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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12월 68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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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현대문학』 등단, 좁은 문이었다. 쉽게 열릴 문이 아니었다. 그러나 열지 않으면 안 되는 숙명적인 문이었다. 그 문을 열어준 분들을 생각하면 인연의 깊이를, 기쁨의 농도를, 무한 감사의 설렘을 곱씹지 않을 수 없다. 나의 등단 이야기가 문학인을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조금이나마 참고가 되기를 소망하며, 감사한 마음으로 등단의 역정(歷程)을 되새겨본다.
국민학교(초등학교) 2학년 때 큰누나 책꽂이에서 소월의『진달래꽃』을 뽑아 읽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냥 좋았다.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에 뭔가 있는 듯싶었다. 들까불며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 여!/ …/ 내가 부르다가 죽을 이름이여!”를 외쳐댔다. 누나들은 “얘가, 얘가” 하면서 눈을 동그랗게 뜨곤 했다. 그때 작문 시간에 써낸 글이 장원으로 뽑혀 공책이며 연필들을 상품으로 받았다. 엊그제 일처럼 아련히 그립다. 고등학교 때 친구(박용선)가 김광림, 김종삼, 전봉건의 3인 합동시집『전쟁과 음악과 희망과』를 선물하면서 읽어보라 하였다. 김종삼 시들이 그리 좋았다.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은 곧 만남을 의미한다. 만남이란 숙명적인 것이며, 사노라면 많은 사람과 만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 만남을 기리고 가꾸며 보람 있는 것이 되도록 힘써야 한다. 나쁜 만남은 시련일 것이나 인간을 단련시킬 것이요, 좋은 만남은 가꿀수록 차원 높은 삶의 질을 터득케 할 것이다.
인연이란 참 묘하고 신비로운 것이다. 개념상의 인연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언뜻 의미를 두고 보자면 인연 아닌 게 어디 있겠는가. 세상 일이 다 그런 거지, 하면서도 곱씹어 생각하노라면 인연은 한없이 신묘하다. 불가(佛家)에서는 인연을 인(因)과 연(緣), 곧 결과를 만드는 직접적 원인과 그 인과 협동하여 결과를 만드는 간접적 힘이 되는 연줄, 모든 사물은 이 연줄에 의하여 생멸(生滅)한다고 한다.
나를 문단에 등단시킨 김윤성 선생님과의 만남도 생각해 보면 어떤 우주적 질서에 의한 필연적 만남이라고 여겨진다. 추천을 받자면 직접 은사이신 미당 서정주 선생님이나 박목월, 김구용 선생님이 가장 첩경일 것이었다. 나는 그때 엉덩이에 뿔이라도 난 듯 문단 진출은 『사상계』 신인문학상을 제일 윗자리 목표로 두었고, 그 다음이 미당 서정주 선생님으로부터의 추천이었다. 그래 『사상계』에는 몇 년간 기회 있을 때마다 정성스레 원고를 정리하여 응모하였고, 폐간 얼마 전 결선 명단에 올랐다던(?) 응모원고 묶음을 당시 기자 겸 편집인으로 있던 박상륭 씨가 어색하게 웃으며 건네주는 것을 무안스레 받아들기도 하였다. 그때 나는 『사상계』의 오랜 애독자였으며, 특히 시골에 있던 약혼녀가 그걸 알고 매월 책을 사서 곱게 포장하여 소포로 부쳐주던 때라, 신인 당선의 기쁨을 그녀에게 선물하고 싶기도 하였다. 그 얼마 후 『사상계』는 필화사건 등으로 정부의 탄압을 힘들게 버티다가 1970년 5월 1일 통권 205호를 끝으로 폐간당하여 더 이상 응모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나의 일차 목표는 허망한 꿈이 되고 말았다.
1962년도에 서라벌예대를 졸업하고 박상륭은 경희대로, 이건청, 권명옥은 목월 선생님을 따라 한양대로, 나는 서정주 선생님의 권유와 자력(磁力)에 끌리어 동국대에 편입하였다. 허국경, 한명륭, 또 친구들 네댓 명과 함께였다.
이세방 시인은 예대 재학 때 이미 『자유문학』 신인상에 당선되어 여러 친구들의 부러움을 샀었는데, 나는 그와 참으로 많이 어울려 다녔다. 담배 몇 갑을 사들고 명동으로 공초 선생님을 찾아뵙기도 하였고, 수색에 사시던 김현승 선생님 댁에 가자 하여 따라갔더니 이성부, 박봉우 시인을 비롯하여 여러 문객들이 담배연기 자욱한 가운데 방 안이 개구리방죽처럼 시끌벅적하였다. 김현승 선생님은 손수 커피를 타 권하시고는 조용히 웃음을 머금은 채 묵묵, 그윽하셨다. 그 이후로도 어울려 종종 찾아뵈었는데, 한결같으셨다.
나는 돈암동에서 자취를 하였고 이세방 시인은 혜화동에서 어머니와 누이동생과 셋이 살았는데, 나는 종종 저녁을 얻어먹으며 자기도 하였고, 이세방 시인 또한 내 자취방에서 자주 자곤 하였다. 그의 초기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갱에서 죽은 어떤 광부의」도 내 자취방에서 쓰여졌다고 기억된다. 어느 날 도화동에서 사당동 예술인 마을로 이사를 하신 서정주 선생님 댁에 들렀더니 깜짝 반기시며 이세방이와 같이 오는 줄 알았다 하셨다. 이세방 시인이 온다 해놓고 깜깜이라고, 혹시 무슨 일 아닌지 모르겠다고 걱정스런 낯빛을 하셨다. 깡맥주를 여러 개 비웠는데도 그는 오지 않았다.
미당 선생님은 내가 송구스레 내미는 습작들을 곁의 함 속에 조용히 넣어놓으시고는 내 재주나 감성이 아직은 좀 무디다고 여기셨는지, 찾아뵐 때마다 깜짝 반기시고는 그냥 범연한 제자로 두시었고, 이세방 시인도 나의 등단을 고대하다가 어느 날 해외로 이민을 가고 종종 지면으로 작품만 보일 뿐이다. 얼마나 늙고 변하였는지 궁금하고, 그립다.
어느 날, 이문구한테서 편지가 날아왔다. 김동리 선생님 댁에 들렀더니 마침 김구용 선생님이 와 계셨는데, 요즘도 주원규 자주 만나느냐, 오래 얼굴이 안 보이더라시며 궁금해하시니 연락을 드리라는 내용이었다. 김구용 선생님 시창작 실기지도 시간에 내가 자주 습작들을 칠판에 적어 평을 들었었는데, 「始感」「月歷」 등의 습작을 보시고는 여러 학생들 앞에서 “朱兄(선생님은 제자들을 아무개 형으로 호칭하였음)은 이제 그런 류(類)로 집을 지어 가는구먼. 잘 익어 가고 있어요” 하시었다. 으레 서정주 선생님으로부터 추천을 받으려니 하셨었다. 참으로 많은 가르침을 받았고 등단 후에도 동소문동 댁으로 김석, 송상욱, 하현식 시인들과 함께 찾아뵙곤 하였다. 위를 반 넘어 잘라내셨음에도 여러 잔 술을 드셨고, 우리들에게도 흔연히 술을 들 수 있도록 맞춰 주셨다. 거나 해지면 자주 웃으셨고, 손을 당겨 잡으시면 깡마른 손인데도 그 악력이 어마소리 나게 세시었다. 새해 들어 연하장을 드리면 꼭 엽서에 구용체 붓글씨로 답을 주시었다. 지금도 몇 점 소중히 보관하는데, 종이는 누렇게 변했지만 글씨는 오롯이 생생하게 선생님의 학 같으시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김윤성 선생님을 스승으로 인연 맺게 해주신 분이 소설가 김제영 선생님이시다. 나는 1970년 3월 3일부터 2007년 2월 28일까지 37년간 서울의 갈현동 소재 대성중고등학교에서 교사, 부장교사, 교감, 교장으로 봉직해 왔다. 1971년 3월 입학식이 끝나고 1학년 2반 담임으로서 반 학생들을 교실로 인솔하여 좌석 번호대로 앉히고, 학생들 얼굴과 이름을 익히며 학교 안내 및 학급 운용 개요를 설명하려는데, 노크 소리와 함께 출입문이 배시시 열리며 사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아주머니 한 분이 명민해 보이는 학생의 손을 잡고 머뭇거리며 다가와 “차지민 학생인데, 선생님 반 아닌가요?” 하신다.
파마도 하지 않은, 머리를 곱게 빗어 뒤로 쪽을 진, 전혀 화장도 하지 않은 허름한 외투 차림의, 시골에 사시는 작은어머니나 이웃집 아주머니 같은 아주 검소해 보이는, 그분이 나중에 알고 보니 김제영 선생님이셨다. 차군은 우리 반 명단에는 없고, 바로 옆 1반 명렬표에 그 이름이 있어 모셔가 담임선생님께 전후사를 말씀드리고 인계해 드렸다. 얼마 뒤 내가 시 공부를 하고 있고, 학교 홍보용 인쇄물은 거의 내 손에서 제작됨을 알고 있는 차군의 담임 조 선생이 차군의 가정환경조사서를 펼쳐보며 어머니는 소설가이고, 전화와 자가용도 있는 조치원 차정신과병원 원장의 아들이라 하였다. 문학의 ‘文’자나 ‘詩’라는 글자만 보아도 가슴 설레던 시절, 소설가 학부형이 있다니 반가웠고 내 반이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솟았다. 마침 교지 『大成』 창간호 발간을 내가 맡게 되었다. 교양강좌에 가까운 격려사 원고를 청탁드렸다. 때맞춰 원고를 보내시며 그 머리에 ‘매수가 넘치니 적당한 곳에서 자르고 글 제목도 알아서 붙여 달라’는 메모가 덧붙여져 있었다. 조심스레 원고를 알맞게 줄이고 제목도 ‘무성한 잎과 가지들의 환성’이라 붙여 타자로 정서하여 학생 편에 보내드렸더니 곧바로 전화가 왔다. 원고 다룬 솜씨가 예사롭지 않은데, 전공이 뭐며 혹시 문단에 아는 누가 있느냐고 물으셨다. 서라벌예대와 동국대에서 미당, 목월, 동리, 석제, 구용, 무애 선생님들께 배우고 이문구, 박상륭과 자별한 사이라 했더니, “그러면 그렇지” 그러셨다. 등단할 의사가 있느냐기에, “그러고는 싶지만 재주가…”하며 말끝을 흐렸더니, “예, 알았습니다” 하고는 이내 전화를 끊으셨다. 며칠 뒤 점심 시간에 동료들과 둘러앉아 도시락을 먹고 있는데(그때는 학교식당이 없었음), 교무실로 찾아오셨다. “이문구 씨한테서 얘기 잘 들었다”며 “사흘 뒤 저녁 때 시간을 낼 수 있느냐, 이문구와 이동주 선생님을 초대했으니 때맞춰 집으로 오면 좋겠다” 하셨다. 이 뜻밖의 인연과 계기, 앞뒤 가릴 것 없이 기뻤고, 어떤 법열(法悅) 같은 게 느껴졌다.
선생님 댁은 홍제동 골목길을 휘돌아 올라가서 잘 쌓은 축대 중간에 10여 개 돌계단을 올라가야 대문에 이르는, 아담한 2층 양옥집이었다. 초인종을 누르니 선생님께서 환히 웃으시며 “어서 오십시오, 주 선생님, 이 돌계단이 아름답지요? 이 계단이 좋아서 이 집을 샀지요” 하셨다. 대문 안 마당은 넓은 잔디밭이었고, 거실 창밖으로는 멀리 북한산이 병풍처럼 환히 펼쳐져 보여 시원하고 신비롭고 아름다웠다. 잘 정리된 실내 가구 장식들은 소박하고 고아한 기품으로 빛나고 있었다.
거실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며 차를 마시고 있으려니, 이동주 선생님을 필두로 이문구, 이호철, 송병수, 최상규, 하근찬, 그리고 일면식도 없는 (이동주 시인은 대조동 이웃에 사시기도 하고, 또 진작 문구를 통하여 인사도 드렸지만, 동행한 분들도 이문구와 어울리며 수인사를 나눈 면면들이어서 나는 잘 기억하지만) 누구, 이렇게 나까지 여덟 명이 잘 차려진 음식상 앞에 자리하였다. 이동주 선생님과 문구 사이에 내가 앉았다. 병 모양과 그 향기가 독특한 중국술이며 양주병들이 사람 숫자 가까이 비워지자 변소 출입이 잦아졌고, 혀들이 분별을 잃어 갔으며, 이동주 선생님은 생고무보다 더 부드러운 손으로 내 손을 끌어다가 만지작거리고 쓰다듬곤 하시었다. 이호철 선생님이셨던가, 이문구였던가, “에에, 그만 일어납시다. 밤이 깊었어요. 김 선생님, 자알 먹었고 아주 유쾌했습니다” 하니, 모두 엉거주춤 일어나며 “끄윽, 감사합니다”를 연발하였다. 김 선생님은 “차린 것도 없이, 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하며 손을 맞잡고 겸손히 웃으셨다.
밖에 나오니 달빛이 교교하였고, 주위는 조용하였고, 누구는 담벼락에 대고 오줌을 갈기고 있었고, 누구는 “홍도야∼” 목청을 뽑으며 이문구의 어깨에 팔을 걸치기도 하였다. 이 날의 잔치는 나를 위한 김제영 선생님의 극진한 배려였다.
그 뒤 조용히 달포가 넘게 지나갔고, 나는 학교 일에 몰두하며 또 습작들을 거듭 손질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퇴근 무렵 김제영 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모레쯤 저녁 시간이 어떠냐, 좋습니다, 그러면 원고 좀 몇 편 정서해서 때맞춰 오시지요, 예.
예정된 날 때맞춰 거실에 들어서니 김윤성 선생님(예대 때 특강을 두 번 들었다. 말씀이나 움직임이 조용조용하셨고, 외모가 참으로 단아한 귀공자 같으셨다. 날 기억하실 리 없지만, 뜻밖에 뵈니 참으로 반가웠다)과 이영걸 시인(이름은 알았지만 초대면이었다. 나중에 <응시> 동인으로 함께 활동하며 각별한 사이가 되었다)이 원탁을 앞에 하고 마주 앉아 양주를 마시며 담소 중이었다. 김윤성 선생님이 “말씀 잘 들었다” 하며 작품을 보자 하였다. 조곤하게 원고를 내밀자, 안경을 벗어 옆에 놓고는 좀 찌푸린 듯한 얼굴로 찬찬히 보시더니 “역시 서라벌 출신이라…” 하시며 원고를 이영걸 시인에게 내밀었다. 이 시인은 작품을 보더니 어깨와 배를 흔들며 우람하게 껄껄 웃었다. 나는 참 쑥스러웠다. 나중에 그에게 그날 왜 그리 웃었느냐니까 기분이 좋아서 그랬노라 하였다.
두 분 시인들은 주량이 대단하였다. 나도 얼큰하도록 거들기는 하였지만, 양주가 세 병째 마개가 벗겨지고 있었다. 그래도 두 분은 별 흐트러짐이 없었다. 이날의 만남을 주선하신 김제영 선생님, 술 한 잔 입에 못 대시면서도 밤늦게까지 땀을 흘리며 빈 접시를 다시 채우고 식은 찌개는 거듭 데워 오시곤 하던 모습이 아프게 눈에 어린다. 육친인들 그리 지극정성을 다하여 살필 수 있으랴. 지금도 많은 시인 묵객들이 선생님의 따뜻한 사랑을 받고 있을 것이다. 내가 그 큰 은혜로 시인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듯이.
돌아보니 감개가 무량하다. 시, 문학이 아니었으면 만나지 못했을 많은 인연들, 스승, 제자, 동료들, 그들이 있기에 내가 있다. 옷깃 한 번 스치는 데도 억겁의 인연이라 하지 않는가. 한없이 큰 은혜를 입고 산다. 조금이나마 언제 그 은혜를 갚을 수 있을지, 벌써 여러분들이 작고하셨다. 김윤성 선생님께서도, 이문구, 박상륭 친구들도. 두루 송구하고 고맙고 간절히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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