았다.
초유의 전염병 사태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교육 당국은 할 수 없이 소위 온라인 교육 시대를 본격화하기 시작하였다. 대학도 마찬가지였다. 코로나-19가 처음 발생한 지 몇 개월 만의 엄청난 변화였다.
얼마 후 한국 정부는 ‘생활 속 거리 두기’ 체제로 전환하였다. 당황과 놀라움의 초기가 지나고 사회가 감당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자 봉쇄보다는 마스크 착용 등 규칙을 정하여 어느 정도의 정상 생활을 해 보자는 얘기였다.
대학은 아직 온라인 강의가 이루어지기도 하고 대면 강의를 하는 곳도 생기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연구 실험 등 대학원생 연구 활동은 다시 실제 실험실에서 진행되기 시작하였다. 물론 마스크 착용과 밀집해서 실험하는 것을 피하는 등 많이 조심하였다.
인도에 다니러 가려 했던 여름 방학이 되었으나 인도로의 출국은 엄두도 못 내고 있었다. 인도 가서 격리 그리고 한국 돌아와서도 격리를 해야 해서 실제 인도에 머무르는 기간은 며칠 되지도 않을 듯했다. 그리고 이용객들이 적다 보니 항공편도 적어졌고 가격도 오른 것 같았다.
거기다 혹시 국제 이동 중 감염 위험성이 높은 공항 같은 데서 코로나-19에 감염이라도 되면 격리 병원에 일정 기간 입원해야 했다. 이리 된다면 원래 계획은 아무런 의미도 없게 되어 버리는 거였다. 거기다 몸이 어찌 될 수도 있고 경제적으로도 문제가 될 수가 있었다. 무사히 인도에 가더라도 거기서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음식도 같이 먹어야 할 인도식 결혼식을 제대로 할 수가 있을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이것저것 따지다 결국, 인도 가는 것과 인도에서의 결혼을 미루기로 했다. 겨울방학 중이나 다음 여름 방학으로 일단 연기하였다. 물론 그때도 확신할 수는 없었다. 인도에 있는 여인과는 수시로 인터넷 화상 통화나 하며 서로의 그리움과 안전함을 확인할 뿐이었다.
“조심해요. 사랑해요.”
만일 인터넷이라도 없었으면 어찌 되었을까 상상도 하기 싫었다. 
그 와중에 한국에서는 집회 관련자들 중심으로 확진자가 다시 증가하였다. 이제 매일 아니 어느 때는 하루에도 몇 번이나 휴대폰으로 인터넷의 한국 확진자와 사망자 그리고 고국 인도를 비롯한 세계 각국의 확진자와 사망자 통계를 보는 버릇이 생겼다. 그런 것이 일상이 되다니 기가 막힌 상황이었으나 현실은 어디 가지 않았다.
수도권에 대한 사회적 거리 두기가 강화되었다. 급기야는 서울 전역에서 개최되는 10인 이상 모든 집회가 전면 금지되었다. 이리되다 보니 수도권 유치원·초·중·고교는 다시 가을 학기 초반에 원격수업으로 전면 전환되었다. 좀 풀렸다 다시 강화되었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 바이러스는 정말 보통이 아니고 마치 지능이 있는 듯해.”
실험실 동료 대학원생들 모두가 이구동성이었다.
원격수업이니 재택근무니 모임 금지니 하는 생소한 단어들이 어느새 점점 익숙한 말로 되어 갔다. 스포츠 행사는 경기를 중지했다. 공공 다중 이용 시설 운영도 중단되었다. 거기다 감염 걱정까지. 전쟁을 경험하지 못했던 다네쉬나 동료 한국인 대학원생들 모두 처음 접하는 삶의 양식이었다. 한마디로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었다.
마스크 착용이 필수가 되고, 거리 두기란 단어가 점점 생활 속 깊숙하게 자리하던 시기였다. 하루빨리 마스크를 벗고 서로 환하게 웃으며 만날 수 있는 그날을 기다리며, 서로를 위하는 마음과 배려만은 가까운 나날을 보내려고 하고 있었다. 물론 지능적인 바이러스 때문에 ‘그런 날이 얼마나 빨리 올까?’ 회의적인 사람들도 점점 많아지고 있었다.
학위를 위한 대학원 연구와 공부도 정상은 아니고 많은 제약을 받았다. 그래도 다른 분야보다는 그런대로 진행이 되고 있었다. 다네쉬는 이런 어려운 가운데서도 외국에서 공부하고 있고 사실 연구밖에 별로 할 것도 없는 상황이 되어서 하여간 더 열심히 하고 있었다.
‘세상이란 어떤 점에서는 참 공평한 거 같애.’
물론 인도에 있는 여인이나 친구들과의 인터넷 영상이나 보통 통화는 점점 많아지고 있었다. 사실 인도뿐만이 아니었다. 한국 내 다른 도시에 있는 인도 유학생들을 만나기도 쉽지 않으니 마찬가지로 인터넷 대화가 주가 되었다.
많은 회의와 학술 모임들도 줌(Zoom) 미팅 같은 인터넷 모임이 대세가 되어 갔다. 이 또한 처음 경험하는 일이었다. 어찌 보면 다 살게 마련이었다. 만일 인터넷이 없거나 시원찮은 상황에서 이런 사태가 생겼다면 어찌 되었을까 생각하기도 싫었다. 옛날 흑사병으로 시골 별장에 고립되어 『데카메론』의 바탕이 되었다던 얘기가 떠올랐다.
줌이라는 회사도 처음 알았다. 이러한 인터넷 모임 회사가 이렇게 각광을 받을지 누가 알았겠는가. 기업 가치가 어마어마하게 올랐다고 했다. 어떤 어려운 시기에서도 그 어느 틈을 뚫고서 잘되는 기업이나 사람이 꼭 있었다.
그러나 서로 간의 숨결을 느끼지 못하는 시대였다. 공상과학 소설이나 영화에서 보던 풍경들이 다네쉬를 비롯한 사람들 앞에 다가온 거였다. 그는 종종 한국이라는 외국이 아니라 다른 외계에 와 있는 거 같은 느낌을 받곤 하였다. 물론 다네쉬만이 아니었다.
이런 불편과 공포의 시대가 언제 끝날지 알 수가 없었다. 약화되는가 하면 다시 강해지니 누구도 종잡기 어려웠다. 학위 공부와 연구는 그런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그래봤자 학위를 위한 본격적인 연구를 하기에 아직 먼 길이었다.
학위 공부를 시작한 지 1년 남짓이어서 사실 한창 포부와 의욕에 차 있을 때였다. 그러나 코로나-19로 인한 괴상하기 짝이 없는 시절을 만나서 그런지 벌써 간혹 이렇게 무리해서 재미없게 학위 공부를 해서 무엇하나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결혼하러 인도에 가지도 못하고 당장 다네쉬 자신도 코로나-19에 감염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가끔 그의 심장을 짓눌렀다. 한국보다 열악한 인도의 방역 수준을 잘 알기에 인도에 있는 나이가 적지 않던 부모나 동시에 결혼할 여인과 그녀의 부모에 대한 걱정까지 끊이지 않았다. 오는 여름 방학에는 코로나-19 상황이 어떻든 무조건 인도에 가서 어른들도 만나고 그 여인과 결혼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그러나 물론 항공편 사정이나 인도와 한국의 감염 상황에 달린 얘기였다. 그만의 생각으로 되는 것이 별로 없었다.
연말에 정 교수가 불가피한 공동 연구 때문에 중국에 다녀왔다. 모험심 강한 그가 도전을 한 것이었다. 다네쉬도 관심이 많았다. 그도 어지간하면 다음 여름에는 인도를 다녀와야 하기 때문이었다.
우선 비행편이 대폭 축소되어 하루에 한 번에 불과하였다. 당연히 북적이던 공항이 괴괴하였고, 우주복 비슷한 방역복 투성이었다. 무슨 우주 여행 같았다.
정 교수가 내내 우려하던 것은 중국 도착 시 예상되었던 2주 격리였다. 도착 공항 내에서 코로 하는 심한 코로나-19 검사를 하고 휴대폰에 큐알(QR) 등록을 한 후 방문할 대학이 있던 지역으로 가는 방역된 버스를 기다렸다. 한참을 지난 후에 그쪽으로 가는 버스가 있는 곳으로 안내하였다. 버스는 여기저기를 들려 결국 그가 격리할 호텔에 도달하였다. 그 사이에 버스로 스쳐 가던 거리의 모습에 전과 같은 활기가 없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얘기일 것이나 바이러스에 침몰당하고 있던 세계적 대도시의 민낯이 보이는 것 같아 스산함을 넘어서 겁이 덜컥 나기까지 하였다. 잠시 눈을 감았다. 시내 멋스런 거리의 싱그러운 햇살과 바람, 그 속을 활기차게 움직이는 젊은이들이 그의 뇌리를 스쳐 갔다.
원래의 호텔 입구가 아니라 건물 뒤쪽 작은 문 근처에 멈춰 섰다. 내리자마자 입구에 있던 방역 요원이 정 교수가 가지고 내린 여행 가방에 소독약을 사정없이 뿌려댔다. 건물로 들어가자 테이블에 앉아 있던 요원한테로 가서 이런저런 사항을 기재하였다. 복도와 엘리베이터와 바닥은 공사 중 건물처럼 소독약 내음 물씬한 흰 천으로 덮어져 있었다.
방으로 들어오자 그때까지보다는 그나마 정상적 세계였다. 그러나 방 한편에 쌓여 있던 생수병들을 보니 이 방도 정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쪽지를 대충 훑어보았다. 매일 코로나-19 검사를 한다는 것과 끼니 때마다 도시락을 문 앞으로 배달한다는 내용 등이었다.
죄수 생활 비슷한 느낌의 격리라는 세월이 시작되었다. 창문 밖은 내다볼 수 있었다. 커튼을 제치니 칠흑 같은 밤이었으나, 대뜸 알 듯한 고가 도로 위로 차들이 간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 자유로움이 부러웠다. 소독약 냄새가 여기저기 진동하던 별로 좋은 환경이 아니었으나, 너무 긴장했고 피곤하여 얼마 후 잠에 깊게 빠져들었다.
어딘가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에 잠을 깼다. 코로나-19 검사를 받으라는 거였다. 코 깊은 속까지 사정없이 찔렀던 엄밀한 코 검사에 잠 깨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통증까지 느꼈다.
잠시 후 다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다시 겁을 먹고 열었더니 문 밖 조그만 탁자에 무슨 비닐봉지가 하나 놓여 있었다.
‘아, 이렇게 식사를 배달하는구나.’
비닐봉지를 풀고, 들어 있던 작은 두유 팩에 빨대를 꽂고 찐빵을 조금 뜯어 먹었다.
이런 식의 생활을 앞으로 2주간 하여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러다 몸이 상할 것 같은 생각이 퍼뜩 들어 그리 넓지 않은 호텔 방 안 공간을 시계추처럼 빠르게 왔다 갔다 하였다. 전화벨이 울렸다. 깜짝 놀라 받았더니 체온을 문의하는 전화였다. 다행히 정상이었다.
좋은 점도 있긴 있었다. 여기 있는 동안은 외부로부터 별 방해를 받을 거 없어 이런저런 밀렸던 일을 하기에 좋은 시간이라고 자기 최면을 걸었다.
드디어 격리가 끝나는 날이었다. 한 1년이 지난 것처럼 느꼈다. 시간 상대성의 실감이었나. 짐을 다 쌓아 놓고도 한참을 기다리니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무척 좋아하는 여인한테 전화가 온 것처럼 반가웠다. 얼른 짐을 챙겨 튀어 나갔다. 다시 소독약 내음 물씬 나던 엘리베이터로 1층으로 내려갔다. 저쪽 프론트에 벌써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체크아웃 줄을 서 있었다. 비록 모두 마스크들을 쓰고 있었으나 사람 사는 세계로 한참 만에 되돌아온 것 같았다.
격리 비용을 내면 영수증을 발급해 주는 거였다. 밖으로 나가니 다시 테이블 위에서 여권, 격리 비용 영수증 등 여러 서류를 보이고 격리 증명서를 받았다. 이거를 들고 날 듯이 출구 쪽으로 이동하였다. 뒤도 돌아보기 싫었다. 출구 문을 나서자 눈에 익었던 거리 모습과 대학 연구원의 마스크 쓴 모습이 보였다. 밖은 마스크들을 썼다 뿐이지 전과 아주 다르지는 않은 듯했다.
큰 거리로 나서 택시를 잡아타고 이곳에 오면 주로 머무는 대학 근처 호텔로 이동하였다. 택시 기사가 마스크를 썼을 뿐 택시 이동에는 전과 별다름이 없었다. 호텔은 오랜만이라서인지 매우 반갑게 그를 맞이하였다. 물론 정 교수도 오랜 방황 끝에 고향 집에 돌아온 느낌이었다. 
얼마간의 체재 기간이 지나 한국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문제는 한국에 가서도 다시 격리를 해야 했다. 한 번 격리를 해 보니 더 숨이 막혀 왔다. 방역 편의를 위해 한국 도착 모든 항공기는 인천공항에 도착하여야 했다.
얼마 후 공항 밖으로 나왔다. 중국에서와 달리 방역 조치가 어느 정도 행해진 개조된 택시를 타고 알아서 격리 장소로 가는 거였다. 보통 택시 타고 갈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아 안심하였다.
미리 가족의 도움을 받아 격리가 가능한 집 근처의 숙소를 예약하였다.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을 수는 없어서 혼자서 짐을 날라 그 숙소로 들어갔다. 격리 기간 동안 생활을 할 수 있게 침구와 생활용품 등이 제법 완비되어 있었다. 먹고 마실 것도 미리 가족한테 부탁하여 놓았더니 햇반, 비빔면 등이 식탁 위에 가득 쌓여 있었다. 특별히 부탁했던 레드 와인 병도 삐쭉 모습을 보였다. 간단히 세면을 한 후 와인을 그냥 유리잔에 따르고 벌컥 들이켰다. 순간 세상의 어려운 일을 헤치고 무사히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서울에서의 격리는 확실히 중국에서의 그것과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편하고 자유스러웠다. 체온 등 보건당국에서 요청하는 정보는 지정된 앱에 하루에 한 번 입력하면 그만이었다. 직접 받을 수는 없었으나 무슨 필요한 것이 있으면 밖에 부탁하여 격리 숙소 문 앞에 둘 수 있었다.
아무리 상대적으로 자유롭다고 해도 격리는 격리였다. 가끔 부탁한 물건들을 받기 위해 집 문을 열 때의 쌀쌀하나 싱그러웠던 바깥 공기에서 물씬 자유의 내음을 맡고는 하였다.
이런저런 정 교수의 코로나-19 모험담을 들은 다네쉬는 인도 가는 것에 대해 걱정이 더 많아졌다. 보통 일이 아닌 것 같았다. 인도의 경우는 사정이 더 열악할 수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방문 중 그 자신이 코로나-19에 직접 감염되거나 감염된 가족 등으로부터 전염될 가능성도 정 교수 경우보다 높을 거로 생각이 들었다. 결혼하러 갔다가 감염되어 목적도 제대로 달성도 못하고, 죽지야 않는다고 하더라도 회복에 시간이 많이 걸리거나 몸이 허약해질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신부를 소위 사지에 계속 내버려 둘 수도 없었다.
또 하나의 큰 문제는 인도에 가는 항공편 문제였다. 가는 편수와 인도 내 도착 공항 수가 줄고 값도 비싸졌다. 코로나-19 상황 특히 인도의 형편에 따라서는 아예 가지 않을 수도 있었다. 첩첩산중에 예측이 쉽지 않았다. 그러나 엄청난 무리가 아니라면 오는 여름 방학에는 무조건 인도에 가서 어른들도 만나고 그 여인과 결혼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다시 다짐하였다.
다네쉬는 어려운 가운데서도 대학원 공부와 연구를 나름 열심히 진행해 가고 있었다. 그러는 중에 해가 바뀌었다.
‘올해는 코로나-19에서 벗어나는 한 해가 됩시다’라는 새해 벽두의 전 세계적 바람은 별로 나아지지 않고 있었다. 특히 다네쉬가 주시하던 인도의 상황이 엉망이 되었다. 연초에 인도 내 코로나-19 신규 감염자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인도는 2차 대유행을 겪게 되었다. 그의 바람과는 전혀 다른 방향이었다. 급기야 일일 신규 확진자 수십만 명에 달하게 되었다. 따라서 인도는 병상 및 의료 관련 장비, 의료용 산소 등이 부족한 상황으로, 인도 내 의료 서비스 역량의 한계에 대한 우려가 지속되었다. 이런 폭발적인 감염 확산은 그전 해 12월 인도에서 처음 발견된 전염력이 강한 이중 변이 바이러스 때문인 거로 추정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봉쇄 조치를 재개 시행하고 있었다. 야간 통행을 금지하였으며, 필수적인 인력 및 시설을 제외한 모임의 운영 중단 방침을 발표하였다.
심지어는 나무 위 격리 인도 청년이라는 비극적인 인터넷 기사까지 보게 되었다. 한 인도 대학생이 인도 전역에서 확진자가 급증하면서 방역 방침에 따라 집으로 돌아가게 됐다. 그런데 귀가 전 받았던 검사에서 양성 판정이 나오고 말았다. 격리하라는 지침을 받았지만, 마땅히 있을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가족 몇 명이 모여 사는 집은 너무 좁아 혼자 쓸 수 있는 방이 없었다. 갈 곳 없던 그가 고민 끝에 향한 곳은 바로 나무 위였다. 그는 밧줄과 양동이를 이용해 가족에게 생활에 필요한 물건과 음식을 받았다. 기가 막힌 얘기였다.
이런 얘기를 듣자 다네쉬는 오는 여름에 인도에 가는 것이 너무 위험하다는 생각을 했다. 특히 그 자신을 위해서는 그랬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신부와 가족이 더욱 걱정되었다. 한국도 천국은 아니었으나 인도와는 비교하기 어려운 상황 같았다. 신부에게 미안했고 보고도 싶었다.
‘하여간 소식을 계속 모니터하면서 판단하자.’
하여간 다네쉬는 조만간 갈지 말지 결정을 해야 했다.
여름 방학이 멀지 않은데 인도 사정은 별로 나아지지 않고 있었다. 결단을 내려야 했다. 가더라도 정상적인 결혼식 같은 거를 하기는 어려울 것이었다. 가족과 신부의 상태도 별로 좋지 않은 것 같았다. 아무래도 건장하고 상대적으로 좋은 환경 속에 있는 그가 희생해야겠다고 결심을 하고야 말았다. 정 교수에게 알려주었더니 이해는 하는데 어려운 결정이라고 했다.
“하여간 조심해요. 신부 데리고 잘 귀국해요. 거기서 무슨 일이 있으면 언제라도 상의하고.”
그의 격려에 말에 다네쉬의 마음이 조금 나아졌다. 사실 이런 상황에서 옛 중세 페스트 창궐 시처럼 인터넷이 없었다면 어찌 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아찔하였다.
항공편도 많지 않아 이 예약 편을 놓치지 말아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도의 사정도 악화되지 말하야하고, 다네쉬가 감염이라도 되면 큰일이었다. 하루하루가 바늘방석에 앉은 거 같았다. 운명 그리고 또 다른 운명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다네쉬는 인도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항공기는 일종의 움직이는 하늘의 병동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공항 도착 후 한 코로나-19 검사에서 일단 음성을 받아 조심스럽게 집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가족들이 그를 반가이 맞았다. 그가 직접 목격한 집안 상황이나 가족의 건강 상태는 생각보다 안 좋았다. 그러나 그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한국에서 가져온 일반 약과 먹거리 따위를 드리는 게 전부였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러나 같이 어려움을 공유하기는 잘했다는 생각은 강하게 들었다. 그의 집에서 멀지 않은 결혼할 여인네 집에도 조심스레 인사를 드리러 갔다. 거기 사정도 비슷하였다.
“제가 여름 방학 마칠 때 라니를 한국으로 데리고 가려 합니다. 지금 결혼식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니 나중 기회에 하기로 하고 우선, 결혼 신고를 하겠습니다. 한국 비자 받는 데도 시간이 걸리니 서둘러야 할 거 같습니다.”
라니에 집에서도 반대할 상황은 아니었다.
결혼 신고 등 신부와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준비는 잘 진행이 되었다. 그러나 다네쉬의 아버지가 갑자기 열도 높아지고 기침도 많이 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설마 하였는데 아무래도 이상해서 코로나-19 검사를 하였더니 양성이었다. 흥분을 애써 가라앉히고 크지도 않은 집에서 아버지를 위한 격리 공간 비슷한 것도 만들었다. 다른 가족들은 다행히 아직 음성이었다.
아버지가 연세가 있으시고 건강이 좋지 않던 상태라서 그런지 증상은 더 심해지는 거 같았다. 치료도 그렇고 다른 가족들에 대한 감염을 막기 위해 인근의 큰 병원에 방이 있는지 문의하였으나 부정적인 답이 돌아왔다. 감염자가 너무 많아 현재도 정원을 초과한 상태였다. 다른 도리 없이 약이나 좀 받아오고 한국에서 가져간 해열제와 기침약 등을 드리는 수밖에 없었다. 보다못해 산소통을 구해보려 하였으나 인도 전반적으로 동이 난 상태였다. 결국, 인근에 있는 아는 대학 실험실에서 작은 것을 하나 임시로 구했다.
한국 갈 시간은 다가오는데 아버지 상태는 점점 더 나빠져 이만저만 걱정이 아니었다. 다른 가족들 감염도 많이 걱정되었다. 이런 상태에서 훌쩍 한국으로 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라니에게 말했다.
“아버지나 가족이 안정되는 거를 보고 가야 해요.”
신부도 당연히 동의했다.
아버지의 상황은 더 나빠졌다. 과감하게 항공편을 한 열흘 연기하기로 정했다. 우려하는 사태가 발생한 거였다. 사실 제대로 한국에 돌아가도 다네쉬 부부는 어디선가 격리도 해야 했다. 너무 어려운 시절이었다. 문득 코로나-19 이전에 자유로이 다니고 하던 추억들이 자꾸 생각났다. 한번 다가온 좋은 기억들 속에 빠져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나오기가 싫었는지도 몰랐다.
갑자기 저쪽에서 어머니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급히 달려가니 아버지가 돌아가실 거 같다는 얘기였다. 무조건 근처 큰 병원 응급실로 쳐들어갔다. 거기도 꽉 차서 응급실 밖 복도까지 환자들이 가득했다. 결국, 얼마 후 별 처치를 받지도 못하고 아버지는 운명하셨다.
다네쉬 부부는 마스크 등 나름 완전 무장을 하고 공항에 도착했다. 그동안 아버지 장례와 뒷정리, 남은 가족들 살피기 등 정신없이 보냈다. 신부와 가족들을 다시 만난 것을 제외하고는 너무 힘들었던 인도 방문 일정이었다. 항공기가 이륙하여 창문 밖 구름을 보니 괜히 방문하여 아버지가 돌아가셨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꽤 먹먹해졌다. 라니는 조용히 그의 손을 잡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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