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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인협회 로고 김진초

책 제목한국문학인 이천이십오년 겨울호 2025년 12월 7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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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뚜레 한 소처럼 끌려다닌다.
고삐를 틀어 쥔 이는 오빠다. 오빠는 인색하다. 구두쇠, 노랭이, 자린고비, 스크루지를 다 합쳐도 모자랄 영감탱이다. 달랑 하나 있는 동생 한테 왜 이리 모질게 구는지 미스터리다. 종일 투덜대면서도 오빠를 벗어나지 못하는 나 또한 수수께끼고.
나는 하녀처럼 산다.
오빠네 집 뒤에 붙은 허름한 조립식 주택이 내 거처다. 오빠는 대궐 같은 집에서 혼자 살고 나는 창고 같은 집에서 혼자 산다. 나는 매일 오빠네 집에 가서 밥 해 주고 청소해 주고 노치원 등하원까지 챙겨준다. 아! 시간 맞춰 먹어야 하는 약도 꼭 내가 참견해야 한다. 휴대폰에 알람을 맞춰 놔도 노느라 바빠 자기가 안 먹고는 하원해서 옷 갈아입다가 호주머니에서 약봉지가 나오면 여지없이 날 타박한다. 지팡이를 탕탕 두드리면서.
“하는 일도 없이 죙일 띵까띵까 놀면서 그거 하나도 따박따박 전화해서 못 일러 주냐? 젊디나 젊은 것이 정신머린 어디에 두고설랑 쯧쯧.”
일흔 살 먹은 나한테 젊은 것이란다. 어이가 없어서 말대꾸도 생략한 채 쌩하니 돌아서 급하게 슬리퍼를 꿴다. 이 슬리퍼는 치아바타처럼 속살이 폭신폭신한 게 착용감 최고다. 걸을 때마다 위로받는 느낌이다. 피아노 교습소 간판을 내린 지가 언젠데 그때 신던 슬리퍼를 아직도 애용한다. 너무 낡아서 오빠 집에 올 때만 신는다.
“밥 먹고 가!”
내가 차려 놓은 밥상을 마치 자기가 차린 것처럼 생색내는 오빠. 고운 사람 미운 데 없고 미운 사람 고운 데 없다고 오빠가 딱 그 짝이다. 꼴도 보기 싫다. 대문을 쾅 닫고 창고 같은 내 집으로 퇴근한다. 내 거처는 오빠네 집 대문을 나와 담장을 끼고 돌아서야 나온다. 사람들은 불편하게 왜 따로 사냐면서 오빠네 들어가라고 상성이다. 오빠 역시 같이 살고 싶은 눈치지만 내가 싫다. 놀부 오빠와 한 공간에서 24시간을 지내면 숨이 막혀 지레 죽을 것이다.
오빠가 여보란 듯이 욕을 한다.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동네가 떠나가라 나를 비난하는 소리가 쩌렁쩌렁하다. 저렇게 기운 좋은 영감탱이가 왜 나를 못 부려 먹어서 안달일까. 혼자 알아서 살든가, 사람 사서 쓰면 되지 왜 꼭 나만 사용하려 드는 걸까. 오빠가 점점 더 못돼지는 것 같다.
설마, 치매? 나이가 구십이니 그럴 때도 겨웠지 싶다. 치매는 정직하다. 아마도 지금 내게 하는 짓이 오빠의 진심일 것이다. 오늘 당장 죽어도 억울하지 않을 나이에 어찌하여 내가 미운 걸까. 오빠 목숨이 얼마나 남았나 몰라도 아마 죽는 날까지 나를 놓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니, 오지 않은 미래가 끔찍하다.
호랭이가 물어 갈 인간!
엄마가 입에 달고 살던 말이다. 사내치고는 참한 오빠가 엄마한테는 종종 대들었다. 불화가 과해 둘이 마주치면 늘 아슬아슬했다. 엄마는 합이 안 든 외아들이 힘든지 자주 신세 한탄을 했다. 나 역시 엄마처럼 오빠와는 젬병이다.
엄마 제발 저 인간 좀 데려가세요. 호랭이가 없으니 엄마라도 데려가 나 좀 살게 해 주세요.
날마다 이러면서 대궐에서 퇴근한다. 월급은커녕 시급도 없는 출퇴근을 매일 반복된다. 내 인생은 진작에 글러 먹었다.
돌아가신 부모님 대신 오빠라도 나를 챙기려니 믿었다. 주변머리 없고 매사 부실한 나를 누구보다 잘 알기에 심사숙고 매제감을 찾아내 들이댈 줄 알았다. 피아노 교습소를 하던 나는 아이들만 상대하기에 남자를 만날 기회가 없었다. 엄마들이 가끔 다리를 놓지만 까딱했다간 수강생마저 놓치기에 완곡하게 사양했다.
오빠는 방관자다. 혼기가 찬 동생이 시집을 가든 말든, 혼기를 놓친 동생이 혼자 늙어 가든 말든, 모르쇠로 일관한다. 내 친구들은 손주 한테 아껴 둔 용돈 털리고도 모자라 재롱까지 부리느라 고단하다며 자랑질인데 난 뒤늦게 고랑땡만 먹는다. 시집 한 번 못 가본 내가 놀부 같은 오빠 시집살이에 늙은 몸이 고단하다. 인정머리라곤 약에 쓸래도 없는 오빠다. 얼토당토않은 상황이 기가 막히지만 설마 계속 이러겠어? 아무런 대책 없이 또 시간에 기대니 이것도 고질병이다. 성격이 운명이라고, 나 또한 나를 방관했다. 아마도 내가 오빠보다 먼저 나를 방관했으리라. 오빠를 떠나려면 저 조립식 건물을 버려야 하는데, 조립식 건물에 발목을 잡혀 꼼짝 못하고 오빠의 하녀가 되었다. 알량한 수입원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나는 공주처럼 귀하게 자랐다.
내가 태어나고 가세가 불같이 일어났으니 그럴밖에. 어화둥둥 내 사랑, 내가 원하면 뭐든 손에 들어왔다. 친구들은 하나같이 나를 부러워했다. 손 큰 엄마 때문에 쉼 없이 드나드는 손님들, 그들이 내게 찔러 주는 용돈은 언제나 넉넉했다. 아쉬울 것 없는 나는 내 호주머니를 친구들과 공유했다. 자연 친구들이 꾀어서 나는 인기의 중앙에 있었다. 무엇 하나 아쉬울 게 없는 시절이었다.
아, 피아노!
우리 집엔 피아노도 있었다. 나는 병아리색 캉캉 원피스를 입고 높다란 피아노 의자에 앉아 까딱까딱 다리를 흔들며 바이엘을 배웠다. 쉰둥이로 태어난 나는 툭하면 넘어져 다쳤다. 엄마는 집 안에서 노는 게 최고라며 피아노를 들여놨다. 초보자의 소음에 가까운 소리조차 이웃들은 신기해하며 귀를 기울였다. 멋 모르고 칭찬을 일삼는 사람들로 인해 칭찬에 중독된 나는 내가 정말 피아노 천재인 줄 알았다. 기대에 부응하는 피그말리온 효과 같은 건 없었다. 나는 공주였으니까. 공주는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여왕이 될 테니까.
엄마는 전폭적으로 나를 지원했다.
어찌어찌 음대에 들어간 것도 엄마의 극성 덕분이다. 고등공민학교 졸업이 전부인 오빠는 나의 특혜에 자주 눈을 흘겼다. 20년이나 터울이 지는 오빠는 거의 아버지급이었다. 그런 오빠가 나를 시샘하니 모자란 어른으로 보였다. 아무튼 오빠가 시비를 걸 때마다 엄마는 딱 잘라 정리했다.
“공부도 다 팔자다. 억울하면 네가 막내로 태어날 것이지!”
공부도 다 팔자라는 엄마의 말을 나는 공주도 다 팔자라고 잘못 들어 혼자 킥킥대며 웃었다. 윗돌 빼서 아랫돌 괴고 아랫돌 빼서 윗돌 괴며 그러그러 먹고살다가 내가 태어나고 집안이 일어섰으니 나는 어부지리로 복덩이가 된 셈이다. 시장통에서 젓갈 장사를 하는 엄마가 옆 가게를 사서 늘려 갈 때 벽돌 공장을 하던 아버지는 논을 사 들였다. 안팎으로 운세가 밀어닥치던 시절이었다.
달도 차면 기운다고 했던가?
아버지가 화장실에서 쓰러지고 아버지 병구완하다가 엄마가 먼저 세상을 뜨는 화가 닥쳤다. 내가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이다. 갑작스런 변고에 오빠는 이리 뛰고 저리 뛰느라 바빴고, 나는 졸지에 찬밥 신세가 됐다. 이게 뭐지? 무슨 일이지? 얼떨떨해서 천지분간 못 하는 당황의 시간을 보내다가 정신이 들자, 불안과 공포가 몰려왔다. 앞이 안 보이는 짙은 안개에 갇혀 두문불출의 시간을 보냈다. 가구처럼 풍경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친구도 만나지 않고 전화도 받지 않았다. 생각할 수도 잠을 잘 수도 없었다. 죽음보다 무서운 혼돈 속에서 나는 자주 나를 분실했다. 나를 분실한 시간이 내겐 휴식이었다.
소식을 들은 친구가 무작정 집으로 쳐들어와 나를 끌고 나갔다. 그다지 친하지도 않은 친구였다. 그 친구는 내 심정 다 안다면서 자기는 중학교 때 교통사고로 한꺼번에 부모님을 잃었다고 했다.
“고아 선배 말 믿고 무조건 나가자.”
고아 선배라는 말에 눈물이 확 쏟아졌다.
친구 손에 이끌려 밤마다 시내 나이트클럽으로 진출했다. 사이키 조명에 몸을 맡기고 미친 듯 몸을 흔들었다. 탈진할 때까지 판탈롱 바지로 플로어를 쓸고 다녔다. 하얀 나비핀을 머리에 꽂은 채 그러고 다녔다.
엄마 장례를 치르고 상복을 벗으면서 매일 아침 하얀 나비를 접었다. 새물 옥양목으로 접었다. 탈상 전까지 상제라는 표식으로 머리에 꽂는 핀이었다. 저녁이면 하얀 나비를 떼어내 상자에 담았다. 모아 둔 하얀 나비는 사십구재 때 태울 거였다. 상제는 탈상 전까지 음주가무, 경조사 참여, 여행, 부부 관계를 삼가야 한다는데, 나는 가무에 빠져 지냈다. 나를 안내한 고아 선배도 그건 몰랐나 보다. 아니면 내가 아주 심각한 상태였던가. 그 시절 얘기는 내가 기억하는 건지 남들이 들려준 얘기를 편집한 건지 알 수 없다.
확실한 기억은 내가 술을 안 마셨다는 거다.
단지 춤만 추었을 뿐이다. 알코올 알레르기가 심한 나는 두드러기와 호흡 곤란 때문에 괴로워 못 마셨다. 그랬는데, 그랬었는데, 내 머리에 꽂힌 하얀 나비를 보고 잘생긴 남자애가 다가와 손을 잡았다. 아주 따뜻한 손이었다. 그 애 테이블로 끌려가 서로의 귀에 대고 뭐라 뭐라 많은 얘기를 나누면서도 나는 오로지 그 애가 손을 놓지 않기만 바랐을 뿐이다. 손으로 전해지는 온기가 너무 좋았다. 눈시울이 뜨거워질 정도로 감동적이었다. 사실 나는 그날 처음으로 남자와 손을 잡았다.
목이 탔다. 남자애가 권하기도 전에 내가 먼저 술잔을 들었다. 
“너랑 같이 온 와리바시가 너한테 술 주지 말라던데 괜찮겠어?” 
고아 선배는 나이트클럽 죽순이였다. 큰 키에 바짝 말라 와리바시로 통했나 보다. 그나저나 이 남자애 매너가 괜찮네. 안 그래도 풀어진 경계심의 끈을 아예 놓아버렸다. 그래도 괜찮을 성싶었다. 처음 본 남자애한테 나는 그만 폭 고꾸라지고 말았다.
“당연하지. 나 마시는 건 잘해. 뒤가 문제지.”
내 말에 남자애가 등을 쓸어 주며 말했다.
“그래? 그럼 뒤는 내가 책임질게. 오바이트 올라오면 내 손에 토해.” 
한 모금 두 모금 술이 들어가고 필름이 끊어졌다. 그리고 나는 몸을 뺐다. 나이트클럽과도 학교와도 담을 쳤다.

 

어느 순간 나는 정신병원에 있었다.
심각한 우울증 때문이었다. 누군가 나를 전담 마크해야 하는데 그게 어려워 어쩔 수 없었다고 오빠는 변명했다. 대가 센 엄마 때문에 시집살이가 고됐던 올케 언니는 친정으로 휴가를 보내고 오빠 혼자 아버지 간병을 맡고 있었다고.
“설마! 내가 정신병원에 일 년이나 있었다고?”
거짓말처럼 까맣게 지워진 시절이다. 퇴원해서 집에 오니 올케가 아기를 안고 있었다. 오빠네는 불임 부부였는데….
“아기 입양했어요? 이럴 거면 진작에 하지.”
“쉿!”
올케 언니가 손가락을 세워 입에 대며 애매한 표정으로 웃었다. 올케 언니의 휴가가 아기를 들이기 위한 절차였구나. 아기가 안쓰러운 나는 자주 들여다보며 올케와 함께 키웠다. 남들이 알아서 좋을 것 없으니 함구하라면서 오빠는 홀트아동복지회에서 입양 받은 서류를 내게 보여 줬다. 당연하지. 남들이 아니라 아기를 위해서 절대 비밀에 부쳐야지. 그럼에도 가끔 의심이 올라왔다. 혹시 오빠가 바깥에서 낳아온 아기는 아닐까?
고물고물 움직이는 아기가 신기해 눈을 뗄 수 없었다. 손가락이고 발가락이고 입에 넣고 빨았다. 오빠 핏줄이든 아니든 아기는 무조건 보호받고 사랑받아야 한다고 나는 믿었다. 배냇짓을 하며 함박함박 웃어도, 이유 없이 귀 따갑게 울어대도 마냥 귀여웠다. 시도 때도 없이 만져보고 싶고 안아보고 싶었다.
올케 언니 심기가 불편해 보이면 나는 잠깐 아가를 멀리했다.
오빠가 엄마와 불화한 원인의 대부분은 불임 때문이다. 오빠는 사대 독자다. 살림이 넉넉해지자 엄마는 오빠를 닦달했다, 밖에서라도 아이를 만들어 오라고. 부부 금슬이 유별나게 좋은 오빠는 길길이 뛰며 엄마를 성토했다.
“어머니는 같은 여자면서 어떻게 그런 모진 말씀을 하세요? 안사람이 아니라 제게 문제가 있다면 어쩌실 건데요?”
아닌 게 아니라 엄마 손에 이끌려 오빠 부부는 유명 병원에 가서 불임 검사를 받았다. 둘 다 아무 문제 없었다. 그럼에도 아이는 들어서지 않았다. 부부 금슬이 너무 좋으면 삼신할미의 시샘으로 아이가 생기지 않는다니, 적당히 하라며 엄마가 말도 안 되는 엄포를 놓기도 했다.
“기다려 보세요. 어머니도 금비를 쉰둥이로 낳으셨잖아요? 집사람도 그럴지 또 누가 압니까?”
엄마는 나를 낳는 날까지 내가 뱃속에 든 줄도 몰랐다고 한다. 생리가 끊어져도 폐경이려니, 살이 쪄도 나잇살이려니 했다. 욕심 많은 엄마는 보조 하나 안 두고 혼자 장사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게다가 달랑 외아들 하나 낳고 20년이 지났으니 임신은 상상도 못했다. 입덧이 지나갈 때도 위장병이려니 소다만 수시로 털어 넣었다고 한다. 그렇게 공짜로 얻은 선물 같은 딸이 천하의 복덩이였으니 얼마나 소중했을까.

 

이제 내 편이라곤 오빠밖에 없는데, 오빠는 나를 부엌데기로 만들었다. 나이 칠십에 이게 뭔가 싶지만 난 오빠를 떠날 수 없다. 내가 마땅치 않은 눈치를 보이면 오빠의 루틴이 나올 차례다.
“누가 살려 놓으랬냐? 네가 살려 놓았으니 네가 책임져야지. 안 그래? 아니면 날 죽여주고 네 갈 길 가던가!”
오빠는 하우스에서 쓰러졌다. 다 늙은 노인네가 밭 한 뙈기 팔아서 쓰면 좋으련만 그걸 못했다. 아들한테 손 벌리기 싫다며 오빠는 깻잎 하우스를 했다. 깻잎 따느라 까맣게 물든 손톱은 사시사철 지워질 새가 없었다. 워낙 노랭이라 사람 덜 쓰려고 새벽부터 하우스에 나가 그렇게 극성을 떨었던 게다.
깻잎 하우스는 밤새도록 불이 환하다.
사람만 밤에 2세를 만드는 게 아니다. 들깨도 밤잠을 자야 열매를 맺는다. 열매를 맺으면 잎이 부실해진다. 낮에 한 광합성을 밤이면 곳곳으로 보내며 저장하는데 밤도 밝으면 계속 광합성을 하느라 양분을 저장기관으로 보내지 못한다. 싱싱한 잎을 얻기 위해 사람들은 들깨의 불면을 유도해 일중독에 빠뜨리는 것이다. 동물 잡아먹는 것만 잔인한 게 아니다. 식물한테도 사람들은 충분히 잔인하다.
“좀 덜 먹고 말지. 노인네가 무슨 욕심이 그리 많아요?”
굳이 불까지 밝히면서 소출을 늘려야겠냐고 항의하자 오빠는 펄쩍 뛰었다.
“도와주지도 않으면서 웬 훈수냐? 나가라 나가!”
그때만 해도 내가 피아노교습소를 해서 손이 보배였다. 안 그래도 늙은 원장인데, 하얀 건반에 올려 놓은 손이 얼룩덜룩 더러우면 아이들이 질색할 일이었다. 자연 손을 아낄 수밖에 없었다.
화장실 갔다가 잠결에 밖으로 나선 날이었다. 나는 불빛을 향해 걸어갔다. 하우스 불을 끄기 위해서다. 오빠가 질색할 일이지만 나는 가끔 그렇게 심통을 부렸다. 하우스 문을 열자 노릇하면서도 싱그러운 깻잎 향이 코를 깨웠다. 하우스 안으로 들어서는데 뭔가가 진행을 방해했다. 오빠였다. 흙투성이로 문까지 기어왔나 보다. 잔뜩 토해 놓고 의식을 잃은 오빠. 그 와중에도 오빠의 손에는 깻잎이 한 움큼 쥐어져 있었다.
“사람 살려! 불이야 불이야!”
나는 목청껏 소리를 질렀다. 사람 살리라는 말보다 ‘불이야!’가 더 주의를 끌 거란 생각에 계속 ‘불이야 불이야!’를 외쳤다.
급히 수술을 받고 병동으로 옮긴 오빠를 내가 집으로 데려왔다. 오빠는 거기 있겠다는 걸 억지로 데려왔다. 몸도 불편한 오빠가 낯선 환경, 낯선 사람들 속에서 견딜 생각을 하니 내가 지옥이었다. 자청해서 오빠의 하녀가 됐다. 오빠의 밥이 됐다.
“오빠도 나 살려냈잖아! 아니에요?”
물난리가 나던 그해, 밤마다 수면제를 먹는 나는 물이 차올라도 일어나지 못했다. 오빠가 달려와 문을 부수고 구하지 않았다면 물귀신이 되었을 것이다. 이튿날 아침에 보니 오빠 집 마당에 소속을 알 수 없는 자동차가 세 대나 들어와 있었다. 물이 담장을 넘어 자동차들이 휩쓸려 들어온 거였다. 그러니까 따지고 보면 우리는 쌤쌤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잘해주지도 않으면서 곁에 두고 살피다가 결정적인 순간에는 구세주가 되는 희한한 관계, 보이면 싫고 안 보이면 불안한 그런 관계 말이다.

 

왠지 오싹하다.
오빠네 대문을 지나 담장을 끼고 급히 돌아서는 데 모공이 서늘하다. 누가 따라오나? 가끔 새벽녘이면 인기척을 느낀다. 누군가 내 방을 들여다보는 느낌이다. 그럴 땐 얼른 이불을 뒤집어쓴다. 수면제 때문에 잠이 덜 깨서 그런 거야. 나를 세뇌하면서 잠으로 피신한다. 하지만 지금은 초저녁이다. 돌아봐도 된다. 오빠 집 담장 아닌가? 잰걸음을 놓으면서 뒤를 돌아보다 그만 돌부리에 걸려서 붕 떠오른다. 슬로우모션의 내가 너무나 선명하게 보인다. 큰일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앞으로 폭 고꾸라지면서 땅을 짚은 팔에서 우두둑! 소리가 난다. 설마 부러진 건 아니겠지?
캄캄하다.
앞치마에 휴대폰이 있으나 꺼낼 수가 없다. 엎어진 채로 가만히 있는데, 아프다, 서럽다, 외롭다, 무섭다, 눈물이 주루룩 흐른다. 천천히 일어나 담장에 등을 기대고 팔목을 더듬어본다. 오른쪽 손목 바로 위 뼈가 부러져 불룩 솟아올랐다. 세운 무릎 위에 손을 받치고 이를 악문 채 천천히 압박하면서 조물조물 위치를 찾아 뼈를 맞춘다. 죽도록 아프지만 이번엔 울지 않는다.
차라리 웃는다.
미친년처럼 비실비실 웃다 보니 시나브로 진정 국면에 접어들면서 마음이 평화로워진다. 별일이다. 나 이제 좀 달라진 거야? 키를 놓친 배처럼 표류하다 어딘가 정박한 거야? 나한테 내가 물으며 뼈를 맞춘 오른손을 왼손으로 꼭 쥐고 어깨를 으쓱 올려본다.
빈손도 다치는구나.
안 그래도 허약한 데다 노안까지 오면서 자주 넘어지던 나는 넘어질 때를 대비해 가능하면 빈손을 유지했다. 휴대폰은 주머니나 가방에 넣고 다닌다. 가방도 백팩으로 바꾼 지 오래다. 양손이 자유로워야 넘어져도 부상이 적기에 택한 방법이다. 오빠네 다닐 때는 이것저것 들고 갈 것이 많아 조심조심 걸어서인지 한 번도 넘어지지 않았는데 처음으로 기록을 깼다. 사람은 넘어진 데서 또 넘어지는 법이다. 이젠 오빠네 다니는 것도 안심할 수 없다. 이참에 아예 발길을 끊으면 좋을 텐데 과연 그런 행운이 오려나 모르겠다.
닥치는 액운은 막을 수 없다.
내 눈으로 분명히 봤다. 붕 날아올랐다 포물선을 그리며 나가 떨어지면서 손으로 땅을 짚던 장면이 생생하다. 손을 짚으면 안 되는데, 짚더라도 유연하게 잘 짚어야 하는데, 양손을 짚어 힘을 분산시켜야 하는데, 그 짧은 순간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양손을 짚긴 했다. 넘어질 때의 각도가 문제였을 뿐. 그러니까 내 오른손은 오늘 저녁 부러지게 예정돼 있었던 거다.
다친 오른손을 받들어 모시고 집으로 향한다. 부엌을 지나 방에 들어선다. 작지만 아늑한 방이다. 압박붕대를 찾아 오른손을 꽉 처매고 왼손으로 부러진 뼈를 다시 압박한다. 내일 아침까지 기다렸다가 병원에 갈 생각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오빠는 내가 아침 상 차려주지 않는 것만 불편해서 또 난리를 치겠지. 안 가르쳐줄 거야. 쥐도 새도 모르게 병원에 갈 거야. 내가 떡하니 깁스를 하고 나타나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아, 생각만 해도 오싹하다. 팔 못 쓰는 핑계로 이제부터 식모살이 휴가다.
배가 고프다.
창문으로 고기 굽는 냄새가 무자비하게 쳐들어온다. 내 방 옆에 붙은 장작구이집에서 흘러드는 냄새다. 나의 유일한 수입원인 장작구이집은 원래 피아노교습소였다. 피아노 강사를 세 명이나 두고 운영했으니 제법 규모가 큰 편이었다. 한때 수강생들이 각종 대회에 나가 상을 휩쓸면서 유명세도 탔으나 원장이 늙자 아이들이 하나둘 떠나갔다.
나이 든 사람의 열의는 평가절하된다.
노욕으로 오해해 손가락질받기도 한다. 학생들의 수상 실적이 우리 교습소의 매리트인데 원장이 늙자 그조차 흠이 되고 억측마저 떠돌았다. 더는 망가지기 싫었다. 설마 오빠가 나를 굶어 죽게야 하겠어? 믿는 구석도 있었다. 하여, 손을 털고 간판을 내렸는데, 반전이 숨어 있었다.
역시나 닥치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인생이다.
피아노교습소 운영으로 들어오는 수입보다 월세 수입이 더 좋아 나는 놀랐다. 피아노나 열심히 가르칠 줄 알았지 세상 물정엔 깜깜했던 것이다. 뭔가 수상했다. 주판알 튕기는데 빠삭한 오빠는 다 알고 있었을 텐데 왜 그냥 두고 봤을까? 내가 따지자 오빠는 실실 웃으며 말했다.
“내가 말리면 네가 믿었겠냐? 또 무슨 야료나 부리는 줄 알고 앙심만 부풀렸겠지.”
설마 하니 오빠가 내가 고생하는 걸 즐긴 건 아니겠지. 그렇게 막돼먹은 오빠는 아닐 거야. 혼자 별별 생각 다 하다가 의문을 접었다. 끝이 좋으면 다 좋다고 놀면서 수입이 늘었으니 그걸로 족했다. 따따부따 따지다가 동티가 날까 염려스럽기도 했다.
내일 아침 일찌감치 병원에 가려면 속이 든든해야 한다. 식탁에 먹다 남은 빵이 보인다. 슬리퍼처럼 생긴 겉바속촉의 빵이다. 프랑스 바게트에 대적하고자 만들었다는 이태리 빵, 치아바타를 우유에 찍어 먹으려다 벌떡 일어나 옆집으로 향한다. 아무도 없는 나는 내가 챙겨야 한다. 나이 들면서 먹는 게 중요함을 깨달았다. 특히 오늘 같은 날은 필히 단백질을 섭취해야 한다.
남의 살을 먹으러 옆집에 간다.
피부에 덮여 보이지는 않으나 뼈가 부러지면서 솟아올라 있었으니 살가죽 속엔 피가 고였을 것이다. 만일 피가 보였다면 119라도 불러서 병원에 갔을 텐데 내 눈에 피가 안 보이니 견딜 만하다. 손목 골절로 죽을 일은 없으니 여유가 생긴다. 더구나 일단 뼈를 맞추지 않았던가.
집에 가서 먹는다고 2인분 포장을 부탁한다. 바로 먹을 수 있게 구워 주는 장작구이다. 손을 못 쓰니 고기를 작게 잘라 달라고 부탁한다.
“손님이 오셨나 봐요, 원장님.”
우리 집에 손님이 온 적이 있었던가? 없다. 너무 누추해 누굴 들일 수 없는 집이다. 굳이 손님이라면 골절이 왔을 뿐.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월세는 내일 넣을게요, 원장님. 요새 장사가 신통찮아서 월세 빼내기도 힘겹네요.”
그러고 보니 오늘이 월세 들어오는 날이다. 저이는 내가 그거 독촉하러 왔거니 생각하나 보다. 매달 200만 원, 큰돈이다. 그거 없으면 난 못 산다. 내 목줄을 쥐고 있는 효자다. 징징대면서도 고깃집은 나갈 생각이 없다. 넓은 주차장 때문이다. 식당도 주차장이 협소하면 행세를 못 하는데 장작구이집은 주차장 부자다. 널널한 주차장 덕분에 나는 월세 걱정을 않는다.
오빠가 쓰러지고 생긴 주차장이다.
깻잎 하우스 자리에 주차장이 들어섰으니 세상에 아주 나쁘기만 한 일은 없다. 오빠가 쓰러진 덕분에 나는 월세를 보장받게 되었다. 침대에 누워 있을 때 오빠는 내 말을 곧잘 들었다. 깻잎 하우스 걷어내고 주차장 만들어 아예 화근을 없애자는 말에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가 또 밭에 엎드리는 일을 원천봉쇄하자는 의미였다. 처음으로 오빠와 의견 일치를 본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시간이었다.
몸을 못 쓰던 오빠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핀 끝에 이젠 지팡이에 의지해 외출도 한다. 그래봤자 노치원과 농협 이사회 정도지만 이웃들은 나만 보면 이구동성으로 치사를 한다. 함께 늙어가는 처녀 여동생이 간병하고 재활시킨 덕분에 오라버니가 세 발로라도 돌아다닌다고. 남의 일이라도 여간 고마운 게 아니라고. 오빠는 가타부타 일체 말이 없다. 지팡이를 땅땅 두드리며 하는 잔소리만 늘었다. 도대체 내게 뭐가 그리 당당한지 알 수 없다.

 

정신병원에서 나온 뒤, 나는 오빠 집 텃밭에 조립식 건물을 지었다. 피아노 교습소를 차린 것이다. 음대 졸업장이 없어 학원 간판은 달 수 없었다. 처음엔 오빠 집에 살며 교습소를 오가다 교습소 옆에 내가 살 방을 달아 지었다. 그게 편해서였다. 인색한 오빠는 그 땅을 내 이름으로 해주지 않았다.
“금비, 네가 거기서 사는 동안만 네 거야. 네가 거길 떠나면 내 거고.” 
애초에 오빠 집에서 나가는 게 아니었다. 오빠 집은 원래 부모님 거였다. 엄마가 아무런 유언도 없이 갑자기 돌아가시고 아버지만 남겨지자, 오빠는 아버지가 잠깐 정신이 돌아온 때를 놓치지 않고 전 재산을 자기 앞으로 해놓았다. 그렇게 몽땅 차지하고는 내겐 내가 사는 땅조차 내주지 않는다. 건물은 내가 지었지만 땅은 자기 땅이라는 이유로 식재료 값조차 아끼고 그저 차려놓은 밥상에 앉을 뿐이다. 날도둑이 따로 없다.
그래도 설마했다. 피붙이라곤 나 하나니 언젠가는 내게 뭐라도 떼어 주겠지, 일말의 희망을 걸었다. 한데 이제 다 틀렸다. 이미 조카한테 다 돌려놓은 눈치다. 오빠는 입버릇처럼 말한다. 자기는 땅거지라고. 땅만 많지 현찰은 말짱 개털이라고. 그러면서 꼭 한마디 덧붙인다.
“넌 대학 물이라도 먹었지 난 촌 무지렁이로 평생 흙에 엎드려 살았다. 금비, 넌 어려서 호사스럽게 누릴 거 다 누렸으니 그때 운을 다 쓴 거야. 아무튼 나 죽고 나면 너 거둘 사람은 장한이밖에 없으니 그 녀석한테 잘해. 공을 좀 더 들이라고 이것아. 너는 그것밖에 답이 없어.”
얼마나 더 공을 들일까?
조카가 군대 갔을 때 면회도 내가 다녔다. 하필이면 백령도에서 군 생활을 하자, 뱃멀미를 핑계로 오빠 내외는 아예 나설 생각도 않았다. 사춘기 때 사고를 쳐도 내가 가서 처리했고, 입시 상담도 내가 다녔다. 말이 고모지 엄마나 다름없었다. 잘하다가 역심이 나서 명색이 부모가 너무한 거 아니냐고, 왜 나한테만 몽땅 떠미느냐고 따지자 엉뚱한 말이 돌아왔다.
“우리 장한이 챙기는 게 네 취미생활 아니냐? 너 즐기라고 우리가 양보한 거야.”
아닌 게 아니라 장한이와 함께 있으면 내가 빛나는 것 같았다. 허우대 좋은 장한이는 어디 가든 눈에 띄었다. 나도 이런 아들 하나 있었으면…, 오빠 내외가 부러웠다. 피아노야말로 계속 가르칠 욕심이었는데 싫다고 뻗대는 바람에 체르니 100번도 중도 포기했다. 그럼에도 종종 피아노 연주로 신나는 시간을 보냈다. 연탄곡을 칠 때다. 피아노 의자에 나란히 앉아 젓가락 행진곡을 칠 때 장한이의 집게손가락 두 개는 세상 명랑 경쾌했다. 장한이가 시험을 망친 날이나 여자친구와 싸운 날 우리는 피아노 앞에 앉아 우울한 기분을 젓가락으로 맴매하며 풀어버렸다. 젓가락 행진곡은 멜로디가 단조로워 조금만 연습하면 누구나 칠 수 있는 연탄곡이다. 때문에 피아노 대중화의 선봉장으로 꼽힌다. 이 곡을 칠 때마다 영국의 16세 소녀 작곡자 앨렌이 고마웠다. 아무튼 조카 장한이는 대체로 나를 잘 따랐고 말도 곧잘 통했다. 장가들기 전까지는.
이젠 장한이조차 나를 무시한다.
볼품없이 늙어서 그런가? 경제력이 없어서 그런가? 생각이 많아진다.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더니 그 말이 딱이다. 오빠 말마따나 취미생활이건 뭐건 난 장한이한테 할 만큼 했다. 그 애가 왜 뜨악해졌는지 도통 이유를 모르겠다. 새 식구를 잘못 들여 물이 들었나? 박사 과정에서 만나 같은 연구소에 근무하는 장한이 내외는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제 아버지를 잘 들여다보지도 않는다. 내가 곁에 있으니 믿거라 떠미는 눈치다.
나는 아껴 산다.
월세를 받으면 봉투마다 갈라 넣어 한 달살이를 준비한다. 품위 유지비도 꼭 따로 챙겨둔다. 기껏해야 피아노 학원 은퇴 원장 모임, 병원 안내 자원봉사자 모임이지만 어디 가서 체면 구길 일은 없다. 철철이 옷도 한 벌은 산다. 아울렛에 몇 번 가서 걸음 품을 팔다 보면 꽤 괜찮은 옷이 얻어걸린다. 밖에서는 제법 대접받으며 사는데 안에서 푸대접이다. 오빠야 그렇다 치고 장한이는 정말 너무한다. 생각할수록 고얀 놈이다.
고기를 한 점 먹는데 이가 덜덜 떨린다.
추워서 떠는 건 공회전이고, 무서워서 떠는 건 예열이라고 들었다. 나는 지금 무서운가? 무서워서 위험을 대비해 예열하는가?
무의식적으로 고기를 쑤셔 넣고 꾸역꾸역 삼켰다. 억지로 밀려 내려가는 위장이 뻐근하다. 안 그러면 무서워서 아니, 외로워서 죽을 것 같다. 다친 오른손을 식탁에 올려놓고 왼손 엄지와 검지를 젓가락 삼아 마구 욱여 넣자, 2인분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순간 빨간불이 들어왔다.
우울증에 시달리던 시절, 무의식적으로 마구 먹어대 체중이 20kg이나 늘었다. 오빠는 굶어 죽은 귀신이 붙었나 싶어 무당을 청해 푸닥거리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고도 낫지 않아 끝내는 정신병원에 집어넣고 말았다고. 하지만 나는 모르는 사실이다. 내가 살아낸 인생에 내가 빠진 부분이 있다는 게 지금도 믿기지 않는다. 내가 부재했던 시간을 떠올리자 두려움이 밀려온다. 다시 또 이가 덜덜 떨린다. 무섭게 떨린다. 손가락을 목구멍 깊숙이 넣고 휘저어 토한다. 얼굴이 시뻘개지고 눈물이 벌창을 하도록 게워낸다. 괴롭게 토하는 사이 두려움이 사라지고 평화가 찾아온다. 한 손으로 세수를 하고 잠을 청한다. 다친 부분이 펄떡펄떡 뛴다. 얼음 찜질을 하며 나는 살아 있다고 혼자 되뇐다. 상처 입은 밤이 길다. 영영 아침이 오지 않을 것처럼 새벽이 멀다.
헝가리 무곡 5번이 환청으로 들린다.
관능과 매혹에 유머러스함까지 갖춘 집시 음악을 브람스가 편곡한 피아노 연탄곡이다. 나는 이 곡이 경쾌하고 자유로워서 좋다. 이 곡을 장한이와 함께 연주하는 게 꿈이었다. 비록 어린이용 젓가락 행진곡으로 끝났지만 또 누가 알랴? 장한이네 아이가 피아노를 배우길 바란다. 장한이네도 아이가 늦어 금년에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피아노를 배운다는 소린 아직 못 들었다. 예전엔 너도나도 피아노를 배우는 게 디폴트 값이었는데 요즘은 판세가 바뀌었다. 소음 때문에 집에서 피아노 연습도 못하니 피아노는 물 건너갔는데 나는 아직도 꿈을 꾼다. 꿈은 자유니까.

 

뼈에 철심을 박았다.
전신 마취가 필요해 장한이가 다녀갔다고 한다. 이참에 오빠나 골려주려 작심했는데 지팡이나 땅땅 두드리는 영감탱이를 왜 불렀을까? 센스 없는 놈 같으니라고. 오빠가 보초 서는 병상이 불편하다. 몸도 성치 않은 사람이 왜 와서 뻗치고 있냐고 짜증을 부리자 오빠가 허허 웃는다.
“너 처녀귀신 될까 봐 무서워서 왔다.”
“그럼 진작에 시집을 보내주던가! 기껏 직무유기해 놓고 이제 와서 뭔 동냥을 주려고요?”
오빠 마음이 바뀌어 땅을 주려나? 솔직히 피 한 방울 안 섞인 장한이한테 몰빵한 오빠를 이해할 수 없었다. 때문에 오빠가 밖에서 낳아온 아들이려니 생각하고 마음을 접었다. 이젠 장한이의 처분을 바라는 길 밖에 없다.
“하늘이 곳곳에 심어 놓은 기쁨 중에 막내인 너도 있고 우리 집 기둥 장한이도 있어, 이놈아.”
요새 노치원에선 시도 배우냐고 묻자 오빠가 피식 웃으며 뒷말을 이어갔다.
“너 좋아하는 젓갈 3종 세트 사 놨으니까 내일 퇴원하면 그거 해서 밥 먹자.”
오빠는 젓갈을 싫어한다. 엄마가 평생 젓갈 장사를 해서다. 무슨 바람에 오빠가 젓갈을 다 샀냐고 물을 수밖에.
“어머니가 늘 말씀하셨지. 생선에는 파리가 꼬여도 젓갈에는 절대 안 꼬인다고. 이젠 너도 나도 잘 삭은 젓갈이겠지. 안 그러냐?”
도대체 뭔 얘기를 그렇게 빙빙 돌려서 하냐고 짜증을 내자 오빠가 빠르게 말했다.
“장한이 우리 핏줄이다.”
역시나 짐작한 대로였다.
“그래서 날더러 어쩌라고요?”
오빠가 입이 마른 듯 쩝쩝 다셨다.
“그냥 그렇다는 얘기지….”
그리고는 잠시 뜸을 들이던 오빠가 결심한 듯 마저 말하면서 구멍이 채워졌다. 상상도 않았던 퍼즐이다.
“정말? 정말이죠, 오빠!”
충격이다. 숫처녀인 줄만 알았던 내가 나이 칠십에 미혼모라니? 자꾸 웃음이 나와서 어쩔 줄 모르겠다. 발을 동동 구르고 싶은데 다친 오른팔 때문에 답답하다. 살이 찌면서 아이 가진 줄도 모르고 병원에 들어갔고, 출산 한 달 전, 소화불량으로 건강검진 받다가 임신 사실을 알았다니 갈 데 없는 모전여전이다.
“그러니까 이제 집으로 들어와. 하꼬방에서 궁상 떨면서 늙은 오래비 걱정시키지 말고.”
참 오래도 삭힌 우리 오빠다. 그러고 보니 코뚜레한 소처럼 끌려다닌 건 내가 아니라 오빠였다. 츤데레 아버지 같은 젓갈 오빠였다. 내가 손을 내밀자 오빠가 다가와 손을 잡는다. 오빠가 일어서면서 지팡이가 쓰러진다. 지팡이와 함께 오빠도 쓰러진다. 나도 모르게 악을 쓴다. 불이야! 불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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