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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 돼지저금통

한국문인협회 로고 아이콘 김현우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4년 7월 66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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욱이는 일기장에 이런 글을 쓴 적이 있지요.

할아버지 팔은 내 베개다. 할아버지 팔만 베면 저절로 잠이 온다.

할아버지는 내 장난 친구다. 할아버지와 놀면 너무 재미있어.

할머니는 내 밥이다. 할머니만 보면 배가 부르니까.

그렇지만 지금 할아버지 할머니는 집에 없었어요. 멀리, 천 리나 멀리 떨어져 있는 남쪽 마을에 가 계시거든요. 할아버지 할머니 사시는 집이 바로 거기죠. 두 분은 한 달에 일주일쯤 욱이 네로 오셔서 지내다가 가시곤 해요. 아빠 엄마가 모두 직장에 다니시기 때문에 욱이와 동생 혁이를 돌보기 위해 자주 오시곤 한답니다. 할머니가 오실 때는 맛있는 반찬들을 한 보따리 가져오지요.

“욱이 먹으라고 요것들을 만들어 왔다. 네가 좋아하는 땅콩 조림도 가져 왔지.”

할아버지도 호두과자를 사 오시지요. 그러면 욱이와 혁이는 그 자리에서 맛있게 먹으면서 좋아하지요. 그러니까 할머니는 욱이 밥이죠. 그리고 더욱더 좋은 것은 잠잘 때 할아버지 팔을 베고 자는 거예요. 욱이는 아주 어릴 때는 할아버지 집에서 자랐어요. 밤이면 늘 할아버지 팔을 베고 잤기 때문에 요즘도 그 버릇이 남아 있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 할머니가 없으니 너무나 쓸쓸했어요. 학교 갔다 집에 돌아와도 재미가 하나도 없었어요. 집에는 아무도 없으니까요. 할아버지와 놀 수도 없고 할머니가, “욱아, 배고프지? 사과줄까? 빵 줄까? 아니면 우유 먹을래? ” 하고 반가워하시면서 빵도 내놓고 금방 삶아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고구마도 내놓을 텐데. 그러면 고구마보다 빵이 더 먹고 싶지만, 고구마부터 한 조각 먹는답니다. 고구마는 달고 따끈따끈하니까요. 그렇지만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계시지 않으니 집에 돌아와도 반겨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아파트 문을 열고 들어와도 조용하지요.

혼자서 소파에 앉았다가 식탁에 놓인 종이쪽지를 봅니다.

‘욱아! 간식 잘 찾아 먹고 시간 맞추어 학원에 가거라. 엄마.’

엄마가 써 놓고 간 쪽지이지요. 욱이는 냉장고 문을 열고 우유와 엄마가 깎아 놓은 사과가 든 봉지를 꺼내서 먹어요. 그러면서 얼른 텔레비전을 켜지요. 재미있는 만화를 볼 수 있지요. 하지만 그것도 잠깐입니다. 욱이가 타고 갈 학원 버스가 아파트 상가 앞에 곧 올 테니까. 그래서 얼른얼른 사과와 우유를 먹고 학원 가방을 둘러메고 집을 나섭니다.

아파트 현관을 나서다가 욱이는 멈칫 섰어요. 뭘 생각하다 급히 돌아섰어요. 글쎄, 뽑기를 하고 싶었어요. 학원 버스가 서는 길가의 문방구 앞에는 통에 여러 가지 장난감이 들어 있는 네모진 통들이 줄지어 서 있었어요. 동전 두어 개를 구멍에 넣고 돌리면 풍선이나 조그만 비행기, 헬리콥터가 든 공이 굴러 나오거든요. 그게 참 재미났지요. 그래서 할아버지가 계실 때는 꼭 할아버지를 졸랐지요.

“할아버지, 함께 가자. 응? ”

할아버지는 욱이가 가자면‘그래, 가자’하고 따라나섰고 욱이가 장난감 뽑기를 하고 싶어 하면 동전 두어 개를 내주셨어요. 그러면 욱이는 구멍에다 동전을 넣고 손잡이를 기분 좋게 돌려서 장난감이 든 공이 굴러 나오기를 기다렸지요. 할아버지는 조그만 장난감이 공 속에서 나오자 혀를 차며, “허어, 아무 데도 쓸모없는 것들이네. 이백 원짜리가 아니라 십 원짜리로구나.” 하셨죠.

“할아버지, 난 참 재미있는데?”

그런데 오늘은 할아버지가 계시지 않으니까 뽑기를 할 수가 없었지요. 욱이는 꼭 그것이 하고 싶은데 말이에요.

욱이는 그때 생각이 났어요. 식탁 위에 어머니 지갑이 있었던 걸 말이어요. 욱이는 현관에서 되돌아서서 식탁으로 갔어요. 얼른 지갑을 열어보니 동전들이 여러 개 있었지요. 욱이는 동전 3개를 꺼냈어요.

“됐다. 됐어. 뽑기를 할 수 있겠어. 나중에 엄마께 말씀드려야지.”

욱이는 학원 버스를 기다리면서 동전 두 개를 구멍에 넣고 손잡이를 돌렸어요. 또르르 공이 굴러 나오는데 열어보니 예쁜 자동차가 나왔어요. 옆에서 보고 있던 친구가 하고 싶어 하기에 남은 동전 하나를 그 애에게 주었지요.

오후 늦게 엄마가 퇴근해 와서, “오늘은 우리 욱이가 무슨 공부를 했을까? ”하고 가방을 열고 연필이랑 공책을 꺼내다가 보지 못했던 자동차를 봤어요.

“이거 뭐냐?”

그때 욱이가 ‘아차! ’ 했어요. 엄마가 그걸 보기 전 동전 얘기를 해야 했는데 깜빡하고 말았지 뭐예요. 미처 대답을 못 하고 어물어물하니까 엄마가 큰 소리로 또 물었어요.

“이거? 뽑기를 했니? 할아버지 할머니도 안 계신 데 돈이 어디 있어서 뽑기를 했니?”

“그, 그게…”

“바른말 해!”

그제야 욱이는 조그만 목소리로 식탁에 있었던 엄마의 지갑에서 동전을 세 개 꺼냈다고 말했어요. 그 말을 하면서 욱이는 할아버지 생각이 났지요. 할아버지만 계셨더라면 엄마의 허락 없이 동전을 가져가지 않았을 걸 하고. 엄마는 욱이 머리에 알밤을 세 개 먹였어요. 그러면서 야단을 쳤어요. 눈물이 찔끔 났어요.

욱이는 그날 일기에 이렇게 썼지요.

오늘은 혼나는 날이다. 뽑기가 하고 싶어서 동전을 세 개 가져갔기 때문이다. 엄마의 허락을 받지 않고. 엄마가 집에 돌아오셨을 때 금방 말씀드려야 하는데 잊어버리고 못 했다. 그래서 나는 엄마에게 혼이 났다. 앞으로는 그런 짓을 안 하겠다고 결심했다.

엄마는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전화로 욱이가 한 일을 죄다 얘기를 하면서 속상해하셨어요. 욱이는 그 말을 들으면서 몹시 부끄러웠지요.

며칠 후 할아버지가 오셨어요.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욱이를 반갑게 맞이해 주셨어요.

“어이구, 우리 손자! 초등학교 1학년이 되더니 아주 점잖아지셨네. 키도 훌쩍 크고 말이야. 허허허.”

“할아버지, 할머니. 보고 싶었어요.”

욱이는 너무 기뻐서 할아버지도 안아보고 할머니에게도 안겨 보았지요. 그런데 할아버지께서 빨간 돼지 한 마리를 내놓았어요. 저금통 말이에요.

“옜다. 이거 욱이 거다.”

욱이가 받아 들고 보니 무거웠어요. 흔들어 보니 동전들이 짤그락거렸어요. 웬일인가 싶어 할아버지를 올려다보았지요. 할아버지는 크게 웃으며 말씀하셨습니다.

“엄마 몰래 동전을 가져가 뽑기를 했다고 혼났다면서? 그래서 할아버지가 동전을 모아두던 저금통을 통째 가져왔다. 이제 이건 네 것이다. 사고 싶은 게 있으면 이 통에서 동전을 꺼내 사렴. 이 돼지 배에는 구멍이 있어 동전을 꺼낼 수 있지.”

말 빨강 돼지 배에는 열었다 닫았다 할 수 있게 마개가 있었죠.

“야! 신난다.”

“그 대신 욱이가 한 가지 할 일이 있지.”

“뭔데요?”

“이거야. 돈을 쓰고 나면 어디다 얼마를 썼는지 꼭 기록해야 해. 일기 끝에다.”

“예!”

욱이는 그날 일기장에다 이렇게 썼어요.

‘할아버지는 내 저금통이다. 뽑기를 하고 싶으면 빨강 돼지에서 동전을 꺼내면 되고, 과자를 사 먹고 싶으면 할아버지 저금통에서 동전을 꺼내면 된다. 무엇을 사는데, 얼마를 썼는지 꼭 기록해 놓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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