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11월 68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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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를 탔다. 아직 이른 시간인지 운전기사도 사람들도 아무도 없고 출입문만 열려 있었다. 차에 올라서 등 뒤에 메고 있던 배낭을 벗어서 앞에서 두 번째 자리에 놓고 버스 밖으로 나왔다.
청승스럽게도 네 시만 되면 자리에서 일어나는 버릇은 평생을 두고 고쳐지지 않은 탓에 오늘도 맨 먼저 도착했나 보다.
어제 내린 소나기 때문에 아침 날씨는 맑고 상쾌했다. 무섭도록 퍼붓던 소나기에 콩알보다 더 큰 우박 덩어리가 무섭도록 퍼붓는 모습을 보고 세상이 끝나는 것 같은 두려움을 나만 느꼈을까? 유난히 큰 소리가 나면 가슴속에 묻혀 있던 공포가 온몸을 엄습하곤 했다.
전쟁이 끝나고 언제 전쟁 같은 일을 겪었나 싶은 지금 시절은 그때와 다름없이 청명한 유월이건만 그의 기억은 조금도 앞으로 나가거나 뒤로 돌아가지 않고 그날의 시간에 머물러 있었다.
참전 전우회 지역 회의에서 아직 생존해 있는 전우들을 모아 국립현충원에 묻혀 있는 전우들을 찾아볼 기회를 제공한다는 안내를 받고 이번에 어렵게 찾아가 볼 기회를 갖게 되었다.
평생을 그의 삶에서 떠나지 않는 그날의 기억이 정말 일어났던 일인지 확인해 보고 싶은 욕망이야 수만 번도 더 되뇌어 보았지만 단 한 번도 실행해 볼 기회도 없었다. 아니, 발걸음을 떼어 놓기가 쉽지 않았던 시간이었다.
북한군의 야습에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고 계속해서 패퇴하고 있는 미군 1사단이 화천 전투에 이어 양구 동면과 고성을 잇는 전투에서 계속해서 전과를 올리지 못하고 고전을 하고 있었다. 태백산맥의 험준한 지세와 괴뢰군의 예상치 못한 작전으로 계속 허를 찔리고 있는 미군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다.
2차 대전에 동원되었던 그들은 유럽이나 태평양, 북아프리카에서는 제대로 된 군인이었는지는 몰라도 우리의 태백준령에 유월 장마가 시작되는 시기의 강원도 지형을 이해할 리 없는 그들의 작전은 절대적으로 불리한 전쟁이었다.
내가 전쟁 한복판에 놓인 날은 단오가 지난 다음 날이었다. 원통에서 고성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 행군을 하다가 한계령으로 향하는 삼거리에서 야영을 하기로 했다. 언제 어디에서 적군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수복했다는 것은 큰 의미가 없었다.
초저녁에 잠시 반달이 떴다가 연해 서산으로 사라지자 산골의 밤은 금방 어둠으로 사위가 깜깜했다. 가끔 지나가는 바람 소리와 어딘가에서 들리는 부엉이 우는 소리 말고는 옆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조차도 천둥소리처럼 크게 들리도록 긴장이 되는 순간이었다.
원통에서 고성으로 넘어가는 태백산맥의 산세가 워낙 험해서 야습을 감행하기는 그리 쉬운 일은 아니지만 금강산으로 넘어가는 서화리 쪽에서는 쿵쿵거리는 포 소리도 가끔씩 들렸다.
인가도 없고 더구나 적은 바로 옆에서 북상하려는 우리 군대를 위협하고 있었으니 잠자리조차도 공포였다. 더구나 장진호 전투에서 미군이 패하고 흥남에서 철수를 한 뒤에 다시 북진해서 38선을 마주하고 있던 전선은 교착 상태에 빠져 있고 맥아더 사령관도 해임되었다.
당시 국군들 사이에서는 맥아더 장군이 해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적잖이 당황하고 있었다. 한 번도 그를 직접 대면한 적은 없었지만 군인들 사이에서는 거의 신적인 존재였다.
전쟁이 점점 승패를 알 수 없는 시간과의 싸움이 되어 가고 태산같이 믿었던 미군이 흥남 철수 이후 무적의 해결사가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나자 우리 국군은 점점 불안 속으로 빠져들었다. 한쪽에서는 휴전 회담을 시작한다는 소문이 있던 시기라 전우들은 더더욱 공포에 젖어 있었다.
화력이나 전술이나 우리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우수한 미 해군이 죽을 쑤고 있던 펀치볼 전투에서 후퇴를 하게 되면 자칫 원통과 인제, 더 나아가서 더 남쪽으로 후퇴해야 한다는 지휘관들의 엄포 아닌 엄포에 잔뜩 겁을 먹고 있었다.
부대에서는 공공연하게 전쟁 이전인 38선을 선으로 해서 휴전이 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순간순간 한 뼘의 땅이라도 적으로부터 더 빼앗아야 한다는 생각은 병사 모두의 생각이었던 것 같다.
언제나 죽음이 코앞에서 서성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때는 순간순간 집에 있는 부모님께 편지를 쓰는 것도 두려웠다. 어쩌면 살아서 돌아가지 못하고 누구의 뼛가루인지도 모를 재 한 줌 상자에 넣어서 고향의 부모님에게 돌아갈지도 모르겠다는 공포가 시도 때도 없이 밀려왔다. 전우가 피우다가 버린 꽁초를 피워 물어봐도 공포가 옅어지지도 않았다.
미 해병이 죽을 쑤다가 뒤로 빠지고 한국군이 투입된 지 이제 겨우 이틀째, 공포는 최대로 높아져서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갈 희망은 아예 버리는 것이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말이 그렇지 삶의 끈을 놓친다는 생각을 하기가 그렇게 쉬운 일인가? 그러나 전장에서의 병사는 한낱 탄환 한 알과 같은 존재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냥 소모품이었다.
처음으로 영천 전투에 투입되었을 때는 솔직하게 말해서 총을 들고 적을 향해 쏘는 것조차도 두려웠다. 그러나 전투가 끝나고 나면 온몸 멀쩡하게 살아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수없이 스러져 간 동료들의 처참한 모습을 보면서 사는 것과 죽는 것의 경계가 모호해질 무렵 그의 부대는 이미 강원도 전선에까지 올라가 있었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나뭇잎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들어도 혹시 적이 침투하지 않았나 싶어서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곤 했다. 자신이 잠들었을 때 적이 침투해서 자신의 목을 가져갔다면 아침에 눈을 뜰 수는 없었겠지만 그저 일상처럼 아침이면 눈을 뜨고 배식받고 행군하고 은폐물로 몸을 숨기고 적을 향해서 총을 쏘고….
새벽녘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고향에서는 지금 한창 보리타작이 끝물어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텐데…. 지게작대기도 움직인다는 모내기철인데 일을 해야 하는 장정은 전쟁통에 총을 든 채 이곳에 와 있으니 농사일은 누가 다 할까?
잠시 부질없는 고향 걱정을 했다. 원통골에도 손바닥만한 논배미에 낮에는 사람들이 나와서 모내기를 하고 있었다. 전쟁이 나든 난리가 나든 사람들의 삶은 계속된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듯했다. 한쪽에서는 전사자를 실은 쓰리쿼터가 뽀얀 흙먼지를 날리면서 화장터로 향하는 장면을 보곤 하는 그의 머릿속은 참으로 혼란스러웠다.
아침이 되자 군내가 진동하는 밥을 항고에 받아서 철모에서 떨어지는 빗물과 섞어서 밭두렁에 쭈그리고 앉은 채 먹었다. 그것도 꿀맛이었다. 전우들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그저 배식되는 밥 먹고 행군하고 적과 대치하고…, 그런 날들이 며칠째 계속되고 있었다.
새벽부터 내리던 비는 아침식사 후에 원통에서 서화로 향하는 군용 차에 타려고 집결지로 걷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세차게 내렸다. 철모 위로 흘러내리는 빗물이 앞호주머니에 넣은 군용 식량을 적시는 것 같아 내내 마음이 쓰였다. 오늘 아침밥이 마지막 식사일지 아니면 호주머니에 들어 있는 비상식량이 마지막 식사가 될지 아무도 모르는 시점이라는 것이 무서운 게 아니고 허약한 영양 상태로 적과 전쟁을 해야 하는 체력이 더 문제인 것 같았다.
완전 군장을 하고 구보를 하는 것이 더 괴로웠다. 4킬로, 8킬로 정도는 가볍게 걸어서 이동해야 하는데 군장을 하고 빗속을 걷는 것이 정말로 힘들었다.
우리 국군이 꼭 사수해야 하는 화천댐은 정말로 생명줄이라는 훈시는 귀에 딱지가 박히도록 들어야 하는 소리였다. 디데이가 언젠지는 모르지만 동쪽에서 펀치볼 평지를 향해 우리 부대가 진격하고 서쪽에서는 동면 쪽에서 험준한 산을 타고 동시에 도솔산 정상을 차지하고 있는 북괴군을 소탕하고 그들을 몰아내는 작전이었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이나 전투가 벌어지는 격전지였다. 그곳을 확보하지 못하면 화천댐도 속초나 고성으로 향하는 고성군의 대대리가 점령당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서화리를 지날 때쯤 빗줄기가 가늘어지기 시작했다. 빗물에 밥 말아 먹은 지가 조금 전이었던 것 같은데 벌써 점심 배식을 위해 행군을 멈추고 자리를 잡고 앉았다.
농부들이 여기저기에서 모내기를 하고 있었다. 대부분 노인들과 아낙네와 아이들이었다. 구불구불한 논배미에서 엎드려 모를 심고 있는 아낙들을 보고 동료들은 휘파람을 불어댔다. 잠시 동안이지만 전쟁을 잊고 있는 것 같은 그들의 행동에 잠시 병사들은 웃을 수 있었다.
조금 뒤 지프차 한 대와 포장을 친 트럭들이 줄지어 뿌연 먼지를 내며 해안 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군용도로로 임시로 뚫어 놓은 신작로는 뿌연 흙먼지로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고개를 들어 문득 남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지금쯤 아랫골 보리논에 모내기를 하고 있을까?’
허리를 숙여 모를 심고 저녁답에 집으로 돌아오는 어머니의 얼굴은 퉁퉁 부어 있겠지. 개울 건너편에서 모를 심고 있는 아낙네의 하얀 머릿수건이 상체를 전부 덮고 있는 것 같은 게 어머니를 연상하게 했다.
‘내가 이 전쟁터에서 살아남아서 돌아가면 꼭 부모님 힘들게 하지 않아야지.’
식사 후에 화랑 담배 한 대 피우는 시간이 제일 행복했다.
다시 부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잠시 감상에 젖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마음의 여유가 조금이라도 있다는 증거이지 싶었다. 콩을 볶듯이 다다거리는 총탄이 눈앞을 날아다닐 때는 어머니나 고향에 대한 생각은 사치스러울 감상일 뿐이고 앞에서 공격해 오는 적을 한 명이라도 더 죽여야 내가 살 수 있었다. 자신의 총을 맞고 피를 뿜으면서 썩은 나무 둥치처럼 쓰러져도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 그저 나의 목숨을 위협하는 상대에 불과했다. 흔한 말로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는다는 절박함 말고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심적 계곡을 지날 때쯤 다시 대포 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계곡 양쪽 어느 지점에 적이 매복하고 있을지 모르니까 시야 잘 확보하라는 분대장의 지시사항이 수시로 떨어졌다. 계곡의 물소리만 청아하게 들리는 것이 아무 걱정 없는 무심한 일상인 듯했다.
주로 밤에 야습을 감행하는 적은 낮의 기습이 흔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의외의 기습은 항상 있는 일이어서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이미 미국은 이 전쟁에서 발을 빼고 싶어한다는 조짐이 여기저기에서 나타났다. 그들의 마음도 이해가 되었다. 아무리 세계 최대의 강대국 군인들이라고 해도 사람의 목숨은 다 똑같은 하나뿐인데 누군들 자기네 국민이 이름 없는 동양의 작은 나라에 보내서 허망하게 죽이고 싶겠는가? 결국은 우리가 지키든지 적군에게 나라를 통째로 내주든지 둘 중 한 가지 방법만 남았을 뿐….
백성들은 그저 국가를 위해 허망하게 목숨과 재산을 내놓아야 하는 존재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나이가 차지도 않아서 징집 대상이 아닌 자신이 이 전쟁터에 끌려 나온 것과 아무것도 다를 게 없다는 사실이었다. 국가라는 이름으로 한 개인에게 어떤 폭력을 행사해도 용인되는 세상, 그것이 나의 나라였다.
쓸데없는 잡념에 잠겨서 행군을 하는 동안 어느새 해안 입구에 도착했다. 다시 장맛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아직 본격적인 장마철은 아닌데도 사나흘 전부터 찔끔찔끔 비가 내렸다. 초저녁에는 맑았다가 새벽녘에는 비가 내리고는 했다.
얼떨결에 징집되어서 제주도로 가서 3주 동안 훈련이랍시고 교육은 받았지만 일제시대가 끝나고 아직 채 자리도 잡기 전에 총이라는 것도 처음 구경한 젊은 장정들은 대부분 전쟁과는 거리가 먼 농촌 출신의 농부들이었다.
훈련소에서부터 다시 전쟁이 나고 1951년이 되어서 논산훈련소가 제자리를 잡을 때까지 그야말로 전쟁에 투입된 군인들의 수준이라는 것이 그야말로 오합지졸들이었다.
나도 진주 근교의 시골에서 징집 연령도 아닌데 만만한 놈성도 없더라고 열아홉 살이 들자마자 느닷없이 징집 영장을 가지고 온 이장의 손에 이끌려서 입대를 하게 된 것이었다.
입춘 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날 어머니는 어디에서 주워들었는지 무명 속곳에 천을 덧대어서 주머니를 만든 다음에 그곳에 돈을 꼬깃꼬깃 넣고 바늘로 입구도 꿰매어버렸다. 시골에서 농부의 아내로 살아온 어머니의 기발한 생각이었지만 훈련소에 도착한 순간 모두 압수를 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우리 어머니의 그런 아이디어가 그 이후 그 동네에 유행처럼 되어서 전쟁이 끝나고 난 뒤에도 한참 동안 군대에 입대하는 장정들의 속옷에 주머니를 달아주고 또 그곳에다가 돈을 넣어 가지고 다니는 방법이 통용되었다. 그 방법은 그의 어머니가 중국을 드나들면서 돈을 옮기는 방법의 하나로 이용했던 것이었다.
대절 버스가 출발하고 곧바로 간식 봉투가 지급되자 차 안에는 김밥 냄새가 퍼져 나왔다. 노인은 간식 봉투를 열어 보지도 않고 그대로 배낭에 넣고 의자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이제 살아갈 날이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지만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으로 푸르른 날에 오르내리던 도솔산에 다시 한 번 더 가볼 기회였다. 차에 타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몸들이 불편해 보였다.
다시 잠이 들었다. 전쟁터에서 살아남았다는 것이 천운이라고 입버릇처럼 되뇌이던 어머니는 이미 삼십여 년 전에 세상을 버리셨지만 어머니의 그 지극한 정성으로 아직도 자신이 목숨이 붙어 있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하지만 삶이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님을 이제는 다 알아버렸으나 나의 삶을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더 큰 어려움이 눈앞에 버티고 있다.
단오가 지나고 한 이틀을 조용하던 적군이 그달 여드렛날 드디어 대규모로 작전을 감행해 들어왔다. 초저녁에 잠시 상현달이 떴다가 서쪽으로 사라지고 나자 사방을 먹물이라도 뿌려 놓은 듯 깜깜했다.
총소리와 포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자 호롱불을 밝히고 있던 민가에서는 일제히 소등을 했고 그야말로 깜깜 절벽 어디가 어딘지 모르게 어두운데 사방을 에워싸고 있는 산자락의 능선만 보였다.
폭풍전야의 고요였을까? 사위는 어둠과 침묵만 흘렀고 간간이 들리는 부엉이 울음소리가 낯설게 느껴질 정도로 팽팽한 침묵이 초저녁부터 이어졌다. 전우들은 교대로 잠을 청하고 있었다.
그러나 때가 때였는지 아직도 산속의 기운이 차서 그런지 좀처럼 눈이 감겨지지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서북쪽 능선에서 함성 소리와 함께 총 소리가 일제히 들려왔다.
“소대원들 모두 기상!”
짧고 강한 소대장의 독기 어린 지시가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천막 밖에서 들렸다. 이미 적이 기습할 것을 알고 있었던 듯이 일사분란하게 명령은 전달되고 모든 부대원들이 준비 자세로 대기했다.
“우리의 선발대가 이미 능선 중간까지 점령했다.”
“이번에는 꼭 탈환해야 한다. 알아들었나?”
“예!”
적군은 고지에서 아군을 내려다보는 지형이었으므로 우회로를 통해 야간에 기습을 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는 곳이었다. 우리 대대는 이미 양구군 동면 쪽으로 우회하여 미군이 있는 분지와는 상당히 거리가 떨어져 있었다.
지난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그 당시 젊은 장교들은 정말로 애국심으로 무장된 젊은이들이었다. 이제 스물을 갓 넘긴 피 끓는 청춘들이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다가 되찾은 지 5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에 또다시 나라가 풍전등화의 상황이었으니 그야말로 죽음을 무릅쓰고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신념을 가진 젊은이들이었다. 어차피 선두에 서서 소대원들을 지휘한다는 것은 목숨을 내놓고 싸우는 것이었다.
우리의 소대장인 나 소위도 마찬가지였다. 사범학교를 나와 강원도 산골에서 근무하다가 입대해서 우리의 소대장이 된 사람이었다. 자그마한 체구였지만 여간 다부진 사람이 아니었다. 새까맣게 그을린 얼굴에 빼빼 마른 체형이었지만 눈빛은 광채를 뿜어내는 사람이었다.
나와 최 상병과 전 하사는 소대장을 바짝 붙어서 능선을 기어올랐다. 며칠 전에 내린 비로 인해 산등성이는 매우 미끄러웠다. 들고 있는 M16 소총이 무겁게 느껴질 때쯤 피아가 서로 총질을 해 대는 소리가 무척 가깝게 들렸다.
“소리 죽여!”
앞서서 전진하던 소대장의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바짝 긴장한 그의 음성이 약간 떨리는 듯했다. 그때부터 눈앞에는 섬광이 퍼지면서 대낮같이 밝았다가 더 심한 어둠이 찾아오고를 반복하면서 우리는 조금씩 전진해 나갔다.
대포 소리가 고막을 때리고 멀지 않은 곳에서 병사들의 비명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때는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저 대포를 맞지 않기 위해서 바짝 엎드려서 몸을 숨기고 소리가 그치면 전진하고 — 소대장의 명령에 따라 자동으로 움직였다. 생과 사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냥 딸려가는 수밖에 아무런 의지도 생각도 없었다. 본능과 앞선 소대장의 지시만이 있을 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소대장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냥 그 자리에 엎드려 있을 뿐이었다. 섬광과 대포 소리, 죽지 않기 위해서 쏴 대는 총 소리가 계속해서 능선을 메우고 있을 뿐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매캐한 화약 냄새가 코끝을 힘들게 한다 싶을 즈음에 소리는 잦아들었다. 총소리와 포 소리가 커졌다가 잦아들었다가를 계속했다. 처음에는 그 소리가 또렷하게 구별이 되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귓속을 괴롭히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렸다.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날마다 일어나는 전쟁의 한복판에서 살기 위해 총을 쏴 댄다는 느낌이었다. 내가 쏘지 않으면 내가 쓰러지는 이치 그 이하도 그 이상도 아니었다. 간간이 들리는 사람들의 아비규환에 내지르는 비명과 악다구 소리가 어우러져서 누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능선 바닥에 엎드렸다. 내가 아직 살아는 있나? 허벅지를 꼬집어 보았다. 살아 있음이 분명했다. 소대장은? 최 상병은? 전 하사는? 궁금했지만 한동안 그대로 엎드려 있었다. 몸을 일으키는 순간 어디선가 총알이 날아와 자신의 몸에 박힐 것 같았다. 그냥 타조처럼 얼굴을 처박고 엎드려 있었다. 멀리서 들리는 사람들의 웅성거림만 귀에 맴돌 뿐 참 허무한 인간은 그 자리에서 잠들어 버렸다.
뼛속을 스며드는 한기에 눈이 떠졌을 때 사방은 적막만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리도 밝게 비추던 불빛은 간 곳이 없고 어둠만 가득했다. 사실은 자기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이 두려워지기 시작하는 시점이었다.
‘동료들이 다 죽어버렸으면 어쩌나. 인민군의 포로가 되느니 죽는 것이 오히려 덜 고통스럽다고 하던데.’
그보다도 온몸을 파고드는 한기가 더 무서웠다.
‘조금 전에 옆에 있었던 소대원들은 다 죽었을까.’
지금 이 추위를 벗어날 수 있다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몸을 일으켜서 깜깜한 주위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런데 왼쪽 눈이 축축한 이물감을 느꼈다. 손으로 눈을 닦아 보았지만 자꾸만 축축한 것이 흘러내리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불빛이라고는 아무 곳에도 없고 인기척도 느낄 수가 없었다. 두려웠다. 아니, 추웠다. 참을 수 없을 만큼 추웠다.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소리를 질렀다. 그때는 죽는 것이 하나도 두렵지 않았다. 그저 춥고 무서울 뿐이었다.
“소대장니임….”
“전 하사니임….”
“인마, 최 상병, 어디 있어….”
악을 쓰면서 불렀다.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다시 악을 쓰면서 불렀다. 그러자 추위가 좀 가시는 것 같았다.
“최 상병, 최 상벼엉….”
이미 매캐한 탄환 냄새도 어디론가 날아가 버린 듯 자신만 그곳에 버려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들 일부러 자기 자신만 남겨 놓은 채 떠나 버린 것 같았다.
나무 덤불에 털썩 주저앉아서 엉엉 울었다. 지금 이곳이 전쟁터 한가운데인 것조차 잊어버린 채 엉엉 울었다. 지금까지 계속해서 북진을 하면서 수없이 겪어본 전투인데 전혀 낯설게 느껴지면서 더 무서워서 울었다.
그 지점까지만 그의 기억이 머물러 있었다. 그날 밤의 어둠 속에서 추위에 떨던 기억만 지금까지 또렷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한쪽 눈을 잃은 채로 한평생을 지나온 그가 기억하는 단편적인 공포였다.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아내가 딸을 낳고는 어린 핏덩이를 남긴 채 어느 날 홀연히 집을 나가 버리기까지 나는 술에 절어 있었다. 밤만 되면 온갖 무서움이 밀려와서 맨정신으로 잠이 들 수가 없었다. 눈만 감으면 칠흑 같은 어둠에 갇힌 채 추위에 떨면서 울고 있는 자신을 볼 수 있었다.
집에 있는 무엇이든지 가지고 나가 술을 사서 마셨다. 그래야 추위도 무서움도 잠시나마 잊을 수가 있었다. 어머니의 하얗게 센 머리가 더욱더 하얗게 변해 갔다. 그리고 아내가 종적을 감춰 버리자 어린 아기는 자연스럽게 어머니가 거두어야 했다.
겨울이 되자 전쟁은 더 치열해졌는지 아랫집 소남댁의 아들이 또 뼛가루로 돌아왔다. 그리고 나의 사촌형도 전사 통지서와 함께 유골 상자가 전달되었다. 사촌형수도 세 살짜리 딸을 두고 떠나갔다.
그런 것이 일상이 되어 갔다. 그리고 그들의 어린 아내들은 하나같이 집을 떠나갔다. 생떼 같은 아들을 잃은 어머니들의 슬픔만 쌓여 가는 나날이었다.
그리도 해방이 되었다고 곧바로 우리의 세상이 온 줄 알았던 백성들은 죽음 앞에서 두려움에 떨어야 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백성들의 운명은 늘 그랬다. 백 년 전에도 천 년 전에도 만 년 전에도 그랬겠지. 그래서 백성들은 백성이 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어느 누구의 간섭 없이 자유롭게 살고 싶었을 것이다.
버스가 가파른 을지전망대를 향해서 올랐다. 어찌나 길이 가파른지 자리에 앉아 있는 것조차 불안했다. 차창으로 스치는 시원한 바람과 멀리 아래쪽에 반짝이는 비닐 밭고랑들이 참으로 생소했다.
미군 종군기자가 펀치볼이라고 이름을 지었다는 해안은 변해도 너무나 변해 있었다. 내가 그때 산등성이에서 미친 듯이 울부짖었던 능선을 눈만 감으면 떠올랐는데 그와 비슷한 지점조차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날 밤 양구 쪽에서 기어오르던 능선을 기억해 보려고 했지만 도저히 생각은 있는데 단 한 장면도 기억에 맞추어 볼 수가 없었다.
‘쓸데없는 과거에 나만 갇혀 있었구나.’
전망대 꼭대기 주차장에서 내리자 어지럽고 속이 매스꺼웠다. 세찬 바람과 함께 알 수 없는 두려움과 같이 속이 울렁거려서 곧바로 화장실에 가서 속에 있는 것을 토해낸 후에야 조금 가라앉았다.
손을 씻으면서 거울을 바라보았다. 머리가 하얀 백발의 아버지가 그곳에 서 있었다. 아니, 어머니였다. 갈색 색안경 너머로 비치는 그 얼굴은 자신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자기가 어떤 모습인지가 생각나지 않았다. 어머니, 아버지, 형제자매, 기타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사람의 얼굴은 기억이 나는데 자신의 얼굴은 스스로 기억해 낼 수가 없었다. 어릴 때의 얼굴도, 전장에서의 모습도, 그 이후의 어떤 모습도 머릿속에서 그려지지가 않았다.
아내가 떠나간 이후로 거의 거울을 보지 않았다. 한쪽 눈이 움푹 파인 괴물을 보고 누가 혐오스럽지 않았을까? 딸아이가 커 가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이 더 혐오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조잡한 라이방을 써 봤으나 영 보고 싶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한참의 세월이 흐른 후에 의안을 해 넣었지만 그땐 아무런 의미조차도 느낄 수 없을 때였다.
2층 안보교육실에 올라가서 젊은 여자 해설자의 설명을 들었다. 그리고 건너다본 반대편 산등성이의 모습은 신록으로 가득했다. 산하는 그대로인데 우리들은 저 땅을 빼앗기 위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려야 했던가?
춘천의 야전병원에서의 생활은 나를 자꾸만 미로 속으로 밀어넣었다. 도솔산 능선에서 잠이 들었던 시간은 잠이 들었던 것이 아니고 나의 의식은 내 육체를 떠나서 먼 미지의 세계로 떠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꿈속에서 헤매던 장소는 아무것도 현실이 아니었고 그냥 둥둥 떠다닌 것이었다.
너무나 추워서 목놓아 울었던 것도 소대장, 전 하사를 불렀던 것도 기억에는 남아 있지만 현실이 아니었던 것이다. 지금 도솔산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펀치볼의 모습도 현실이 아닌 곳이 되어 가고 있었다. 내가 서 있는 이 지점만 내게 남아 있을 뿐 지나간 일은 모두 헛것에 불과했다.
지나간 일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그래, 맞아. 아무것도 아닌 것이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지도 몰라.’
아무런 실체가 없이 한낱 지나간 순간일 뿐이었다. 누가 그것에다가 꾸며 붙여서 각색을 하고 그것을 누가 이용을 하느냐의 차이일 뿐….
버스를 타고 평화의 댐을 둘러보고 다시 파로호로 향했다. 전쟁 때 6사단에서 복무하던 우리 동네 동준이가 그곳에서 전사했다. 중공군이 고스란히 수장당한 대붕호 발전소를 뒤로하고 화천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기어이 나는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비슷한 시기에 입대하여 그는 이미 잿가루가 되어서 고향으로 돌아갔을 때 나는 도솔산 능선에 눈이 빠진 채로 누워 있었다. 길가에 가끔 보이는 깔끔한 집들과 잘 닦여진 산책로를 걷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시간의 흐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군데군데 남겨진 돌덩이에 새겨진 전적비에만 남겨진 그들의 목숨과 바꾼 글자 한 자 그리고 풀숲에 묻혀 버린 그들의 애절한 사연은 땅속으로 묻혀 버렸다. 그리고 잊혀져 버렸다.
그날 이후 집에 돌아와서 심한 몸살을 앓았다. 평생을 떠돌이처럼 살게 된 일의 원망이 어렴풋이라도 지워지기 전에 한 바퀴 돌아보고 싶은 부질없는 생각이 고개를 내밀 때마다 발길이 망설여지던 길, 그 길이 70여 년 하고도 더 많은 세월이 흘렀다. 가끔 가슴속이 답답해지면서 밥을 삼키는 것이 귀찮아졌다.
백마고지에서, 월정리에서, 펀치볼에서, 서화리로 가는 길목에서, 파로호에서, 소양호에서, 다 잊고 살았다고 기억의 끝에도 남아 있지 않다고 생각했던 옛날의 기억이 하나하나 떠오르면서 밤낮을 괴롭혔다.
꿈같은 청춘이 삶의 악몽으로 변해버린 그 시절이 아직도 아파 죽겠는데 사람들은, 그리고 세상은 도대체 기억하려고 하지를 않는 것 같다. 아니, 나만 억울하게 내 인생을 빼앗겨 버린 것이다.
시커멓게 그을린 형광등 불빛이 깜박거린다. 희미하게 보이는 불빛 사이로 뜬금없이 어머니의 얼굴이 겹쳐진다. 애꾸가 되어 집으로 귀향한 날, 내 손을 붙잡고 울음을 삼키느라 낯빛이 흙색으로 변해 가다가 끝내 혼절하고 만 내 엄니.
희미한 형광등 불빛에 그 얼굴이 보이다니? 이번엔 내가 혼절할 차례인가? 눈물이 흘러내렸다.
스무 살에서 인생이 멈춰버린 것을, 그리고 그 수없는 날들이 오직 하루하루를 이어 나가야 하는 동물적인 절박함으로 지탱해 온 시간은 생각나지 않고, 나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어머니의 기억과 고향의 기억과 사선을 넘나들던 전우들의 기억뿐이었다. 눈을 감고 더듬어 보면 선명하게 떠오르는 장면도 현장에 가보면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기억에 대한 집착——그럴까?
중국에서 소학교에 다니던 걱정 없던 시절, 해란강에서 자맥질하고 물고기 잡던 시절, 기차를 타고 학교에 등교하면서 짖궂은 장난으로 누나들 괴롭히던 기억, 이웃집 과수원에서 복숭아를 한 자루나 따서 집으로 가지고 온 날, 이것은 도둑질이라고 아버지한테 흠씬 맞았던 기억…. 그 기억의 끝은 어딘지 모르게 끝없이 이어져 나왔다. 그러나 전쟁 이후 집으로 돌아온 뒤로는 정말 기억의 저편에조차 매달려 있지 않았다.
“아부지∼.”
딸년의 흐느낌이 이어졌다. 어미 없이 서럽게 자란 딸년이 그래도 지 남편은 마음 곧은 사람을 만나 살림을 잘 꾸려 나가고 있었다.
“아부지∼.”
흐느끼기만 했다.
“아부지 어디 안 간다, 여기 있잖냐?”
“아부지∼.”
딸년의 흐느낌만 길게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