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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쯤이야

한국문인협회 로고 권영희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11월 68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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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강산. 넌 참 좋겠다.”
단짝인 영채가 산이에게 바짝 다가서더니 말했습니다.
“야, 너 지금 나 놀리냐?”
잔뜩 화가 난 산이는 영채를 확 밀어버리고 싶었습니다.
“권영채, 너 절대로 이제부터 나 아는 척하지 마라.”
산이가 영채에게 이렇게 화를 내는 일은 잘 없었습니다. 산이는 가방을 챙겨 들고 보기 싫은 영채를 피해 복도로 나왔습니다.
“칫, 지가 잘한다면 얼마나 잘한다고.”
항상 영채랑 같이 다녔지만 오늘만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습니다. 영채가 산이의 시험지를 보고 놀린다고 생각하니 화가 부글부글 끓어올랐습니다. 산이는 신발을 대충 구겨 신고 땅바닥을 쿵쿵 차며 교문 앞까지 나왔습니다.
땅을 아무리 차도 좀처럼 화가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그때까지 들고 있던 오십 점짜리 받아쓰기 시험지를 꼭꼭 접었습니다.
보기도 싫었습니다. 쫙쫙 찢어버리고 싶었습니다. 바람 따라 훌훌 날려 버리고 엄마에게 잃어버렸다고 거짓말할까 잠깐 생각했습니다.
“엄마, 오늘 시험을 못 쳤어. 선생님이 너어무 바빠서…. 진짜 거짓말 같지만 정말로 진짜라니깐!”
하지만 눈치코치 백단 엄마가 모를 리가 없습니다. 재현이 엄마, 영채 엄마도 가만히 입 다물고 있을 리 없습니다.
“아씨, 짜증 나! 엄마가 오늘 칠십 점만 넘으면, 딱 칠십 점만 되면 사 준다 했는데….”
물 건너, 바다 건너, 저 너머 가는 레고시티가 산이의 눈앞에 아른거렸습니다.
산이는 지난번 재현이의 생일 파티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재현이가 백화점보다 더 많은 장난감을 갖고 있다는 소문이 이미 벌써 온 학교에 쫙 났습니다.
이학년 올라오자마자 재현이의 생일 파티가 열린다는 걸 알고 산이는 꼭 초대받고 싶었습니다. 꼭 산이 눈으로 직접 그 거대한 장난감들을 보고 싶었습니다.
재현이의 생일은 3월 14일이었습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산이의 작전은 3월 2일 새 학기가 시작되자마자 시작되었습니다.
“야, 이재현. 너 참 멋있다.”고 외치고 다녔습니다. 아니, 재현이가 한 반이 되었다는 걸 알고부터 모든 촉이 재현이에게 향했습니다.
“야, 이재현. 너 진짜로 축구도 잘하는구나.”
“와! 넌 어떻게 구구단도 하나 안 틀리냐? 진짜 부럽다.”
재현이가 사실 그렇게 잘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 정도쯤이야 얼마든지 해줄 수 있었습니다. 재현이의 눈에 벗어나는 행동은 절대 하면 안 되는 날들이 하루하루 흘렀습니다.
드디어 3월 13일. 재현이가 산이에게 다가왔습니다.
“야, 강산. 너 내일 내 생일 파티에 와라.”
“진짜로? 내가 가도 돼?”
산이는 너무 좋아서 재현이에게 꾸뻑 절까지 했습니다.
“아싸, 세상에 내가 재현이 생일 파티에.”
재현이 생일 파티에서 산이는 기절초풍할 뻔했습니다. 산이가 그토록 갖고 싶었던, 엄마에게 그토록 졸라댔던 레고시티가 시리즈별로 다 있었습니다. 진짜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있었습니다. 산이는 재현이만큼 부러운 아이가 이 세상엔 없었습니다. 재현이가 수도 없이 가지고 있는 레고시티 시리즈를 한 개라도 꼭 갖고 싶었습니다.
그때부터 산이는 엄마를 졸졸졸 따라다니며 졸라대기 시작했습니다.
“엄마, 나 레고시티 사 줘!”
“얘가 왜 또 뜬금없이….”
“엄마, 재현이는 시리즈별로 다 있단 말이야.”
“안 된다니까, 얘가 왜 자꾸….”
엄마는 이번 달에 들어가는 돈이 얼마나 많은지 산이를 보며 조목조목 따지기 시작했습니다.
산이는 힘이 쭉 빠졌습니다.
“한 개만…, 응. 그니까 딱 한 가지만….”
“…….”
“엄마아아아?”
“아고, 시끄러워 죽겠네. 엄마 잠 좀 자자. 잠 좀.”
“아이, 레고시티를 잘해야 나중에 카이스트 갈 수 있다고오!”
“…….”
“씨이, 나 카이스트 못 가면 다 엄마 책임이야.”
말도 안 되는 고집도 부렸습니다.
“참 내….”
“레고시티, 레고시티. 으으응, 레고시티.”
엄마를 따라다니며 입이 아프도록 외쳤습니다.
“아이고, 알았다. 알았어. 모레 있을 받아쓰기 칠십 점만 받아와라.”
“야호! 엄마, 진짜지? 또 그전처럼 딴소리하는 거 아니지?”
“알았으니까 받아오기나 해.”
“진짜, 진짜다. 약속했다, 엄마. 아싸!”
산이는 그날부터 공부란 걸 했습니다. 이제껏 책을 그렇게 많이 본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제 칠십 점 정도는 가뿐하게 받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산이는 그렇게 칠십 점을 아주 우습게 생각했습니다.
“아씨, 근데 오십 점이야.”
게다가 짝꿍인 영채가 약 올리기까지 하니 더욱더 화가 났습니다.
“야, 강산. 헤헥, 왜 그러는데? 난 진짜로 네가 부러운데.”
언제 따라왔는지 영채가 숨을 몰아쉬며 산이의 어깨를 탁 잡았습니다.
“난 진짜로 오십 점 받고 싶었단 말이야.”
산이는 멍하니 영채를 바라보았습니다. 유치원 때부터 영채를 좋아했지만 지금 이 순간 혹시 영채가 바보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산이는 손가락을 들어 빙글빙글 돌렸습니다.
“야, 권영채. 너 돌았지? 오십 점이랑 칠십 점이랑 어떤 게 더 높은지 알기는 알지?”
“어쨌든 됐고. 우리 아빠는 중간을 제일 좋아한단 말이야.”
“뭔 말이냐?”
기가 막힌 산이는 영채를 멀뚱히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우리 아빠가 매일 중간만 하면 아주 잘하는 거지, 했단 말이야.”
“헐!”
“진짜라니까. 우리 아빤 늘 ‘뭐든 중간만 하면 잘하는 거지’ 이런다니까.”
영채가 그렇게 말하니까 산이는 이상하지만 그런 것 같기도 했습니다. 어른들 말은 알다가도 모를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설마? 너 장난이지?”
“야, 강산! 난 진짜로 네가 부럽다니까. 넌 어떻게 딱 중간을 맞출 수 있냐?”
“권영채. 너 진심이니?”
“난 진짜 산이 네가 존경스럽다. 나도 아빠를 힘나게 하고 싶은데….”
영채는 피곤하다며 집에서는 하루도 빠짐없이 소파에 푹 잠겨 있던 아빠를 생각했습니다. 영채가 딱 중간인 시험 점수를 보여주면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예전처럼 영채를 꼭 안아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번 시험에는 꼭 중간인 오십 점을 받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칠십 점이라니…. 영채는 속상해서 고개를 푹 떨어뜨리고 있었습니다. 오십 점을 받은 산이가 부러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산이의 눈이 갑자기 반짝반짝 빛이 났습니다. 산이는 얼른 꼬깃꼬깃 접었던 시험지를 쫙 폈습니다.
“야, 권영채. 너도 시험지 펴봐.”
“응, 왜?”
영채는 가방 속에서 받아쓰기 시험지를 꺼냈습니다. 칠십 점짜리 영채의 시험지가 산이에겐 우러러보였습니다. 산이가 그토록 원했던 칠십 점짜리 시험지가 거기 있었습니다. 영채와 산이는 길가에 나란히 쪼그려 앉았습니다.
“우리 이거 바꿀까?”
“맞다. 그러면 딱 좋은데. 난 오십 점, 넌 칠십 점.”
“그니까? 응, 우리 눈 딱 감고 바꾸자. 알았지? 영채야.”
영채도, 산이도 정말 그러고 싶었습니다. 산이와 영채가 시험지만 바꾸면 누구도 다 행복해질 수 있었습니다.
산이는 칠십 점 시험지를 받고 좋아할 엄마를 생각했습니다.
“아구, 우리 아들. 아주 잘했네. 자, 레고시티 시리즈다.”
산이는 엄마를 생각하니 구겨졌던 얼굴이 확 펴졌습니다. 아니, 레고시티를 생각하니 저절로 웃음이 흘러나왔습니다.
“우리 딸, 딱 중간이네. 아주 잘했어.”
영채도 오십 점 시험지를 받은 아빠가 머리를 쓰다듬으며 껄껄 웃어줄 걸 생각하니 기분이 막 좋아졌습니다.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었습니다. 기가 막히게 딱 맞는 점수를 받은 것 같습니다. 산이와 영채는 서로 가만히 마주보았습니다.
“우리 바꾸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소리쳤습니다. 영채는 필통에서 지우개를 꺼냈습니다. 아주 잘 지워진다는 컴퓨터용 지우개는 거짓말같이 지워졌습니다. 권영채도 지우고, 강산도 지우고. 찢어지지 않도록 살금살금, 조심조심. 모두 다 행복해지는 아주 중요한 순간이었습니다.
이제 오십 점과 칠십 점만 남았습니다. 산이는 연필을 꺼내 칠십 점 위에 강산이라고 또박또박 썼습니다. 오십 점 위엔 영채가 권영채라고 힘주어 썼습니다. 원래부터 칠십 점은 강산, 처음부터 오십 점은 권영채. 꼭 그런 것 같았습니다.
“이야, 강산아! 진짜로 네 거 같고, 정말로 내 거 같다. 그치?”
“당연하지, 영채야. 넌 이제 오십 점이고, 난 이제 칠십 점이야.”
영채는 강산이의 시험지를 고이 접어 가방에 넣었습니다. 영채도, 아빠도 행복해할 마음을 같이 꼭 챙겨 넣었습니다. 강산이도 영채의 시험지를 탁탁 펴서 던져두었던 가방에 넣었습니다. 엄마의 환한 웃음도, 산이의 넘쳐나는 웃음도 함께 다 꼭꼭 넣었습니다.
산이와 영채가 아빠, 엄마를 속이는 건 잘못이라고요? 그것보다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으면 좀 거짓말해도 괜찮다고 늘 어른들은 말하더라고요.
이 정도쯤이야. 거짓말도 자꾸 해봐야 는다고 그러잖아요.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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