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12월 682호
9
0
사람들이 잰걸음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호기심과 기대감으로 달아오른 그들의 눈빛은 한 곳을 향했다. 다농관 다뤼 회랑으로 향하는 계단 최정상에는 <사모트라케의 니케> 상이 서 있었다. 조각상 주변은 사람들로 혼잡했다. 곳곳에서 낯선 이와 부딪치고 동선이 엉켰다. 그러나 그만한 접촉은 대수롭지 않은 듯 지나쳤다. 당당히 바닷바람을 맞으며 돌진하듯 서 있는 승리의 여신상 앞에서 사람들은 너그러워져 있었다. 관람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려면 작은 일에 시간을 허비해서는 안 된다고 실리를 챙기는 건지도 모른다. 현의 눈에 비친 그들의 모습이 그랬다.
니케 상 주위로 몰려든 사람들은 연신 사진을 찍어댔다. 사람들이 승리의 여신에게 압도당해 있을 때, 현의 시선은 엉뚱하게도 그들을 향해 있었다. 관람객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2층 난간에 붙어 서서 몰려든 사람들을 재빠르게 훑어 나갔다. 많은 사람을 관찰하는 데는 그만한 자리가 없었다. 세계 각국에서 온 다양한 인종의 남녀노소가 거기 있었다. 여러 나라의 언어가 뒤섞여 윙윙 벌 떼가 날아다니는 것 같았다. 한껏 힘을 주었던 현의 눈꼬리가 내려온다. 피곤이 몰려왔다. 사람들의 얼굴이 마구 뒤엉켰다. 서양인, 동양인, 남자, 여자, 노인, 청년, 아이…. 한 덩어리가 되어 뭉글뭉글 소용돌이쳤다.
현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기억 속에서 주운 조각들을 모아 승우의 모습을 그려봤다. 창백하리만치 하얀 피부에 고집스러워 보이는 우뚝한 콧대와 약간 곱슬기가 있는 머릿결, 이국적인 분위기를 풍기기도 했다. 그래서 더 찾기 힘든지도 모른다. 과연 승우의 모습이 지금도 그대로일까? 그때 세상을 갈라놓을 만큼 커다란 굉음이 귓전을 때렸다. 현은 깜짝 놀라 두 손으로 양쪽 귀를 막고 주저앉아 몸을 한껏 웅크렸다.
익숙한 국숫집이 보였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 탓인지 늦은 점심시간인데도 노부부가 운영하는 작은 국숫집은 사람들로 복작였다. 현이 식당에 들어갔을 때 빈자리는 방금 손님이 일어선 4인용 테이블뿐이었다. 자리에 앉아 주문을 마치자, 식당 안으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들어섰다. 그들이 앉을 자리는 없었다. 안절부절못하는 주인 할머니의 표정과 비어 있는 1인석이 현의 눈에 들어왔다. 현은 얼른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다시 들었을 때 주인 할머니의 안타까운 눈빛을 보고 말았다. 현은 깊은 숨을 몰아쉬고 화장실 벽면에 붙여 놓인 1인석 테이블로 옮겨 앉았다. 장사가 안 돼 걱정하는 노부부의 사정을 뻔히 알기 때문이었다. 그저 식사 중 누군가가 화장실에 들어가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보이지 않아도 상상되는 그림이 떠오르자 미간이 좁아졌다. 방금 나온 뜨끈한 국물을 한 숟가락 입에 넣는 순간 화장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현은 수저를 내려놓고 슬쩍 자신이 양보한 테이블을 바라봤다. 그들은 유쾌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음식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러다 한 중년 남자와 눈이 마주쳤고, 그는 고마움의 표시인지 설핏 웃으면서 고개를 숙였다. 무안해진 현도 살짝 고개를 숙였다. 예민함을 자극하는 벽 뒤편을 생각하지 않으려 현은 빠르게 국수를 흡입했다.
순간 굉음과 함께 벼락이 쳤다. 허연 연기와 매캐한 냄새에 앞이 보이지 않고 숨이 막혔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식당 내부는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고급 세단이 유리문을 뚫고 식당 안으로 밀고 들어온 것이었다. 중앙에 있던 테이블은 산산조각이 났고, 사람들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현은 벽에 붙어 있던 구석진 자리라 괜찮았다. 여기저기서 신음과 울부짖는 소리로 식당 안은 지옥을 방불케 했다. 119 구급대에 실려 가는 중년 남자의 축 처진 팔과 손을 보는 순간 현은 주저앉았다. 남자의 선한 눈빛이 떠오르자 바짝 마른 목구멍이 찢어질 듯 기침이 터져 나왔다.
그 후, 현은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굉음에 놀라 주저앉기를 반복했다. 주위는 예전과 다름없이 흘러가는 데 뭔가 근본적으로 해결해야만 할 일이 있는 것만 같아 허둥댔다. 죽음이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불쑥 다가올지 모른다면. 아니, 죽음과 한 몸으로 살고 있다면 말이다.
현은 굽혔던 허리에 다시 힘을 주고 관람객들을 바라보았다. 서울에서 김 서방 찾는 황당한 행동이지만, 이것만으로도 숨이 쉬어졌다. 사람들 사이에서 뭔가 낯익은 모습이 보였다. 카키색 바바리를 입은 남자, 어디선가 본 듯한. 남자는 한동안 사람들에게 밀리면서 여신상을 묵묵히 바라봤다. 특이한 점은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그는 사진을 찍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계단을 올라와 사람들 물결에 휩쓸려 가고 있었다. 현은 마음이 급해졌다. 사람들을 헤집고 그에게로 다가가려다 멈칫 서고 말았다. 그 남자는 승우가 아니었다. 이젠 자기 눈을 믿을 수 없었고, 승우의 모습도 선명하게 기억나지 않았다. 그러나 박물관 문을 닫는다는 안내 방송이 나올 때까지 현은 눈에 인공눈물을 넣으면서도 사람들을 지켜봤다.
*
현은 두 달 전부터 진행했던 프로젝트를 마친 후 노트북 화면을 보고 있었다. 언제나 일이 끝나면 속이 헛헛했다. 허전함을 채우기 위해서는 다시 일에 빠져드는 수밖에 없었다. 좋은 성과를 낸 현에게 주변 사람들은 웃는 낯으로 축하했지만, 그 뒷말이 무엇일지는 모를 일이었다.
말이란 받아들이는 사람의 선택에 따라 연기처럼 사라지기도 하고, 마을을 집어삼킬 만큼의 화력으로 폭발하기도 한다. 현은 단순한 삶을 살았다. 일이 없으면 머리를 비우고 멍하니 있었다. 그런 현을 사람들은 뭘 또 구상하고 있냐고 혀를 내둘렀다. 단지 그냥 멍하게 있는 것뿐인데도 말이다. 그들은 워커홀릭에 빠진 골드미스로 현을 인식했다. 그 시선조차 현에게는 의미가 없었다. 그녀에게 삶이란, 살고 있으니까 사는 거였다. 노트북 화면 하단에 카톡이 떴다. <전시회 감상동아리>였다.
-나 승우 봤다.
-승우? 우리 동아리 회장 했던 강승우?
-파리 갔다가 루브르박물관에서 승우를 본 것 같아. 확실치 않지만.
-승우를 파리에서? 걔가 왜 거기에 있지?
또 다른 누군가 댓글을 달았다.
-헐, 작년에 가족여행으로 파리 갔다가 센강변에서 승우와 닮은 사람을 봤는데, 내가 잘못 본 줄 알았지.
이어서 동아리 회원들의 댓글이 쏟아졌다. 행색은 어떠냐, 살아 있기는 했구나, 진짜 예술을 사랑한 놈이구나, 파리에서 살고 있다니. 두더지 게임처럼 머리통을 여기저기서 내밀며 한마디씩 하던 그때 누군가 묵직한 망치를 상큼하게 휘둘렀다.
-현이랑 승우 죽고 못 사는 사이 아니었어?
-야, 인마! 그게 언제적 이야기라고. 그만해.
그 댓글을 끝으로 두더지들은 머리통을 내밀지 않았다.
20여 년이 흐른 <전시회 감상동아리> 방은 각자 사는 데 바빠진 회원들로 인해 활동이 뜸했다. 가끔 좋은 전시회가 있는데 가지 않겠냐는 물음과 전시회 포스터가 올라오면 회원들은 아쉬워하며 다음 기회에 참석하겠다고 댓글을 달았다. 그리고 예전과 다름없이 전시회 관람이 끝난 후, 뒤풀이가 어디에서 있는지 물어왔다. 그리운 얼굴이나 보러 술자리에는 참석하겠다는 얘기였다. 예전에도 그랬다. 제사보다도 젯밥에 관심이 많았다. 후다닥 전시회를 둘러본 다음, 감상은 술자리에서, 술자리에서 예술을 이야기하는 게 제맛이지 않겠냐며, 그리고 술독에 빠진 것처럼 모두 술을 퍼마셨다. 어찌 보면 술을 먹기 위한 애피타이저로 전시회를 관람했던 것 같기도 하다.
술자리에서 터져 나오는 감상평은 20여 년 전의 현에게는 달콤한 꿀처럼 들렸다. 설익은 비평가의 눈으로 감상을 나누다 보면 자신이 한껏 격조 있고 고상한 인간이 된 것 같아 좋았다. 자연스럽게 억눌렸던 감정을 꺼내 놓을 수 있어 좋았고,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고민을 그때만큼은 잊을 수 있어 더욱 좋았다. 행색은 궁핍하고 치기 어린 말들이었지만, 모두가 빛났었다. 그곳에서 현은 동아리 리더인 승우를 만났다.
현은 댓글을 빠르게 읽는 동안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더욱이 갑자기 들리는 죽음의 굉음에서 벗어나려면 숨겨진 내면을 직면해야 했다. 그렇다면 승우를 찾아야 한다. 현은 아주 오랜만에 휴가를 내고 파리행 비행기를 탔다.
박물관에서 돌아온 현은 숙소 침대에 걸터앉아 퉁퉁 부은 종아리를 주무르며 창밖을 내다봤다. 숙소 앞으로 센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센강 건너편 도로에서는 노란빛을 밝힌 차들이 빨간 꽁무니 불빛을 흘리며 지나갔다. 거기다 건널목에 세워진 신호등의 초록 불이 더해져 창밖 세상은 마치 크리스마스트리처럼 보였다. 빨강, 노랑, 초록빛이 번갈아 거리를 비추었고, 가로등 불빛은 센강에 빛그림자를 만들었다. 바람에 물결이 흔들릴 때마다 불빛은 춤을 추었다.
현은 하염없이 크리스마스트리 같은 세상을 바라봤다. 승우와 함께했던 크리스마스이브. 찬란하고 따뜻하고 반짝였던 그날. 물론 그날도 전시회 관람을 마치고 술집에서 감상평을 나누었다. 아마추어에 가까운 무명작가들의 첫 전시회였다. 작품은 소박하고 풋풋했다. 첫 설렘이 묻어나는 작품들이라 그렇게 느꼈는지도 모른다. 각자 좋았던 작품을 이야기할 때 승우가 <눈이 내리면>이라는 작품을 말했다. 현은 두근거렸다. 자신도 그 작품이 가장 마음에 들었었다. 전시관 안쪽 귀퉁이에 걸려 있어서 눈에 잘 띄지도 않던 작품이었다.
눈 내린 도시의 거리를 걷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따뜻해서 마치 파리의 벨 에포크 시대를 그린 미셸 들라크루아의 그림이 연상되었다. 승우는 그림 속으로 들어가 거리를 마냥 걷고 싶다고 했다. 그 길을 걷다 보면 사랑하는 사람이 눈 내리는 가스등 불빛 아래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거라 말했다. 승우의 이야기를 들으며 현은 가스등 아래서 있는 자신이 보였다. 좋다는 감정은 그렇게 소소하고 사소한 것에서 싹 텄다.
현은 들라크루아가 그린 센강변을 걷는다. 열린 창문으로 이불을 터는 여자가 보이고, 개를 끌고 산책하는 남자와 유모차를 미는 여자가 지나간다. 마주 오던 남자가 중절모를 벗어 다정하게 인사한다. 장난기 가득한 승우의 얼굴이다. 현이 다가가자 승우가 손을 내민다. 둘은 손을 잡고 센강변을 걷는다. 센강의 유속이 빨라졌다. 강물이 소용돌이치더니 강물 속에서 괴이한 물체가 불쑥 튀어나왔다. 현은 몸부림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밖에는 잿빛의 센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현은 아침이 밝아 오기 무섭게 오르세 미술관으로 향했다. 아침부터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입장을 한 현은 사람들을 잘 볼 수 있는 2층 테라스 전시관으로 올라가 난간에 붙어 서서 관람객들을 살폈다. 그 녀는 사람들 속에서 승우를 찾았다. 그러다 어느새 승우는 잊은 채, 생떼를 쓰는 아이들과 씨름하는 아빠, 가이드를 따라 몰려다니는 사람들, 신혼부부로 보이는 젊은 남녀들, 조각상을 올려다보며 감탄하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두 들뜨고 행복해 보였다. 혼자만이 이방인이 된 듯했다. 현은 멀리 시선을 던졌다. 건너편 벽면에 달린 커다란 시계가 보였다. 같은 시간이 사람마다 다르게 흐르고 있었다.
현이 다시 고개를 숙여 관람객을 살폈다. 그녀의 얼굴에서 서서히 빛이 사라졌다. 오랜 시간 똑같은 자세로 있어서인지 조각상처럼 몸이 굳어져 갔다. 현은 깊은숨을 몰아쉬며 허리를 쭉 펴고 천천히 전시실을 향해 걸어갔다.
현은 5층으로 올라가 그림을 보았다. 그림 한 점이 현의 걸음을 멈추게 했다. <카미유의 임종>. 카미유 앞에 서 있는 남자를 보는 순간 현은 숨이 멎는 듯했다. 어딘가 낯익은 모습, 승우인가 싶어 가까이 갔지만 승우는 아니었다.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숨이 새어 나왔다. 만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 저편에 만남이 빗나가길 원하는 또 다른 마음이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회랑을 돌았다.
현이 5층 회랑을 다 돌고 다시 한번 <카미유의 임종> 앞으로 왔을 때, 아직도 남자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마치 식어가는 카미유의 낯빛을 하고서. 그는 왜 저 그림에 사로잡혀 있는 걸까? 궁금했지만 현은 얼른 몸을 돌려 테라스 전시실로 발길을 돌렸다. 자신이 스스로 부여한 책무를 다하기 위해, 바보 같은 짓이긴 해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현은 뻣뻣해지는 다리를 흔들며 되뇌었다.
오르세 미술관을 나와 숙소로 가기 위해 현은 버스를 탔다. 버스는 센강을 따라 달렸다. 내려야 할 곳이 다가올 때쯤 버스 안은 사람들로 꽉 찼고, 황급히 빠져나오느라 몸이 휘청댔다. 누군가 그녀의 팔을 잡아 넘어지려는 걸 막아주었다. 현은 사람들을 뚫고 겨우 버스에서 내렸다. 그리고 내린 버스를 쳐다보자 한 남자가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낯익은 스카프가 들려 있었다. 현은 그제야 자기 목이 허전하다고 느꼈다. 남자는 입을 벙긋거리며 연신 손가락으로 다음 정거장을 가리키는 것 같았다. 당황해하는 현을 놓아두고 버스는 떠났다. 스카프가 사라진 목에 찬 기운이 훅 밀려왔다. 떨리는 몸을 한껏 웅크린 채 현은 천천히 센강을 따라 버스가 달려간 방향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얼마를 걸었을까, 앞에서 자신의 스카프를 들고 뛰어오는 카키색 바바리를 입은 남자가 보였다. 남자가 누군지 이제야 기억났다. 남자는 현을 발견하자 걸음을 멈춘 후, 가쁜 숨을 몰아쉬며 겨우 말을 이었다.
“스카프…. 맞죠?”
“네, 맞아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혹시 저 때문에 내린 건 아니에요?”
숨차 하는 남자에게 현은 미안해하며 물었다. 남자가 고개를 저으며 장난기 섞인 음성으로 말했다.
“아, 괜찮습니다. 이 스카프, 두 번이나 주인을 찾아드리는군요.”
“두 번이요?”
“한국에서 3일 전쯤 H항공기 타고 오셨지요?”
“맞아요.”
“제 발밑에 스카프가 떨어져 있어서 앞좌석에 올려놓았거든요. 모르셨지요?”
“아하, 정말요! 몰랐어요.”
“스카프가 아니었다면 앞좌석에 앉았던 분이라는 걸 저도 알지 못했을 거예요.”
현은 남자로부터 넘겨받은 스카프로 목을 감쌌다. 봄바람이긴 해도 저녁이 되자 쌀쌀했다. 스카프를 두르자 한결 몸이 따뜻해졌다. 현은 남자에게 뭔가 고마움을 표현해야 할 것만 같은데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남자도 머쓱하게 현을 쳐다봤다. 현은 기본 예의는 지켜야겠다고 생각했다. 여행지가 아니던가. 그녀는 남자를 향해 말했다.
“스카프도 구해 주셨는데, 맥주 한잔 어떠세요?”
남자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아닙니다. 저는 이제 센강변에 앉아 저녁노을을 즐길 생각입니다. 부담 갖지 마시고 좋은 여행 하십시오.”
남자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후, 뚜벅뚜벅 계단참으로 걸어갔다. 현은 조금 당혹스러웠지만, 연이은 우연이라면 이것도 인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과 비슷한 그늘을 가진 남자에게 잠시 시간을 내주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현이 남자에게 다가갔을 때, 남자는 백팩에서 어린이용 돗자리를 꺼내는 중이었다. 현을 발견한 남자는 놀라는 눈치였고, 얼떨결에 <토이 스토리> 캐릭터가 그려진 돗자리를 현에게 내주었다. 그녀는 생뚱맞은 물건에 참 특이한 남자란 생각이 들었다. 현은 호기심을 숨기고 무심한 척 물었다.
“여행 혼자 오셨어요?”
“네.”
“아하, 그러셨군요. 아까 오르세 미술관에서 뵌 것 같아요. 모네의 그림을 보고 계셨지요? <카미유의 임종> 앞에서. 그리고 어제는 니케 상 앞에서도 본 것 같은데.”
“어떻게 알아보셨어요? 특별히 눈에 띄는 얼굴도 아닌데 신기한데요. 파리를 찾는 관광객이라면 누구나 찾는 곳을 저도 찾아다녔으니 만날 수도 있었겠군요. 그래도 많은 사람 중에 저를 기억하시다니.”
현은 잠시 비행기 안을 떠올렸다. 화장실에 갈 때 뒷좌석이 스치듯 눈에 들어왔었다. 카키색의 바바리를 입고 석고상처럼 정자세로 앉아 있던 남자, 마치 불편함을 자초해 벌을 받는 행동처럼 보였었다.
“카키색 바바리가 눈에 확 띄었어요. 모네 그림 앞에서는 바바리를 입고 있지 않으셨지만.”
“그랬군요. 그럼 우린 같은 장소와 시간을 공유했군요. 아무리 많이 스쳐도 지나쳐 버린다면 영원히 모르는 사이가 되었을 텐데. 참, 신기합니다. 그런데 여행은 혼자 오셨나요?”
“혼자 온 건 맞는데 여행을 온 게 아니라 사람을 찾으러 왔어요.”
“사람이요?”
“친구….”
“찾으셨나요?”
“아니요. 못 찾았어요. 친구가 그림을 좋아했으니까 미술관을 중심으로 다니고 있어요. 그 친구가 목격된 곳을 중심으로요.”
남자는 의아한 듯 현을 쳐다봤다. 현은 특별한 일이 아니라는 듯 얼른 남자에게 되물었다.
“어떤 목적의 여행인가요?”
“목적 없는 여행입니다. 굳이 말하자면 3년 전에 들었던 적금이 만기되어 세웠던 계획을 실천하는 여행이라고 할까. 아내는 부득이한 사정으로 못 오고 저 혼자 왔습니다. 사실 의미가 사라진 여행입니다.”
현은 남자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시간을 잘 맞춰 부인과 함께 오시지.”
“인생이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더라고요. 제가 보면 아내와 딸도 함께 보고 있는 겁니다.”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제 말이 맞습니다. 제가 좋아하면 아내와 딸도 좋아합니다. 진짜입니다. 제 얘기를 누구보다 좋아하고 즐거워하는 사람들이죠. 제가 아내에게 잘 설명해 주면 좋아할 거예요. 사실 파리는 아내가 선택한 여행지였어요. 제 아내가 조금 엉뚱한 데가 있거든요. 괜찮으시다면 들어 보실래요.”
현은 깜짝 놀랐다. 깊은 침묵 속에 빠진 듯한 첫인상과는 달리 남자가 말이 많았다. 현이 사람을 잘못 보았나 의문이 들었지만, 어찌 되었든 친구가 되어주기로 한 이상 말을 받아주었다. 남자는 서서히 붉게 물들어가는 서쪽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내와 저는 파리로 신혼여행을 오려고 했습니다. 아내가 저를 만난 건 운명이었다며 꼭 모네의 그림을 보고 싶어했지요. 제가 잃어버린 노트를 아내가 찾아주었는데 노트 표지에 모네의 수련이 그려져 있었어요. 만약 모네의 그림이 아니었다면 굳이 찾아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아내가 말하더군요. 자신이 수련을 닮았다나. 별것 아닌 것에도 기발한 의미를 붙여 즐거움을 찾는 여자였지요. 그런데 결혼식을 며칠 앞두고 우리에게 아기가 선물처럼 왔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아내와 아기의 건강을 위해 신혼여행을 미루었습니다. 금방 떠날 줄 알았던 여행이 이런저런 이유로 차일피일 미루게 되고 시간은 자꾸 흘러갔지요. 그냥 저지르고 보면 되는데 왜 그렇게 이리저리 쟀는지. 아내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여행 적금을 들어 어떤 이유를 불문하고서라도 만기가 되면 여행을 떠나겠다고요. 아내는 여행의 최고 즐거움은 여행 떠나기 전날 맛보는 설렘이라고 말했습니다. 매달 통장에서 적금액이 쌓이면 아내는 마치 금방이라도 여행을 떠날 것처럼 행복해했어요. 매달 설렘을 이자처럼 받고 행복을 저축하는 여자였지요. 그런데 저축만 하고….”
남자의 말끝이 흐려졌다. 사라진 말 뒤에는 알 수 없는 긴장감이 돌아 현도 쉽사리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강 위를 지나가는 뱃소리와 뒤에서 들려오는 도시의 소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찾는 분은 어떤 사람인가요?”
남자가 이야기를 전환하려는 듯 현에게 물었다.
“어떤 사람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현은 승우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다. 승우와 놀이공원 입구 화단에 앉아 지금처럼 해가 저물 때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던 그날이. 승우는 놀이공원을 가자고 먼저 얘기를 꺼냈고,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어떤 놀이기구를 탈 것인지 신나게 얘기했었다. 현은 고소공포증이 있어 무서운 것은 절대 못 탄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었다. 승우는 자신만 믿으라고 했다. 놀이동산 입구에 도착했는데 갑자기 승우는 놀이동산 앞 장미정원 화단 돌턱에 쪼그리고 앉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금은 무슨 이야기인지 생각이 안 나지만 그의 말을 끊고 입장권을 사러 가자고 할 수가 없었다. 그의 표정이 너무 심각해서. 서너 시간을 놀이동산 입구 앞에서 입장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놀이기구를 하나도 타지 못했는데도 승우를 더 좋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어떤 문제든 이토록 깊이 있게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다니. 소설 속 인물과 좋아하는 철학자의 사상과 현시대의 문제점까지.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간혹 현이 의견을 말하면 그는 더없이 다정한 얼굴로 수긍해주고 감탄해 주었다. 롤러코스터를 탄 것보다 더 짜릿한 순간이었다. 장미 향기가 진동하는 장미 넝쿨 아래서 장미 향을 맡으며 이야기에 취했었다.
꿈에서 깨어난 듯 현은 말했다.
“장미 향기 같은 사람이요.”
남자의 눈이 커졌다가 스르르 반달 모양이 되었다. 남자가 처음으로 웃었다. 말을 하다 보면 자기 말에 취할 때가 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을 바닥이 보일 정도로 싹싹 긁어 다 보여주고 싶을 때가. 센강을 물들이며 지는 노을이 현을 그렇게 만들었다.
“그 사람은 남자친구였는데 사라졌어요. 4월에 내리는 눈 아세요? 4월에 눈이 내리면 그 친구가 생각나죠. 아니요. 언제나 생각나요. 잊을까 봐 제가 겁을 내는 게 맞아요. 그를 잊는 건 그를 용서하는 거라서 잊으면 안 돼요. …사실 별거 없어요. 따뜻한 남쪽으로 여행을 떠나자고 약속했어요. 단둘이서. 그 친구를 너무너무 좋아해서 여행이 얼마나 기대되고 떨렸는지 몰라요. 그런데 약속 시간에 그가 나타나지 않았어요. 타려고 했던 기차가 떠나고 혹시 무슨 일이 벌어졌나 싶어 그를 아는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었어요. 아무도 어디 있는지 모르더군요. 처음에는 걱정이 되다가 분노하고 서서히 미쳐갔어요. 아침이 올 때까지 서울역에서 기다렸어요. 서울역 안 대형 TV에서 4월에 눈이 내린다고 참 신기한 일이라고, 펑펑 내리는 눈을 보여주었지만, 우리가 만나기로 한 장소에서 꼼짝도 안 하고 있었어요. 밤이 지나고 아침이 밝아 올 때 역을 나섰지요. 세상은 밤새 펑펑 내린 눈으로 하얀 겨울왕국이 되어 있더라고요.”
“그 친구분은 왜 안 온 건가요?”
“모르죠. 그게 궁금해서 20년이 흐른 지금에 그를 찾아온 거예요. 재미있지요? 그 친구는 사라졌어요. 사라지고 난 후, 그에 관한 얘기가 마구 올라왔지요.”
남들이 죽고 못 사는 사이라고 볼 만큼 서로를 사랑했지만, 정작 승우에 대해 아는 게 별반 없었다. 그들은 서로의 생활을 존중해 주는 편이었고, 그게 자랑이었다. 건강한 사랑을 하고 있다는. 그러나 승우에 대한 편안함은 자신이 믿고 싶은 모습으로 믿었기 때문에 오는 안정감이었다는 걸 훗날 현은 알았다.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믿고 싶은 대로 믿는 것. 가장 달콤한 마취제. 안타까운 건 효과가 금방 휘발되어 사라지고 만다는 것이었다.
승우가 사라진 후, 현은 말을 잃었다. 할 말이 없었다. 단편적인 이야기를 모아보면, 그가 동아리 회원들에게 많은 빚을 졌다는 것. 모두가 학생이라 부모에게 용돈을 받거나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충당하는 형편이었는데, 누구보다 회원들의 처지를 아는 동아리 회장이 돈을 빌려 사라졌다는 것에 분노했다. 그의 해박한 예술적 소양과 지식에 대해서도 반신반의하는 이야기들이 쏟아졌다. 하나가 의심스러우니까 모든 게 의문 덩어리였다.
그를 수소문하다 한참 후에는 이런 이야기도 나왔다. 밤에 택배 분류하는 일을 했는데 같이 일하던 고등학생이 다쳤다는 것이다. 회사 측에서 신분을 속인 고등학생에게 책임을 떠밀고 모른 척하자, 승우가 발 벗고 나서서 쫓아다녔다고 한다. 그래서 돈이 필요했을 거라고 회원들은 그랬다. 제대로 얘기를 하지, 왜 사라져 버렸냐고. 남을 돕기 위해 돈을 빌려 갚지 않는 게 옳은 일인가에 대한 찬반 토론이 뜨겁게 단톡방을 달궜다.
더욱 기가 막힌 건 승우를 찾는 여자가 나타났다는 거였다. 막장이었다. 여자를 만나볼까 고민도 했지만, 그럴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다. 나쁜 놈. 또 시간이 흐른 후, 그 여자가 애인이 아니라 여동생이란 말도 들려왔다. 한 사람을 놓고 이야기가 이렇게 다르다니. 그땐 미움과 분노가 너무 커서 현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동료들은 침묵하는 현을 비겁하다고 질타하거나, 그녀도 피해자라고 옹호하기도 했다. 현은 적어도 연기처럼 사라지기 전에 자신에게만은 진실을 말해줘야 하는 게 아니냐고, 그게 사람의 도리지 않냐고 허공에 대고 되묻고 또 되물었다.
남자에게 승우를 이야기하면서 현은 문득 마음의 크기가 달라서 그랬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하늘 우주만큼의 크기인데, 승우는 100원짜리 동전만 한 마음이었을 수도 있었겠다고.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남자는 현의 담담함 속에 숨겨진 그늘을 읽었다. 그 그늘이 자신의 것과 결이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현이 잔물결을 일으키며 흐르는 강물을 유심히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그 친구가 안 와서 제가 엄청 아팠어요. 진짜 미워하면서 살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제가 추억을 먹고 살았더라고요. 물론 그 추억이라는 것도 제가 편집해서 만든 것일 수도 있지만요. 이상한 건 소소한 것들이 잊히지 않는다는 거예요. 얼굴에 묻은 머리카락을 떼어 준다든가, 무거운 가방을 얼른 들어 자신이 메고 간다든가, 내 가방을 메고 가는 그의 뒷모습에서 제가 그에게 업혀 가는 기분이었어요.”
현은 남자가 이야기를 듣고 있는지 슬쩍 남자를 쳐다보았다. 남자의 시선도 쉼 없이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현이 다시 말했다.
“조금 춥긴 하지만 좋네요. 훗날, 이 순간도 기억할 것 같아요. 센강변에서 우연치고는 너무 인연 같은 분과 함께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것. 사실 무언가 강렬하게 마음에 남는 것은 경치나 음식보다도 누구와 함께였느냐인 것 같아요. 결국 사람이 남는 거지요. 안 그런가요?”
한참 침묵하며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남자가 천천히 말했다.
“그렇지요. 이야기를 듣고 보니. 사실 오늘 오르세미술관에서 죽은 카미유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모네를 보았네요. 모네가 이곳저곳에 걸린 동료들의 그림을 감상하다 다시 돌아와 카미유를 들여다보더군요. 그의 동료인 마네와 르누아르도 다가와 함께 그녀를 들여다보다 엄숙하게 고개를 끄덕거렸어요. 죽어가는 아내를 그릴 만큼 깊은 사랑과 그림에 대한 열정은 대적할 수 없다는 승복의 표현이었지요. 그런데 조금 있다 어떤 여자가 모네 곁에 서서 짓궂은 표정을 짓더라고요. 아, 카미유더라고요. 빨간 양귀비꽃이 핀 들판을 아들과 함께 걷던 모네의 아내, 카미유였어요. 그들의 옷차림을 보고 알아챘지요.”
무슨 소리인가 의아해하는 현을 향해 그가 말을 이었다.
“저도 아내와 다섯 살 난 아이와 함께 그림을 감상했습니다. 제 아내가 그러더라고요. 내가 여기에 있네. 아이가 말했어요. 나도 여기 있네. 하면서요. 아까 물으셨지요. 아내의 꿈을 위해 함께 왔어야 하지 않았느냐고요. 맞아요. 아내와 저는 함께 그림을 보았고 아내가 활짝 웃는 모습을 보았어요. 아내는 흡족해서 마구 웃더군요. 무척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현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흘긋 남자를 보았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 같은 남자의 눈을 보는 순간 현은 당혹스러워 고개를 돌려 센강을 바라봤다. 붉게 물든 하늘이 센강을 물들였고, 붉은 노을에 취한 강물이 유혹하듯 흔들렸다. 현은 남자가 강물로 침몰하기 전에 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은 남자에게 말했다.
“내일 함께하실래요? 괜찮으시다면요.”
남자가 한참 후에 대답했다.
“그럼, 디즈니랜드에 갈까요?”
현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놀이동산은 생각도 해본 적 없었지만, 고개를 끄덕여야만 할 것 같았다. 잠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던 남자도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디즈니랜드 앞에서 만납시다. 남자는 그 말을 남기고 뚜벅뚜벅 걸어갔다. 남자가 걸어간 길을 따라서 가스등에 불이 들어왔다.
*
디즈니랜드에서 만난 현과 남자는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함께 놀이동산을 누볐다. 선물 가게에도 들어가서 이것저것 만져도 보고 모자도 서로 씌워 주면서 많이 웃고 떠들었다. 굳이 상대방에게 이야기를 들어 달라고 하지도 않았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깊이 들을 생각도 없었다. 현은 승우의 이야기를 했고, 남자는 아내와 딸의 이야기를 했다. 두 사람은 여태껏 누군가에게 그들의 이야기를 터놓은 적이 있었나 싶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이야기했다. 처음에는 상대방의 이야기에 예의상 고개를 끄덕였으나, 차츰 서로에게 스며들 듯 남자에게는 승우가, 현에게는 남자의 아내와 아이가 보이기 시작했다. 심지어 살갑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두 사람은 아주 사소한 이야기에도 크게, 크게 입을 벌리고 소리 내어 웃었다. 옆에서 다른 사람이 보았더라면 복권에 당첨된 사람들이 아닌가 오해를 살 법한 표정들이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음껏 한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지, 그들은 깨달았다. 누군가 무엇을 하자고 제안을 하면 바로 따라주었다. 물론 현이 제안한 것을 남자가 따르는 식이었다. 잠시 벤치에 앉아 숨을 고르고 있을 때, 남자가 디즈니랜드에 와서 처음으로 제안했다.
“<토이 스토리> 공연을 보고 싶은데 괜찮겠어요?”
현은 남자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무조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곳이 그가 가장 가고 싶은 장소라는 걸 현은 이미 알고 있었다. 현은 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토이 스토리> 공연은 신나는 노래와 춤으로 막이 열렸다. 스크린에 배경이 이리저리 바뀌면서 장난감들이 사람이 되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춤과 노래가 흥을 돋웠다. 현의 눈앞에 한 여자아이가 보였다. 바로 앞줄에 다섯 살 정도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어깨를 들썩이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옆에 앉은 부모가 못 말리겠다는 듯 미소 지었다. 더없이 사랑스러운 눈빛이었다. 여상 있는 일인 듯했다. 음악이 고조되자 아이의 춤도 어깨에서 온몸으로 번져갔다. 이제 두 다리까지 흔들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공연을 온전히 즐기는 건 여자아이였다.
현은 무대 위 조명이 그 가족에게 쏟아져 내리는 걸 보았다. 차츰 모든 주위가 깜깜해지고, 오직 아이의 모습에만 환한 불빛이 비쳤다. 그 빛 끝에 현은 승우가 오지 않았던 다음 날 아침이 보였다. 온통 하얗게 변한 세상은 눈빛으로 날카로워져 위태로웠다. 발을 베일 것 같은 눈길을 걸어, 현은 무작정 앞으로 걸어갔다. 승우와 함께 가려던 따뜻한 남쪽 마을을 향해서. 서울역에서 갈월동을 지나 남영동, 삼각지, 용산을 거쳐 한강대교를 건널 때, 하얀 눈밭에 빨간 선혈이 뚝뚝 떨어졌다. 그리고 눈길에 쓰러지고 말았다. 자신에게 찾아왔던 소중한 생명이 떠났다는 걸 예감하는 순간이었다.
악기 연주와 노랫소리에 맞춰 관객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모두가 흥겹게 즐기는데, 현은 소리 죽여 울었다. 주체할 수 없이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쳤다. 여자아이는 이제 온몸을 들썩이며 춤을 추었다.
현은 생각했다. 과연 승우를 사랑했을까. 그가 왜 나타나지 않았는지 살펴보지도 않고, 그를 미움의 감옥에 가둬 버렸다. 우주 공간의 미아로 둥실둥실 떠다니는 자기 모습이 보였다. 승우도 자신의 의지와 달리 굴러가는 굴렁쇠를 잡지 못해 궤도에서 튕겨 나가 버린 것일까?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자 눈앞이 밝아졌다. 여자아이가 머리를 이리저리 까딱거리며 ‘좋아 좋아’를 연발하는 것 같았다. 잊고 있었던 말이었다.
아, 좋아 좋아.
승우가 그랬었다.
행복은 대단한 게 아니야. 좋다는 감정을 많이 느끼고, 그게 쌓인 게 행복이지. 아, 좋다. 마음 따뜻해지는 그림을 보아서 좋고, 그걸 현이와 함께 봐서 더 좋고, 함께 이 감정을 나눌 수 있어서 더더욱 좋고….
현의 입 안에서 좋다는 소리가 뱅글뱅글 맴돌았다. 이제야 승우를 버릴 수 있었다. 그녀는 자유로워졌다. 사모트라케의 니케 여신처럼 날개를 달고 날아오르는 것같이 몸이 가벼워졌다. 흥분된 감정을 다독이다가 옆자리의 남자가 이상하다는 걸 알았다. 그는 격하게 온몸을 떨고 있었다. 울음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지만, 어느새 남자는 오열하고 있었다. 현은 놀라 그의 팔을 잡았다. 공연은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다. 노래와 악기 연주, 박수 소리로 공연장은 들썩였다. 현은 잡은 손에 힘을 꽉 줘 자신의 마음이 전달되길 바랐다.
남자가 앞서 걸어가고 있었다. 저 멀리에서는 퍼레이드를 알리는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의 발걸음이 바빠졌다. 그들의 발걸음이 박자를 탔다. 현은 남자를 급히 따라가 손을 내밀었다.
“저와 함께 춤추실래요?”
남자가 현을 보았다. 빨갛게 충혈된 눈이 애써 웃음을 지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