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인
이천이십오년 겨울호 2025년 12월 7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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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구(望九)의 나이에 느끼는 세계는 망백(望百)이 되면 어떻게 달라질까? 10년 후인 2035년에도 세계는 지금 같은 느낌일까?
지금부터 십 년 후는 지금부터 십 년 전을 돌아보면 그 놀라운 변화의 양상과 속도를 가늠할 수 있을 터이다. 한마디로, 예측하기 어려운 시대를 맞이할 것 같다. 변화에 가속도가 붙어서 각 분야마다 지난 세기보다 훨씬 변화가 빨라져서 정신을 못 차리게 어지러울 것이다. 신문명의 주역인 젊은 세대들은 이를 창조하고 향유하려 하겠지만 노인들은 변화의 거듭된 충격으로 적응을 포기하는 자가 과거보다 더 많이 생길 것이다.
십 년 전에 돌아가신 문단 선배 한 분은 휴대전화 사용을 끝내 거부하여 제자나 후학들이 그를 초청하려면 번번이 선물을 들고 자택을 방문하여야 하는 불편을 겪어야 했다. 노트북 컴퓨터로 글쓰기를 거부한 노년 세대들이 수년 내 모두 사라지겠지만 연이어 지금은 에이아이 교육을 귀찮아하는 노인들이 생겨나고 있다. 전 세계가 한글을 배우겠다고 기를 쓰는데 정작 한국에선 아직도 한자 서예 전시회를 하며 한시 백일장을 하기도 한다. 영어 배우기에 목을 매면서도 영시 백일장을 하는 걸 보지 못한다. 영시 백일장 대신 한국시 영어 번역 대회라도 하는 것이 우리 문학의 세계 진출을 위해 필요한 게 아닐까 한다.
10년 전 휴대전화가 생기고부터 사람들은 종이 편지를 쓰지 않고 거의 모든 문자 생활을 카톡으로 영위한다. 그러다 보니 이전에 주고받은 편지가 마치 한자 전용 시대에 주고받던 간찰처럼 귀한 유묵이 되어 버렸다. 내가 받은 150여 통 문인들의 편지 중에 최초로 받은 손편지는 1965년에 받은 설창수 시인의 것이고 가장 연세가 많은 분은 1894년생 아동문학가 한정동 선생의 것이고 가장 긴 편지는 시조 시인 김상옥 선생, 가장 짧은 것은 복(福) 자 하나만 쓰인 김구용 선생의 엽서이다. 가장 여러 번 보낸 이는 이성선 시인의 것이다. 문인들의 손편지 수집에 호응한 분들 중 내게 소장 편지를 보내 온 분엔 최승범, 정민호, 김양식, 박찬선, 박종해, 권달웅, 정용원 등이다. 나는 이들이 보내 온 걸로 책을 엮어 『한국문인 서간집』을 펴내고 편지를 크게 확대하여 여러 곳에 가서 전시 행사를 하였다. 편지의 군데군데에 한자가 섞여 있어서 젊은 세대들이 읽기 어려운 부분도 있겠지만 이는 앞으로 10년만 지나면 우리 문단 선배들의 친교 관계와 문단 활동을 들여다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리라고 생각한다.
그런 맥락에서 올 초 김민정 시인이 기획한 자기 시의 문인 친필 시 전시와 시집 출판도 문인들의 필체를 엿볼 수 있게 한 값진 행사라고 생각한다.
자, 이제 아직도 진행되고 있는 전쟁 이야기를 좀 해보자.
지난 9월 14일 우크라이나군 저격수가 드론 AI 지원을 받아 러시아군 2명을 대물 저격 소총으로 4km 거리에서 사살하며 세계 최장거리 사격 기록을 세웠다는 보도가 나왔다. 그 전달에는 미제 벙커버스터가 이란까지 날아가서 정확히 땅속 200m의 군사 시설을 날려버렸다. 작년엔 차에 타고 있던 이란 사령관을 미제 닌자 드론의 칼날로 지붕을 찢고 들어가 베어버렸다. 원샷 원킬의 실력이다.
융단 폭격 같은 대량 살상 무기에 민간인 희생이 큰 데 비해 족집게식 정밀 살상 무기는 요인 제거용으로 현대전에 채용된 살상 방식이다. 어쨌든 미국을 비롯한 전쟁 당사국은 신무기 개발만이 인류 평화를 담보할 수 있다는 듯, 군비 확장에 진심이다.
북한의 도발에 대응하기 위해 방위 산업에 매달린 지 75년, 그간 우리의 무기 개발은 전 세계를 놀라게 하고 있다. 자주포며 폭격기며 레이저 무기며 벙커버스터 등 우리의 무기가 세계에 팔리고 있다. 각국이 자기 나라를 지키기 위해, 소위 평화를 지키기 위해 거액의 국가 예산을 쏟아서 무기를 사들이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인류의 생존 철학은 군비 확장 이외에 아무것도 없어 보인다. 내가 살기 위해선 엄청난 무기를 쌓아 놓아야 감히 나를 넘보지 못하는 것이다.
지난 세기 동안 인류가 저지른 살육전의 이름표를 보라. 1차 대전, 2차 대전, 소련과 중공의 공산혁명, 홀로코스트, 제노사이드, 태평양 전쟁, 원폭 투하, 한국전쟁, 월남전, 킬링필드, 이라크전, 중동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전, 코소보 사태, 중국의 내전 등이 20세기 100년 동안 인류가 인류끼리 서로 죽인 실적이다. 그러니 이런 전쟁에서 살아남으려면 힘을 길러야 한다. 21세기에 들어와서도 이 공식엔 변함이 없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를 봐도 그렇다. 1940년대에 태어나 망구가 망백이 되도록 살면서 겪어 온, 전쟁으로 점철된 세월을 보며 소회를 밝힌다.
인류가 인류를 쏴 죽이는 정신 나간 짓거리는 이제 끝내야 한다. 전범을 재판을 통해 목매다는 비효율적 방식도 내던졌으면 좋겠다. 분쟁을 일으킬 조짐이 보이는 소시오 패스를 가려내어 정신 치료를 하든가, 그런 유전자가 생겨나지 않도록 단종 수술을 하든가, 분노 수치 상승 내지 공격성 징후가 발견되면 완화제를 투여하는 식으로 적극적 증오심 퇴치 방안을 연구해야 할 것이다. 아니면 전쟁 시작 즉시 닌자 드론을 보내어 전범을 제거함으로써 인류 공멸을 사전에 막아야 한다.
인간이 전쟁 말고도 막아야 할 것들이 있다. 기후 위기, 해수면 상승, 화산 폭발, 인구 폭발, 대기 오염, 식수 부족, 소행성 충돌 등은 자연재해임으로 전쟁 상대가 아니다. 그러나 인간이 저지른 전쟁 못지않게 인류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것이다. 인류는 이런 재난을 막기 위해 전쟁 치듯 힘을 모아야 한다. 기후 위기가 오지 않도록 하고 지구 사막화를 막아야 한다. 해수면 상승으로 국토의 저지대가 침수되지 않도록 대책을 세워야 한다. 화산 폭발로 화산재가 뒤덮이는 데 대비해 방도를 강구해야 한다. 국내 인구는 감소해도 지구 인구는 80억이 넘는다. 그러니 이 인구가 내뿜는 공해를 해결해야 한다. 대기 오염과 식수 부족 현상은 저절로 따라온다. 지구는 더 이상 살 곳이 못 된다며 화성으로 도망갈 게 아니라 어떻게든 살기 좋은 지구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지구도 수명이 있겠지만 인간의 평균 수명이 연장되듯이 지구도 수명을 연장시켜 가며 사는 데까지 살다 가는 것이다. 인류가 과학을 발달시키고 지혜를 모으면 소행성 충돌도 비켜가게 될 것이다.
나는 늘그막에 지구 찬양 시 한 편을 썼더랬다. 이 시의 메시지로 ‘이 계절의 언어’를 삼겠다.
이 가을
하늘은 높다 못해 푸르르고
곱디고운 단풍 속을 나는 걷는다.
아, 여기가 바로 낙원이구나.
저 무한 우주의 무수한 별들 중에
오직 하나 푸른 보석, 지구별에
내가 생겨나 살아가고 있다는 게
신기하고 다행하고 고맙기 그지없다.
비록 인생이
더러는 힘들고
때로는 억울하고
아무리 아까워도
이 아름다운 별에 태어나
이 따스한 별에 살다가
이 포근한 별에 묻히는 것만으로도
생명은 얼마나 복된 것인가!
머나먼 안드로메다에도 숨 쉴 곳 없다는데
물이 있고 꽃이 피고 새가 나는
여기 밖에 따로 천국이 없다는 걸
이 가을 문득 깨닫고 보면
땅 위에 뭇 생명 가진 것들과
더불어 사랑하고 즐겁게 살리라.
그리고 죽음이란 것도 한 없이 정겨운
낙원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 다름 아니랴.
——졸시, 「이 가을 문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