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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과 동시에 쏟아지는 것들

한국문인협회 로고 유영자(서울)

책 제목한국문학인 이천이십오년 겨울호 2025년 12월 7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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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이나 점 같은 것을 지독히 싫어하는 소유자가 된 지도 참 오래되었다. 왜 나라고 현재 곧 닥칠 일이나 미래에 닥쳐올 일들이 궁금하지 않겠는가? 특히 좋은 일들보다는 나쁜 일들이 내 삶에 끼어드는 것을 미연에 방지할 수만 있다면 더없이 좋은 일일 것이다.
내 나이 28세 때쯤 나는 거의 80프로를 언니의 반강제성으로 예언이란 것을 처음 접하게 되었다. 언니는 예수님을 믿기 훨씬 전부터 점을 보러 다니기를 좋아했으니, 하나님을 믿고 나서도 점과는 사뭇 다른 차원이긴 하지만 좀 비슷한 예언을 더 좋아했던 것 같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답을 얻기보다는. 난 그런 언니가 이해가 잘 되지는 않았어도 이해해 보려고 그래도 노력을 많이 해온 것 같다. 못 말리는 그런 언니의 습성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진 않았지만….
어느 날 언니는 자신이 다니고 있는 교회 재단의 어느 교회에서 부흥회를 한다고 해 다녀왔다고 자랑하였다. 특히 그분께서 자신에게 예언을 해주신 부분을 강조하였다.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그릇이 크다고. 경제권, 물건을 다 주셨다고.”
예언의 안수를 할 때 그 목사님께서 자신에게 들려주었다고 하였다. 좋은 예언을 자신이 받고 왔으니 당연히 흥분을 하는 것이 마땅하고 마땅했다. 자신이 그런 좋은 예언을 받고 왔으니 자신의 바로 밑의 여동생의 예언이 궁금한 것 또한 사실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동생은 자신보다도 훨씬 공부도 못했고 체육 쪽은 젬병이었다. 분명 내 동생은 나보다는 좋은 예언을 받진 못할걸…. 어린 시절도 그랬잖아. 모든 것이 나와는 현저히 실력 차이가 났잖아.
그러니 더 자신 있게 동생의 예언이 어떻게 나오는가가 더 분명해졌을 언니의 자세였다. 어쩜 그 속은 의기양양한 태도가 숨겨져 있었을지도 모른다. 언니는 점집으로 말하면 복채 격인 헌금 2천 원을 의기양양하게 쾌척 내 손에 쥐어 주었다.
“너도 어서 빨리 그 교회를 다녀오라고. 얘, 너의 예언도 모두 궁금하잖니?”
언니가 고맙기는 했지만 사실 그리 내키지 않는 걸음을 난 시행을 하였다. 언니가 가라는 그곳의 감리교회는 꽤나 멀었다. 버스를 타고 꽤나 오래 갔으니까. 그곳은 부흥회 기간이었다. 초빙되어서 오신 목사님은 감리교 쪽에선 꽤 유명한 목사님이란다. 특히 초신자들에게 꽤나 쉽게 성경 말씀이나 교회 생활 전반부를 명쾌하게 가르쳐 주시는 분으로 유명하시단다. 특히 그분에게 예언을 받게 된다면 그 예언은 틀림없이 맞는다는 소문도 자자하다는 것이다. 그렇다 해도 내겐 별로였다. 다만 나는 친형제이긴 하지만 언니네 미용실의 한 사람 종업원인지라 그 말을 순종하는 동생이자 종업원의 모습으로 그곳에 도착을 했다. 그렇다고 약간의 호기심마저 전혀 없었다고 한다면 아마 그것은 거짓말일 것이다. 그곳까지 자의든 타의든 예언을 들으러 온 것은 온 것이니 말이다.
그곳에 갔을 땐 이미 부흥회는 시작되고 있었다. 부흥회는 분명히 다른 곳과는 달라도 너무나 달랐다. 목사님께서 늘 설교하시는 강단에서 하시질 않으시고 강단 밑에서 칠판 하나를 세워 두시곤 분필로 열심히, 열심히 한 주제를 계속 적어 나가시면서 자세히 설명을 해주셨다.
보통 한 주제에 30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나는 더럭 겁이 났다. 칠판에 적힌 주제를 보니 7가지 주제였다. 30 곱하기 7을 계산해 보니 210분이나 되었다. 다시 시간상으로 계산해 보니 3시간 10분은 족히 걸릴 듯했다.
“오, 이런, 이런!”
이 장소에서 세 시간씩 허비한다는 것은 참으로 따분하기 그지없을 것 같은 생각마저 들기 시작했다.
‘어떻게 3시간을 견딘담! 그냥 집으로 돌아갈까? 그러면 예언을 듣지도 못하고 갈 텐데…. 그러면 이곳에 온 이유가 허물어지는데…. 하루 종일을 걸려서 온 것은 아니지만….’
일단은 내 인내심의 한계부터 시험해보기로 하였다.
나는 이미 수도 성경전문학교도 나왔고 각종 성경 퀴즈대회, 각종 성경 암송대회에서도 많은 입상을 해온 터였다. 특히 성경 퀴즈에선 이상하리만치 1등을 좀 많이 한 편이었다. 각 팀당 5명이 나오는 대회. 그땐 중등부, 고등부, 대학부, 부인전도회, 장년부, 5팀이 나오는 대회인 구약 성경인 이사야서 성경 퀴즈대회에서도 나는 전체 1등을 했다(대학부 팀으로). 특히 초등부, 중등부, 고등부, 대학부, 장년부 대항에선 나이상으로 대학부 출전자 중 다섯 명 중에 한 명인 우리 팀은 단체상을 받았다. 거기에서 난 5팀 전체에서도 1등을 한 기록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전국 성경 고사 대회에서도 수도노회 대표로 장년부에선 장려상, 우수상, 2등상까진 탔을 때였다. 나중엔 그 대회에서 초, 중, 고, 장년부 전체에서 특등을 하게도 되었다.
성경 말씀을 가르쳐 주는 곳이면 어디든지 쫓아다녔다. 대학생 성경 읽기까지도 섭렵하였다. 아침엔 본 교회인 전농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난 후에 종로5가에 있는 대학생 성경 읽기를 나섰다. 어느 땐 먹는 것도 부실한 데다 밥도 굶고 성경 공부 그것도 1대 1로 거의 저녁 나절까지 하다 보니 나의 몸체가 뒤로 나가동그라질 정도까지 되었다. 젊은 청춘이라서 가까스로 몸의 중심을 잡긴 했다. 우리 교회에서 하는 성경 퀴즈도 모자라서 이웃 교회에서 하는 성경 퀴즈대회라도 꼭꼭 알아내서 원정 성경 퀴즈대회 관람을 하고선 꼭 방청석 문제라도 맞추고 돌아와야만 직성이 풀리는 나였다. 나 자신도 성경 공부에 왜 그렇게 미치도록 매진하게 되었는지는 나 자신도 알 수가 없는 수수께끼였다. 그런 행운도 우리 교회에 유명하신 오영호 부목사님이나 김종훈 집사님들을 통해 이루어졌다. 우리 교회 성경 퀴즈 문제지도 모자라서 한강 건너의 멀리 노량진 교회까지 가서 성경 문제집을 가져다가 풀기까지 했다.

 

그곳에서 1년에 한 번 겨울이면 한 달씩 하는 성경대학 대학 과정도 졸업을 했다. 한 달씩이긴 하지만 그래도 삼 년이나 걸렸다. 노량진 교회 옆쪽의 교회인 송학대교회에서도 단기 선교대학을 한 달 과정으로 공부하고 졸업도 했다. 난 주일학교 교사도 했고 교회에서 성가대원으로도 부족하나마 약 2년 이상 한 적도 있었다. 나름 교회 쪽에서 알아야 할 공부는 한도를 초과할 정도로 열심히 한 내가 이곳에서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거지? 생각할수록 무모한 함정에 걸려들어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내 모습이 참으로 민망하기 짝이 없다.
지금이라도 언니와의 약속을 과감히 깨버리고 집으로 돌아갈까? 그러면 혹사당하는 이 괴로움에선 벗어날 수는 있을 텐데. 그까짓 돈 2천 원은 언니에게 그냥 되돌려주면 될 터이고…. 집으로 갈까도 생각을 해 보았다. 그러면 언니의 꿈이 사라질 것도 같아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마음속은 이미 생지옥이 된 지 오래다. 예언을 강의해 주시는 시간을 초반이나 중간에 넣질 않으시고 맨 나중에 두신 그 목사님이 원망스럽기만 하다. 마음속에선 자꾸만 불평의 소리가 검은 뭉게구름처럼 일어나고 있다. 30분씩 한 주제가 끝나기를 죽지 못해 기다리는 나의 몰골이라니…. 나 스스로 생각해도 가련하고 비참하고 미련하게도 생각이 들곤 한다. 무엇보다도 시간을 너무나 낭비하고 있다는 생각에 부아가 울컥울컥 나는데 그것을 참느라고 나는 너무나 힘이 들었다. 그날 내 기분은 혼쭐이 났다는 말이 훨씬 더 맞을 것이다.
드디어 장장 세 시간 십 분의 초신자들을 위한 부흥회란 지긋지긋한 강연은 끝이 났다.
나의 본연의 목표인 예언을 듣기 위해서 돈 2천 원을 봉투에 넣은 채로 줄을 서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의 순서가 되어서 언니가 내게 준 돈 2천 원이 담긴 봉투를 드린 후 머리를 조아리고 그 목사님께 안수를 받고 있었다. 그 시간이 예언 시간임을 처음 알게 되었다. 목사님의 예언이 시작되었다.
“참, 경제적이시군요.”
난 찔끔했다.
‘혹시 내 돈이 너무나 적어서?’
처음 말부터 재미가 일단은 없었다. 우선 그 목사님에 대한 그 어떤 기대감이 처음부터 없었다는 것이 더 사실적이었다. 그런데 뭐, 저를 보시고 경제적이시라고요. 내 원 참. 기분이 순간적이나마 더럽게 뜰 벗다. 저 그 돈도 사실은 없었거든요. 언니가 궁금해서 동생을 생각해서 쥐어준 돈이라구요. 그러니 어쩌라구요. 처음 말문이 터지는 그 순간부터 기분 나쁜 예언이 쏟아지는데 계속 좋은 예언이 쏟아지리라는 보장을 그 누가 그 순간에 하겠는가? 나는 별 기대감도 없이 그 목사님의 예언이 끝나기만을 빌고 있었다. 정말 기대하지 않고 있었는데 아주 희망적인 예언이 그 목사님으로부터 나왔다.
결혼과 동시에 온갖 금은보화가 쏟아진다고… 난 별로 유쾌한 감정이 아니었다. ‘당신이 무엇을 얼마나 많이 안다고… 당신의 예언은 잘못된 예언일 수도 있다고.’ 그 ○○○ 목사님의 예언은 다시 시작되었다. 나중에, 나중에 아주 훌륭한 집사님이 될 거라고. 난 그 예언도 시큰둥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내가 뭐 언제 온갖 금은보화를 원했느냐고? 그리고 결혼을 하고 싶기나 하다고 누군가에게 말을 한 적이 있느냐고? 그리고 내가 언제 집사, 그것도 훌륭한 집사가 되고 싶다고 입도 뻥끗한 적이 있느냐고?’
쳇, 난 그런 예언들 하나도 필요 없다고요. 난 지금요. 단지 신학교를 가고 싶은 것뿐이에요. 그 꿈이 이루어진다면 말이지요. 난요, 구약 성경책에 나오는 에스라 성경학자 같은 성경학자가 되고 싶은 마음인 걸요. 지극히 평범한 삶은 저의 삶이 아니길 바라거든요. 집으로 오면서도 그렇게 좋은 예언을 받았건만 나는 계속 투덜거리고 있었다. 미용실에 돌아오자 언니는 다급하게 물어왔다.
“넌 어떻게 말하든?”
나는 언니에게 그대로를 말해 주었다.
“너도 상당히 좋은 예언이네, 뭘.”
그런 일이 있고 난 몇 년 후에 난 예기치 못하게 결혼을 하였다. 난 꼭 신학교를 가고자 모자라는 학력을 채우고자 28살 때부터 검정고시라는 국가고시까지 총동원을 하였다. 고검, 대검을 2년을 잡았다. 처음 예정대로 그렇게 합격을 했더라면 최소한 칼빈 신학교라도 갔을 것이다. 수학이라는 암초를 만나서 그 기간이 배로 늘어난 것이다. 4년 그러다 보니 나도 대학이란 곳이 가고도 싶어졌다. 몇 번 도전은 했다. 그러나 여의치가 않았다.
35살 나이에 결혼할 때에도 나의 상황은 그리 좋진 않았다. 5남매의 맏며느리가 얼마나 어려운지조차 감지도 못한 채 정말이지 어떨결에 어이없이 결혼을 하고 말았다. 그래도 나의 뇌리 속에 알게 모르게 그 목사님의 예언은 품고 살았었을까? 좋은 일이 있을 때 더 그런 생각을 더 많이 하였다.
처음 시집을 오고 나니 증조할머니와 시어머님의 음식 솜씨가 장난이 아니었다. 이제까지 먹어 보지 못한 맛있는 반찬들이 언제나 즐비하였다. 입맛의 신세계가 날마다 날마다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것이 결혼과 동시에 온갖 금은보화가 쏟아진다는 것일까? 아닐 거야, 겨우 맛있는 반찬만 날마다 맛있게 먹는다고 온갖 금은보화가 쏟아진다고는 할 순 없겠지?
몇 년이 흐르자 새로운 방년 22세의 전라도가 고향인 동서가 또다시 생겼다. 가히 미스코리아 급의 미모였다. 이목구비가 뚜렷한 미인형이었다.
나보다 6년 먼저 결혼한 둘째 동서는 같은 고향 사람이었고 도무지 일을 겁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종교마저도 같았다. 설날이나 추석 명절, 제삿날이 다가와도 그 둘째 동서 때문에 그리 힘든지 모르고 그날들을 보냈다. 5남매의 그 시댁은 친척분들도 시어머님의 친구분들도 끝도, 끝도 없이 많아서 그런 날들은 정말로 식구들이 산더미처럼 많이 몰려오셨다. 한 번씩 손님들이 오셔서 식사를 하시고 나면 그 설거지감 역시 산더미처럼 쌓였다.
‘어떡하지? 저 많은 설거지를 어떻게 나는 해야만 한담! 잘못하다간 이 사기 그릇들을 다 깰지도 몰라.’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었지만 그 설거지를 하는 것은 언제나 거의 그 둘째 동서의 몫이었다. 아무리 많은 설거지감이 쌓인다 하여도 그 동서만 있으면 안심이 되었다. 5분도 안 되어서 소리도 없이 깨끗이 정리가 되어 맏동서인 나를 깜짝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말도 별로 없었지만 요리 솜씨도 증조할머니와 시어머님을 닮았는지 아니면 시집을 일찍 와서 습득을 빨리 했는지는 모르지만 음식 솜씨마저 빼어났다. 인물도 그만하면 누구에게 꿇리지 않는다. 삼동서가 알콩달콩 사는 것이 바로 그 온갖 금은보화가 아닐까? 나는 날마다 순간, 순간 그 생각들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었다. 어쩌면 결혼을 안 했으면 그런 생각들은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결혼을 하고 나서부터 차츰 시댁 식구들의 안 좋은 습성들이 자꾸만 보였다. 특히 시어머님의 술버릇이었다. 술을 들지 않고 계실 땐 호인 중의 호인이셨다. 술을 거의 매일 들고 오시다시피 하니 거의 날이면 날마다 밤이면 밤마다 술주정이 대단하셨다. 본인의 남편이 바람을 피워서 다른 여자분과 살고 있으니 그 한이 오죽하겠나 하는 생각에 너무도 가여워 보였다. 그 술주정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서 점점 더 심해지니 다른 모든 사람들을 짜증나게 만들었다. 첫째는 잠을 잘 수가 없다는 것이다. 다 같이 한 방에서 자는 것은 아니지만 바로, 바로 한 공간 안에 방이 있기 때문이었다. 며느리인 나는 친정집에서 한 번도 보지 않은 그 풍경이 처음엔 너무나 낯설기만 했다. 그러나 이해하려고도 무척 노력해 보기도 하였다. 난 어렸을 때부터 작가지망생이니까 라는 생각도 있었다. 시어머님 행동 하나하나가 다 글감이었다. 어떻게 아무리 슬퍼도 그렇지, 그렇게 술을 마실 수가 있으며 술을 마셨어도 그토록 술주정을 하셔서 모든 사람을 자신과 마찬가지로 잠을 못 자게 만드실까? 나중엔 정말이지 짜증스런 날들이 나를 참으로 많이 기다리고 있었다. 시어머님은 이성적인 사람이 아니라 정적인 분이라서 더 감내하기 어려웠던 것 같으셨다. 종교가 불교이신지라 그것은 자신이 극복할 수 없는 상처였을 것이다. 말이 불교가 신앙이지, 며느리인 내가 보기에는 술과 술주정이 더 종교 같아 보였다. 첫딸애가 태어났을 때 갓난아이가 잘 때 술을 드시고 오시는 날이면 술주정을 부리시는 시어머님 탓에 며느리요, 아기 엄마인 나는 두 배로 긴장감이 들곤 하였다. 갓난아기를 겨우 분유 먹여서 재웠는데 그 술주정 때문에 아이가 잠이 깰까 봐 엄마인 나는 노심초사였던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틈만 나면 쪼르르 친정에 와서 마냥 개기는 고명딸 시누이도 문제였다. 오면 혼자 오지도 않는다. 어느 땐 자신의 남편, 자신의 어린 아들까지도 데리고 나타나서 약 15일가량도 머물다가 갈 때도 있었다. 가뜩이나 많은 식구들로 힘든데 그 시누이는 좀처럼 미안해하지도 않는다. 밥때가 되면 같이 밥만 먹어주어도 부주이다. 가난하진 않았지만 그 많은 식구들을 해먹이려면 장난이 아니었다. 그래서 난 나대로 반찬값을 조금이라도 줄이려고 채소류를 많이 사서 반찬을 하기도 하였다. 신혼 초에도 그 시누이는 밤 1시쯤이 되어야 자신의 방에 가서 잠을 잘 때도 많았다. 이유는 단 하나, 자신의 방에 있는 작고 헌 텔레비전은 보기 싫고 나의 친정집에서 해준 커다란 TV를 보기 위함이었다. 비디오까지 딸려 있는 그 텔레비전을 보려고 절대로 자신의 방으로 가지를 않았다. 뭐 어때, 뭐 어때 하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무데뽀로 사는 그 시누이. 아무리 그래도 종일 다른 식구들 때문에 피곤하게 일한 올케언니, 늦게 결혼을 하였어도 그렇다 해도 이제 막 결혼한 신혼부부가 아니던가! 눈치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모든 것을 자기 중심으로, 다른 사람들의 눈치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만의 편리만을 위해 모르쇠로 살아가는 사람인지, 도무지 알 길 없는 소유자다.
그렇다면 막냇시동생은 또 어떠한가? 얼굴은 이 집에서 가장 잘생기고 착하기는 한데 늘 사고뭉치였다. 형들이나 자기 엄마에게 돈을 뜯어서 그 비싼 골프를 치러 다닌다. 자신은 돈을 벌려고 다니지도 않았으며 자신의 미래를 위해 공부도 열심히 하지도 않았다. 무면허에다 음주운전까지 하여서 자신의 목숨을 허공에다 무참히 내동댕이칠 뻔한 적도 있었다. 추운 겨울 날씨에 삼중추돌을 한 것이다. 자신의 차에 다른 사람들 차 두 대까지 상하게 한 후 자신은 길 위에 나가떨어져서 피를 흘리며 누워 있었다고 한다. 다행히 지나가는 사람의 눈에 발견되어 119 타고 응급실에 입원했다가 그 큰 병원에서 얼굴 수술을 크게 받고서 퇴원했다. 살아난 것이다. 엄청 잘생겼던 얼굴이 철심 같은 것을 몇 개 박고 나니 본래의 얼굴이 아닌 변질된 얼굴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나서야 좀 겸손해진 마음으로 바뀌었다. 그 집에서 그나마 열심히 사는 사람은 그래도 시어머님이시긴 하셨다. 본인의 옷 한 벌 제대로 사 입으시지 못하시는 그 시어머님은 그래도 늘 돈이 부족하신 분이셨다. 좀처럼 절약이란 걸 모르셨다. 시간 절약도, 음식 절약도, 모든 절약엔 젬병이었다. 화장실엔 늘 물이 철철 흘러넘쳤다. 깜빡이는 정신력 탓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습관 탓도 있었다. 세숫비누 한 장이 5일을 넘지 못한다. 세수를 하고 나서 물을 비우지 않고 나왔기 때문이다. ‘뭐, 이런 사람들이 다 있나’ 하는 의아심도 처음엔 생겼다. 어쩜, 저럴 수가 있을까? 난 그것이 궁금했다. 얼마든지 주의하면 모든 것을 아낄 수도 있으련만. 시집을 간 지 얼마 후에 그 집에서 쓴 첫 달 수도요금이 나왔다. 만이천 원이 나왔다. 웬지 수도요금이 많이 나온 느낌이 들었다. 언제나 대여섯 식구들이 있었고 늘 군식구들이 들끓긴 하였다. 시어머님의 남녀 친구들 = 1, 2, 3, 4, 5, 6 등등, 시어머님의 수양딸 1, 2, 그렇지만 37년 전에 그 요금은 너무나 과한 듯한 요금이었다. 물론 쓰지 않은 요금을 수도사업소에서 물릴 까닭은 없다.
어떤 방법을 사용하든지 수도요금을 최대한 아껴보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해보기로 결심을 해보았다. 그리고 실천을 해보았다. 경제권을 내가 쥐고 살림을 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한 번만이라도 그렇게 해보고 싶었다. 설거지를 하고 난 깨끗한 물을 큰 바게쓰에 모았다가 용변을 보고 나서 그 물을 사용했다. 세탁을 할 때 깨끗이 나온 물도 그렇게 사용하거나 거실이나 방바닥이나 계단 청소를 하거나 애벌빨래를 하였다. 아니면 운동화나 다른 신발류를 빨아 보았다. 그 물들로 2층으로 올라오는 계단 청소도 늘 해보았다. 그랬더니 다음 달 수도요금은 내가 쓸 물을 넉넉히 쓰고도 열 배나 줄인 요금인 1200원이 나왔다.
나는 그때 깨달았다. 물이든 시간이든 그 어떤 것들도 아낀 만큼 넉넉하면서도 자신에게 이로운 일들이 많이 생겨난다는 것을 크게 깨달았다. 시댁 식구들에게 그 소식을 알려드렸더니 처음엔 좀 놀라는 기색이었지만 그들의 습관은 좀처럼 바뀌지 않았다. 훗날 마포신문사 백일장에 나가서 절약이란 제목으로 수필을 써서 우수상을 받게도 되었다. 그 백일장의 취지 중에 가장 중요한 관건은 글을 쓰는 사람이 절약을 몸소 실천했는가 안 했는가를 글 속에서 찾아내는 것이 심사의 쟁점이었다는 사실도 심사위원장님을 통해서 나중에 상을 받기 직전에 알게 되었다.
아무리 시댁 식구들이 주먹구구식으로 살고 예의 없이 살아도 남편만큼은 그렇게 살지 않기를 나는 조금은 바랐다. 37살 늦은 나이에 결혼을 했건만 자신이 직접 벌어서 저축한 돈이 단돈 백만 원도 없었던 사람인 것을 결혼을 하고 나서야 직접 알게 되었다. 그저 둘째 시동생 이름으로 된 그 집에서 자신의 식구들과 자신의 말처럼 밥은 먹고 살아왔다는 말이 맞았다. 처음엔 무척이나 난 놀랐다. 37살까지 이 사람은 무엇을 하고 살아왔단 말인가. 그렇다고 공부를 많이 한 것도 아닌, 한낮 버스기사였을 뿐이었다. 결혼 전에 난 미용기술자였다. 일은 위험해도 버스기사를 좀 오래 한 사람들은 그래도 작은 집이라도 한 채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5남매의 막내도 아닌 맏아들인 사람이 이렇게 터무니없이 살아오다니! 기가 막혔다. 그나마 결혼을 하고 나선 좀 정신을 차린 듯도 했다. 자신의 버스기사 일을 그래도 열심히는 했다. 아들이 태어났을 땐 스스로 대타일도 서슴지 않고 하기도 했다. 그리고선 자기 스스로도 대견한지 자신의 친목회 때 나와 함께 갔을 때 친구들 앞에서 자화자찬을 하였다. 남편에게 무리한 돈을 요구한 것도 아닌데 남편은 이상한 말들을 내게 쏟아 놓았다.
“내가 번 돈을 내 맘대로 쓰는데 당신이 무슨 참견을 하느냐.”
난 성격이 남들에게 과도하게 요구하지 않는 습관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런 나에게 남편이란 작자가 하는 그 말을 세 번 이상 듣고 나니 온갖 정나미가 일단 다 떨어졌다.
‘이 남자는 그럼 왜 나랑 결혼을 한 거지?’
따져 보고도 싶지도 않았다. 남편이 주는 최소한의 한 달 돈은 고작 10만 원에서 20만 원이었다. 그나마도 결혼 초엔 시어머님이 경제권을 쥐고 계셨으니 단 한 푼도 내겐 돈이란 없었다. 난 결심했다. 이 남자랑 살기는 살되, 내가 쓸 돈은 분명히 필요할 텐데…
‘어떡한담! 그렇다고 좌절하진 말자. 분명히 방법은 있을 거야 있고, 말고.’
난 좀 더 시간을 아껴 쓰고 내게 보이는 막연한 시야와 내가 들을 수 있는 모든 희미한 청각을 다 동원해서라도 내가 알 수 있는 모든 정보를 나의 것으로 모을 작정을 했다. 큰돈을 벌기 위함은 절대로 아니었다. 오로지 나의 작은 자존심과 내가 필요한 돈만큼은 그 알량한 그 남자에게 더 이상 크게 기대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래, 그래. 그저, 그저 그런 정씨와 왕족은 분명히 다르지, 암. 다르고 말고. 난 이래 봬도 말이지요, 고려시대로 넘어간다면 임금 왕(王) 자 왕씨란 말이요. 어딜! 상놈도 아니고 양반도 아닌, 지극히 평범한 고무래정(丁)씨 주제에. 너 까불다간 나 왕족인 문화 유(柳)씨, 그러니까 왕건 태조의 후예인 나에게 언젠가 큰코 다칠 날 있을 줄 알으렸다. 지금은 까마득히 너는 알 길도 없을 테지만 말야.’
이런 생각들로 난 늘 내 생활에 모자라는 돈을 어떻게 마련하느라 머리를 써야만 했다. 결혼생활 중에 태어난 두 아이들을 데리고서 조용히 침착하자고 했지만 언제나 놀란 토끼처럼 사방을 살피고 다녔다. 세상 속에선 참 보이는 것이 참 많았다. 쉬임없이 귀 쫑긋하며 행동을 하니 들리는 것이 세상엔 참 많이 널려 있었다. 큰돈은 벌지 못해도 간간이 용돈은 혼자서 벌어서 쓸 수는 있게 되었다. 결혼 전에 미용사였으니 가끔씩 사람들의 머리를 잘라 드릴 수도 있었고, 파마를 해드릴 수도 있는 장점도 분명히 있었다. 가끔씩 용돈이 생겼다. 내가 가지고 있는 돈에선 최대한도로 절약을 하였다. 그런 와중에도 시댁 식구들의 모습을 보기 싫어도 나는 바라다보아야만 했다. 시어머님은 음식 솜씨가 워낙 뛰어나셔서 그런지 취직도 잘 되셨다. 자신이 직접 돈을 버시기도 하였고, 아들이 그동안 효도 못한 대가로 경제권마저 초기엔 시어머님께 맡겼다. 자신의 어머님께 필요한 돈은 타서 쓰라고…. 난 적은 돈이라도 누구에게 타서 쓴 적이 별로 없었다. 내가 적은 돈이라도 주었으면 주었지, 그게 나의 습관이었다. 시누이는 늘 친정에 와서 신세를 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지만 심지어 자신의 조카의 돌반지마저도 식구들이 다 외출한 뒤에 거의 다 훔쳐간 적도 있었다. 그 당시 금반지가 거의 됫박으로 한 됫박은 되었다. 그나마 자신도 일말의 양심이 있었는지 반 돈짜리 금가락지는 서너 개 남겨 놓고 훔쳐갔다. 그 중엔 셋째 삼촌이 사준, 그 제법 값이 나가는 금팔찌 한 냥도 있었다. 그 시누이가 나타나면 더럭 겁이 났다. 이번엔 저 도둑년이 또 무엇을 훔쳐갈 건가 노심초사해야만 했다. 이미 내 마음속엔 가족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남편이라도 성실히 살았으면 하였지만 아니었다. 결혼 전에 단돈 백만 원이라도 벌어 놓지 않은 상태였다면 결혼 후엔 좀 달라진 모습을 보여야만 하진 않았을까? 자신의 가족들을 위해서라도 말이지. 약간의 돈이 생기면 그 돈이 바닥날 때까지 다 쓰고 또 취직을 해서 돈을 벌고 늘 그런 식이었다. 시댁 식구들 하나하나를 보면 그 어떤 희망이란 단 한 구석도 보이질 않았다. 둘째 시동생과 셋째 시동생, 그리고 동서들을 제외하곤….
어느 날 나는 둘째 동서에게 결혼 전에 예언을 받았던 그 이야길 들려주었다.
“동서, 내가 말이야. 결혼과 동시에 온갖 금은 보화가 쏟아진다는 예언을 들었거든. 난 혹시나 하고 기대를 하긴 했지. 정말로 결혼을 하면 온갖 금은 보화가 쏟아지는 걸까 하고 말이지. 그런데 동서가 보다시피 내겐 골치 아픈 일만 생겨나잖아. 안 그래? 난 말야. 그 목사님 예언은 맞질 않는 것 같아. 동서는 어떻게 생각해?”
동서의 답은 꽤나 긍정적이었다.
“형님, 아직 다 사신 것 아니잖아요. 기다려 보세요. 누가 알아요, 나중에라도 온갖 금은 보화가 쏟아질지요. 아직은 꿈을 접진 마세요.”
그런 말이라도 해주는 동서가 고맙긴 했다.
무절제한 생각과 과소비로 물든 시댁 식구들과 남편의 모습을 보면 먼 훗날에조차도 그건 도저히 꿈에 불과한 것같이 느껴졌다. 난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내 안의 꿈을 더 단단히 다졌다. 꼭 돈이 아니더라도 나의 목표를 시간을 아껴서라도 쟁취하자고 마음을 먹었다. 나는 영어 문법의 한 종류인 분사구문의 문법 형태로 내 일생을 살아가고자 다짐을 하고 살아냈다. 이것도 하면서 저것도 해내는 삶. 노태우 대통령 당시 독학사 제도가 생겼다. 난 그때 이런 결심을 했다.
‘난 공부를 충실히 했든 하지 못했든 시험장엔 꼬박꼬박 가서 시험을 볼 것이다. 누가 알아? 내가 아무리 공부를 많이 했어도 내가 모르는 문제들이 즐비하게 나오면 떨어질 것이고 내가 아무리 공부를 하지 못하고 갔을지라도 아는 문제가 많이 나온다면 합격할 수도 있지 않을까?’
국어국문학과에 접수를 하고 해마다 시험을 보러 갔다. 그 예상들이 가끔씩 맞아 들어갔다.
남편이 주는 돈은 턱없이 부족했다. 난 결혼 전에 하던 아르바이트 일감을 신당동에서 가져왔다. 이름하여 자개 모자이크 일감. 그것도 부족하여 결혼 전에 하던 영창 피아노 의자 다리를 일감이 있을 때마다 그곳에 가서 사포로 곱게 닦고 약간의 돈을 벌어왔다. TV만 잘 보아도 목돈이 생길 때가 종종 있었다. SBS의 개통과 동시에 알뜰 살림 장만 퀴즈 대회, 도전 주부 퀸 대회는 비록 돈은 아니었지만 살림 장만은 제대로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KBS 방송국은 그 당시 내 삶에 신비로움을 가득 안겨주었다. 나는 돈을 벌기 위해서 현상공모나 백일장에도 끊임없이 도전을 해보았다. 터무니없는 시댁 식구들, 그리고 남편의 그 이상한 행동들은 내 가슴을 너무도 텅 비게 만들었을까? 나는 텅 빈 가슴 속을 채우려고 무단히도 뛰어다녔다.
자기가 번 돈이라고 내겐 쥐꼬리만큼 돈을 쥐어준 그 남편은 합병증으로 뇌경색으로 쓰러졌다. 그 후유증으로 당뇨 망막증과 녹내장까지 왔던 남편은 64세의 젊은 나이에 저세상으로 가버렸다. 그리고 시어머님도 그 후 몇 년이 지나자 이 세상을 떠났다.
좀 안타까운 것은 셋째 동서가 50세 중반에 췌장암으로 이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몇 개월이 지나서 그 동서의 신랑마저 이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그는 깡패 두목이라 사람들이 두려워했지만, 결국은 의리의 사나이 돌쇠로 이 형수의 마음에 남아 있는 사람이었다. 결국은 부모를 잘 못 만나서 삐뚤어진 길로 갔던 사람 같았다. 가장 잘해주고 싶었던 인물을 고르라면 그 말없는 어쩌다 한마디씩 내뱉는 진심 어린 그 시동생이었다. 그에게 해준 것은 그의 옷가지를 세탁기에 엄청나게 많이 빨아 준 것이 고작이었던 난 그런 형수였다.

 

남편이 저세상으로 가자 내겐 수많은 자유의 시간이 부여되었다. 다행히 아이들은 남편을 닮지 않고 나를 닮아서 근면성실하다. 어린 아이들을 등에 업고 이 일 저 일을 찾으러 다닌 탓에 37살 된 딸도 자신의 자식들을 옹골차게 기르며 살고 있다. 34살 된 아들은 미혼이지만 아주 성실하고 배려 깊은 청년으로 힘차게 살아가고 있다. 그 옛날 나는 하나님께 간절히 이런 기도를 드린 적이 있었다.
‘하나님! 제가 열심히 열심히 살 테니요, 이 아이들이 직장생활을 할 때가 되면 그 엄마의 자식들이니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고용주 분들께서 써주세요 네엣?’
지금 72세가 되어 나의 뒤안길을 되돌아본다. 그 희안한 시댁 식구들로 인해서 너무도 힘든 세월을 보냈지만 그 열매들은 더욱더 단단히 여물었나 보다. 큰돈은 아니지만 마음이 풍성한 부자다. 내 삶의 너무도 풍성한 열매들을 주렁주렁 맺으며 살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결혼과 동시에 온갖 금은 보화가 쏟아지는 것이라고 나는 굳게 믿고 있다.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분은 왕의 영화이니라.’〔잠언 25장 2절〕 말씀도 생각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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