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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죽 위의 염소

한국문인협회 로고 김태환(울산)

책 제목한국문학인 이천이십오년 겨울호 2025년 12월 7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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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는 염소가 한 마리 살고 있다. 고약한 일이다. 흐린 날에만 나타나는 흑염소 한 마리. 맑은 날에는 어디로 자취를 감추었는지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흐린 날에 무릎이 아파온다던 나이 든 노인들의 말을 생각해 보면, 염소는 내 무릎속에 숨어 있다. 흐린 날이면 어김없이 나타나 끊임없이 울어대는 염소 때문에 정신과에 다녀온 적이 있다.
“단순한 과민성 스트레스 증후군입니다. 날이 흐려지면 약을 드시고 하루 종일 주무시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인 것 같습니다.”
정신과를 찾아온 걸 급하게 후회했다. 내 병적에 정신과 진료라는 명예롭지 않은 기록만 남겼을 뿐, 얻은 게 하나도 없었다. 그런 처방쯤은 번거로운 기록을 남기지 않고도 얼마든지 얻을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누가 나에게 그런 상담을 해 온다면 몸에 별로 좋지도 않은 수면제 따위를 처방하지는 않을 것이다.
“술을 한 잔 드시고 친구들과 어울려 신나게 떠들고 노세요. 아니면 여자 친구라도 만나 기분 전환을 하시던가요.”
차라리 수면제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더 자극적인 처방을 내려 줄 수도 있다.
“하루 종일 먹고 즐기세요. 이왕이면 흑염소 고기를 드시면 더 낫지 않을까요?”
글쎄 모르겠다. 고기가 되어 뱃속에 들어간 염소가 얌전하게 있어 줄지는 장담할 수 없다.
그 흐린 날에만 울어대는 염소를 먹어치우지 않은 탓인지 요즘 들어 부쩍 증세가 잦아졌다. 어젯밤만 해도 그랬다. 늦도록 잠이 오지 않아 서재에서 지나간 일기들을 뒤적거리다 보니 갑자기 염소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나의 과거 생에서 현재와 거리가 멀어질수록 염소 울음소리는 더욱 커진다. 최근에 들었던 희미한 울음소리는 애팔래치아의 산장에서였다. 그것은 염소라기보다는 비슷한 울음소리를 내는 산양의 무리가 내는 소리였다. 겨울이라 먹이가 부족했는지 산장 가까이에 내려온 산양이 염소처럼 매애애하고 울었다.
“웬 염소 울음소리죠?”
같은 방에 있던 제니가 나에게 말했다. 하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들은 염소 울음소리가 현실에서도 존재했던 것인지 알 수 없다. 스스로도 그것은 내 기억 속에서 울리는 환청에 불과하다고 믿고 있었다. 제니가 들은 염소 울음소리는 현실에서 존재하는 것이 틀림없다.
“정말 염소일까? 한국에 있는 흑염소 말이야.”
“지금 뭐 하는 거야? 여기 산속에 와서도 고향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미국에 무슨 흑염소 따위가 있겠어. 저길 봐 봐. 산양 떼잖아.”
제니와 나는 동시에 니콜이 가리키는 창밖으로 시선을 가져갔다. 넓은 산장의 마당을 가로질러 소나무 숲이 시작되는 지점에 산양이 떼로 몰려와 있었다. 산장 관리인이 건초더미를 눈 위에 풀어 놓은 때문이었다. 산양 떼 사이로 드문드문 사슴이 섞여 있었다. 눈 때문에 먹이를 구하기가 용이하지 않은 탓인지 산양들은 많이 지친 듯 보였다.
애팔래치아의 그 산양들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 울음소리만으로 확실한 염소 울음소리를 찾아 나선 것인지 모른다. 애팔래치아의 산양 울음소리를 듣기 전에 나는 이미 서울에서 들려온 염소의 소식을 들었다. 나에게 그 소식은 놀라운 것이었다. 염소가 사라진 것은 벌써 사십오 년 전의 일이었다. 사십오 년이라면 반세기에 가까운 시간인데 사라졌던 염소가 그 오랜 시간을 어디에 갔다가 나타났단 말인가.
“정말 그가 나타났단 말이야?”
“정말이라니까 그러네. 나타난 게 아니고 서울에 쭉 같이 있었지. 아직까지 정정하다니까. 궁금하면 네가 한 번 다녀가. 사는 곳도 알고 있으니까. 김포의 아파트에 살고 있어.”
서울에 사는 친구 동석의 전화를 받고 밤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 염소가 같은 염소인지 확신할 수도 없었다. 오랜 세월이 지나고 나니 서로의 기억력에 상당한 간극이 벌어져 있음도 느낄 수 있었다.
염소는 중학교 시절 물리를 가르치는 선생이었다. 그는 누가 보아도 별명이 염소임을 단번에 알아볼 정도였다. 턱끝에 까만 반점이 있었는데 그 반점 안에 까만 털이 대여섯 가닥 자라고 있었다. 털을 길러도 깎아도 여전히 염소가 연상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동창생 녀석들은 황낙준이라는 본명은 잊어도 염소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니 염소라는 별명은 우리가 지은 것도 아니었다. 선배들이 벌써부터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
그 염소를 죽인 것이 나였다. 나는 염소를 죽이고 나서 도피의 목적으로 미국이란 나라를 선택했다. 20년이란 세월이 지나고 나서 한국의 동창생 녀석에게 전화로 염소의 소식을 물었더니 우리가 중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가는 바람에 소식을 모른다고 했다. 나는 염소의 시체가 저수지 바닥에서 떠오르지 않았다는 사실에 적이 안심했다. 하지만 그가 아직 멀쩡히 살아 있단 소식에는 아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염소가 살아 있다니, 그럼 내가 죽인 것은 누구란 말인가? 혹시 친구 녀석이 다른 선생을 염소라고 잘못 기억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친구는 염소의 본명이 황낙준이라는 사실까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염소를 모를까 봐. 물리 선생이었는데 순 엉터리로 가르쳤잖아. 공부 좀 한다는 녀석들은 과학 시간에 아예 다른 공부를 하다가 들켜서 매를 맞기도 했고. 성질은 또 얼마나 드러웠니. 쇠자를 들고 다니다가 마음에 안 드는 녀석은 머리통을 내리쳤지. 날을 세워서 말이야. 나도 그 바람에 머리 두피가 한 번 찢어진 적이 있었는걸. 요즘 같았으면 바로 감옥으로 가야 할 짓을 한 거지.”
“확실한 것 같군. 그런데 그 염소가 아직까지 살아 있었더란 말이지?” 
“그렇다니까. 나이가 팔십도 안 되었어. 아직 정정해 보여.”
전화를 받으면서 정수리에 손을 대보았다. 얼마 남지 않은 머리카락 밑에 흉터가 잡혔다. 바로 염소의 쇠자에 맞아 두피가 찢어졌던 흉터였다. 나는 전화를 끊고 나서 며칠 동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제니와 니콜과 함께 가을에 약속해 놓았던 애팔래치아 산장으로 여행길에 나서면서도 줄곧 염소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애팔래치아산의 야생 산양은 생김새가 한국의 흑염소와 비슷했다. 다만 털빛이 다를 뿐이었다. 나는 오래전부터 보지 못한 염소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초점을 알 수 없는 노란색 눈동자가 먼저 떠오른다. 오랫동안 들여다보면 저승사자의 눈을 보고 있는 듯했다. 기분이 별로였다. 모피로 쓰기에는 너무 거친 까만 털과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물결처럼 결이 진 작은 뿔. 그리고 염소의 특징이랄 수 있는 좁은 턱끝의 수염. 그 모든 것을 흩어 놓았다 다시 조립을 해보아도 기분 좋은 모습으로 만들어 내기는 힘들었다.
애팔레치아의 산장에서 돌아와 곧바로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염소가 살아 있다면 내 눈으로 꼭 확인하고 싶었다. 비행기가 인천공항에 착륙하기 전부터 폭우가 쏟아졌다. 안전 착륙을 장담할 수 없을 정도의 대단한 폭우였다.
비행기가 안전하게 활주로에 착륙한 다음에 누군가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한마디 했다. 생각해 보니 맞는 말이었다. 택시를 타고 공항을 빠져나오는데 빗줄기는 점점 더 강해져서 숫제 양동이로 퍼붓는 듯했다.
“비가 이렇게 퍼붓는 걸 보니 머잖아 봄이 오려나 봅니다.”
택시 운전사는 비가 오는 것이 자신의 책임인 양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창문으로 줄줄 흘러내리는 빗물 때문에 사십오 년 만에 만나는 고국의 풍경이 마구 뭉뚱그려져 휙휙 지나갔다.
택시 안에서 동석의 전화를 받았다. 급한 일 때문에 공항에 나가지 못해 미안하다고 했다. 그 대신에 일이 끝나는 대로 호텔로 찾아갈 것이라고 했다. 조금 서운한 것도 사실이었지만 개의치 않기로 했다. 흐르는 빗물 속에 그와 둘이 갇혀 있었더라면 정말로 할 말이 많았을 것 같았다. 빗속에서 염소가 맹렬하게 울었다. 동석도 서울 하늘 아래 어디에선가 염소 울음소리를 듣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동석과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한 마을에 같이 살았다. 북쪽으로 큰 산을 등지고 형성된 작은 마을이었는데 동석과 나는 같은 산의 정기를 받고 태어난 셈이었다. 마을은 큰 산으로 오르기 시작하는 경사지에 있어서 이름이 윗말이었다. 마을 앞을 흐르는 냇물을 따라 내려가면 점점 넓은 논들이 나타났다. 우리 마을은 산 아래의 평야에 자리 잡은 아랫마을보다는 빈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빈촌이었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무렵에 읍내로 나가는 마을 아래에 저수지를 만들었다. 우리가 학교에 갈 때 개울 옆으로 다니던 길은 물에 잠기고 말았다. 그 대신에 산허리를 깎아 만든 신작로가 새로 생겨났다.
저수지가 만들어지던 해에 읍내에 중학교가 새로 생겼다. 그전에는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중학교에 가기 위해 대처로 나가야 했다. 대처에 일가붙이라도 있는 아이들은 중학교에 갈 수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아이들은 곧장 서울로 올라가 공장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나도 읍내에 중학교가 생겨나는 바람에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던 행운아였다.
그런데 산골살림으로는 중학교 공납금을 대는 일도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내가 중학교에 입학하던 날 아버지는 읍내 장에 가서 염소 한 마리를 사왔다.
“이걸 네가 거두거라. 이걸 키워 네 중학교 공납금을 해결해야 한다.” 
애헤헤헤. 아마 그때 처음 들었던 염소 울음소리가 아직까지 머릿속에 저장되었다가 고삐가 풀리면 뛰쳐나오는 것 같다. 우연의 일치인지, 한 마을에 사는 어른들 둘이 작당을 한 것인지, 동석에게도 한 마리의 염소가 할당되었다.
우리는 학교 가는 길에 염소를 끌고 저수지 방죽까지 갔다. 방죽 위에 쇠말뚝을 박고 염소를 매어 놓고 학교에 갔다. 방죽은 위에서부터 경사면 아래로 제법 무성한 풀밭이 형성되어 있어서 염소를 매기에 아주 적당했다. 큰 나무가 없어서 염소가 나무에 줄을 감고 목을 매 죽을 염려도 없는 안전한 곳이었다.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아 들고 온 쇠말뚝을 땅에 박은 다음 염소를 맸다. 염소는 멀어져 가는 어린 주인의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보며 가볍게 울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아침 방죽의 풍경이 한눈에 떠오른다.
학교에 가면 염소는 까맣게 잊어버리기 일쑤였다. 마지막 교시는 되어서야 슬그머니 염소 걱정을 하기도 했는데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아주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수업시간에 갑자기 날씨가 변해 비라도 뿌리기 시작하면 수업에 집중할 수 없었다. 나무 그늘이라도 있는 곳이라면 비를 피할 수도 있겠지만 밧줄에 매인 염소는 대책 없이 비를 맞고 견딜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날이 흐리기만 하면 염소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은 그때 받은 스트레스의 연장선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비보다 더 운이 좋지 않았던 것이 염소 선생과의 만남이었다. 처음엔 그의 별명이 염소인 것도 몰랐었다. 하필이면 그가 우리 반 담임이었다. 우리 반에서 그의 쇠자에 머리를 얻어맞고 피를 흘리지 않은 학생은 아무도 없었다. 반장이라는 녀석도 그가 가르치는 과학 수업에서 잘못된 부분을 물고 늘어지다가 결국은 쇠자에 얻어맞아 두피가 찢어지고 말았다.
나의 경우는 최악이었다. 나는 염소를 팔아야 공납금을 낼 수 있었는데 그게 날짜를 맞추기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단순하게 장날을 맞추지 못해 그런 것은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정이 들기 시작한 염소를 팔기가 싫었다. 동석의 염소는 일찌감치 팔려가 공납금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날짜가 자꾸 미루어지자 방과 후에 염소에게 끌려가 쇠자에 얻어맞았다. 두피가 찢어지지 않은 날은 재수가 좋은 날이었다.
그는 찢어진 머리를 움켜쥐고 있는 나에게 염소 수염을 들이대며 징그럽게 웃었다.
“어때? 많이 아프지? 그러니 제발 거짓말은 그만하라고 자슥아. 공납금 언제 가져올래?”
“모르겠습니다. 아버지가 염소를 팔아 와야 됩니다.”
“뭐라꼬. 니 지금 염소라고 했나? 이 짜슥이.”
아차 싶었지만 이미 때가 늦었다.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의 눈알이 진짜 염소 눈알처럼 노랗게 뒤집어졌다. 머리를 감싸 쥐고 있던 손등 위에 쇠자가 내려왔다.
공항을 출발한 택시는 빗속을 뚫고 롯데호텔에 도착했다. 잠시 겨울 빗속을 걸어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참았다. 객실에 들어와 커튼을 여니 어둠이 밀려오고 있었다. 빗줄기는 쉬지 않고 창문 유리를 타고 흘러내렸다. 짐을 대충 풀고 샤워까지 마치고 난 뒤에 동석이 나타났다. 그는 모 일간지 기자라는 사람을 데리고 나타났다.
“이게 얼마만인가. 꼭 사십오 년 만이군.”
환갑이 지난 노인의 모습에서 열다섯 중학생을 찾아내는 게 쉽지 않은 노릇이었다. 녀석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세월이 흐르긴 흘렀나 보이.”
동석은 먼저 다가와 나를 끌어안았다. 그의 뒷통수에 백발이 된 머리칼이 낯설었다.
“이 친구야. 사람이 어찌 그리 매정한가. 미국이 한 번 가면 못 돌아오는 그런 나라가 아니잖아. 가끔씩은 들어왔어야지.”
동석의 입장에서는 맞는 말일지는 몰라도 나에게는 가당치 않은 말이었다. 이 나라 이 땅에서 있었던 일을 하나도 남기지 말고 잊어버리자고 선택한 미국행이었다.
“이 양반은 누군데?”
“아, 문화일보의 김인수 부장인데 우리 아들하고 친분이 있는 친구일세. 자네 이야길 들어보려고 내가 일부러 불렀네. 괜찮겠지?”
“먼저 불러놓고 괜찮냐고 물어보는 건 미국식으로는 노 땡큐일세.”
동석이 기자를 부른 건 나 때문이 아니었다. 보나마나 자기 아들인 김선규가 미국에서 잘 나가고 있다는 걸 알리고 싶었을 것이다. 뉴욕의 교민신문에도 나와 김선규의 이야기가 실린 적이 있었다. 뉴욕대의 브루클린 캠퍼스에서 한국인 교수 두 명의 이야기가 교포사회에서 회자된 적이 있었다.
“우리 아들이 미국까지 가서 자네를 만난 건 기적이나 마찬가지야. 안 그래?”
“그건 그렇지. 그런데 그 염소 선생이 살아 있다는 게 정확한 거야?”
나는 갑자기 이야기의 방향을 염소에게로 돌렸다. 문화일보의 편집부장이라는 자가 나와 동석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염소 선생은 또 누구냐는 표정이었다.
“아하, 자네가 궁금한 모양이군. 우리 중학 시절에 염소라고 대단한 선생이 있었어.”
“아, 네. 존함이 어떻게 되시는데요?”
“대단한 건 아니고 함자가 황낙준 선생이었소.”
“모두 시장할 텐데 밖에 나가 식사라도 하면서 이야기합시다.”
셋은 객실에서 나와 근처의 고급 한식당으로 갔다. 갖가지 음식이 나오는데 내가 알고 있는 음식은 김치 외에 몇 가지뿐이었다. 입에 맞는 것도 별로 없었다.
식당 창문 밖으로 거세던 빗줄기가 차츰 가늘어지고 있었다. 우리는 기자가 있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고 옛날 이야기를 나누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궁금한 이야기가 너무 많았다.
우리가 초등학교 시절에 만들어진 저수지에 관한 이야기가 단연 많았다. 염소를 저수지 방죽 위에 매어 놓고 중학교를 다닌 때문이기도 했다. 나의 아버지가 리어카를 끌고 읍내에 나가 비료를 사서 싣고 오다가 저수지에 빠져 나오지 못한 것이 나에게는 가장 큰 아픔으로 남아 있었다. 동석도 그 사실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너희 아버지를 끌고 들어간 그 리어카 말이야. 이십 년 전에 찾았지 뭐냐.”
“그게 무슨 말이야? 리어카를 찾다니?”
“리어카를 몰라? 너희 아버지가 무거운 리어카를 이기지 못해 저수지에 끌려 들어간 거였어. 장례를 치르고도 리어카는 그대로 저수지 안에 있었지. 이십 년 전에 저수지 물을 처음으로 모두 빼낸 적이 있었어. 나도 이미 서울에 올라와 있었던 때였는데 고향에서 전갈이 왔지 뭐야. 저수지 물을 빼면 그동안 저수지 안에서 자란 물고기를 엄청나게 잡을 텐데, 그걸 팔아 동네잔치를 열자고 해서 내려갔었지.”
“그래서? 저수지 물을 몽땅 뽑았으면 물고기가 엄청났겠네?”
“웬걸. 모두 그렇게 생각했지. 대처에 있는 민물고기 장수가 활어차를 대기하고 기다렸지 뭐야. 그런데 잡힌 물고기는 한 바가지가 되지 않았어.”
“그럴 리가 있나. 우리가 중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도 큰 고기가 물 위로 첨벙첨벙 뛰어오르는 걸 보았는데.”
“그랬지. 그런데 큰 물고기는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 거야.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 물고기들은 미리 땅속으로 파고들어 다른 곳으로 몸을 숨긴다고 하드만.”
“그럴 수도 있는 이야기네.”
“물고기 대신 건져낸 것이 무엇이었는지 아나?”
등골에 식은땀이 흘렀다. 갑자기 그런 것이 아니라 아까부터 저수지 이야기를 할 때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염소 선생을 죽인 것이 저수지 방죽 위였고 시체를 감춘 곳이 저수지 물속이기 때문이었다.
염소를 키워 중학교를 졸업하자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다. 아버지가 저수지에서 익사 사고를 당한 뒤라 타처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일은 꿈도 꾸지 못하고 있었다. 졸업식을 마친 며칠 뒤 할 일이 없어 저수지 둑 위로 산책을 나갔다. 삼 년 동안 염소를 매던 곳이었다. 이미 염소는 팔려 나가고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방죽 위는 을씨년스러웠다. 어린 자식들을 남겨 놓고 물속으로 들어가 버린 아버지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하필이면 그때 염소 선생이 우리 마을에서 걸어 나오는 것이었다. 손에 종이봉지를 들었는데 무척 가벼워 보였다. 나는 도로 옆의 방죽에 앉아 있다 염소를 보고 일어서 인사를 했다.
“여긴 웬일이냐?”
“그냥 바람 쐬러 나왔습니다.”
“졸업했다고 하릴없이 바람이나 쐬러 다녀서야 쓰겠냐?”
“그래서 우짜라고요?”
나도 모르게 울화통이 터졌다. 졸업을 했으면 그만이지 내 인생에 책임을 져주지도 못하는 선생이 무슨 잔소리를 할 자격이 있다고 입을 놀리는가 싶었다.
“뭐시라고? 이 새끼 좀 봐라. 이제 졸업했다고 선생이 눈에 뵈지 않는가 보네.”
“그렇소. 내 눈엔 뵈는 게 없소. 또 쇠자로 때리게요?”
“이 새끼가….”
염소가 종이봉지를 내던지고 손을 번쩍 들었다.
“쇠자가 없어서 어쩌시려구요. 잠시 기다리시소. 내가 쇠자 대신 더 든든한 걸 갖다 드릴 테니.”
마지막 염소를 팔고 나서 쓸모가 없어진 쇠말뚝을 땅에서 쑥 뽑아 들었다.
“자, 이걸로 한 번 때려보소. 대가리가 터져 죽게.”
“이 새끼. 이거 미친 놈 아닌가?”
염소의 손바닥이 뺨을 때렸다. 눈에 불꽃이 튀었다. 순간 뾰족한 쇠말뚝이 염소의 명치 끝을 파고들었다.
염소가 쇠말뚝을 움켜쥐고 격렬하게 울었다. 애헤헤헤헤.
나는 염소를 쇠말뚝이 박힌 채로 저수지 물속에 처박았다. 그리고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뛰었다. 뒤에서 염소가 따라오며 계속 울어댔다. 애헤헤헤헤.
“그래 물속에서 뭐가 나왔는데?”
동석은 바짝 다가앉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처음에 너희 아버지를 끌고 들어간 리어카가 나왔지.”
“그 다음엔.”
“뭐가 나왔을 것 같아?”
“…….”
입이 바짝 타들어 갔다. 시체가 물속에서 20년을 견디면 어떻게 될까?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아마 물고기 밥이 되어 몇 개월이 지나지 않아 살점은 모두 없어지고 백골만 남아 있지 않을까 생각되었다. 그렇다면 백골은 발견되었을까?
“죽일 놈들.”
“왜?”
“폐타이어가 15톤 트럭으로 한 차가 나왔지 뭐야. 오라지 울 놈들. 밤중에 지나가다 쏟아붓고 내뺀 거지.”
온몸에 힘이 쫙 빠져나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맥 빠진 목소리로 동석에게 물었다.
“그리고 더 나온 건 없었어? 쇠말뚝 같은 거.”
동석이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어린 시절 함께 방죽에 염소를 몰고 가던 철부지 어린 모습이 아직까지 남아 있었다.
“폐타이어가 한 트럭이면 됐지 뭐가 더 나와야 해?”
“혹시 사람의 백골 같은 건 안 나왔나?”
“이런 제길. 아주 소설을 써라.”

 

다음 날 아침을 마치고 프론트에 나가자 조간신문을 읽을 수 있었다. 문화면에 내 얼굴이 대문짝만 하게 나와 있었다. 미국 교포사회에서 성공한 자랑스런 한국인이란 제목 밑에 두서없는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그런데 모두 읽고 보니 내 이야기보다는 동석의 아들 김선교 교수에 대한 이야기가 중심이 되어 있었다. 사실 나보다는 내가 길을 열어준 김선교가 교포사회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사실이 그렇기는 하지만 나를 앞세워 자신의 아들 자랑을 하려는 동석이 좀 얄미웠다.
하지만 정작 기가 막힌 것은 마지막 문장이었다. 내가 중학교 때 은혜를 입은 황낙준이란 은사를 찾아보고 싶어 귀국했다는 내용이었다. 덧붙여 황낙준이 참교육자로 뽑혀 대통령상까지 수상했다는 것이었다. 기가 막힌 노릇이었다.
동석은 하루 종일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저녁때가 다 되어서야 전화가 걸려왔다. 하루 종일 예전의 중학교 동창생들을 끌어모으느라 바빴다고 했다. 내일이면 열 명 가까운 친구들이 롯데호텔로 모일 거라고 했다. 더불어 팔순이 가까워진 염소선생도 모시고 오기로 했다고 했다. 나는 이게 다 무슨 일인가 어안이 벙벙했다. 꼭 염소를 만나야 할 필요는 없었다. 그가 살아 있다는 사실만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나의 인생에서 그는 살아 있어서는 안 될 인물이었다.
나는 염소의 시체를 저수지에 처박고는 읍내를 향해 마구 달렸다. 정확하게는 읍내 입구에 있는 교회를 향해 달렸다. 그 교회에 미국에서 온 제임스라는 선교사가 있었다. 그는 가끔씩 윗마을에 선교 활동 차 들어왔는데, 나와는 방죽에서 몇 번 만나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는 염소와 양의 차이점에 대해 명료하게 구분을 지어 설명해 주었다. 우리는 왜 어린 양처럼 살아야 하는가를 설명했다.
나는 그에게 어린 양처럼 달라붙었다. 어차피 나를 이끌어야 할 목자들이 모두 물에 빠져 저세상으로 떠났으니 어쩌란 말인가. 누군가는 나를 이끌어 주어야 하지 않겠나 생각했다.
“나를 길 잃은 양이라 생각되시거든 제발 미국으로 데려가 주세요.” 
그는 기꺼이 방죽 위의 염소 치기 소년을 미국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나는 떠나면서도 다시는 이곳에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 독한 마음을 먹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호텔을 빠져나왔다. 택시를 잡아타고 아무 곳이나 아담한 저수지가 있는 시골로 가자고 했다. 기사는 자기 고향이 가까운 음성인데 그곳의 저수지로 가도 되는가 물었다. 좋을 대로 하라고 했다. 사십 분 정도를 달려서 택시가 도착한 곳은 음성과 가까운 작은 마을이었다. 내가 원했던 대로 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골짜기를 막아 놓은 저수지였다.
“이 저수지를 만든 지가 얼마나 되었소?”
“글쎄요. 제가 아주 어렸을 때니까. 한 오십 년쯤은 되지 않았을까요?”
“예전에 여기 방죽 위에 염소를 매어 놓지 않았나요?”
“그랬었지요. 예전엔 저수지 방죽만큼 염소를 매기에 좋은 곳도 없었지요.”
“흠. 어느 곳에나 염소를 키우는 소년이 있었다는 이야기군.”
저수지 방죽 위에 올라 사방을 휘둘러보았다. 가벼운 바람에 저수지 수면이 은빛으로 반짝거렸다. 일렁이는 수면을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자니 눈이 시려 왔다. 잠시 눈을 감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이 저수지는 무슨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을까? 설마 폐타이어를 한가득 담고 있지는 않을 것 같았다. 사람과 함께 리어카를 끌어들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름대로의 이야기는 가지고 있을 것 같았다. 주머니 속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택시기사의 고향이라는 원남면 소재지에서 간단한 점심요기를 하고 서울로 차를 돌렸다. 오후가 되어 호텔에 도착하자 중학교 동창생들이 여남은 명 모여 있었다. 동석이 앞에 나서서 호들갑을 떨었다.
“이 친구가 바로 미국까지 가서 우리 학교의 이름을 빛낸 한동기란 친구일세.”
“허허. 그러고 보니 옛날 얼굴이 생각나네. 많이 늙었구먼.”
“야, 이놈아, 네 얼굴이나 한 번 살펴보고 그딴 소리해라. 쪼그랑 할배야.”
“사돈 남 말 하고 있네. 너는 뭐 이팔청춘인 줄 아냐?”
그때였다. 호텔 보이의 안내를 받으며 진짜 허리가 꼬부라진 할아버지가 우리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멀리서 보기에도 좁은 턱에 까만 점이 돋보이는 바로 그 염소였다. 염소는 우리들 앞에 잠시 허리를 펴더니 곧장 나에게로 걸어왔다. 온몸이 얼음장처럼 얼어붙었다. 혹시 이곳이 이승이 아닌 저승인가 하고 사방을 둘러보기까지 했다.
“네가 바로 한동기구나. 어제 신문에서 봤지. 어쨌든 대견하다. 아직까지 나를 기억해 줘서 고맙기도 하고.”
나는 바짝 얼어붙어 있어 뭐라고 대꾸할 말을 잊어버리고 멍하니 서 있었다.
“다, 당신이 진정 염소란 말이오?”
“이런 고이헌 녀석.”
동창 녀석들이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녀석들이 웃는 소리가 염소가 우는 소리로 들렸다. 한참 동안 배를 잡고 웃던 녀석들이 일제히 웃음을 멈추었다.
“야. 뭘 해! 은사님을 뵈었으면 큰절을 올려야지.”
한 녀석이 다가와 강제로 내 머리를 앞으로 처박았다. 하는 수 없이 힘에 밀려 염소 앞에 무릎을 꿇었다. 염소가 들고 온 가방을 열고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나는 염소가 들고 있는 물건의 실체를 알아보고 깜짝 놀랐다. 그 옛날 방죽 위에 염소를 맬 때 사용하던 쇠말뚝이었다. 
“한동기, 이게 뭔지 알아보겠나?”
“…….”
나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그러자 염소가 아주 낮게 깔린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때는 우리들 모두가 염소였어. 줄을 매서 앞에서 당겨도 끌려오지 않으려고 버티고 뒤에서 회초리를 휘둘러도 말을 듣지 않았지. 나는 아직까지 염소를 길들이는 방법을 모른다. 교육의 목표는 개인의 행복 추구가 아니라 원만한 사회 구성원을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요즘의 교육 방식이 예전보다 나아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염소의 목소리는 너무 느리고 또렷했다. 그가 내뱉는 단어 하나하나가 쇠자가 되어 머리를 내려치는 것 같았다.
“네가 미국 사회에서 자리 잡은 것은 축하받을 만하다. 하지만 나는 그걸 성공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누구나 다 그렇게 길을 걸어갈 뿐이다.”
나는 고개를 들어 염소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악마의 눈알 같은 주황빛 눈동자는 보이지 않고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갈색 눈동자에 이슬 같은 것이 맺혀 있었다. 평생을 살아오면서 내 앞에서 자신의 속을 뒤집어 보여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우리는 모두가 거친 바위 절벽을 마주하고 있는 염소들이다. 자만하지 마라.”
염소가 내민 쇠말뚝을 양손을 내밀어 무겁게 받아들었다. 아주 오래전에 살의를 품고 그의 손으로 넘어갔던 쇠말뚝이 다시 주인의 손으로 돌아온 것이다. 하찮게 생각한다면 아무것도 아닌 쇠말뚝 하나였다. 하지만 한 사람은 실물을 간직하고 살았고, 또 한 사람은 기억 속에 담고 살았다.
“우리들만큼 지독한 사람들이 지구상에는 없을 것이다. 같은 형제들끼리 총칼로 서로 죽이는 걸 서슴지 않았던 사람들이다. 전후 세대라고 하지. 너희들은 혼돈 속에서 태어난 불행한 세대였어. 내가 너희들과 다른 것은 나는 전쟁 전에 태어났다는 것뿐이다. 지금은 뭐가 달라져 있을까? 아직도 이 나라는 수십만 명의 청년들이 같은 동포를 죽이겠다고 총을 들고 서 있어.”
염소의 목소리는 낮고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아무도 염소 선생의 말에 대꾸하는 자가 없었다.
“입으로는 정의를 이야기하고 평화를 떠들어대지만 우리들 가슴 깊은 곳에는 감당할 수 없는 못된 뿔을 가진 짐승 한 마리가 웅크리고 있다.”
“그래서 쇠자로 머리통을 때린 겁니까?”
“한동기!”
염소가 정면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릴 적 보았던 소름끼치는 염소 눈빛이 이글이글 불타는 것 같았다.
“염소가 미국에 가면 양이 되는 거야? 하긴 거긴 서양이니까.”

 

미국으로 돌아와서도 한동안 정신을 가다듬을 수 없었다. 내가 평생 동안 마음의 빚으로 짊어지고 있던 염소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다시 정신과를 찾아갔다. 담당 의사는 아직까지 염소 울음소리가 들리느냐고 물었다. 소리는 들리지 않는데 그동안 한국에 가서 겪고 온 일은 어떻게 정리를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고충을 호소했다.
“과거의 기억과 현실이 일치하지 않는군요?”
“그런 셈이죠.”
“그밖에도 염소에 얽힌 이야기가 더 있습니까?”
“한국에 다녀온 뒤로 내가 무기력한 양과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나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의사는 고개를 좌우로 덜렁덜렁 흔들었다.
“당신은 회복할 수 없는 강력한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군요. 당신은 가해자이면서 피해자 역할을 하고 있어요. 그 반대일 수도 있고요.”
“…….”
더 이상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의사는 대답을 기다리다 지친 것인지 먼저처럼 똑같은 처방을 내렸다. 다시 한 번 정신과에 온 걸 후회했다. 그 정도라면 내가 나에게 얼마든지 처방을 내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의사에게 치료를 위해 해야 할 이야기는 따로 있었다.
염소 선생이 우리 반 수업을 하고 있을 때 비가 내렸다.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였다. 나는 방죽에 매어 놓은 염소 걱정에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연신 창밖을 내다보며 비가 내리는 양을 가늠하고 있었는데 운동장 한가운데에 염소가 나타났다. 비가 내리자 스스로 헐거워진 쇠말뚝을 뽑고 내가 있는 학교까지 달려온 것이다. 한 번도 와 본 적이 없는 학교에 어떻게 찾아온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염소는 운동장 한가운데서 큰소리로 울었다. 수업 중이던 전교생이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어 염소를 내다보았다.
“와, 염소다!”
학생들이 외치는 소리에 염소 선생이 수업을 중단하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저 염소 새끼가 왜 학교까지 들어온 것이냐?”
“저거 한동기 염소입니다.”
“뭐라고 한동기 염소?”
“네.”
“야, 한동기 너 뭐하냐. 빨리 나가서 염소 붙들어 매지 않고.”
교실에서 뛰쳐나가 운동장 한가운데에 있는 염소를 붙들었다. 고삐를 잡고 비가 맞지 않는 교실 처마 끝으로 잡아끌었다. 웬일인지 염소는 끌려오지 않으려고 네 다리를 바닥에 끌며 버티었다. 처음보다 울음소리가 더 높아졌다. 교실 창문으로 전교생이 그 모습을 지켜보며 웃었다. 빗줄기는 더욱 세차게 염소와 나를 두들겨댔다. 금방 교복을 적시고 속옷까지 흠뻑 젖었다. 학교 운동장에 염소 울음소리가 교실에 있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섞여 이상한 화음을 만들어냈다.
그 후로 무슨 일이 더 일어났는지 알지 못했다. 아마 스스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부분을 가위로 잘라낸 듯한 느낌이었다.

 

축 처진 몰골로 집에 들어오자 제니가 반갑게 맞았다. 제니는 나의 연구실 조수로 있다 나와 결혼한 한국계 혼혈이었다. 우리는 만나서 사귀는 동안에 아이는 가지지 않는 조건으로 결혼했다. 나는 자녀에게 책임을 져야 한다는 압박감에서 벗어나기 힘든 상태였다. 제니는 그런 나의 주장을 충분히 이해해 주었다.
“아직도 염소 울음소리가 들려?”
“조금.”
“그럼 염소 말고 양 울음소리를 생각해 봐.”
제니의 권고대로 양에 대해 생각하기로 했다. 양은 염소보다는 다루기가 훨씬 손쉬운 동물이다. 오죽하면 양이라는 단어 앞에 순한이라는 단어를 붙여 쓸까.
나는 제임스의 순한 양이었다. 순한 양이 되기로 약속을 하고 미국 땅에 들어온 것이었다. 제임스는 미국에 들어오자마자 아내와 이혼했다. 일방적으로 그의 아내가 이혼을 통보한 것이었다. 우리 가족은 나와 제임스 그리고 제임스의 친딸인 니콜이 전부였다. 니콜은 나보다 다섯 살이 어렸는데 나를 친오빠처럼 잘 따랐다. 셋이 오붓하게 살아가는 가족에게 아무런 문제점이 있을 수 없었다. 내가 제니와 결혼을 하겠다고 했을 때 제임스가 언짢은 표정을 지었지만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나는 그가 내놓는 제안에 한 번도 토를 단 적이 없었다. 그는 나를 이끄는 선한 목자였다. 나는 그냥 양이 되어야 했다. 문제가 있어도 순한 양과 목자의 관계를 벗어날 수 없었다.
몇 년 전에 제임스는 죽었다. 죽어도 될 만한 나이였다. 그가 죽었다고 해서 누구도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우리 가족 넷은 겨울을 맞아 플로리다로 해수욕을 떠났다. 그와 나는 말편자를 바닷물 속에 던져 넣고 잠수를 해서 먼저 꺼내오는 게임을 했다. 한 번은 그가 편자를 던지자마자 잠수를 했다. 나는 조금 늦은 시간에 뒤따라 잠수를 하니 제임스의 엉덩이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이미 편자를 손에 움켜쥐고 밖으로 올라오려고 했다. 먼저 잠수를 한 것은 분명 반칙이었다. 나는 그의 순한 양이 되기로 약속했지만 누가 그에게 목자의 권한을 부여하고 나에게는 순한 양의 역할을 맡도록 시킨 것인지 회의를 품기 시작했다. 나는 그가 가장 감추고 싶어하는 심벌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내 안에 양의 탈을 뒤집어쓴 염소 한 마리가 드디어 본색을 드러낸 것 같았다. 그때의 나는 주인도 몰라보고 뿔로 들이받는 못된 염소였다.
나는 태연하게 제임스의 장례를 치르고 집안의 가장이 되었다. 니콜도 어머니에 대한 반감 때문인지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데도 결혼은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우리는 해마다 애팔래치아의 산장에도 가고 플로리다의 해변에도 놀러 다녔다. 앞으로는 방죽 위의 염소 울음소리 대신에 애팔래치아의 시끄러운 산양 울음소리가 들릴 것 같다. 기억들이 모두 어디에 저장되는 것인지는 아직도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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