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11월 68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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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구나. 그랬어. 그래서 그랬구나.”
끼익! 확성기를 통과한 듯, 날카로운 전파음이 울렸다. 의아한 나머지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사람도, 확성기도 보이지 않았다. 누가 한 말인지, 뭐가 ‘그랬다’는 말인지도 대체 알 수 없는 환청이었다. 그 순간, 영화처럼 장면이 확 바뀌었다. 순간이동을 한 것처럼 내가 버스 안에 타 있었다. 그러곤 운전기사를 향해 목청껏 소리쳤다. 112에 신고해 달라고. 그랬지만, 기사는 버스를 멈추지 않았다. 나는 들은 체만 체 고불고불한 길을 운전하는 기사를 향해 울먹이는 음성으로 재차 외쳤다.
“기사님! 제발 신고해 주세요.”
그제야 기사는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기사와 눈빛이 마주친 순간, 나는 섬뜩했다. 기사가 비릿하게 웃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기사도 녀석과 한패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집으로 가는 노선이 아닌 엉뚱한 버스를 탔다. 여차하다 일어난 실수였다. 올라탄 버스는 가로등이 없고, 후락한 건물이 늘어선 으슥한 길을 계속 맴돌았다. 초조한 나머지, 나는 자리에 앉지 못하고 버스 기둥을 잡은 채 기사에게 말했다. 후암동 주민센터로 가야 하는데 버스를 잘못 탄 것 같다고. 그제야 기사는 대답했다. 갈아탈 정류장에 도착하면 알려줄 테니 빈자리에 앉아 있으라고.
나는 기사 뒷자리를 비집고 들어갔다. 2인용 의자 한쪽에 중학생으로 보이는 남학생이 앉아 있었다. 반쪽 공간에 앉기는 했지만, 캄캄한 동네를 맴도는 버스 생각에 초조했다. 그래서 등을 기대지 못하고 발을 오므린 채 창밖을 내다보았다.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는 것조차 허둥대는 스스로를 자책하면서.
그런데 옆자리에 앉은 학생이 이상했다. 스마트폰에 시선을 고정한 채 게임을 하면서 어깨와 무릎으로 나를 툭툭 치는 것이었다. 신경이 쓰였지만, 나는 곧 내릴 거라는 생각에 참기로 했다. 그런데, 녀석이 스마트폰을 보며 히죽거리더니 운동화로 내 구두를 툭툭 건드리는 것이었다. 나는 짜증 섞인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학생을 보았다. 그러자 학생은 코웃음을 흘리며 가방에서 커터칼을 꺼냈다. 학생이 엄지손가락으로 칼집에 들어 있는 칼날을 밀어 올리는 순간, 딱딱거리는 쇳소리에 칼에 찔릴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느꼈다. 당할 수만은 없었다. 나는 칼을 잡은 녀석의 손목을 움켜쥐고 위로 치켜올렸다. 그러자 녀석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나도 덩달아 일어서게 되었다. 녀석의 손목을 움켜쥔 채. 칼에 그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정신이 아득해지고, 기사에게 신고해 달라고 절규하는 순간에 눈을 떴다.
꺼림칙한 꿈이었다. 동이 트지 않은 시간이었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고, 심장이 쪼그라들어 가슴에 뭉근하게 열이 났다. 종아리에도 찌르르한 전율이 일었다. 꿈은 생생했다. 하지만, 두 시간 뒤인 일곱 시에 작은아버지 발인제를 올려야 한다는 생각에 장례식장 방바닥을 짚으며 일어났다.
토막잠을 자며 깊게 잠에 들지 못했고, 급기야 가위에 눌리는 꿈까지 꾸었다. 닷새 전, 해외여행을 하던 작은아버지가 급사했다는 소식을 들어서 그런지도 모를 일이다. 나와 작은아버지는 삼촌 간이지만, 아버지와 아들 사이처럼 각별했다. 그래서 작은아버지 사망 소식에 세상이 무너지는 것처럼 슬펐다. 불쌍하다는 생각, 그가 살아온 인생이 덧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술을 마시고 싶다는 충동이 올라왔지만, 나는 삼 년 동안 단주해 온 이력에 금이 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서 억지로 참았다. 커피를 마시거나, 군것질을 해서라도 술을 마시면 안 되는 사람이 바로 나였다.
가위 눌리는 꿈을 꾼 건, 삼 년 만의 일이었다. 삼 년 전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술을 마실 때는 거의 매일 가위에 눌리는 꿈을 꾸었었다. 망상은 아니지만, 잠이 드는 순간 자동으로 악몽을 꾸었다. 그런데 오늘은 전혀 술을 마시지 않았는데도 난데없이 악몽을 꾸었다. 잠에서 깨어났어도 한동안 심장 박동이 가라앉지 않을 정도였다. 삼 년이 지났어도, 나는 매일 술을 마시고 싶다는 충동에 시달렸다. 알코올중독자에게 술 생각이 나는 것은 사람들이 매일 돈 생각을 하는 것처럼 자동으로 작동하는 패턴이었다. 다시 술을 마시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알기에, 알코올중독자들은 하루하루 음주 충동을 참으며 살아가야 하는 존재였다.
장례식장 접객실 바닥에서 뒤척이다가 빈소로 들어갔다. 현우가 바닥에서 자고 있었다. 소리 나지 않게 뒤꿈치를 들고 향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텅 빈 로비를 가로질러 다시 접객실로 갔다. 홀 구석에 있는 선반으로 가서 전기스토브에 물을 채우고 전원을 켰다. 금세 쉭쉭대며 물 끓는 소리가 났다. 커피믹스 두 봉지를 털어 넣고 빈소로 돌아와 침침한 전등 아래에서 영정사진을 쳐다보았다. 시간이 지나자 형광빛 박명이 창문으로 비쳤다. 동이 트고 있었다.
*
닷새 전, 현우로부터 작은아버지의 부고를 받았다. 그리고 엊그제 비행기 도착 시간에 맞추어 공항으로 향했다. 나는 문중의 종손으로 종중의 대소사를 챙겨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 하물며 작은아버지 일이니, 공항까지 마중 나가는 게 당연했다. 전광판에 도착 메시지가 떴다. 열네 시간 전에 로마 피우미치노공항을 이륙한 비행기가 인천공항에 도착했다는. 사촌 동생 현우는 나보다 먼저 공항에 와 있었다.
지난달, 작은아버지 내외와 사라 그리고 사라 남편, 네 명이 해외여행을 떠났다. 작은아버지는 경제적으로나 건강상 이유로 해외여행을 할 형편이 아니었지만, 무료로 여행할 기회를 얻었다. 이는 ‘자비연대’로 불리는 자선단체의 모집공고에 응모한 사라의 기지로 이루어진 일이었다. 자비연대는 불교와 관련된 자선단체로 J 스님이 운영하고 있었다. 이 단체는 가난한 나라에 식수시설을 설치해 주고, 결식아동을 돕고,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었다고 알려진 인도 둥게스와리 마을의 불가촉천민과 마약 조직이 거주하는 필리핀 민다나오 지역 주민을 돕는 봉사단체였다. 그런데 이 단체에서 작년부터 알코올중독자를 선발하여 ‘해외행복투어’를 기획했고 올해, 두 번째로 해당자를 선발했던 것이다.
해외행복투어 주최 측은 한 가족당 최대 여섯 명 한도로 세 가족을 선발했다. 선발 조건은 까다로웠다. 알코올중독병원에 입원했던 이력이 있는 중독자를 대상으로, 현재 1년 이상 단주하고 있어야 했다. 또한 암, 심장질환 등 시한부 판정을 받았으며 저소득층이어야 신청이 가능했다. 게다가 알코올중독 치료 중이라는 정신과 전문의 소견서를 제출해야 했고, 다른 여러 조건에도 동의해야 했다. 여행 중에 사고나 질병으로 사망하는 경우, 시신을 화장하여 해당 가족이 즉시 귀국한다는 동의서도 첨부되어 있었다.
사라는 우연히 주민센터에 들렀다가 게시판에 붙은 ‘자비연대’의 공고 포스터를 보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응모했는데, 운이 좋았는지 대상자로 선발되었다. 남편과 부모님까지 넷이 해외여행을 떠나게 된 사라 입장에서는 돈을 들이지 않고 부모님께 효도할 기회를 잡은 셈이었다.
그렇게 작은아버지 가족을 포함해 세 가족, 열네 명과 ‘자비연대’의 진행팀 두 명까지 열여섯 명이 한 달 일정으로 여행을 떠났다. 당사자 세 명은 알코올중독 회복자이면서, 모두가 암 환자였다. 그런데 여행하는 도중 작은아버지의 병세가 급속히 악화되었다. 생각해 보면, 암 환자가 긴 여행 일정을 소화하기에는 무리가 되기도 했을 터였다. 인천에서 출발한 비행기가 프랑크푸르트공항에 도착했고, 전세버스로 갈아타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에 이르는 긴 여정이었으니. 이탈리아 밀라노를 거쳐 로마에 도착하던 날, 그러니까 여행 일정을 80%쯤 소화했을 즈음, 작은아버지는 호텔 방에서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앰뷸런스를 타고 시내에 있는 병원으로 급히 옮겼지만, 도착했을 때 작은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뜬 뒤였다. 간암 4기였던 작은아버지는 언제라도 죽을 수 있었다. 가족은 현실을 덤덤하게 받아들였다. 작은아버지는 앰뷸런스에서 마지막으로 가족에게 미안하다는 한마디의 말만 남겼다고 했다.
사라가 유골함을 받쳐 든 채 입국장으로 나왔다. 서약서 내용대로 작은아버지는 로마 화장장에서 한 줌 재가 되었다. 사라로부터 아버지 유골함을 건네받은 현우는 바닥에 주저앉아 흐느꼈다. 사라와 작은어머니도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다.
그때, 사라 남편이 끌고 나온 캐리어가 눈에 띄었다. 낡은 캐리어 표면에 별무늬 스티커가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스티커를 보는 순간, 나는 그것이 작은아버지 캐리어라고 확신했다. 작은아버지는 별에 관한 한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누구보다도 별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사라 남편에게 캐리어가 누구 것이냐고 물었다. 역시나 사라 남편은 작은아버지 것이라고 대답했다. 사라는 눈을 손수건으로 훔치며 나에게 말했다. 아버지가 한국에서 출발하기 전에 캐리어에 별 모양의 야광 스티커를 잔뜩 붙여 놓았다고.
초등학생 때, 나는 방학이 되면 할아버지 집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때, 작은아버지는 뒷산 언덕에 올라 나에게 별자리를 알려주었다. 견우직녀성의 은하수, 북두칠성은 물론 오리온자리, 카시오페이아 같은 별자리를. 태양계에서 가장 크고 빛나는 목성을 그리스의 신 주피터라고 부른다는 말은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나는 거였다. 그러면서 엉뚱하게 중얼거렸다. 이 언덕이 자신의 베이스캠프이고, 언젠가는 여기에서 비행선을 타고 은하계로 돌아갈 거라고 말했었다.
작은아버지는 소설 「어린왕자」에 관심이 많았다. 어린왕자처럼 미지의 행성으로 떠나고 싶어 했다. 작은아버지는 순수하면서도 호기심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현실 감각이 떨어져 보이기도 했지만, 어린왕자처럼 외로움을 많이 타는 사람이었다. 돈을 벌고 직업을 갖는 것보다 비현실적이고 막연한 것을 공상하는 사람. 그래서 할아버지는 늘 빈둥거리며 하늘만 쳐다보는 작은아버지를 한심한 놈이라고 말하곤 했었다.
내가 어릴 때, 작은아버지(당시에는 결혼하지 않아 삼촌이라고 불렀다)는 툇마루에 앉아 먼산을 바라보는 때가 많았다. 밤이 되면 머리맡에서 나에게 『어린왕자』 책을 읽어 주었다. 그러면 나는 금세 B612호 소혹성에서 온 어린왕자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나는 일곱 번째 별인 커다란 지구의 모습을 어린왕자의 시선으로 상상했다.
작은아버지가 스티커를 캐리어에 붙이고 여행을 떠난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작은아버지는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어린왕자 같은 감성을 버리지 않았을 거였다.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오는 것을 받아들이면서도, 난생처음 외국 나들이를 하면서도, 지구에서의 여정을 마치고 1년 만에 죽는 어린왕자처럼 미지의 별을 찾아가는 걸 상상했을지도 몰랐다.
그런 작은아버지도 직업을 가졌던 적이 있었다. 강원도에 있는 천문대에서 전기설비를 관리하는 기사였다. 전문대학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한 뒤 기사 자격증을 갖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직장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상습적으로 술에 취해 있었기 때문에 1년도 채우지 못했던 것이다. 천문관 소유의 차를 술에 취해 몰다가 나무와 충돌하는 사고를 내기도 했고, 지각을 하거나 결근하는 일도 잦았었다.
작은아버지와 나는 알코올중독자였다. 다른 점은, 작은아버지는 스무 번 넘게 정신병원에 입원했고, 나는 두 번 입원한 것이 전부라는 거였다. 우리는 중독자로 살아온 기간과 음주량만 다를 뿐, 둘 다 중독자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었다. 알코올중독은 죽을 때까지 고칠 수 없는 불치병이었다. 아니, 죽고 나서도 제사상에서 술을 받으니 사실은 죽어서도 고칠 수 없는 병이라고 해야 맞았다. 단주한 지 수십 년이 지나도 술 생각을 하지 않고 하루도 살 수 없는 사람들이 알코올중독자였다. 중독자는 하루씩 술을 참는 것일 뿐, 언제 다시 중독자가 될지 몰랐다.
작은아버지와 나는 삼 년 전 같은 정신병원에 입원했었다. 작은아버지는 삼 층 노인병동에, 그리고 나는 칠 층 남성병동에. 수면 시간 외에는 엘리베이터나 계단을 통해 서로의 병동으로 이동할 수 있었지만, 여성 병동인 팔, 구 층과 외래환자들을 진료하는 일 층, 개방병동으로 운영하는 이 층으로는 이동할 수 없었다. 의사, 간호사, 상담사 등 병원 직원들만이 패용한 명찰의 바코드를 읽히고 밖으로 연결되는 엘리베이터 철문을 열었다. 게다가 병실 창문과 계단 창문에 쇠창살이 설치되어 밖으로 도망칠 수도 없었다.
오 층에 흡연이 허용된 발코니가 있었다. 작은아버지와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그곳에서 담배를 피웠다. 오 층 복도에는 공동 화장실이 있었는데, 치매에 걸린 노인들이 담배를 피우러 왔다가 볼일을 보고 변기물을 내리지 않는 경우도, 바지에 똥을 지리는 노인을 보는 것도, 의자를 들고 유리창을 부수겠다고 소란을 피우는 광경을 보는 것도 예사인 곳이었다.
작은아버지는 술로 인한 증상이 심각했었다. 나처럼 가위에 눌리는 꿈을 꾸는 정도가 아니었다. 대낮에도 눈앞에 귀신이 나타나는 환시 증상, 쇳소리처럼 스산한 바람소리가 들리는 환청에 시달렸다. 허공을 계단으로 알고 비척거리며 걷다가 발을 헛디뎌 이 층에서 아래층으로 떨어져 발목이 부러진 적도, 경찰차가 쫓아온다며 논둑길을 맨발로 도망 다닌 적도 있었다. 작은어머니 말에 의하면, 작은아버지는 헛것을 보고 발가벗고 동네를 뛰어다니기도 했다고, 그래서 동네에 창피해서 얼굴을 못 들 정도였다고 했다. 참다못한 작은어머니는 작은아버지를 몇 번이고 정신병원에 입원시켰다. 몇 달 뒤 퇴원하고 나서도 술을 마시면 작은아버지의 환청, 환시 증상은 다시 나타났다. 그런데도 작은아버지는 술을 끊어내지 못했고, 오십 년에 걸쳐 스무 번이나 입·퇴원을 반복했던 것이다.
작은아버지가 입원했던 초기 시절의 이야기는 지금 들어도 구역질이 날 정도였다. 여러 명이 체인을 연결해 발목이 묶였던 일, 그래서 함께 화장실에 다녀야 했던 일 등 인권을 유린당한 이야기. 간호사가 쌀쌀맞게 대한다고 의사에게 말했다가, 된장국이 싱겁다고 말했다가 엉덩이에 보복성 ‘코끼리 주사’를 맞았던 이야기를 들으면 비참함이 느껴졌다. 당시 나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남의 일이 아니라고 스스로를 다잡곤 했었다.
나는 알코올중독 환자만 전문으로 치료하는 정신병원에 입원한 것을 다행이라고 여겼다. 일명 코끼리 주사라고 불리는 ‘할리페리돌’ 약물은 조현병이나 조증을 보이는 환자에게 투여하는데, 주사를 맞으면 온몸에 힘이 빠지고, 이틀 정도 기력을 잃어 잠에 빠지는 지독한 약물이었다. 작은아버지는 젊은 시절, 한 달에 세 번이나 코끼리 주사를 맞을 정도로 병원 측에 저항한 적도 있었고, 간호사에게 미움을 사서 큰일이 아닌데도 다른 사람들에 비해 지나치게 학대를 받기도 했다. “묶어버려!”, “묶이고 주사 맞을래요? 주사 맞고 묶일래요?”라고 말했던 간호사 목소리를 한동안 환청으로 들었다고 했다.
가족은 오십 년 동안 작은아버지를 병구완하느라 지쳐갔다. 술주정으로 오붓한 가족관계가 깨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자식들은 작은아버지가 암에 걸리고 나서야 측은한 마음이 생겼다. 그전까지는 곁을 주지 않았다. 집에 잘 오지도 않았고, 명절에 만나도 데면데면 대했다. 그나마 작은어머니만이 끝까지 남편 곁을 지켜 이혼에 이르지 않을 수 있었다.
병원 발코니에서도 작은아버지는 어린왕자 이야기를 자주 했다. 나는 몇십 년이 지나도 어린왕자를 똑같이 흠모하는 작은아버지를 순수하다고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철이 덜 든 어른 같기도 했다. 나는 어린왕자에 대한 작은아버지 집착이 환시와 환청 증세를 일으키는 원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적도 많았다. 황당하게도 작은아버지는 어린왕자처럼 우주 공간을 맴돌며 여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입원 초기, 간호사나 보호사들이 칭찬을 하면 작은아버지는 오히려 어색해했다. 작은아버지는 낯가림이 심했다. 환자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여러 번 입원한 뒤에야 다른 층 환자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떡진 머리에 말라 터진 미역줄기 같은 머리카락이 삐죽삐죽 나와 있어도, 퀭한 눈으로 창밖을 내다보면서도 작은아버지는 늘 환상 속에 사는 사람이었다. 거칠게 자란 수염이 바람에 나풀나풀 흔들려도 하늘을 볼 때의 시선은 호기심에 가득 차 있었다.
작은아버지는 병실에 별무늬 스티커를 붙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작은아버지는 병원으로 면회 오는 사라에게 별 모양의 스티커를 사다 달라고 하여 병실 천장에 붙였다. 다른 병실은 화장실에 가려고 밤에 일어나면 유리창 밖에서 들어오는 희미한 교회 십자가 불빛에 의지하며 신발을 찾아야 했지만, 작은아버지 병실은 야광 스티커를 붙여 놓아 누구라도 손쉽게 슬리퍼를 신을 수 있었다. 별을 좋아하는 작은아버지 마음이 다른 환자들에게는 이롭게 작용했던 것이다.
흡연 발코니에서 사람들은 뒷담화를 즐겼다. 우리도 같은 병실 환자의 흉을 보았다. 작은아버지는 옆 침대 노인에게서 지린내가 난다고 했고, 나도 옆 침대 환자를 비꼬았다. 우리는 그렇게 따분함을 달랬다. 의사와 간호사, 상담사도 뒷담화 대상이 되기도 했고, 내 아내와 작은어머니의 모진 성격을 서로 욕하기도 했다.
내 옆 침대에 있었던 환자는 인천대교를 설계한 교량 건축 전문가였다.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아 대학교수가 되었지만, 알코올중독으로 학교와 가족에게서 버림받다시피 된 불행한 사람이었다. 병원 중앙 홀에 ‘빅 북’으로 불리는 알코올중독 책이 있었는데, 그는 영어로 된 빅 북을 읽었다. 그제야 나는 그가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했다는 사실을 진짜로 믿게 되었다. 그는 알코올로 인해 망상을 경험하는 딜루전 환자였다. 수시로 과대망상증을 보였다. 회진하는 주치의에게 어제 헬리콥터를 몰고 에베레스트 정상에 다녀왔다는 둥, 안나푸르나에서 패러글라이딩으로 포카라 호수에 착륙했다는 둥 헛소리를 했다.
앞 침대의 환자는 입원하는 날부터 누군가에게 고성으로 쌍욕을 하며 병동에 들어왔던 사람이다. 그는 유명한 탤런트의 동생이었다. 성과 돌림자가 같은 데다, 형과 똑같이 생겨 처음 마주쳐도 TV에서 본 듯한 인상을 풍겼다. 그는 환촉을 경험하는 중증 중독자로, 거미가 거미줄로 온몸을 꽁꽁 싸매고는 얼굴로, 콧구멍으로 기어오르는 꿈을 꿔서 공포에 시달렸다. 점점 심해져 나중에는 거미가 귀로 들어가는 끔찍한 망상을 겪었다.
몇몇 2030 환자들은 중독자도 아니면서 일이 하기 싫어 입원한, 일명 ‘나이롱 환자’였다. 그들은 구석자리, 밖이 잘 보이고 볕이 잘 드는 명당자리를 버젓이 차지했다. 그들은 의사나 간호사 앞에서 일부러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행동했다. 기초생활수급 환자들은 병원비의 구십 퍼센트를 국가에서 부담하기 때문에 자부담액이 얼마 되지 않았다. 구태여 밖에 나가 일하지 않아도 밥 걱정, 잠자리 걱정 없는 병원에서 지내기를 희망했다. 당시 코로나가 유행하고 있어서 그들에게는 공짜로 놀고먹기 좋은 피난처였던 것이다.
2030 환자들은 자기들끼리만 어울려 다른 환자들에게 눈총을 받기도 했다. 보호사 입회하에 밖으로 나가 족구할 사람을 신청받으면 그들이 재빠르게 먼저 신청했다. 족구하는 환자 절반 이상이 젊은 사람이었다. 족구뿐 아니라 반찬을 배식받을 때도 일종의 카르텔이 형성되어 자기네들끼리 고기나 햄 등 맛있는 반찬을 남보다 많이 퍼주어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유치하지만, 나는 그들이 반찬을 제 것인 양 마음대로 배식하는 걸 미워했다. 식탐이 없다고 자부했건만, 못 본 척할 만큼 아량이 생기지 않았다. 입원이 장기화되면 규정에 따라 병원에서 퇴원 조치되었는데, 그러면 그들은 다른 병원으로 옮겨 법의 허점을 최대한 활용했다.
작은아버지가 퇴원하는 날, 나는 사라 부부와 함께 병원을 찾았다. 나는 퇴원한 지 오십일 만이었고, 작은아버지는 입원 육 개월이 지나 있었다. 작은아버지가 퇴원하는 날, 나는 작은아버지 앞에서 죽을 때까지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나는 작은아버지의 야윈 모습에 가슴이 아파 작은아버지 손을 잡으며 말했다.
“오면서 들으니, 사라가 작은아버지 건강검진을 예약했대요. 그동안 술 마시고 주정을 부렸는데도 효도를 받다니 작은아버지는 복 터진 거예요! 아마, 우리 가족이라면… 꿈도 꾸지 못할 일일 걸요?”
그 뒤, 작은아버지를 만난 건 딱 두 번이었다. 첫 번째는 사라가 결혼하는 날이었다. 봄비가 질기도록 내리는, 비가 도로 위에 튀어 구두를 적시는 날이었다. 예식이 끝난 뒤, 가족과 가까운 친척들이 커피숍에 마주 앉았다. 퇴원하고 나서 5개월 동안 단주했다고 말하는 작은아버지 눈빛이 또록또록해 보였다. 그런데 갑자기 작은아버지가 눈물을 글썽이며 나에게 말을 꺼냈다. “내가 암에 걸렸대.” 나는 놀라서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 옆에 있던 작은어머니가 건강검진에서 간암을 진단받았다고 말했다. 작은어머니는 한평생 술을 마셨으니 암에 걸리지 않았겠느냐고 툴툴거렸다. 그렇게 나는 작은아버지가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암 진단을 받자, 작은아버지는 변했다. 구청 문화센터에서 하는 수필 쓰기 과정, 명상 수업에 다니기도, 가족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왕복 십 킬로가 넘는 거리를 걸어 다니면서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았다. 팔을 어깨까지 올리면서 걸었더니 늘어졌던 이두박근 근육이 단단해졌다고 자랑하기도 했다.
두 번째, 작은아버지를 만난 날은 항암치료를 위해 병원에 입원해 있던 날이었다. 항암치료가 생명을 조금 연장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의사의 말에 작은아버지는 치료받는 것을 거부했다. 현우가 나에게 전화를 걸어와, 아버지가 항암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설득해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작은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전에 병원에 입원했던 얘기, 별과 어린 왕자 이야기를 하다 보니 통화 시간이 한 시간을 훌쩍 넘어갔다. 나는 입원해서 항암치료를 받으면 곧 병원으로 찾아가겠다고 작은아버지를 설득했다. 내 전화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작은아버지는 다음 날 입원했다.
입원 이후, 곧 나는 병원을 찾았다. 우리는 병원 옥상에 있는 정원에 올라갔다. 휠체어를 탄 작은아버지는 뼈만 남은 야윈 모습이었다. 하지만, 눈빛은 어느 때보다도 또렷했다.
“현우와 사라가 하라는 대로, 나중에라도 그 애들이 후회하지 않게 해 주세요.”
“평생 짐만 됐는데, 마지막까지 자식 등골만 빼먹게 생겼어.”
“지들이 하겠다는데, 고마운 마음으로 받으시면 돼요.”
“염치가 없어서 그러지.”
작은아버지는 능숙하게 바퀴를 굴려 난간 앞으로 휠체어를 몰았다. 나는 얼른 뒤로 가 휠체어를 밀어 주었다.
“하늘이 맑네. 어젯밤에 별을 보려고 올라와 봤는데 구름이 많아서인지 안 보이더라고.”
“요즘엔 무슨 별자리가 보이나요?”
“가을에는 카시오페이아지만, 안 보이더라고. 그냥 저기 어디쯤이라고 상상하는 거지.”
장례식장은 한산했다. 중독자였던 작은아버지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많이 깨져 있었다. 일가친척과 지인 몇 명 그리고 현우와 사라의 조문객으로 단출하게 장례가 치러졌다. 나는 사흘 내내 빈소를 지켰다. 염습도 지켜보았다. 시신을 정갈히 닦고, 가족이 돌아가며 마지막으로 고인의 손을 잡았다. 그런데, 그때 교활한 생각이 떠올랐다. 작은아버지 손등을 막 만졌을 때였다. 나는 작은아버지만큼 중증 중독자는 아니라고. 나는 작은아버지보다는 오래 살아야 마땅하다고. 좋아했던 사람의 혼백을 보내는 자리에서, 슬퍼서 눈물을 흘리면서도 왜 이런 이기적인 생각이 떠오르는 걸까. 그런 숙연한 분위기에서도 왜 자신만 애틋하게 여기는 걸까. 염을 마치고 나올 때까지 나는 작은아버지에게 죄스런 마음이 들었다. 아직도 술을 잣대에 대고 작은아버지와 비교하는 스스로가 비참했다. 남과 비교하지 말고, 어제의 나와 비교하며 살라고 했던 아내의 말이 되새겨졌다.
문상객이 모두 돌아간 늦은 밤, 현우와 함께 작은아버지 캐리어를 열었다. 장례를 급히 준비하느라 잊고 있었던 일이었다. 현우는 캐리어에 세 자리 숫자 비밀번호가 걸려 잠겨 있다고 말했다. 현우와 사라 그리고 작은어머니 누구도 비밀번호를 짐작하지 못했다. 그때, 나는 612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숫자 키를 612에 맞추자, 캐리어가 열렸다. 「어린 왕자」에 나오는 소혹성 B612의 아라비아 숫자였다.
캐리어에 들어 있는 물건은 단출했다. 옷가지와 전기면도기 그리고 책과 노트 몇 권, 볼펜과 12색 색연필 세트가 전부였다. 책은 닳아서 해진 『어린 왕자』 책이었다. 노트에는 날짜와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적어 놓았고, 간간이 사라와 현우의 어릴 때 사진이 붙어 있었다. 그래서 노트는 가운데 부피가 늘어 비닐로 된 앞뒤 표지 폭이 모자랄 정도였다.
현우가 A4 크기의 큰 노트를 펼쳤다. 노트에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비행기, 우주선, 북두칠성과 오리온자리, 카시오페이아자리 등 별자리 그림들 그리고 나무, 배, 지프차까지. 작은아버지는 정식으로 그림을 배운 적도, 가족 누구에게도 그림 그리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술만 마시던 작은아버지가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다. 색연필로 세세하게 색칠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작은아버지는 늘 상상을 즐겼다. 비행기의 이착륙 원리를 궁금해했고, 자동차의 내연기관과의 차이도 연구했다. 당시 귓등으로 들었지만… 생각해 보니, 작은아버지는 관심 분야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열심히 탐구하는 사람이었다.
노트에 나무 그림도 보였다. 아래쪽에 황토 흙과 잔풀이 있고 굵고 키가 큰 나무 세 그루, 바오밥나무였다. 바오밥나무는 「어린 왕자」에 나오는, 마다가스카르에 많다고 알려진 굵은 몸통에 키가 크고 윗부분은 가는 가지가 복잡하게 얽힌 모양으로 잎이 마치 뿌리처럼 많지 않은 게 특징인 나무였다. 다른 그림에는 하늘은 있었지만 별은 없었다. 대신 토성처럼 띠를 두른 빨간색 우주선을 그렸고, 띠는 주황색으로 칠해 놓았다. 그림 그리기를 배우지 않아 조악했지만, 상상력은 유명한 화가가 그린 그림보다도 풍부해 보였다. 나는 상상했다. 그림을 그릴 때의 작은아버지 눈빛을, 그늘 없이 주름살 잡힌 웃음을 그리고 이마 근육이 넓게 펴진 모습을.
현우가 스케치북 마지막 장을 넘겼다. 흑연가루가 잔뜩 묻은 투박한 연필 글씨가 보였다. 나는 작은아버지의 유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현우와 사라에게
두려움은 두려움을 부른다. 언제나 두려움은 앞에 있다. 과거를 기억하며 두려움을 만들지 마라. 두려움은 넘어서라고 있는 것이다. 나는 두려워서 술을 마셨고, 먹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평생 술 앞에 굴복했다. 술만 아니었다면, 아버지도 달랐을 것이지만 후회하기엔 너무 늦었구나. 미안하다!
오른쪽 페이지에는 ‘사라 엄마에게’라고 적은 글도 있었다. 나는 작은아버지가 쓴 시를 본 적이 없지만, 연도 행도 제대로 형태를 갖춘 시가 분명했다.
자네 덕에 시간이 보여
지나간 시간
굽어지고 말았다.
간을 보며
눈치를 보며
자네에 눌어붙어
긴 시간 고약한 덩어리로
마음마저 암(癌)을 키웠다.
자네에게 토한 원죄를
나무가 되어 씻으려나.
그 시간 부채감을
얄궂게도 흙으로 덮고 말다니.
—「부채감」
*
나는 매주 중독자 자조모임에 나가 중독자로 살아온 삶을 참회하고 있다. 퇴원한 뒤부터 마트에 가는 것도, 처가에 가는 일도 삼가고 있다. 마트에 진열된 술병을 쳐다보는 것도, 처남들과 술을 마시는 것도 안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아내는 필사적으로 나의 단주 생활을 돕는다. 그렇게, 나는 회사와 집을 오가는 단조로운 생활 속에서 단주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현우가 나에게 장례 일 대부분을 맡겼다. 장례는 수목장으로 정했다. 현우는 수목장에 쓸 묘목으로 값이 싼 측백나무를 골랐다. 하지만, 나는 현우에게 동백나무를 권했다. 그러면서 3년 전 병원에서 있었던 일화를 현우에게 들려주었다. 작은아버지가 겨울을 지나 봄이 올 때 동백꽃을 보고 싶어 했다고. 그때 나는 작은아버지에게 동백꽃이 왜 좋으냐고 물어보았고, 작은아버지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봄의 시작을 알리는 선홍빛 동백나무 꽃망울이 눈 속에서 삐져나오는 게 씩씩해 보여서 좋아. 동백꽃 꽃말도 좋은데 모르지? 꽃말이 ‘그대를 누구보다 사랑합니다’인 걸.”
지금 생각해 보니, 이미 작은아버지는 시인처럼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서울 근교의 한 추모공원에 전화를 걸었다. 수목장을 예약하려는데 동백나무가 있느냐고. 관계자는 없지만, 당장 동백나무 묘목을 준비하겠다고 말했다. 나는 별이 잘 보이는 언덕 위에 선홍빛 꽃이 피는 종자로 심어 달라고 말했다. 동백나무는 사철나무인 데다 눈과 비에 강해서 수목장 묘목으로 손색이 없었다.
예상대로 추모공원 측에서 동백나무를 잘 준비해 놓았다. 언덕 위에 심겨 있었고, 고인 생일과 사망일이 적힌 푯말이 나무 밑에 놓여 있었다. 가족은 유골을 흙에 섞어 동백나무 뿌리에 뿌렸다. 가족이 돌아가며 한 삽씩 흙을 덮었다. 현우와 사라는 준비해 온 이별 편지를 읽었다. 술 때문에 미워했던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내용이었다.
한 사람이 떠났다. 작은아버지는 어린 왕자처럼 지구 방문을 마치고 원래의 별로 돌아갔을지도 모른다. 상상을 즐기던 괴팍한 사람, 자유인을 꿈꾸었던 사람이었다. 술에 빠져 인생에 금이 갔을지라도, 가족을 챙기지 못했을지라도, 지구에서 70년 넘게 살다 간 사람. 자유인 그의 명복을 진심으로 빌었다. 새벽에 꾸었던 꺼림칙한 꿈 얘기를 아무에게도 못 했지만, 동백나무 아래 무릎 꿇고 작은아버지에게 속삭였다. 죽을 때까지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소설 「어린 왕자」에서 어린 왕자가 알코올중독자와 대화를 나누는 대목이 있다. 어린 왕자가 알코올중독자에게 묻는다.
「왜 술을 마시나요?」
「잊어버리기 위해서.」
「무엇을 잊으려는 건가요?」
「부끄러움을 잊으려고.」
「무엇이 부끄러운데요?」
「술을 마신다는 사실이.」
나는 당장이라도 정신과 전문의에게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술을 끊어 낸 지 3년이 지났는데도 왜 가위에 눌리는 건지 의사에게 물어보아야겠다. 중독자에게 술은 독이다. 독을 몸속에 퍼붓는 행위는 자살 행위이다. 땅속에 있는 미생물도 지상의 식물들과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죽어서 흙으로 돌아간다. 작은아버지처럼 나도 언젠가는 흙으로 돌아간다.
나는 악몽을 가볍게 여기다가 환시, 환청을, 어쩌면 무시무시한 환촉에 이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견디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술을 끊어내자 뜨거운 심장이 몸속에서 박동하는 것을 느낀다. 중독자가 아닌 회복자라서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기운이다. 회복자는 중독자를 심판하는 의사에게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사람이나 마찬가지다. 염습실에서 작은아버지와 중독의 정도를 비교하는 속 좁은 인간이 나라는 사실이 부끄럽다. 나도 언제든지 중독자로 재발할 위험이 있다. 나는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회복자로서 순간마다 맑은 정신으로 심장이 박동하는 것을 느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