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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지성 호우

한국문인협회 로고 전상준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11월 68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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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예년에 비해 더웠다. 더위로 잠을 이루지 못하는 열대야가 가장 많았다는 기사를 읽기도 했다. 지구 온난화의 영향으로, 앞으로는 여름 견디기가 더 힘들어질 것이라 한다. 8월 9일이 말복이다. 입추가 지난 뒤의 첫 번째 경일(庚日)이다. 수천 년 전 중국의 고대 음양오행설과 천간지지에서 비롯되었다. 초복·중복·말복의 삼복 중 마지막으로 더위를 이겨야 할 날이다. 기상청의 일기예보에는 아침부터 제주도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해 대구는 오후부터 온다고 했다. 아침 일찍 서둘러 부모님 산소를 찾았다.
지난 4월 한식(寒食) 무렵에 부모님의 산소를 정비했다. 주변에 질서 없이 자란 잡목들을 베어내고 잡풀을 캐고 잔디를 심었다. 그 후 다시 자란 풀과 잡목을 없애기 위해 7월 말 무더위가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도 두어 번 작업했다. 잔디를 심느라 새로 흙을 덮은 곳과 나무를 없앤 자리에 바랭이, 강아지풀, 뚝새풀, 피 등이 뿌리를 내려 무성하다. 풀 한 포기가 자리를 엄청나게 크게 잡아 괭이나 호미로 캐기가 힘들다. 그래도 지금 풀을 잡지 않으면 산소 정비는 하나 마나가 될까 봐 오늘도 아침 일찍 출발했다.
부모님 산소는 고향 예천에 있다. 대구에서 약 80km나 된다. 오전에 일을 마칠 참이다. 비가 오후에 온다는 핸드폰 검색 결과만 믿고 나섰다. 날이 잔뜩 흐린 게 비가 올 것 같다. 중앙고속도로 의성 나들목에서 일반 국도로 가야 한다. 서대구 나들목을 벗어나니 빗방울이 드문드문 떨어진다. 막연히 지나가는 비가 아닐지 생각하며 계속 달린다. 제초 작업을 할 수 없을까 봐 마음이 불안하다. 30분 정도 지나 군위 나들목이 가까워지자, 빗방울이 굵어지며 소나기로 변한다. 포기하고 차를 돌려 대구로 왔다.
하늘이 말리는 일을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있겠나. 되돌아오는데 빗방울이 가늘어지더니 그친다. 서대구 나들목에 들어오니 하늘까지 훤하다. 마음의 갈등이 생긴다. 이왕 모든 준비를 하고 나왔는데 다시 산소로 가야겠다. 차를 돌렸다. 비는 내리지 않으나 검은 구름이 하늘 여기저기 덮고 있다. 지난번에 제초 작업할 때 날씨가 더워서 애를 먹었다. 오늘은 구름 덕분에 일하기가 좀 더 수월할 것이라 기대하며 산소가 있는 산 밑까지 왔다.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소나기가 쏟아진다. ‘세상을 사노라면 뜻대로 되는 일이 별로 없다’ 하던 부모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고향까지 거리의 절반가량이나 되는 군위까지 왔다가 다시 대구를 다녀왔으니, 시간상으로는 고향 산소를 두 번이나 온 셈이다. 제초 작업은 비를 맞으며 할 수 없다. 차 안에 앉아 우두커니 소나기만 바라본다. 국지성 호우(豪雨)다. 10분 정도 내리니 주위의 논과 밭작물이 모두 젖었다. 지금은 비가 그친다 해도 산소의 제초 작업은 못 할 형편이다.
생각이 깊어진다. 덥고 짜증나는 한여름 아닌가? 하늘은 알고 있나 보다. 나의 효심에 진정성이 부족하다는 것을…. 아버지 돌아가신 지 40여 년이 지났고 어머니도 벌써 10년의 세월이다. 그사이 산소 정비를 좀 일찍 했다면 오늘 같은 낭패는 겪지 않을 수도 있다. 멀리 햇수를 따질 일도 아니다. 올해라도 날씨 좋은 봄날에 몇 차례 더 산소의 잡초 제거 작업을 했으면 괜찮았을 일이다. 이 더위에 날을 잡았으니, 하늘까지 노했나 보다.
핸드폰에서 카톡 카톡 하는 소리가 난다. 행정안전부와 대구광역시에서 온 안전 안내 문자다. 야외 활동을 자제하라. 폭염(暴炎)에 물을 충분히 마시고 그늘에서 휴식을 취하는 등 건강 관리에 유의하라. 거기에 또 무더위가 지속 중이니, 야외 작업(논·밭 작업, 공사 현장 등)을 자제하란다. 그렇다. 내 의지대로 될 일이 아니다.
차창 밖의 빗줄기는 많이 약해졌으나 오늘 계획은 포기다. 부모님이 나의 무모한 계획에 브레이크를 밟고 있다. 부모의 자식 사랑은 끝이 없다. 선친과 선비가 오지 못하게 하고 하늘이 말리는 일을 어떻게 하겠는가. 제초 작업을 마무리하지 못해 아쉽지만, 오늘 나의 정성은 여기까지다. 부모님 사랑을 다시 일깨워 준 국지성 호우가 고맙다고 자위(自慰)하며 부모님 산소를 뒤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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