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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문학기행

한국문인협회 로고 이여산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11월 68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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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나는 설거지를 할 때도 “님은 갔습니다.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하고 치매 예방에 도움 된다는 시 낭송에 열중한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별 헤는 밤」 「그 먼 나라를 아십니까」 등등, 팔순을 넘긴 내가 암기력이 이만함을 감사하며 산책할 때도 무료한 시간에도 수시로 중얼중얼 시를 암송하니 재미가 있다. 그런 중에 전북시인협회에서 ‘남한산성에서 만해 한용운을 만나다’라는 기치를 내걸고 문학기행을 간다는 소식을 접하니 꼭 가고 싶었다. 그런데 오른쪽 무릎이 좀 안 좋아서 선뜻 신청할 수 없었다. ‘내가 죽기 전에 그곳에 갈 기회는 또 없으리라’ 여겨지니 안타까워서 무릎을 잘 달래 보며 임박해서야 접수하게 되었다. 우리 민족에게는 치욕의 역사로 얼룩을 남긴 곳이라지만, 누구나 한 번쯤은 그곳에 오르고 싶은 꿈을 갖게 하는 그리운 곳 ‘남한산성! 만해 기념관, 그리고 허난설헌 묘소’ 이 얼마나 매력적인 기회인가.
막상 출발 날이 다가오니 간밤부터 날씨가 걱정이다. 우르르르 천둥이 울고 잿빛 하늘에선 빗줄기가 퍼부으니 말이다. 그러나 비장한 각오로 단단히 준비하며 나섰다. 회원들의 간절한 기도를 가납하시어 하늘은 찡그린 얼굴이지만 울진 않으셨다. 선선한 바람을 보내주시어 걷기에도 좋고 가지고 간 우산을 사용할 일도 없는 고마운 날씨였다.
경기도 광주는 어머니 품처럼 너른 가슴을 가진 땅으로, 하남시와 성남시를 거느리고 수도 서울을 지키는 수문장 같은 존재인 남한산성(유네스코에 등재된 세계 문화유산)이 있는 곳이다. 남한산성은 단 한 번도 함락된 일이 없는 요새 중의 요새이다. 해발 400미터의 험준한 산악지형을 따라서 11.7킬로미터에 달하는 성벽을 쌓아 다양한 방어시설을 갖추고 있고, 내부로는 넓고 평평한 땅에 물이 풍부하니, 수만 명이 장기간 농성할 수 있는 지형이라 난공불락의 산성이고 요새이다.

 

맨 먼저 만해기념관을 찾았다. 기념관에는 만해 한용운 선생과 관련된 자료들(친필, 유묵, 저서)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중에서 『님의 침묵』 초간본 앞에서 회원들의 발길이 오래 머물렀고, 180여 종의 판본과 연구서들이 소장되어 있었다. 2층 강의실에서는 ‘한용운의 『님의 침묵』에 있어서 「님」의 소고(小考)’라는 주제로 관장님의 강연을 들었다.
나는 「님의 침묵」이란 시를 처음으로 접했을 때는 ‘님’을 남녀가 서로 사랑하는 연인 관계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만해 선생의 조국 독립을 위한 절규와 사모의 정을 생각하면서는 ‘님’을 조국이요, 민족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불교의 대선사라 생각하니 ‘님’은 비로자나 법신으로서 화엄사상의 대명사로 여겨지기도 한다. 아무튼 만해 선생은 독립운동가, 시인, 불교 사상가, 근대 시인으로서 남긴 발자취가 무한히 크고 깊음을 더욱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일생을 일기처럼 그때그때의 시정을 한시로 남겼다. 그러나 일반 독자들을 위하여 한글 시를 지었고, 시집 『님의 침묵(沈默)』(자유시 총 88편) 단 한 권을 남겼다. 만해 선생의 시는 시이면서 철학적인 시이고, 종교적인 분위기가 가미된 함축된 시로서 후손들에게 두고두고 십인십색으로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 같다.

 

점심식사는 두부전골로 맛있게 먹었다. 묵은 김치가 담백하여 맛있었고, 막걸리는 아무리 생각해도 전라도의 막걸리 맛보다는 못하였다.
남한산성에는 둘레길 코스가 5곳 있다는데, 우리 회원들은 그중에서 1코스를 선택하여 걸었다. 조금 올라가니 ‘지화문’이라 쓰인 커다란 성문이 있었는데, 우리 일행은 문의 오른편 성곽을 따라서 오르기 시작하였다. 내려올 때도 이 길로 다시 내려오라고 했다. 해발 400미터라는데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겠지만, 팔순이 넘은 내 눈에는 하늘같이 가파르고 높아만 보였다. 대부분의 등산로에는 쇠파이프 같은 난간이 설치되어 있는데, 남한산성은 자연 그대로 흙 위의 나무 계단이라, 성곽 기왓장을 짚으면서 올라갔다. 한참 오르다 올려보고, 또 한참 오르다 올려보며, ‘저 계단 끝까지 올라가야겠는데, 그러면 내려올 땐 또 어찌 내려올까나’ 걱정은 되지만, 그래도 중도에서 멈추긴 싫은지 꾸역꾸역 자꾸만 더 올라가진다. 숲속에서 불어오는 바람통에서 땀을 씻으며 잠시 쉬는데, 저 아래에선 풍악 소리가 가깝게 들려온다. 지금이 ‘남한산성 문화축제’ 기간이라, 다시 계단을 오르기 시작하여 드디어 평지에 올라섰다. ‘그 상쾌함이라니!’ 마치 히말라야 정상에나 오른 것처럼, 성곽이 낮은 곳을 골라서 성 밖을 내려보았다.
“저 멀리 보이는 도시가 어디지요?”
“서울이지요. 저기 남산타워도 보이고 롯데월드 탑도 보이네요.”
“저쪽은 어디지요?”
“성남시지요.”
두 도시를 한눈에 내려다보려니 참 신기하였다.
산은 올라갈 때보다 내려갈 때가 더 조심스럽다는데, 발 한 번 잘못 디디면 앗차 하는 순간에 나 뒹굴고 말걸…, 무릎이 안 좋은 발을 먼저 내려서 딛으며 한 발 한 발 조심조심 내려가기 시작했을 때, 누군가 내 팔을 슬며시 잡아 준다. 내가 안쓰러웠나 보다. 일행 중 연세가 지긋하신 분이 미소를 지으며 인자한 얼굴로 바라보신다.
“팔을 잡아 주시니 훨씬 수월하네요.”
“저를 잡고 가셔요.”
우리는 마치 운동회 날 짝꿍끼리 한 다리씩 묶고서 영차! 영차! 게임하듯 자연스럽게 서로 허리를 붙잡고 내려오니, 젊은 회원들이 웃으면서 “두 분이 부부 같아요!” 하며 사진도 찍어 주었다. 나는 거짓말처럼 그 많은 계단을 쉽게 내려온 것이 너무 기뻤다. 그리고 고마웠다. 평소에는 낯가림이 많은 편인 내가 동료 문인들에게 더욱 친근감이 느껴지는 즐거운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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