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11월 68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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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감기 때문에 아주 힘들었다.
“여름은 동사의 계절 / 뻗고 자라고, 흐르고, 번지고, 솟는다.”는 시의 구절과 달리 축 늘어져 호되게 앓았다. 처음엔 목이 따끔따끔, 머리가 지끈거리며 열이 나 약을 먹고, 하룻밤 지나면 괜찮으려니 했는데, 보름 넘게 고생하고 나서야 요란스럽던 기침이 수그러들고 있다. 그새 중복을 지나 오늘이 7월 말일, 월초에 시작된 사상 최악의 더위는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다.
8일부터였다. 티베트와 북대서양에서 온 거대한 쌍고기압이 반도 위에 두 겹 솜이불을 넓게 펼치고, 동쪽 먼바다에서 온 열풍이 산맥을 넘으며 대기를 바짝 달구자 수은주가 40도 가까이 치솟았다. 수온도 상승해 제주 앞바다에 만타가오리가 나타나 헤엄치고, 동해에서는 참다랑어가 지정 어획량을 초과해 잡힌 까닭에 폐기되는 일이 벌어졌단다. 농가 비닐하우스에서는 채소가 제대로 자라지 못한 채 시들고 썩는다. 물가는 껑충껑충 뛰고 불쾌지수도 쭉쭉 올라갈 즈음 미친 듯 퍼부은 괴물 폭우는 또 어땠는가. 인명을 해치고 생활 터전을 마구 헤집고 파괴했다.
그러고도 뻔뻔스러운 저 폭염, 지금껏 고개 숙일 기미가 전혀 없다. 오늘도 낮 기온이 35도를 웃돌았고 밤에도 28도를 넘고 있다. 무려 22일째 열대야를 고스란히 견디다 보니 응급실마다 온열 질환자들이 넘쳐난다. 건설 현장 작업자들, 쪽방촌 사람들, 지글거리는 길 위의 배달 라이더들은 얼마나 고역스러울까. 삼복에도 모기가 없을 만큼 선선한 태백 지역에도 폭염주의보가 발령되고, 이맘때쯤 고랭지 배추가 초록 물결을 이루는 대관령에서도 작물들이 녹고 있다니, 온 나라가 이상기후의 폭력에 휩쓸리고 있다.
동물원 나무늘보는 얼음 베개를 베고 누워서 바나나와 딸기가 든 아이스바를 먹고 있고, 호랑이는 우족을 넣은 얼음덩이를 씹으며 버티는데, 농장에선 돼지도 닭도 자꾸 폐사된단다. 축사마다 냉방기를 풀가동한 농장주들, 이달 전기료가 500만 원을 넘겼다며 한숨짓는다. 그러고도 안심할 수 없어 밤새 불침번을 서야 하고, 조금만 이상해도 달려가 얼음 비타민을 먹이지만 간밤에도 임신한 소가 유산했다고 한다.
남해안 가두리 양식장 어부는 석 달 동안 애지중지 키운 조피볼락을 뜰채로 떠서 바다에 뿌린단다. ‘부디 꼭꼭 살아남으라.’고 당부하며. 일소 피해를 입은 사과를 따는 농부들 가슴마다 검푸른 얼룩이 번지는데 출하가 코앞인 토마토도 시들고 있어, 정든 것들 자꾸 쓰러지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한다니, 덩달아 시름겹다. 그래도 괴물 폭우가 휩쓸고 간 자리마다 다시 애써 일으키는 자원봉사자들의 땀에 번 미소는 갓 핀 연꽃처럼 아름다워, 그 사랑 폭염보다 따뜻해 다시 희망이란 말을 만지작거린다.
낮에 병원에 다녀오는 길에 앞뜰 맥문동, 조그마한 보랏빛 꽃에 잠자리가 앉았다 날아오르는 걸 보았다. 매미도 지쳐 누운 오후, 지글거리는 열기를 뚫고 마실 다니는 잠자리라니! 잊지 않고 온 계절의 전령이 반가워 뭉클했는데, 깊어가는 밤 창 너머에서 귀뚜라미 노래가 들려온다. 돌돌돌, 해맑은 곡조에 들뜬 마음이 가을 들판으로 내달린다. 붉게 물드는 산을 그린다.
이 밤이 가면 8월, 아직 말복이 남아 있지만 대수랴. 입추도 서둘러 오고 모기 입 비뚤어진다는 처서도 종종걸음치고 있을 테니까. 남쪽 어디쯤에서 고기압 사이를 뚫고 오는 태풍 꼬마이가 서늘한 바람을 안고 와, 반도를 덮은 저 두꺼운 이불을 휘휘 거둬 가면 오죽 좋을까. 만타가오리, 참다랑어가 제 고향으로 돌아가고, 쪽방촌과 건설 현장 사람들, 산불 감시원, 거리의 배달 라이더들은 마음에 가을산을 품고 땀과 근심을 휘휘 씻어 낸다면!
내일은 손녀와 메로나, 비비빅, 싸만코를 먹으며 <얼음과자> 동요를 불러 볼까 한다. 노래에 맞춰 손잡고 뒤뚱뒤뚱 율동도 해 볼까. 그러면 잠시라도 폭염을 잊을 수 있으려나. 기도하는 마음으로 거푸거푸 부르면 역대급 더위가 주춤주춤 물러나고, 산들산들 맑은 바람 불어오려나. 폭염 따라 무섭게 치솟은 밥값, 배춧값, 계란값이 덩달아 쑥 내려가려나.
잠자리, 귀뚜라미가 왔으니 입추도 서두르고 인견 이불깃이 까슬까슬해지는 처서도 달려온다면! 아직 멀었다고, 기대하지 말라고, 처서 매직은 없겠다는 뉴스뿐이지만 그래도 희망한다. 선들바람, 갈바람 데리고 가을이 성큼성큼 오기를! 사상 최악의 7월을 견디며 눈 빠지게 기다린, 어서 느끼고픈 서늘함이요 청량감이다. 반드시 올 가을이 어서어서 오기를! 반드시 떠날 무소불위의 폭염이 재게재게 사라지기를!
그러나 내년에도, 그 후에도 이런 여름일 테고 겨울도 그만큼 더 독해질 테니, 아직 어린 손녀가 포악한 계절을 내리 겪게 된다는 생각에 가슴이 미어진다. 잘못을 따져 탓하기보다는 지혜를 모아 반드시 극복해야 할 터인데,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으니 안타깝다. 저 고약한 이상기후의 연쇄 고리를 끊어내는 일에 작은 보탬이라도 된다면 무조건 열심히 할 텐데…. 지금은 그저 막막할 뿐이다. 답답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