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11월 68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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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 지는 가을이 가고 동장군이 설치는 삼동의 계절, 겨울로 들어서면 내가 그렇게도 그리워하던 눈보라가 서북풍을 타고 시도 때도 없이 몰아친다. 하늘을 헤집고 몰아치는 눈보라를 바라보면 고색찬연한 사찰이나 갈매기가 날아다니는 바닷가 어딘가로 훌쩍 떠나고 싶어진다.
어제만 하여도 쾌청했던 하늘에서는 하얀 눈이 곡선을 그리며 소리 없이 내린다. 대지 위로 사뿐히 내리는 눈송이들은 우리 고장 청계산과 관악산 그리고 온 천지를 하얀색으로 덧칠하고 세파에 찌든 내 마음속 깊은 계곡에서도 하염없이 내린다.
내 어린 시절은 눈이 오기 시작하면 마당 앞에 산더미같이 눈이 쌓여 있었다. 동이 트면 온 식구들이 빗자루와 넉가래를 들고 마당으로 나와 눈을 치우곤 하였다. 눈을 치운 후에는 언 손을 호호 불어 가며 마당 귀퉁이에다 눈사람을 만들어놓고 좋아하였는데, 요즘은 눈이 내려도 지구 온난화 현상 때문인지 많이 내리지 않는다. 혹시 많이 내려도 제설차로 밀어내고 염화칼슘을 뿌려서인지 금세 녹아버린다. 그러고 보니 옛날 같은 정겨운 모습을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
현관문을 나선다. 넓고 광활한 하늘을 쳐다본다. 하늘은 잿빛으로 물들어 있는데 하얀 눈송이들이 내 시야를 가리고 속절없이 내린다. 그런데 어디서 왔는지 차고 귀퉁이에서 바짝 마른 고양이 두 마리가 추위에 떨고 있다. 하도 불쌍하고 가여워 강아지가 먹던 먹이를 그릇에 담아 그들 앞에 놓으니 며칠이나 굶었는지 한 알도 남기지 않고 게 눈 감추듯 게걸스럽게 먹어치운다. 고양이도 집고양이와 야생고양이가 있는데, 집고양이는 사람한테 빌붙어 살고 있지만 야생고양이와 수많은 야생동물들은 온 천지가 눈으로 덮여 있는데, 무엇을 먹고 살아가는지 애잔한 생각이 든다. 하루빨리 겨울이 가고 봄이 오면 좋겠는데, 겨울은 할 일 없이 낮잠만 자고 있으니 어쩌면 좋을꼬.
약삭빠른 고양이들은 벌과 개미 같은 미천한 곤충들도 스스로 자급자족을 하면서 살아가는데, 왜 사람들한테 빌붙어 사는지 모르겠다. 고양이도 사람한테 빌붙어 살아가는 집고양이가 있는가 하면 스스로 살아가는 야생고양이도 있다. 살다 보면 무슨 운명을 타고 났는지 사람도 호의호식을 누리며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쪽방에서 하루 한 끼로 연명을 하는 독거노인도 있다. 부귀영화도 권불십년 화무십일홍이라고 언젠가는 눈같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 것이다. 세상은 천태만상이고 요지경 속인데, 왜 우리 인간들은 서로 도우면서 살지 않고 헐뜯고 하면서 살아가는지 모르겠다.
눈송이 한 송이 한 송이는 나약하고 미미한 존재지만 서로 뭉치고 뭉치면 거대한 비닐하우스도 무너뜨리는 절체절명의 괴력을 지니고 있다. 이 절체절명의 괴력으로 뭉친 눈덩어리로 148마일로 펼쳐진 휴전선을 무너뜨리고 남과 북이 하나로 뭉친 통일된 국가를 건설하면 얼마나 통쾌할까. 살다 보면 독일처럼 기적이라고 하는 일도 일어나는데, 왜 우리 국민들에게는 그런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걸까.
현관문을 나선다. 갖은 망상에 젖어 마을 둘레길을 걷다 보니 지난 어린 시절 조무래기 아이들과 눈이 내리는 차가운 얼음판에서 콧물을 질질 흘려 가며 썰매를 타고 팽이를 치면서 놀았던 일들이 기억 저편에서 손짓을 한다. 천방지축으로 뛰어놀았던 순진무구한 그 아이들, 살아 있으면 나처럼 구순을 바라보며 살아갈 텐데, 어디서 무엇을 하면서 살고 있을까. 왜 오늘따라 그 아이들이 보고 싶어지는지 모르겠다.
지난날을 회상하며 갖은 망상에 젖어 막계천 둑길을 걷는다. 둑길 따라 개울물은 더 큰 세상을 향하여 흘러만 간다. 둑길을 따라 하얀 눈꽃이 나뭇가지마다 꽃보다 더 아름답게 피어 있는데, 왜 막계천 둑길이 오늘따라 낯설기만 할까. 흐르는 구름과 정처 없이 흘러가는 개울물을 바라보니 내가 이방인이 되어 이국의 어느 낯선 거리를 걷고 있는 것 같은 생각에 젖어든다. 중국 송나라 때 대문호인 소식 동파(東坡)는 “가는 구름과 흐르는 물은 정해진 바탕이 없다는 행운유수(行雲流水) 초무정질(初無定質)이라는” 글을 세상에 남겨놓고 홀연히 세상을 떠났다.
인생이란 평탄한 길을 걷다가도 때에 따라서는 가시밭길 같은 형극의 길을 걷기도 한다. 매사를 조심조심하면서 걸어도 지나고 보면 허점투성이이고 오류투성이이다. 인생사 모든 것은 불투명의 연속선인가. 나의 인생길도 떠도는 구름과 정처 없이 흐르는 물처럼 마지막 종착점을 향해 흘러만 간다. 하지만 우리 인간에게는 고귀한 생명의 존엄성과 가치관이 있다. 우리 인간은 좋은 일을 베풀지는 못할망정 패악을 끼쳐서는 안 된다. 이것은 거역할 수 없는 인간이 지닌 덕목이며 철리이다.
나는 인생사 갖은 시련을 다 겪고 구순을 바라보며 살아간다. 이제는 남은 인생 모든 것을 털어버리고 순탄한 황혼길을 걸었으면 좋겠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남은 인생길은 순탄하지만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어찌 되었든 간에 한 가지 소망이 있다면 남한테 손가락질을 받지 않는 눈처럼 희고 맑은 삶을 누리면서 여생을 보내고 싶다. 이것이 나의 마지막 꿈이고 소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