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트맵

시간을 건너는 차 한잔

한국문인협회 로고 전수림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12월 682호

조회수14

좋아요0

“약만 타서 올 거야! 식사는 갔다 와서 하자. 배고프면 과일 한 조각 먹든지….”
남편이 집 근처 병원에 다녀오겠다며 현관을 나서면서 한 말이다. 이게 뭐지. 그날은 그저 단순한 말이 아니라, 소박하지만 깊고 단단한 마음이 깃든 듯 들렸다. 사랑은 커다란 고백이나 거창한 선물 속에 있지 않은 것처럼, 기댈 수 있는 믿음과 신뢰가 담겼다고나 할까. 어린 시절에 만나 반세기 가까이 함께 걸어온 동행의 다짐이고, 평생의 기약처럼. 단단한 마음이 깃듦으로 와 닿았다. 별일이었다.
‘우리가 너무 오래 살았나?’
나도 모르게 그가 나간 자리에 툭 던져졌다.
우리는 서너 해 전부터 식전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창가에 나란히 앉아 “어제 그 두루미는 또 왔을까? 밤새 비가 많이 왔나 봐. 물이 많아졌어!” 이같이 시답지 않은 말을 찻잔에 얹으며 하루를 연다.
강가에 두루미는 쌍으로 날아와 사냥한다. 날마다 찾아오는 단골들이 있다. 한 마리가 날면 또 한 마리가 날고, 혼자다 싶었는데 어느새 또 한 마리가 와 앉았다. 물속에 두 발을 담그고 있는 모습이 언뜻 보기엔 붙박이처럼 고요하고 한가로워 보이나, 먹이를 건져 올리는 순간은 정교하고 치열하다. 회색빛 재두리미는 물속에서 잠복하는 시간이 꽤 길다. 기다림의 연속이다. 언제쯤 움직일까. 그런 소소한 모습들을 바라보는 재미가 있다.
햇살은 강물 위로 비늘처럼 흩어지고, 바람은 물결에 공기를 불어 넣어 생명력을 키워준다. 늘 그 자리에 머물지만 매일 다른 얼굴로 변화와 지속이 함께 깃든 풍경을 만들어낸다. 봄이면 강가에 꽃이 흐드러지고, 들판은 연둣빛 새순으로 화려하다. 여름이면 햇살이 강물 위로 부서지고, 물결은 바람에 얹혀 흘러간다. 가을이면 단풍이 배처럼 떠가고, 겨울이 오면 강물은 서서히 얼어 쓸쓸해진다.
남편이 나가자 집 안은 휑하니 적막에 휩싸였다. 입 안이 심심했다. 맹물 한 모금 입 안에 머금다가 그냥 차 한 잔을 마시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차 통을 열자 바닥이 보였다. 서랍에서 둥근 접시 모양의 보이차를 꺼냈다. 날짜를 보니 이십여 년은 족히 넘었다. 깜짝 놀랐다.
‘어, 이렇게 오래 되었다고…?’
그동안 선물로 받았던 것들을 한곳에 처박아 두었던 터였다. 그랬는데 차를 마시기 시작하면서 곶감 빼먹듯 하나둘 빼먹은 자리가 헐거워지기 시작했다.
딱딱하게 굳은 차를 맨손으로는 도저히 뗄 수 없어 망치로 내리쳤다. 어찌나 단단한지 몇 번을 내리친 끝에야 부서졌다. 사실은 매번 이렇게 깨서 마셨는데, 그동안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었다. 그런데 오늘은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아니, 차가 이렇게 단단할 일이야. 이건 돌이잖아….’
차는 오래될수록 좋다고는 하지만 단단해도 너무 단단해 마치 돌덩이 같았다. 차를 깨부수다 보니 어쩌면 우리가 지나온 세월과 닮은 것 같기도 했다. 우리도 이렇게 단단하려나? 시간으로 따지면 우리가 더 오래 됐는데. 그동안 수없이 울고 웃으며 여기까지 왔으니, 그 시간이 짓눌려 돌이 되었으려나 싶었다. 피식 웃음이 났다.
차를 내려 창가에 앉았다. 찻잎이 하나둘 살아났다. 그 온기가 빛으로 번졌다. 찻물이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주었다. 차를 잘 모르니 딱히 표현할 마땅한 말은 없지만, 잔잔하게 감싸주는 위로와 같은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동안 서로를 부르는 소리에 반응하며 살았다. 그 시간이 이제는 지나간 풍경처럼 서서히 바뀌어 가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아마도 차를 하나씩 빼 마셨듯, 우리의 시간도 그렇게 빠져나가고 있음을 잘 모르고 산 것 같다. 지나간 세월이 흐릿하게 스쳐 가며 고개를 갸웃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찻잔을 앞에 두고 나란히 앉았다. 찻잔 속에서 은은한 향이 우러났다. 창밖엔 어제와 같이 초록으로 가득하고, 바람은 강둑을 훑다가도 고요하게 머물고, 새들도 강과 숲을 넘나들었다. 두 손에 따뜻하게 감기는 찻잔. 그리고 내 곁에 앉아 있는 이 한 사람이 내 삶의 가장 오래된 시(詩)로, 가장 고운 풍경으로 아침을 맞는다.

광고의 제목 광고의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