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12월 68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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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 쿵, 쿵!
마치 산이 무거운 몸을 끌고 오는 듯이 느릿느릿하면서도 커다란 발자국 소리가 점점 가까이 다가왔어요.
나는 숨을 훅, 삼키며 책상 밑으로 들어가 몸을 웅크렸어요.
숨 죽인 어둠 속에서 잔뜩 긴장한 채, 내 귀는 토끼 귀처럼 쫑긋거렸어요. 쿠웅! 발자국 소리가 멈추더니 달빛 가득한 창문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산처럼 불쑥 솟아올랐어요.
잠시 후, 솜털처럼 폭신해 보이는 커다란 거인 하나가 부드러운 안개처럼 내 방 안으로 스르륵 밀려 들어왔어요. 거인은 내 방 한가운데 마치 구름이 방 한가득 내려앉는 것처럼 조용히 앉았어요.
거인은 내 얼굴만큼이나 큰 조끼의 단추를 하나 풀더니, 커다란 손바닥을 부채처럼 흔들어댔어요.
후욱-, 후욱-.
거인이 덥다는 듯 숨을 내쉬자 바람결이 숲을 스치는 듯 향긋한 냄새가 방 안에 가득 퍼졌어요.
다행히 거인은 내가 숨어 있는 걸 눈치채지 못했어요.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어요.
거인의 몸은 이상하게도 반짝거렸어요. 마치… 가장 오래되고 아름다운 별빛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그 부드러운 팔과 다리는 은은한 금빛이 돌며 포근해 보였어요. 솜털처럼, 안개처럼. 어깨의 무늬는 강물에 씻긴 조약돌처럼 알랑알랑 매끄러워 보였어요.
그런데 거인은 아까부터 이쪽저쪽 두리번거리며 살피고 있어요. 혹시 그 무언가를 못 찾으면 어떡하나? 그런 눈빛이었어요.
‘혹시 나를 찾으러 온 걸까?’
그런데 어떡하지요? 난 책상 밑에 웅크린 채 숨어 있으니까요!
나는 작은 심장이 콩닥거리며 깨어나는 걸 느꼈어요.
거인의 커다란 눈동자는 바깥세상이 온통 궁금한 어린아이처럼 빛나고 있었어요. 마치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품은 투명한 구슬 같았죠. 조금 우스꽝스러운 것은 거인의 동그란 이마에 작은 별처럼 황금별이 박혀 있다는 거예요.
거인은 다시 불안해진 눈길로 방 안 구석구석을 천천히 훑어보는 것 같아요.
‘무얼 찾는 걸까?’
거인의 눈길이 슬금슬금 지날 때 내 방의 작은 물건들은 숨 죽이며 떨고 있는 듯했어요.
그런데 바로 그때였어요. 거인의 두 눈이 내 책상 위로 옮겨 가더니 반짝, 하고 빛나며 둥그래지는 거예요. 무슨 까닭인지, 거인은 스르르 몸을 옮겨 내 책상 위로 올라가는 게 아니겠어요?
“거인 아저씨, 뭐 해요?”
나는 드디어 거인 아저씨 앞에 모습을 쓱 내보였어요.
“어마! 들켰다.”
거인은 깜짝 놀라며 기우뚱하더니 그만 쿵,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어요. 책상 밑에서 갑자기 작은 아이가 튀어나왔으니 놀랐던 거예요.
“아, 괜찮아요.”
거인은 몸을 조금 일으키며 씨익, 내게 웃어 보였어요. 그 바람에 나도 용기가 불끈 생겨서 아까부터 궁금했던 질문들을 마구 쏟아냈어요.
“농구는 잘해요?”
“피자는 잘 먹어요?”
“공부는 잘해요?”
나는 알고 싶은 걸 한꺼번에 물었어요.
거인은 우뚝, 멈춰 섰어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거인의 거대한 몸은 마치 공중에 떠오르려는 커다란 풍선처럼 파르르 흔들렸어요.
“농구는 잘 못해요.”
“피자는 잘 못 먹어요.”
“공부는 안 해봤어요.”
거인은 또박또박 대답해 주었어요. 그러나 말이 끝나자마자 휙! 훌쩍! 창문 밖으로 빨려 나가듯이 사라졌어요.
무언가 반짝거리는 것으로 가득 차 있던 내 방 안은 순식간에 어두컴컴한 빈자리만 남은 듯했어요.
나는 얼른 거인의 뒤를 쫓아가며 창문 밖을 내다보았어요.
‘어머나!’
거인은 신발 한 짝이 벗겨진 줄도 모르고 절뚝절뚝 어두운 새벽길을 달리고 있었어요.
“아저씨! 여기 신발이 있어요!”
다행히 우리 집은 1층이었어요. 나는 실내화를 신은 채로 휙! 훌쩍! 거인 아저씨랑 똑같이 창밖으로 뛰어내렸어요. 창문 밑에 뎅그러니 놓인 내 다리 길이만 한 커다란 신발 한 짝을 안고 거인을 뒤쫓아 갔어요.
“맨발로 뛰면 유리가 박혀요!”
아무리 외쳐도 거인은 듣지 못했어요.
어느새 거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어요. 터벅터벅 걷고 있던 나는 그만 거인의 신발끈을 질끈 밟고 말았어요.
앗! 안고 있던 커다란 신발이 품에서 쿵 떨어지며 두세 번 굴러서는 시냇물 쪽으로 가고 말았어요.
“거기 멈춰 서!”
하지만 어떡하죠? 신발은 벌써 시냇물을 따라 떠내려가고 있어요.
‘그렇다면 할 수 없지.’
나는 떠내려가는 신발 속으로 재빨리 뛰어 들어갔어요.
출렁 출렁, 흔들 흔들!
거인의 신발 안은 냄새도 나지 않고 퍽 마음에 들었어요. 쏙 들어가 누워 보기도 했어요. 꽤 넓고 말랑했거든요.
참 재미있는 거인이지 뭐예요? 신발 저 안쪽 천장에 황금별을 다닥다닥 붙여 놓았어요. 그 노란 별들이 빛을 내며 신발 안쪽을 노르스름하게 밝혀 주었어요.
신발은 냇물을 따라 자꾸 떠내려갔어요. 어느새 바깥을 내다보니 몽글몽글 구름 속으로 들어왔어요.
어느새 나는 거인이 사는 구름 마을까지 따라와 버린 거예요.
저만치 거인의 모습이 잠깐 보이는 듯하더니 이내 솜털 구름 속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았어요.
내가 타고 있던 커다란 신발은 휘몰아치는 듯이 빙빙 도는 구름 동굴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어요. 구름 동굴을 지날 때는 차가운 물방울들이 토토토 소리를 내면서 금빛 별똥별처럼 휙휙 스쳐 갔어요.
마침내 구름 동굴이 끝나고 ‘쿵’ 소리를 내며 신발의 여행은 멈췄어요. 나와 보니, 커다란 신발은 구름 위로 솟아난 뾰족한 나뭇가지에 걸려 있어요.
할 수 없이 난 조금 걸어 보기로 했어요.
폭신 폭신 폭신….
내 발걸음은 저절로 춤을 추듯이 출렁거렸어요. 구름 마을 저쪽까지 살금살금 걸으며 다가갔어요. 동그란 언덕 위에서는 작은 반짝이들 사이로 황금별 조각이 톡톡 튀어 오르는 게 보였어요.
그 반짝이들은 구름 언덕에서 사는 작고 귀여운 반짝이 도깨비들이었어요. 엄지손가락만 한 도깨비들은 황금별 조각들을 자루에 담아 낑낑대며 옮기고 있어요. 황금빛 조각으로 미끄럼틀을 만들거나 시냇물 위로 작은 금빛 다리를 놓으며 깔깔깔 웃기도 했어요.
도깨비들은 황금별 조각을 서로 던지고 받으며 신나게 놀기 시작해요. 구름 동굴 저쪽에서 빛이 스며들자 반짝이 도깨비들은 더욱 반짝였어요. 나도 끼어서 같이 놀고 싶었어요.
“안녕?”
그러나 내 모습을 본 반짝이 도깨비들은 “와앙!” 놀라며 갖고 놀던 황금별 조각들을 우르르 떨어뜨리고 말았어요. 그리곤 “찍찍! 삐릭!” 쬐그만 소리로 말을 주고받으면서 구름 솜털 속으로 슈슈슉 사라졌어요. 마치 풀잎에 맺혀 반짝이던 빗방울들이 휙 불어온 바람에 흩어져 버리는 것 같았어요.
구름 동굴 속에 혼자 남게 된 나는 금세 심심해졌어요.
사방은 고요했어요. 오직 내 심장 소리만이 동굴의 물방울 소리와 뒤섞여 똑똑, 내 마음 문을 두드리는 듯했어요. 구름 마을의 금빛이 내 손등 위로 사르르 퍼지더니, 어느새 내 몸은 금빛 비늘로 덮이는 듯 누르스름해졌어요.
내 옆에서 황금별 하나가 톡 솟아오르며 속삭였어요.
“조심하세요….”
뭘 조심하라는 거지? 이상하게 황금별 조각을 가져가고 싶은 생각이 불쑥 생겨났어요.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어요. 하지만 나도 모르게 내 손은 그곳에 쌓여 있는 작은 황금별 조각들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있었어요.
‘이 정도 가져가도 눈치 못 채겠지?’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어요. 구름 동굴 저쪽에서 느릿하지만 분명한 발걸음 소리가 울렸어요. 그 소리를 따라 고개를 들었어요.
마치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듯이 우뚝 나타난 건 그 거인 아저씨였어요. 나머지 신발 한 짝을 찾아 신고 서 있었어요. 거인의 넓은 어깨 위에는 아까 사라졌던 반짝이 도깨비들이 납작 엎드린 채 거인의 눈치를 살피고 있어요.
나는 황금별을 빼앗기나 할까 하고 휙 돌아서서 달아났어요. 하지만 걸음은 폭신폭신 꺼지며 뜻대로 나아가지 않아요. 거인의 발걸음만 쿵, 쿵,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올 뿐이에요.
거인의 거대한 손은 어떤 것도 콱 움켜쥘 수 있었지만, 그냥 조용히 내 뒤를 따라올 뿐이었어요. 거인이 걸을 때마다 발걸음 밑에서는 금빛 가루가 보석처럼 흩날렸어요. 거인이 반짝이 도깨비들이 갖고 노는 작은 황금별 조각을 다룰 때는 아기를 어르듯 살살 부드럽게 했어요.
“잠깐만!”
우레 같은 목소리로 거인은 내 앞을 막아섰어요.
불룩한 내 바지 주머니를 한 번 보고 거인은 슬픈 듯이 고개를 숙였어요. 그의 커다란 두 눈에는 파르스름한 눈물이 감돌았어요. 마치 내가 소중한 빛을 함부로 다루는 것을 아파하는 것처럼요.
나는 부끄러워지며 얼굴이 빨개졌어요.
하지만 반짝거리는 황금별을 한 주먹 정도는 꼭 구름 마을에서 가지고 가고 싶었어요. 거인이 천천히 말했어요.
“구름 마을에서는 영원히 깨끗하고 변치 않는 마음을 모으고 있어, 황금별은 바로 그 보물이야.”
“…….”
“하지만 왜 난 황금별 조각을 못 가져가는 거야?”
나에게는 거인이 황금별을 혼자 독차지하려는 욕심꾸러기처럼 보였어요. 하지만 황금별 조각을 몰래 가져가려고 했던 자기의 모습 또한 떳떳하지는 않았어요.
거인은 천천히 똑똑하게 말했어요.
“훔쳐 가는 황금별은 곧 사라지고 마는걸.”
“내가 이렇게 꼭 쥐고 있는데?”
나는 황금별을 손에 쥐고 내밀었어요.
거인은 검지손가락 하나를 내 눈앞에 대고는 이렇게 덧붙였어요.
“하지만! 네가 온 마음을 다할 때 황금별은 사라지지 않고 네 것이 될 거야.”
“온 마음?”
“응.”
반짝이 도깨비들도 그 말에 고개를 끄덕끄덕했어요.
거인 아저씨는 다시 한 번 내 주머니 쪽을 보았어요. 그러나 황금별 조각을 뺏지는 않았어요. 만일 그 황금별 조각을 훔쳐 가려는 것이 내 마음이라면, 황금별 조각은 이내 사라져 없어질 테니까요.
반짝이 도깨비들은 벌처럼 윙윙 소리를 내며 날아올랐어요. 잠시 뒤 어디선가 황금별 조각들을 가지고 와서 좌르르 한 줄로 이어 금빛 미끄럼틀을 만들었어요.
내 몸은 어느새 미끄럼을 타고 쭈욱 쭈욱 내려왔어요. 잠시 후 나는 졸졸 냇물 흐르는 소리를 들었어요. 어젯밤 그 물가였어요.
나는 다시 언덕 위로 올라간 뒤 우리 집이 보일 때까지 쉬지 않고 달렸어요. 어느새 내 방의 창문, 그 앞에 있는 꽃밭에 이르자 나도 모르게 “푸우” 숨을 내쉬었어요.
나는 황금별 조각이 사라지기나 할 듯이 꼭 쥔 채로 방에 들어가 소르르 잠이 들었어요.
창문 가득 쏟아져 들어오는 노란 아침 햇살은 나를 흔들어 깨웠어요.
희미하게 눈을 뜨면서 나는 어젯밤 꿈속의 기억을 더듬듯 얼른 주머니 안을 더듬어 보았어요.
아! 황금별 조각은 내 주머니에 그대로 있었어요. 손끝에 닿는 아직 따스한 느낌. 하지만 신기한 일은 바로 그 다음이에요.
내 손바닥 위에서 작게 빛나는 황금별이 어젯밤 내가 책상 위에 올려 두었던 그 황금별 스티커였어요! 아니, 자세히 보니, 내 눈이 믿기지 않을 만큼 똑같은 황금별 스티커는 정말 아니었어요!
구름마을 황금별 거인이 내 방으로 와서 찾아서 가져갔던 황금별. 그것을 내가 되찾아 온 걸까? 이런 의심도 살짝 들었어요. 그러나 잔잔하게 알롱거리는 금빛은 어제와는 전혀 다른 맑고 깨끗한 빛깔이었어요.
나는 황금별 보물을 찾아 내 방으로 들어온 거인을 떠올렸어요.
‘영원히 깨끗하고 변치 않는 마음….’
사실 그 황금별 스티커는 오늘 전학 가는 영민이한테 쓸 편지를 꾸미려고 사 둔 것이었어요. 나는 영민이와 즐겁게 지난 날들을 떠올렸어요. 그리고 따뜻한 구름마을을 펼쳐 보이듯 온 마음으로 편지를 써 내려갔어요.
‘그래! 우리가 온 마음을 다하면, 그 마음은 영원히 깨끗하고 변치 않는 황금별이 될 거야.’
나는 편지를 다 쓰고 편지지 위에다 구름마을에서 품고 온 황금별 스티커를 장식하기 시작했어요. 영민이와 영원한 우정을 약속하는 별자리처럼 황금별은 하나하나 빛났어요.
지금도 어딘가에서 깨끗하고 변치 않는 금빛 마음을 찾아 헤매고 다니는 거인 아저씨를 떠올렸어요.
황금별로 이어진 영민이와 나! 우리가 구름마을에서 거인 아저씨를 함께 만나게 될 날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가슴이 설레어 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