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12월 68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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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열자, 고개를 5도가량 기울인 그가 서 있었다. 그는 좌반구와 우반구가 균형을 이루지 못하여 어쩔 수 없는 것처럼 고개를 삐뚤하게 한 채로 잔뜩 찡그리고 있다.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얼굴 근육을 모두 활용하여 표정을 일그러뜨림으로써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는 아직도 세상으로 나올 준비가 안 되었나 보다. 행여나 호랑이가 동굴에서 나올까 봐 굴만 쑤시다 노인이 되어버린 어린 중처럼, 그는 무의식 속에 밀어 넣은 감정들이 튀어나오지 못하게 하느라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옛날에 대관령 너머 산골에 사는 한 남자가 강릉 바닷가 마을에서 소금을 받아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지름길로 접어든 남자는 동굴 앞을 지나다가 안을 들여다보았다. 동굴 안에는 큰 호랑이 한 마리가 있었다. 더럭 겁이 난 남자는 급한 대로 지게 작대기를 들고 굴을 쑤시기 시작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남자는 오도 가도 하지 못하는 상황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간 것이다.
“만약 제가 그렇게 찡그린 표정으로 맞이한다면 기분이 어떨 것 같아요?”
“저는… 괜찮아요.”
그는 한참 만에 대답했다. 그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면서 속마음이 튀어나오지 못하도록 단속한 대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을 들여다보고 성찰하는 시간이 되도록 던진 질문이었으나, 그는 역지사지가 안 되는 사람이었다. 좋은 사람으로 포장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도 커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상을 보지 못하는 걸까? 호랑이가 튀어나올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굴을 쑤신 남자처럼, 부정적인 감정이 튀어나오지 못하게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는 자신의 처지를 고통스러워하며, 자신이 처한 상황을 벗어날 방법을 몰라서 힘들어한다. 그런데도 손을 내밀면 겁을 잔뜩 집어먹은 채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곤 했다. 자신만의 세상으로 자꾸만 도망치는 그가 감정을 느끼고 표현하게 하려는 의도로 질문하면, 그는 언제나 ‘괜찮아요’라고 했다. 그나마 한참을 망설이다가 대답했으니, 긍정적인 신호라고나 할까. 그는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민감한 삶을 살아온 듯하다. 행여나 속마음을 드러냈다가 타인으로부터 박한 평가를 받게 될까 봐 자신만의 세상을 벗어날 엄두조차 내지 못하나 보다.
몇 날 며칠 호랑이 굴을 쑤시던 남자는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고통스러운 상황을 벗어날 궁리를 했다. 마침 대관령을 내려오던 어린 중이 굴을 쑤시는 남자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뭐하세요?”
“스님, 동굴 안에 큰 호랑이가 있어요. 스님이 부산으로 가서 포수를 데려올 건지, 호랑이가 튀어나오지 못하게 작대기로 굴을 쑀을 건지 하나를 선택하시오.”
어린 중은 작대기로 굴을 쑤시는 일이 더 쉬울 것 같아서 지게 작대기를 넘겨받았다. 남자는 자신의 근심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는 방식으로 자신의 어려움을 해결한 것이다. 며칠이 지나도 남자가 오지 않자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어린 중은 고통스러운 상황을 벗어날 방법이 마땅히 떠오르지 않았나 보다.
이듬해에도 소금을 사러 대관령을 내려온 남자는 어린 중의 안부가 궁금해서 동굴이 있는 곳으로 길을 잡았다. 그곳에 당도하자 머리가 하얗게 센 키 작은 노인이 지게 작대기로 굴을 쑤시는 모습이 보였다. 다가온 남자에게 노인은 포수를 데리러 다녀올 동안 굴을 대신 쑤셔 달라고 했다. 자기가 했던 말과 같은 말을 하는 노인을 쳐다보던 남자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어린 중이 일 년 사이에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근심을 해결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상황이 어린 중을 백발 노인으로 만든 것이다.
그는 호랑이 같은 감정이 튀어나오면 부정적인 평판을 받게 될까 봐 두려운 걸까. 꾹꾹 눌러 놓은 감정이 밖으로 나가고 싶다고 아우성치는 소리를 애써 외면하고 있으니 말이다. 호랑이를 조절하는 방법을 몰라서 억누르기만 하다가 머리가 하얗게 세어버린 어린 중처럼, 눌러 놓은 감정들이 그의 마음을 헝클어뜨리고 있나 보다. 헝클어진 마음이 고개를 비뚤게 만들고,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라는 표정을 짓게 만들었나 보다. 감정 연구자들은 감정을 다양하고 섬세한 언어로 표현하는 사람은, 감정 표현에 서투른 사람에 비해 건강한 삶을 산다고 말한다.
그가 자기만의 세상에 갇혀서 백발 노인이 된 것도 모른 채 호랑이 굴만 쑤신 어린 중처럼 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감정의 실타래를 풀기 위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그는 질문에 맞지 않는 대답을 하거나 의심에 찬 눈초리로 바라보며 침묵하다가 ‘괜찮아요’라는 대답으로 이야기의 길을 끊고,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기 일쑤였다. 대화는 어긋난 채로 돌아가는 톱니바퀴 같았다.
그렇지만 그런 중에도 그의 무의식은 균형을 잡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나 보다. 삐뚤하던 그의 고개가 차츰 중심을 잡기 시작했다. 입 밖으로는 드러내지 못해도, 무의식 속에서 감정을 드러내는 연습을 하고 있었나 보다. 그가 자신만의 세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작은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한 것처럼, 머리가 하얗게 세어버린 어린 중도 이제는 호랑이 굴을 벗어날 방법을 찾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