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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인협회 로고 김범선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12월 68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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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오늘도 안 피네!”
“꽃잎이 조금 더 벌어졌나요?”
“아니, 그대론데.”
아내 성주가 몹시 실망한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조금도 변화가 없나요?”
건우가 물었다.
“어제 그대론데…. 야, 너 이름 바꿔야겠다.”
“뭐라고 바꿔?”
“약백합이라고 이름을 바꿀 거야.”
“약백합? 약초는 아닌데….”
“약초 말고, 꽃은 안 피고 사람 약만 올리는 백합.” 
성주가 깔깔 웃었다.
“조금 더 기다려 봐요.”
“기다리긴 뭘 더 기다려, 저 모양으로 벌써 구일째인데.”
성주가 몹시 실망이 가득 찬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지난 봄, 영주댐에 드라이브를 갔을 때 이산초등학교를 지나 원리 언덕을 넘자 도로변에 영주나무시장이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우리는 매주 두세 번 영주댐 일원을 드라이브했다. 왜 영주댐에만 갔냐고? 도심은 차가 많이 다녀 신경이 쓰이는데 영주댐에는 차와 사람도 없고 2차선 도로 변에 벚꽃나무가 심어진 아스팔트 도로를 전세를 낸 것처럼 마음대로 다닐 수가 있었다. 도로 변에 심어 놓은 벚꽃나무에 새순이 돋아 나오기에 추운 겨울이 지나갔네 하는데, 어느 날에는 주행 중에 옆자리에 앉아 있는 할머니가 “여보 잠깐” 하며 차를 세우란다. 건우가 차를 세우자 그녀는 문을 열고 나가 눈송이처럼 활짝 핀 벚꽃을 핸드폰으로 찍고 있었다. 그녀의 블로그에 올리기 위해서이다.
‘어, 저 꽃이 언제 저렇게 활짝 폈지?’ 하고 생각하는데 아내는 벚꽃을 찍는 데만 정신이 없었다. 건우는 겨울의 앙상한 나뭇가지만 생각했는데 어느새 봄은 영주댐의 벚꽃나무에 활짝 꽃을 피게 했다.
어느새 댐의 주변에 산들은 녹색으로 변해 있었다. 차를 타고 도로 위에 비에 젖은 벚꽃 꽃잎이 하얀 눈처럼 떨어져 있는 길을 지나갔는데 다시 보니 꽃과 나뭇잎은 지고 나뭇가지만 앙상한 겨울철이었다. 2∼3일에 한 번씩 이 길을 지나갔는데 잠깐 사이에 계절은 변해 있었다. 팔순이 지나 인지 능력이 둔해져서 그런가? 어떻게 잠깐 사이에 계절이 변해 있는지 이해가 안 된다. 갑자기 아내가 “여보, 저기 한번 가 봐요” 하고 영주나무시장을 가리켰다.
하망동이라는 도로 변 표시판 건너편에 ‘교통사고 다발 지역이니 서행하세요. 영주나무시장’이라 쓰인 현수막이 전면 도로 변에 걸려 있었다. 영주나무시장 앞 도로가 곡선으로 나 있어 저런 현수막을 걸어 놓은 것 같다. 그곳은 도로가 곡선으로 나 있어 주행 자동차나 나무시장 에서 출구로 나오는 자동차가 서로 안 보여 과속을 하면 교통사고가 나는 것 같았다. 건우는 2∼3일에 한 번씩 이 도로 앞을 지나가면서 꽃을 좋아하는 아내를 위해 저곳에 들를 생각은 왜 못 했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차도에서 우회전하여 비포장 좁은 길을 들어가자 넓은 밭에 이름도 모르는 묘목과 꽃들이 피어 있었다. 영주나무시장 안에 들어가자 트럭과 승용차를 타고 온 사람들이 묘목과 꽃들을 사고 있었다. 농막 같은 건물 앞에는 나무판자로 계단씩 진열대를 만들어 놓고 그 위에는 눈이 부시게 아름답게 활짝 핀 처음 보는 꽃 화분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둥근 모자를 쓴 까만 옷을 입은 중년 여성이 꽃을 팔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화분에 담긴 꽃을 사거나 나무를 사고 있었다. 아내는 차에서 내려 한참 동안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뒤에서 승용차의 트렁크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백미러를 보니 아내가 어떤 청년과 같이 나무를 들고 서 있었다. 트렁크를 열어주자 청년이 나무가 커서 나뭇가지를 굽혀서 집어넣었다.
“여보 카드.”
아내가 조수석 창문을 두드리며 말을 했다. 잠시 후 그녀가 조수석에 타자 건우는 나무시장 비포장 좁은 출구 도로를 나왔다.
“무슨 꽃 샀어?”
“4년생 능소화 꽃나무 사만 오천 원, 백합 구근 세 개 구천 원.”
아내는 빙그레 웃으며 아주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말을 했다. 
“돈 아깝지?”
“아닌데.”
“얼굴 표정에 그렇게 쓰여 있는데.”
“넘겨짚지 말아요.”
“내가 사기꾼에게 걸려 결혼을 했지만 비싼 옷을 사 입었나, 맛있는 음식을 사 먹었나, 꽃을 사는 데는 돈 안 아낄 거야.”
아내는 아주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했다.
건우는 사기꾼이라는 말이 나오면 찔끔했다. 그녀가 자기 블로그에 올린 글 때문이었다. 그녀가 ‘결혼여행’이라는 배너에 올려놓은 수기 중에 동생의 소개로 건우를 만났는데 데이트 시절에 다방에서 만나서 커피를 마시자고 했더니 자기를 따라오라고 해서 갔더니 길가에서 파는 포장마차에서 20원을 주고 홍합국을 한 그릇을 사가지고는 둘이서 같이 먹자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기는 4남 4녀의 장남이지만 결혼을 하면 둘이서만 살면 된다고 했다. 그리고 길거리 좌판에서 파는 30원짜리 구리 반지를 사서 손에 끼워 주면서 청혼을 했다는 것이다. 자기는 건우의 그런 행동이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아주 건전한 사람이라고 생각을 해서 결혼을 했다는 것이다.
신혼집을 얻는 전세금 60만 원도 절반씩 부담을 하자고 해서 30만 원씩 나눴는데 건우가 부담을 한 30만 원은 종합고등학교 선생님에게 빌린 돈으로 매달 봉급에서 이자와 원금 일부를 떼고 주더라고 했다.
그런데 결혼하고는 둘이서만 산다고 해놓고 고향 영양읍에 살고 있는 시어머니와 5명의 동생들까지 모두 영주시로 데려와서 구학공원 밑에 방 3칸 전세에 살게 했다.
시멘트 블록으로 지은 그 집은 소유자가 여왕미장원을 하는 여자라고 했다. 방 3칸 중 1칸은 생사공장에 다니는 아가씨가 월세로 산다고 했다. 지금은 영주시민운동장이 서천을 건너 가흥동에 있지만 옛날에는 지금 영주동 주공아파트가 있는 곳이 시민운동장이었다. 운동장 옆에는 생사공장이 있었다. 생사공장은 누에의 고치에서 명주실을 뽑아내는 곳이었다. 그곳에는 많은 젊은 아가씨들이 근무를 했다. 공장 안에는 아가씨들이 숙식을 하는 기숙사도 있었다. 어느 날 매일 자전거를 타고 그 길을 따라 출퇴근을 하는 동료가 자기는 기숙사에 있는 아가씨들을 볼 수가 있다고 말을 했다. 어떻게?
그는 기숙사를 향해 “영자야!” 하고 크게 불렀다. 갑자기 기숙사 창문이 열리며 아가씨들이 내다보았다. 그는 자전거를 타고 쏜살같이 내빼 버렸다.
당시에 그 공장은 영주에서는 가장 큰 기업이었다. 건우는 아침이면 자전거를 타고 서천 제방 둑길을 달려 종고까지 갔다. 비포장 서천 제방 둑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서천교를 건너면 종합고등학교가 있었다. 그 둑방 길은 봄에서 가을까지는 좋은데 겨울철에는 너무 추워 그 길을 다니지 못했다.
영양읍에서 영주시로 어머니와 5명의 동생들이 오자 방 2칸으로는 부족했다. 그래서 생사공장에 다니는 아가씨를 내보냈다. 블록으로 지은 방 3칸 작은 집에 성인이 된 동생들과 어머니가 오자 그때부터 아내는 만삭이 된 몸으로 하루 3끼 밥을 하느라 고생을 했다.
자기는 시댁 식구들과 합쳐 7명의 대가족들의 하루 세 끼 밥을 하는 데 죽을 고생을 했다는 것이다. 한 달에 쌀 한 가마니도 부족하더라고 했다. 반찬은 김치 한 가지뿐인데도 신기하게도 끼니 때마다 가족들은 밥그릇을 모두 싹 비우더라고 했다. 그리고 시동생들과 시누이는 모두 자기 방으로 가서 말없이 공부만 하더라고 했다. 그리고 건우는 자기는 경상도에서 제일 잘 살았던 부잣집 출신으로 망하지만 않았다면 당신과 결혼하지 않았다고 공갈을 쳤다. 대가족이 같이 살면서 보니 남편은 매사에 쪼잔하고 속이 좁아, 자기는 30원짜리 구리 반지와 홍합 한 그릇에 속아 사기꾼과 결혼을 했다는 것이다. 자기 블로그 ‘결혼여행’이라는 배너에 그렇게 써서 올려놓았다.

 

성주는 집 뒤란 작은 텃밭에 능소화나무와 백합을 심었다. 5월에 접어들자 능소화나무에 잎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빨간 꽃망울이 생겼다. 그녀는 자기 블로그에 능소화꽃 사진을 올리기 시작했다. 블로그 이웃들의 ‘능소화 참 예쁘네요. 나도 한 그루 사서 심어야겠어요’ 하고 댓글이 달렸다.
어떤 이웃은 자기 집 아파트 베란다에 심어놓은 능소화 사진을 댓글에 올려주기도 했다. 어떤 이웃은 조선시대에 암행어사의 관모에 꽂은 꽃이 능소화라고 댓글을 달기도 했다.
문제는 1개에 3,000원을 주고 산 3개의 백합구근이었다. 계란만 한 백합구근에서 새싹이 돋아나자 아내는 아침저녁으로 물을 주고 이름도 모르는 비료를 주며 정성을 다했다. 그녀는 백합의 구근을 심을 때부터 백합이 크는 과정을 자기 블로그 ‘노년의 하루’라는 배너에 사진을 찍어 올리기 시작했다. 3천 원짜리 백합이 무릎 아래까지 키가 커서 하얀 꽃망울이 맺히자 블로그 이웃들이 ‘낼이면 백합이 피겠네요’ 하고 댓글을 달았다. 하얀 백합꽃이 속살을 보이며 활짝 피자 여러 각도에서 백합꽃을 사진을 찍어 블로그에 올리기 시작했다. 3그루의 백합꽃이 활짝 피자 작은 텃밭이 환하게 밝아지는 것 같았다.
달님이라는 네임을 쓰는 이웃은 ‘백합 향기가 여기까지 나네요’ 하고 댓글을 달았다. 또 어떤 이웃은 ‘청라언덕과 같은 내 맘에 백합 같은 내 동무야’ 하고 노랫말을 달기도 했다.
됐네요. 저 백합은 향기가 없는 백합이랍니다. 어떻게 아냐고요. 건우는 초등학교 시절, 전국에서도 가장 작은 자치단체인 영양읍 도뭇골 옛집에 살았다. 야산 밑에 1500평의 대지에는 3채의 건물이 있었다. 본채와 사랑채, 그리고 외채. 기와집 본채 뒤란 야산 밑에는 작은 텃밭이 있었다. 야산에는 4그루의 밤나무가 있었고 텃밭에는 감나무가 2그루 있었다. 납작 감이 달리는 감나무가 서 있는 둑 아래에는 백합 군락지가 있었다. 그 백합 군락지는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고 난 뒤 물을 버리는 곳이었다. 5월 달이 되어 백합이 피면 향기가 집 안 가득히 퍼졌다. 대문 옆 우물가에도 백합이 있어 집에 들어서면 백합 향기가 진동을 했다.
초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 어느 날, 건우는 뛰어놀다 피곤해서 본채 뒤란 툇마루에 누워 낮잠을 잤다. 그런데 잠을 깨자 마치 술을 먹은 것처럼 얼굴이 벌겋게 부어오르며 머리가 깨어질 듯 아팠다.
할머니가 백합 향기에 취해서 그렇다며 꿀을 타서 먹이며 마당에서 뛰라고 했다. 향기 좋은 백합 향에도 독성이 있었다. 당시에는 집 뒤에는 산이 있고 앞에는 강이 있는 배산임수 집을 가장 좋아했다. 나무장작으로 밥을 해먹던 시절이라 뒷산에서 수시로 땔감을 구할 수가 있고, 집 앞 강에서 물고기를 잡아 단백질을 먹을 수 있어 그렇다.

 

건우는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느티나무 밑에서 공부를 했다. 하루에 4시간 수업을 했다. 교실이 없어 주번 2명이 교무실에 가서 흑판을 들고 와서 느티나무에 걸어 놓으면 선생님이 하얀 분필로 흑판에 “바둑아 바둑아 이리 오너라” 하고 쓰면 학생들은 공책에 받아썼다. 2시간 수업이 끝이 나면 나머지 2시간은 한국전쟁으로 폭격을 당해 부서진 일제강점기에 지어 놓은 교실의 잔해물을 치워야 했다. 2시간 수업을 하고 나머지 2시간은 폭격의 잔해물인 벽돌과 시멘트 파편, 나뭇조각과 잡동사니들을 손으로 들고 치우는 게 하루 2시간 수업이요 일과였다.
지금의 영양초등학교 운동장 동쪽 끝은 저지대로 옛날에는 넓고 깊은 웅덩이가 있었다. 전쟁으로 폭격을 당해 부서진 교실의 잔해물은 모두 그곳에 묻혀 있다. 포클레인으로 2m만 파보면 잔해물이 나올 것이다. 전쟁 후라 학교 입학 후에 선생님이 흑판에 쓰는 것을 공책에 받아 쓰기만 했는데 3학년 때 처음으로 학교 가니 교과서가 나왔다. 그 교과서에는 이런 문장이 있었다.
“달달 무슨 달 쟁반같이 둥근 달∼ 어디 어디 떴나 동산 위에 떴지.”

 

건우는 오늘은 아내가 병원에 가서 혼자서 영주댐에 드라이브를 나왔다. 석포교를 지나 선비수련원에 갔다가 귀갓길에 지난번에 산 백합꽃을 보고 아주 좋아하던 아내 생각이 나서 영주나무시장에 가서 어린 시절에 보았던 짙은 향기가 나는 토종 백합을 사고 싶었다. 그래서 영주나무시장에 들렀다. 둥근 모자와 검은 옷을 입은 여성이 꽃과 묘목을 팔고 있었다. 건우는 조수석에 창문을 내리고 그 여성에게 물었다.
“토종 백합 있나요?”
“잠깐 기다리세요.“
그 여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우측 창고 같은 곳에 들어갔다. 건우는 향기도 나지 않은 하얀 백합꽃을 보고 소녀처럼 좋아하는 아내에게 진짜 백합과 어린 시절 경험한 백합 향기가 얼마나 좋은지 직접 보여주고 싶었다. 종이로 포장이 된 밥그릇만 한 꾸러미를 손에 들고 꽃집 주인이 조수석 창문 옆에서 말을 했다.
“이 백합은 한 개에 오천 원이에요.”
“지난번에 백합은 한 개 삼천 원을 주고 샀는데요.”
“이건 겹백합이라 가격이 더 비싸요.”
순간 토종 백합이 아니고 겹백합, 그런 백합도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 개만 주세요.”
그녀는 전지가위로 종이 포장을 하고 끈으로 묶어 놓은 꾸러미의 포장지를 벗기고 백합 구근 3개를 신문지에 싸서 내밀었다. 건우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이 백합은 농장에서 직접 심어서 키우는 구근이 아니고 쿠팡에서 구입해서 택배로 받아서 파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쿠팡에서 바로 사면 되잖아.
“여보, 이 백합 봐요. 이게 향기가 나는 진짜 백합이라오.” 
건우는 자랑스럽게 백합 봉지를 내밀었다.
“구근은 똑같네.”
“저건 삼천 원 줬지만 이건 한 개에 오천 원을 줬다오.”
“이천 원이 더 비싸네.”
“이건 향기가 나는 진짜 백합이라오.”
아내는 햇볕이 아주 잘 드는 텃밭에 새로 산 백합 5천 원짜리 백합 구근 3개를 정성 들여 심었다. 그리고 그 백합을 심은 곳에 그제께 먹은 전복 껍데기로 동그랗게 꽂아 놓았다. 이건 이천 원이 더 비싼 백합이니까. 특별 대접을 한 것이다.

 

“에구머니, 이게 무슨 일이야?”
작은 텃밭에 고무호수로 물을 주던 아내가 비명을 질렀다. 건우가 창문을 열고 내다보니 그녀는 거금 5천 원을 주고 산 백합의 꽃봉오리를 손에 들고 놀라서 들여다보고 있었다.
“여보, 왜 그래요?”
“이거 봐요.”
약백합의 꽃봉오리를 손가락으로 펼쳐 보였다. 약백합의 꽃봉오리는 강한 햇볕에 삶겨 속이 상해 있었다. 그래서 꽃을 피우지 못하고 있었구나. TV 뉴스에서 수박이나 배추가 강렬한 햇볕에 속이 상해 상품으로 팔지 못한다는 뉴스는 봤으나 폭염이 백합 꽃봉오리까지 상하게 하나? 금년 여름에 햇볕이 그렇게 강렬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주에 수많은 행성 중 하나인 지구는 살아서 숨을 쉬는 힘을 가진 생명체이다. 지구는 동맥(지하수)과 정맥(석유) 그리고 대기권(폐), 중심에는 심장을 가진 수억 년을 살아온 생명체이다. 지구라는 생명체는 필요 시 용암을 배출하고 지진이라고 부르는 지각판을 흔들어 스스로를 치료하고 자정하는 지혜로운 생명체이다. 지구라는 생명체는 수억 년을 그렇게 살아왔다.
인간은 지구에 기생하는 수많은 생명체 중 하나이다. 그런 인간이 지구라는 생명체에 기생하면서 마음대로 선을 그려 국가라는 것을 만들었다. 그들은 더 많은 생명체의 영역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죽이는 전쟁을 벌였다. 지구의 정맥에서 석유를 뽑아 태우고 동맥에서 지하수를 뽑아 지구의 폐인 대기권을 병들게 했다. 지구는 폐에 병이 들자 대기권의 흐름이 달라지고 생명체의 여러 곳에서 불이 나고 홍수로 난리가 났다. 이것은 지구라는 생명체에 기생하는 생명체 중 하나인, 지적 능력이 뛰어난 인간의 탐욕이 만들어낸 결과이다. 초등학교 시절 우리나라는 삼한사온이 있는 온대 지역이라고 배웠다. 그런데 지금은 아열대 지역이라고 한다. 그럼 다음에는 열대 지역으로 변하나? 지구라는 생명체에 기생하는 수많은 생명체 중 백년을 사는 인간만이 유일하게 지구가 인간들의 것이라고 착각하며 살고 있다. 지구에 기생하는 생명체 중 다른 개체가 땅 뺏기를 하는 것을 봤나? 지구의 동맥과 정맥에서 혈액을 뽑아서 태워 폐인 대기권을 병들게 하는 것을 보았나? 토끼가 서로 죽이는 걸 봤나? 사슴이 땅 뺏기를 하는 걸 봤나?
지구에 기생하는 기생충들이 땅 뺏기를 그만하고 힘과 지혜를 모아 지구라는 생명체를 치료했으면 좋겠다. 기후 변화로 폭염과 폭우는 이제 눈앞에 닥친 현실이 되었다.

 

“여보, 약 먹어.”
건우가 자기 약봉지를 찢으며 말했다.
“어, 점심 약을 안 먹었네.”
성주가 약봉지를 들고 흔들며 대답했다.
“거 봐요. 내가 약을 먹을 때 당신을 안 부르면 약 먹는 걸 까먹는다니까.”
건우가 말을 하자 그녀는 약봉지를 들고 호들갑을 떨며 약을 먹었다. 팔순이 지나자 부부는 두 사람 모두 지병이 있어 한 달에 한 번 병원에 가서 약을 타 먹었다. 그런데 아내 성주는 자꾸만 약 먹는 걸 까먹었다. 건우는 식후에 바로 약을 먹었다. 그런데 성주는 약 먹는 걸 자꾸만 잊어 먹었다. 대부분의 노인들은 우리처럼 약을 먹고 있을 것이다. 쇠로 만든 자동차도 80년을 탔으면 벌써 고물이 되어 해체했을 것이다. 그걸 보면 물과 석회질로 만들어진 사람은 참 강하다.

 

젊은 시절, 건우는 영주에서 봉화군 소천중학교까지 비둘기호 완행열차로 통근을 했다. 학교는 버스로는 통근이 어려웠다. 영주에서 봉화군 소천면까지는 너무 멀고 비포장 도로이고 높은 노룻재는 교통사고도 자주 났다. 그래서 영주에서 강릉으로 가는 새벽 6시 10분 비둘기호 완행열차를 탔다. 당시에는 강릉으로 가는 길은 영동선 이 열차뿐이었다.
여름방학 때면 서울 청량리역에서 중앙선을 타고 내려온 젊은 캠핑족들이 이튿날 강릉으로 가는 새벽 6시 10분 비둘기호를 타기 위해 역 광장에 텐트를 치고 잠을 잤다. 밤새도록 청년들은 기타를 치고 노래를 합창하며 즐겁게 놀아 역 광장이 캠핑장이 되었다. 그러나 겨울철이면 강릉으로 가는 사람이 없어 73석의 객차는 텅 비었다. 사람이 타지 않았다.
그래서 건우는 텅 빈 객실의 3인용 의자의 팔걸이를 베고 길게 누워서 갔다. 그렇게 웅크리고 누워서 자다 보면 갑자기 몸이 따뜻해지면 일어나야 한다. 춘양역이다. 객차 창문이 동쪽으로 향하고 있어 햇볕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열차가 출발을 하면 다음은 녹동역, 그다음이 건우가 내려야 할 현동역이다. 건우는 아내가 새벽 5시에 일어나 싸 준 도시락 가방을 가슴에 안고 내릴 준비를 했다.
따뜻한 도시락의 온기가 아내의 체온처럼 느껴졌다. 장갑을 끼고 목도리로 머리와 얼굴을 감쌌다. 현동역에서 소천중학교로 가려면 역사 건물 맞은편 가파른 말뚝재를 넘어서 소재지를 지나야 노룻재 아래에 있는 학교로 갈 수가 있다. 걸어서 30분 정도 가야 소천중학교가 있다. 지금은 높은 노룻재는 터널이 뚫려 있다. 터널 길이가 3km이다. 현동역 다음이 산타 마을로 알려진 분천역이다. 옛날에 분천역은 철도 선로에 까는 자갈을 채취하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채취한 자갈이 전국의 철도 선로에 깔려 있었다. 건우는 하루 일과를 마치면 강릉에서 나오는 오후 5시 50분 열차를 타고 퇴근을 했다. 몹시 추운 12월 어느 겨울날, 학교에서 늦게 나왔다. 열차 시간이 급해 뛰기 시작했다. 헐떡거리며 면 소재지 지나 말뚝재를 뛰어서 올라가기 시작했다.
경사가 진 높은 말뚝재를 뛰어가자 얼굴에서 땀이 나기 시작했다. 가슴속 깊이 들이킨 찬 공기에 숨이 차서 헐떡거렸다. 건우는 이건 군대 시절에 유격훈련이야. 뛰어라 열차는 기다려 주지 않는다. 핵핵핵….
말뚝재 정상에 오르는 순간 갑자기 가슴에서 뚝 하는 소리가 났다. 머리와 얼굴에서 땀이 나고 심장을 칼로 찌르는 통증이 일어났다. 건우는 풀썩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심장의 통증으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혼자서 심장을 부여잡고 땀을 흘리며 말뚝재 아래를 내려다보니 강릉발 영주행 비둘기호 열차가 들어오고 있었다. 5분만 더 내려가면 저 열차를 타는데. 문득 새벽에 도시락을 건네주던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저 열차를 타면 아내와 아이들이 기다리고 낙원으로 갈 수가 있는데…. 건우는 가슴을 부여잡고 출발하는 열차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느낌이 와요?”
영동병원 심장내과 전문의 신 선생이 물었다. 그녀는 50대의 여의사였는데 심장내과 전문의라고 했다. 그녀는 중키에 단발머리를 하고 무척 소박한 사람 같았다. 그녀는 건우의 왼쪽 손목 부근의 혈관을 절개하고 그 혈관 속으로 가는 전선 끝에 카메라가 달린 기구를 넣어 건우의 심장을 들여다본다고 했다. 그것을 의학 용어로 ‘혈관조형술’이라고 불렀다. 건우는 팔목 혈관 속으로 들어가는 그 무엇이 자꾸만 쿡쿡 찌르며 조금씩 심장 가까이 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건우는 누워서 의식이 몽롱한 상태에서 허리를 굽혀 혈관 속으로 카메라를 밀어 넣는 그 의사의 단발머리 뒤통수를 보고 있었다. 그녀의 목 부근의 하얀 가운에는 까만 때가 묻어 있었다.
“통증이 있나요?”
“아뇨, 괜찮아요.”
그녀는 모니터 화면을 보면서 괜찮냐고 물으면서 자꾸만 전선을 혈관 속으로 밀어 넣었다. 건우는 몽롱한 상태에서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말을 할 때 “네 맘속이 다 보인다. 네 가슴속이 다 보인다” 하고 대화를 한다. 건우는 몽롱한 의식 속에서 이 의사가 건우의 가슴속까지 다 들여다보고 있구나 생각했다. 의사는 말을 했다. 심장병이라고 했다.

 

점심을 먹고 “여보, 나갈래요?” 하고 성주가 말했다. 두 사람은 차를 타고 드라이브에 나섰다.
“어디로 갈까?”
건우가 말을 하자 조수석에 타고 있던 아내는 “그건 운전수 맘대로지” 하고 대답했다. 건우는 파머스를 지나자 물문화관이 있는 C코스로 접어들었다.
차가 문수로 가는 열차 굴다리 밑으로 빠져나와 언덕을 지나자 “거짓말쟁이” 하고 그녀가 말을 했다. “내가 뭘?” 하고 건우가 대답하자 “지난 주에도 저 찻집에 들러 커피 한 잔 하자고 했잖아” 하면서 불평을 했다.
“다음에 가요” 하고 대답하고 송리원 찻집 앞을 지나 직선도로에 접어들자 대낮인데도 도로 우측 편에 ‘사느레’라는 네온사인을 밝힌 찻집을 지나갔다.
“저 집 참 좋았지, 차 맛도 좋고.”
“그게 언젠데?”
“몰라.”
“이 양반아, 그게 벌써 사 년 전이야, 코로나 때. 한 번 갔네요.”
그래, 이제 기억이 나는군. 코로나가 한참 심할 때 시림들은 만나지 못하고 집에 들어 앉아 있으니 답답해서 두 사람은 영주댐으로 나갔다. 겨울철이었다. 저 찻집에 들어갔더니 비닐로 온실같이 만든 가건물 안에 처음 보는 열대식물이 가득했고 넓은 온실에는 이름도 모르는 각종 열대식물이 자라고 있었다. 열대식물 밑에는 작은 탁자와 의자가 있어 차를 마실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 옆 좌석과 격리가 된 자리에는 우리처럼 코로나를 피해 집 밖으로 나온 수많은 사람들이 각종 차와 음료수를 마시고 있었다. 그곳은 코로나에 지친 많은 사람들에게 쉬어 갈 수 있는 피난처 같았다.
두 사람이 차를 타고 승문2리 돌내를 지나자 조수석의 아내가 말을 했다.
“여보, 무섬마을에 갑시다.”
“오늘 무섬은 차도 많고 사람도 많을 걸.”
“가기 싫어요?”
“오늘은 토요일이잖아. 휴일 날은 사람들이 많이 와요.”
“그러네, 물문화관으로 가요.”
영주댐 물문화관에 갔더니 찾아오는 사람은 없고 건물 옆 주차장에는 흰색 승용차가 한 대 서 있었다.
물문화관 좌측 편에는 ‘어드벤처 케슬’이라는 높은 철제 구조물과 관리 건물이 있었다.
“저 높은 철제 구조물에 누가 올라가노?”
“젊은 사람들은 아주 좋아할걸. 여긴 아직 안 알려져서 그렇지, 한 번만 TV 방송을 타면 미어터질걸.”
“여보, 저기 벤치가 있네. 당신 저기까지 갈 수 있지?”
아내가 물었다.
“난 싫어.”
“내가 잡아줄게, 운동 삼아 가자.”
아스팔트 주차장 옆에는 영주댐 준공 기념비가 세워져 있었다. 기념비 옆을 지나 조금 더 가면 두 사람이 앉을 수 있는 작은 나무 벤치가 있었다. 그 앞에는 철제 안전봉 울타리가 있었다.
“여보, 가자.”
“당신 혼자 가요, 난 싫어.”
건우가 싫다고 대답했다.
“그럼 저녁밥은 당신이 해먹어.”
“그래도 싫어.”
“그럼 용돈 올려줄게. 십만 원.”
“갑시다.”
건우가 운전석에서 내리자 아내 성주가 오른쪽 팔을 접었다. 건우가 그녀와 팔짱을 끼고 경계석에 올라서자 그녀의 몸이 휘청거렸다. 체중이 10kg 차이가 나니 그럴 것이다. 주차장은 아스팔트로 포장이 되어 있으나 그곳에는 시멘트 보도블록이 깔려 있었다. 두 사람이 걸어가자 늦가을 바람에도 몸이 휘청거렸다. 준공비 옆으로 걸어가자 구조물이 바람을 막아 주었다. 건우는 30m 거리도 참 멀게 느껴졌다. 검게 칠을 한 나무 벤치에 두 사람이 앉자 넓은 영주댐의 강물이 보였다. 건너편 저 멀리 산이 보이고 넘어가는 석양에 붉게 노을이 진 댐의 물이 금빛으로 반짝거렸다.
“푸른 잎에 붉은 치마 갈아입고서 남쪽 나라 찾아가는 제비 불러 보아∼”
갑자기 아내가 노래를 불렀다. 두 사람은 벤치에 앉아 같이 노래를 불렀다.
“여보, 이 노래 제목이 뭐지?”
“몰라, 노랫말만 기억이 나네.”
“해는 저서 어두운데, 찾아오는 사람 없어 밝은 달만 쳐다보니∼.” 
또 다른 노래를 불렀다.
그래, 해가 지니 빨리 가야겠지. 우리 부부는 30m를 걸어서 벤치까지 가는데도 힘이 들었다. 전쟁 때에는 3백 리 길을 걸어서 피난을 갔고 새마을사업을 할 때는 3십 리 산길을 도로로 만들기도 했어.
이제 우리 부부는 늙고 노쇠해서 30m 걷는데도 힘이 들었다. 해는 져서 어두운데 눈앞에 저 강물만 보이네. 우리는 4남 4녀, 8남매의 장남과 4남 3녀, 7남매의 장녀로 태어나, 4남매의 자식을 두었다. 결혼생활 55년 동안 참 많은 일들이 있었지. 양가 부모님들은 모두 돌아가셨고 동생들은 모두 결혼해서 분가를 했다. 4남매의 우리 자식들도 분가해서 살고 있다. 이젠 늙고 노쇠한 두 사람의 노인만 서로 의지하면 살고 있다. 결혼생활 55년 동안 우리는 삶이라는 전쟁터에 전우가 되고 동반자이며 부부로 살았다. 국민소득 3백 불 시대에 만나 지금은 소득 3만5천 불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런데 집에 자가용 2대를 굴리며 사는 젊은 부부들이 너무 쉽게 헤어지는 걸 보면 이해가 안 된다. 건우는 노래를 부르다 조용히 강물만 바라보고 있는 백발의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여보, 도시락 받아.”
아내가 출근하는 건우에게 도시락 가방을 건네주었다. 건우는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만삭의 몸으로 파란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그런데 평소 칠흑같이 검고 윤기가 자르르 흐르던 검은 머리카락이 퍼석한 노랑 머리카락으로 변해 있었다. 머리카락이 왜 저런 색으로 변했지? 건우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아이를 출산할 때 그녀는 난산으로 죽을 고비를 넘겼다. 의사가 말했다. 임산부가 영양실조로 몸이 허약해 출산이 아주 위험했다고 말했다. 건우는 그런 것도 모르고 있었다.

 

“여보, 나 만나서 참 고생 많이 했지. 당신 말처럼 둘이서만 살았더라면 고생을 안 했을 거야. 아버님이 먼저 돌아가셨으니 8남매 장남인 내가, 어머니와 동생들을 돌봐야 되잖아. 내가 그걸 밝혔더라면 우리 결혼이 됐을까? 꿈처럼 그 모든 것들이 지나가고 잠에서 깨보니 늙고 병든 두 사람의 노인들만 남았구려. 여보, 당신이 고생한 걸 생각하면 지금도 죄책감이 들고 마음이 아프다오. 무슨 말로 이 마음을 표현해야 할까?”
얼굴을 마주 봤더니 백발의 할머니는 중지 손가락을 입술에 대며 말을 했다.
“아무뚜마레.”
아무뚜마레는 경북 북부지역 사투리로 ‘네가 말을 하지 않아도 무슨 말을 하려는지 나는 안다’는 말로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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