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12월 68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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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49 단지 숫자 쌍일 뿐이다. 100이라는 완전한 수를 반으로 나눈 50을 기준으로, 하나는 1을 더 가졌고 하나는 1을 덜 가졌다. 수학적으로는 미미한 차이지만, 인간사에서는 세상을 나누는 경계가 되기도 한다. 1이라는 작은 차이가 누군가에게는 희망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좌절이 된다.
노조 일을 하며 이런 조합을 마주한 적이 있었다. 결정을 앞둔 순간, 나는 긴장했다. 왜냐하면 회의장 안에는 조합원들의 하루하루가 얽혀 있기 때문이었다. 한쪽에서는 이번만큼은 꼭 관철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고, 다른 쪽에서는 “회사가 버틸 여력을 생각해 달라”고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그래서 표결로 넘어가면 그 결과는 종종 51대 49였다.
회의장의 공기는 그때가 가장 무거웠다. 표가 개표되는 동안 들리는 것은 오직 종이 넘기는 소리뿐. 누군가는 손을 모으고, 누군가는 눈을 감았다. 마침내 결과가 발표되는 순간, 얼굴엔 안도와 미소가 번지기도, 묵직한 그늘이 드리우기도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그 미묘한 균형추가 좋았다.
어느 날 한 조합원이 물었다.
“99:1로 확실히 이겨야 속이 시원하지 않습니까? 왜 아슬아슬한 싸움을 택하시죠?”
나는 잠시 말이 막혔다가, 천천히 대답했다.
“노조가 99로 이긴다면, 회사는 어떤 모습이 될까요?”
99의 승리란 상대의 완전한 패배를 뜻한다. 그 뒤에 남는 것은 대화의 단절과 신뢰의 붕괴다. 노조의 승리는 회사의 패배 위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노사 모두가 ‘함께 버틸 수 있는 결과’를 찾아야 비로소 진짜 의미가 생긴다는 것을 지난 10여 년의 노조 활동을 통해 깨닫게 되었다.
노사관계는 결국 공존의 관계다. 노조가 없으면 노동이 온전치 않고, 회사가 없으면 노조가 있을 수 없다. 서로를 비추며 나란히 걸어가야 하는 집단이다. 그래서 나는 51:49 비율의 결정이야말로 ‘함께 남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51은, 이기되 상대의 얼굴을 잊지 않는 일이다. 49로 졌다는 것은, 지되 다시 손을 내밀 여지를 남겨두는 일이다. 그 1의 차이는 때로 자존심이고, 존중이다. 51의 겸손과 49의 품위가 만날 때, 비로소 협력의 씨앗이 싹튼다.
이 비율은 일터에서만 통하는 원리가 아니다. 살다 보면 인간관계에서도 같은 순간을 마주한다. 부부 사이도 그렇고, 부모와 자식 간도, 동료 간에도 늘 팽팽한 줄다리기가 있다. 조금 더 이해하고, 조금 더 물러서야 관계가 유지된다. 양쪽이 50:50을 고집하면 관계는 버티지 못한다. 언제나 한쪽이 조금 더 품거나 내어줘야 세상은 굴러간다.
처음 노조 일을 맡았을 때는 쟁취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쟁취만이 승리이고, 타협은 지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수많은 회의에서의 갈등 상황, 그리고 협상 끝에 깨달았다. 지나친 한쪽의 승리는 결국 고립을 낳는다는 것을. 세상은 한쪽이 완벽히 이길 때보다, 서로가 조금씩 이기고 지는 상태일 때 훨씬 더 평온하다.
그 후부터 나는 결과보다 과정의 온도를 더 느끼려 했다. 표결이 끝난 뒤 사측 업무 담당자가 먼저 다가와 “그래도 다음엔 함께 가야죠”라고 말하는 순간, 공동체의 숨결을 느꼈다. 그 온도는 승리감보다 더 오래 남았다.
51:49. 언뜻 보면 불안정한 숫자 같지만, 그 안엔 조화가 있다. 누군가 한발 물러나고, 한 발 내딛는 자리. 그 경계 위에서 사람들은 살아가고, 조직은 굴러간다.
나는 오늘도 51:49를 떠올린다. 노사 간의 문제를 넘어, 사람과 사람 사이, 나와 세상 사이의 거리에서도 이 비율은 균형의 기준이 되어 준다. 이기되 너무 이기지 말고, 지되 너무 져버리지도 말자. 그 중간 어딘가에서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며 웃을 수 있다면, 그게 가장 아름다운 차이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