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11월 68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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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경제가 전에 없이 어려워졌고, 경기는 침체의 늪을 헤매고 있었으며, 대기업 중소기업 할 것 없이 몸살을 앓고 있었다. 어려움은 내가 일하는 회사도 예외일 수 없었다. 우리 회사는 화학제품을 생산하는 회사다. 창업 이래로 별문제 없이 매년 성장해 왔었다. 그런데 작년부터 매출이 줄어들고 있었다. 경기 불황에다가 설상가상으로 중국의 저가 경쟁 제품이 밀려와서 매출이 급속하게 줄어들고 있었다. 판매 단가를 인하해도 판매 물량은 줄어들고만 있었다. 수금이 나쁜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나는 사장실로 불려갔다.
사장은 나를 한 번 흘낏 쳐다본 후 잠시 뜸을 들이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사장실에 들어서기 바쁘게 질문을 쏟아놓던 사장이었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거라면 나는 빨리 소나기가 지나가기를 바랐다. 드디어 소나기가 쏟아졌다.
“오 이사, 대체 일을 어떻게 하기에 이 모양이오? 판매 수금이 매월 줄어들고 있으니 이러다가 회사 문 닫는 것 아니오!”
“죄송합니다. 직원들도 독려하고 저도 거래처에 자주 방문하고 신경을 많이 쓰고 있는데도 중국의 저가 제품 때문에 어려움이 많습니다.”
“또 그 중국 타령이오? 중국 저가 제품이 어디 어제오늘 일이오? 그래서 내가 작년부터 대비하라고 했잖소.”
사장의 말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렇기에 특별한 의미가 없는 말이기도 하다. 사장실을 나서는 내 마음은 복잡했다.
삼 년 동안 내 젊음을 보냈던 군부대를 찾아간 것은 제대 후 17년 만이었다. 술자리에서 흔히 있는 일로 사내들끼리 군대 시절을 얘기할 때면 나도 이야기의 한 자락을 잡고 잡설을 곧잘 늘어놓기는 했지만, 내가 복무했던 부대를 굳이 찾아가겠다는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왜 찾아갔을까? 굳이 따져본다면 어려워지는 회사 문제와 위축되는 내 처지가 답답하여, 집단생활이지만 지나고 보니 나름대로 젊음의 낭만과 자랑거리도 있었던 군대 시절을 떠올리게 한 것 같다.
그러나 다음 날 소설가 서지원이 도봉산에 오르자는 전화를 걸어오지 않았다면, 나 혼자 그곳을 찾아갔을지 자신할 수는 없다. 나는 산에 가자는 친구를 무조건 차에 태우고는 옛날 내가 복무했던 군부대에 가자고 하며 차를 몰았다.
“갑자기 군부대는 왜 찾아간다는 거야? 누가 그 부대에 입대라도 한 거야?”
“그런 건 아니고, 그냥 교외로 달리며 머리를 좀 식혀야겠어.”
“왜? 회사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너 혹시 이렇게 된 거 아냐?”
그가 손으로 자신의 목을 자르는 시늉을 해 보였다.
“말이 씨가 된다고 했지, 어쩌면 그렇게 될지도 모르겠다.”
“이거 정말 장난이 아니구먼. 그래, 그 정도로 심각한 거야?”
“중국의 저가 제품 때문에 매출이 계속 줄고 있어. 영업 책임자인 내 입장이 자꾸만 좁아지는 것 같아.”
“그래서 사장이 사표라도 쓰라는 거야?”
“그건 아니지만, 하여튼 골치가 아프다.”
나는 한동안 말없이 차를 몰았다. 차는 서울시 경계를 벗어나고 의정부를 지났다. 우리는 계속해서 북으로 달렸다. 차창 밖에는 하늘이 낮게 내려앉아 있었다.
얼마 후 우리는 동두천을 지나고 있었다. 여중생 사망 사건, 촛불 반미 시위, 미군 후방 배치 등 일련의 사건들이 떠올랐다. 동두천을 지나 계속 북으로 달리자 드디어 한탄강 다리가 나타나고 38선이라는 표지석이 나타났다. 이 지점은 1950년 6월 25일 동란이 터지기 전의 휴전선이다. 그러니까 이 지점의 북쪽은 6·25 이전까지는 북한 땅이었다. 20년 전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이 다리를 넘었다.
대구에 있는 군의학교에서 의무병 교육을 마친 그해 겨울, 나는 보충부대를 거쳐 ○○사단 의무중대로 배치되었다. 나는 12월의 매서운 한탄강 바람을 맞으며 이 다리를 넘어, 한 번도 와본 적이 없는 미지의 땅으로 실려 가고 있었다. 38선이라는 글자만 보고서도 나는 잔뜩 겁을 먹고 있었다. 마치 북한에 끌려가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전곡을 지나 내가 배치받을 부대가 있는 연천에 이르렀을 때는 이미 해가 지고 있었다. 북에서 내보내는 대남 선전 방송의 확성기 소리가 얼어붙은 겨울 하늘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아, 나는 이렇게 북한 가까이 왔구나. 확성기 소리가 이웃 마을에서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내 전방 부대 생활은 시작됐다.
한탄강 강가에서 잠시 차를 세우고 친구와 나는 차에서 내려 담배를 피우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강물은 꽤 깊어 보였고 물빛도 검푸른색을 띠고 있었다. 강 건너편에는 절벽이 우리 쪽으로 넘어질 듯이 거의 90도 각도로 서 있었다. 군대 시절 나는 여기에서 유격훈련에 참여한 적이 있다. 당시에 나는 상병 계급으로 원소속은 사단 의무중대이지만 사단 수색중대 파견 근무를 1년 가까이 하고 있었다. 그래서 유격훈련에 의무병으로 참여하였으나 직접 유격훈련을 받을 의무는 없었다. 나의 의무는 다친 병사가 생기면 응급처치하는 것이었다. 이 절벽은 하강훈련장이었다. 하강훈련이란 절벽 위와 강물 사이를 로프로 연결해 놓고 절벽 위에서 도르래를 이용해 줄을 타고 내려오다가 종착지 조교의 신호가 떨어지면 도르래를 잡은 손을 놓고 강물 속으로 떨어지는 훈련이다. 조금은 위험하고 종종 사고가 나기도 했다. 때문에, 몸이 허약하거나 혹은 심장에 문제가 있는 군인은 이 훈련은 하지 않아도 된다. 수색중대 졸병 몇 명이 하강훈련을 포기하기도 했다. 절벽 위에서 강으로 내려올 때는 애인의 이름을 큰소리로 외치게 한다. 그래야만 자신이 외치는 애인에게 의식이 집중되어 훈련의 공포심을 떨치게 된다.
“21번 올빼미 애인 있습니까?”
“예, 있습니다.”
“애인 이름 외치면서 하강한다. 하강!”
“미자야! 미자야! 미자야!”
이렇게 외치며 하강하는 훈련이다. 내가 하강할 때도 조교가 물었다.
“35번 올빼미 애인 있습니까?”
“없습니다!”
“35번 올빼미 하강!”
나는 그들 유격 조교에게 사랑하는 애인 혜영이의 이름을 말할 수 없었다. 그것은 혜영의 신성을 건드리는 일이었다. 나는 속으로만 혜영이의 이름을 부르면서 뛰어내렸다.
훈련의 의무도 없는 나는 자진해서 하강을 해보겠다고 훈련 조교에게 말하여 하강훈련을 해봤다. 나는 어려서부터 고향의 저수지에서 헤엄을 쳤기에 물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하강훈련에서 도르래에 매달려 강물로 뛰어내리는 시간은 채 10초도 되지 않는 짧은 순간이다. 하지만 도르래에 몸을 내맡기고 미끄러져 내려가는 그 짧은 순간도 제법 긴 시간처럼 느껴진다. 사고 없이 절벽에서 아래 강물에 내리고 나니 내가 마치 대단한 공수부대 대원인 것 같은 우쭐한 기분이 들었다. 한때의 젊은 치기였다. 그때는 아득하게만 느껴졌던 이 절벽도 지금 보니 별로 높아 보이지 않았다.
“저곳이 유격훈련장이었어. 하강훈련 때 저 절벽 위에서 줄에 도르래를 매달고 미끄러져 내려와 강물 속으로 빠지는 거야.”
“넌 의무중대에 있었다면서 위생병이 무슨 유격훈련을 받았다는 거야? 공갈치는 것 아니야?”
“넌 군대에 가지 않아 잘 모르는구먼. 유격훈련은 뭐 특전사만 받는 줄 아나? 내가 수색중대에 파견 나가 있을 때 일부러 한번 해본 거였어.”
친구가 별로 동조하지도 않는 자랑을 끝내고, 나는 다시 차를 몰았다. 길이 옛날보다 많이 좋아졌음을 알 수 있었다. 내가 군대 생활을 할 당시만 해도 한탄강 일대는 비포장도로였는데, 지금은 아스팔트로 잘 포장되어 있었다.
출발 한 시간 반쯤에 우리는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부대 가까이 도달하면서 나는 세월이 흘렀음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세월은 나만 변하게 한 것이 아니라 군부대와 부대 주위도 변하게 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사단 사령부를 둘러싸고 있던 철조망은 없어졌고, 대신 사람 키보다 높은 블록 담이 세워져 있었다. 그때 유일하게 하나 있었던 ‘약속다방’은 아직도 그대로 있었고, 다방 2층의 ‘승리당구장’은 PC방으로 바뀌어 있었다. 당시 숙박업소라고는 ‘서울여인숙’뿐이었는데 지금은 제법 번듯한 여관이 두 개 있었다. 단층 건물의 ‘서울여인숙’은 3층의 ‘서울장’ 모텔로 변모해 있었다.
서울여인숙. 제대 말년 병장 때의 어느 봄이었다. 20대 초반의 그때까지 나의 남성은 완전히 개화하지 못한 상태였다. 나는 제대하기 전에 내 그것을 수술하기로 결단을 내렸다. 사회에 나가서 수술하려면 돈이 들어가야 할 것이니, 제대 전에 내가 복무하고 있는 사단 의무중대에서 수술하고 나가기로 결단하였다. 나 말고도 포경수술 받는 사병들이 더러 있었다. 취침 점호가 끝나고 나는 치료실로 가서 수술대 위에 누웠다. 집도는 전입 동기인 치료실 곽병장이 맡고, 역시 치료실 소속의 나 상병과 정일병이 조수역을 했다. 바지와 팬티를 무릎 아래까지 내리고 내가 수술대 위에 올라가 눕자, 그들의 손놀림은 바빠지기 시작했다. 곽병장이 먼저 내 물건의 외피에다 마취주사를 놓았다. 처음 주사침에 찔릴 때 따끔하게 아팠을 뿐 생각보다는 아프지 않았다. 마취효과로 내 물건은 점차 통각을 잃어가고 있었다. 곽병장은 마취약이 골고루 퍼지도록 내 물건을 의료용 고무장갑을 낀 손으로 마구 주무르고 있었다. 그러자 내 물건을 둘러싸고 있는 외피가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나는 누운 채로 고개를 쳐들어 명료한 정신으로 이 성스러운 행사의 진행과정을 마치 총감독이라도 되는 것처럼 빠짐없이 살폈다.
“야야, 사령부에서 언제 주번사령이 내려올지 모르니까 빨리빨리 서둘러!”
곽병장이 수술가위로 내 물건의 껍질을 자르면서 나 상병과 정일병을 채근했다. 군의관의 입회도 없이 야간에 위생병이 행하는 포경수술은 엄연히 규정 위반이기 때문에 우리는 수술을 서둘렀다. 우리 의무중대의 주번사관 김용필 상사에게는 당연히 사전보고를 했다. 김상사는 흔쾌히 나의 성스러운 할례의식을 허락해주었다.
“알았어, 좆이라도 까고 제대를 해야지!”
불법에는 벌이 따르게 마련. 너무 급하게 서두르다 곽병장이 내 물건의 아래쪽 외피를 너무 많이 잘라버린 것이었다. 그래서 물건이 발기하면 아래쪽 외피의 길이가 짧아서 물건이 아래로 휘어져 갈고리 모양이 되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었다. 나는 곽병장에게 형편없는 돌팔이 놈이라고 욕을 해댔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잘려나간 내 물건의 껍질은 벌써 쓰레기로 버려져 썩어버린 것을 무슨 수로 복구한단 말인가! 성능 향상을 위해서 감행한 튜닝이 오히려 물건을 이상한 모양으로 구부러지게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휘어지는 모양도 모양이지만, 실제로 작업을 행할 때 성능면에서 어떤 문제가 생길지를 알 수 없어 걱정이 태산이었다. 수술 후에 내 의식은 온통 물건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나는 틈만 나면 그것을 꺼내놓고 요모조모 들여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한숨으로 며칠을 보내고 있던 토요일 오후였다. 사전 연락도 없이 혜영이가 면회를 온 것이다. 당시 혜영은 신촌에 있는 여대 3학년으로 기말시험을 끝내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나를 만나러 온 것이었다. 밝은 혜영이의 표정과는 달리 나는 속으로 약간은 걱정을 하고 있었다. 이유는 수술한 내 권총에 대한 불안감이었다. 외박증을 끊어서 부대 밖으로 나가면서도 내 발걸음은 그리 신나지 않았다.
“오빠, 오늘 뭐 먹고 싶어?”
혜영이가 내 팔에 매달리며 코맹맹이 소리로 애교를 부렸다. 나는 잠시 망설였다. 평소 같으면 삼겹살에 소주를 마시거나 동동주를 마시는 것이 당연한 절차지만, 그날은 좀 생각할 필요가 있었다. 수술부위가 아직 완전히 아물지 않아서 술을 마시는 것은 아무래도 삼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오늘은 간단히 중국집에 가자.”
우리는 중식당에 가서 삼선짜장면을 주문했다. 평소에는 중식당에서는 탕수육이나 짬뽕을 주문해서 배갈을 마셨다. 하지만 그날은 짜장면을 주문했다.
“오빠, 술은?”
“응, 어제 술을 많이 마셨더니 속이 좀 쓰리다.”
삼선짜장면만 한 그릇씩 먹고 우리는 언제나 그랬듯이 해가 지기도 전에 서울여인숙으로 갔다. 서울여인숙에는 이미 두 개의 방문 앞에 군화와 여자 신발이 놓여 있었다. 어지간히들 급했던 모양이다. 그간 혜영이와 성전을 치를 때는 거의 예외 없이 술을 마시고 전투를 했다. 그래야 알코올이 마음을 고양되게 하여 전투가 한결 극적인 기분을 주고 전투의 시간도 길어진다는 생체원리를 나는 체득했기 때문이었다. 우리의 이런 전투 스타일은 혜영이도 선호하는 방식이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맨정신으로 전투하는 수밖에 없다. 술은 마시지 않았지만, 새롭게 튜닝한 내 권총의 성능을 처음으로 실험하는 전투라 나는 한껏 부푼 마음으로 작업을 시작했다. 기말시험이 끝난 뒤라서 그런지 이날 따라 혜영의 반응도 아주 적극적이었다. 모처럼 격렬한 전투를 성공적으로 끝내고, 나는 바로 누워 천장을 쳐다보며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내게서 떨어져 일어나 휴지를 손에 들고 나의 그것을 뒤처리해주려던 혜영이가 비명을 질렀다.
“오빠! 이거 왜 이렇게 되었어! 아유, 이거 어떻게 해!”
“왜?”
나도 급히 몸을 일으켰다.
“아이고!”
내 권총이 온통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아직 덜 아문 수술 부위에서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평시에야 별 문제가 없었지만, 한껏 발기한 권총을 마구 휘둘렀으니 출혈은 필연적인 결과였다. 혜영이가 휴지로 피투성이가 된 내 권총을 닦고 핸드백에서 손수건을 꺼내 내 권총을 감싸서 묶어주었다. 그날 혜영은 숙박을 포기하고 서울로 돌아갔다.
피투성이가 된 나의 권총은 다시 보수공사를 해야 했고, 더욱 거칠어진 권총이 되었다. 그걸 두고 동료 병장들은 거칠고 갈고리처럼 휘어진 내 물건이 여자의 속을 잘 긁어줄 수 있을 거라며 오히려 부러워하기도 했다. 내 갈고리 권총은 제대하는 날까지 기회 있을 때마다 화젯거리가 되었다.
부대 주변에는 호프집, 양품점, 미용실 등이 새로 들어서 있었다. 그때만 해도 시골이었지만 지금은 지방의 작은 읍에 들어선 것 같은 분위기였다.
내가 근무했던 의무중대는 사단사령부에서 약 300미터 정도 떨어져 있다. 의무중대는 환자를 수용하는 병실이 있어, 전염성 질병 등을 고려해서 사단사령부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것이다. 의무중대는 옛날의 그 자리에 있기는 했으나 건물은 새로 지은 것이었다. 내가 있을 당시에는 퀀셋 건물이었는데 지금은 흰색 시멘트 건물로 바뀌어 있었다. 우리는 먼저 위병소로 갔다.
“어서 오십시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상병 계급장을 단 위병이 경례하며 물었다.
“아, 내가 이 부대에서 복무했는데 마침 지나가다가 한번 찾아왔습니다. 부대가 많이 달라졌네. 부대 건물이 많이 좋아졌구먼.”
“우선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위병소 안에서 내 이야기를 듣던 병장이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말했다. 나와 친구는 위병소 안으로 들어갔다. 병장은 팔에 위병 조장 완장을 두르고 있었다.
“나도 이 부대에서 복무했습니다. 수고 많습니다.”
내가 먼저 손을 내밀며 인사를 청했다.
“아, 그렇습니까. 언제 복무하셨습니까?”
두 손으로 내 손을 잡으면서 조장이 말했다.
“한 십오 년 된 것 같군요.”
“그렇습니까. 까마득한 대선배님이시군요.”
조장이 우리에게 자리를 권했다. 위병 조장과 나는 오래전부터 아는 사이처럼 곧바로 군대 이야기로 빠져들었다. 그와 나는 어쩔 수 없는 선후배였고, 전우였다. 친구는 잠자코 나와 조장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위병소를 나서면서 나는 가져간 담배 봉투를 놓고 나왔다. 위병 조장이 밖에까지 따라 나와 인사를 했다.
우리는 위병소에서 나와 의무중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부대 뒤에 있는 가게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예전에는 여기에 집이 없었는데 후에 새로 생긴 모양이었다. 가게 유리창에는 ‘라면’, ‘옥수수 동동주’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옥수수 동동주? 우리 옥수수 동동주 한번 마셔볼까?”
내가 가게를 가리키며 친구에게 동의를 구했다.
“좋으실 대로.”
친구는 좀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다. 일방적 주장에 끌려 갑자기 남의 부대에 따라왔는데 허름한 가게에 들어가 동동주나 마시자고 하는 내 주장이 군대 경험이 없는 친구에게는 좀 어이없다는 생각이 들게 한 모양이었다.
“저기 개천 건너 부대 건물 보이지? 저것이 병기중대인데, 저 병기중대 뒤에 할머니가 하는 왕대폿집이 있었지. 그 집 옥수수 동동주 맛이 끝내줬지. 이 집 동동주도 맛있는지 한번 마셔보자고.”
“추억의 술맛을 위해서는 동행이 필요한 법이지. 그래서 네가 날 데려온 것 아니냐.”
우리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가게 안에는 나무로 만든 작은 식탁이 두 개 있었고 진열장에는 식료품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우리가 들어갔는데도 아무 인기척이 없었다. 몇 번 주인을 부른 후에야 안쪽에서 5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나타났다. 우리는 라면 두 그릇과 옥수수 동동주를 주문했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행동이 굼떠 보였는데도 아주머니는 예상외로 빨리 라면 두 그릇과 동동주를 내왔다. 라면은 김치와 달걀을 넣고 끓인 것이었다. 동동주는 항아리에 담아서 나왔다.
우리는 단숨에 잔을 비웠다. 동동주는 역시 맛이 아주 좋았다.
“아주머니, 이 동동주 집에서 담근 건가요?”
잔을 놓으며 내가 묻자 아주머니가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네, 왜 맛이 없으세요?”
“아니에요. 술맛이 너무 좋아서 그래요. 병기중대 뒤에 할매집이라고 그 집 옥수수 동동주 맛이 참 좋았는데 이 술도 그 맛이네요.”
“손님들은 처음 보는 분들인데 할매집을 어떻게 아세요?”
“옛날에 군대생활을 여기서 했거든요. 그때 할매집 동동주 인기가 참 좋았지요. 그 할머니 나이가 많았었는데 아직 살아 계신지 모르겠네.”
“돌아가신 지 한 오 년 되었어요. 이 술이 그 할매집 옥수수 동동주와 꼭 같이 만든 겁니다. 우리 집 아저씨가 하도 할매집 옥수수 동동주를 좋아해서 할머니가 식당 그만둘 때 비법을 내가 물려받았거든요. 어째 맛이 괜찮지요?”
“예, 아주 좋습니다. 아, 할머니가 돌아가셨구나. 제가 이 의무중대에 복무할 때 그 할매집에 자주 갔었는데.”
“손님도 의무중대에 있었어요? 우리 집 아저씨도 의무중대에 있었는데요.”
“그래요? 아저씨 성함이 어떻게 되는데요?”
아저씨가 어쩌면 내가 아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조바심을 느끼며 물었다.
“김용필 상사입니다.”
“예에? 김용필 씨, 김용필 상사님 말입니까?”
김용필 상사. 그는 내가 의무중대에 복무하던 삼 년 동안 같이 있었던 장기복무 직업군인이었다.
“제가 의무중대에서 김 상사님 밑에 있었습니다.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우사에 갔는데 곧 돌아올 거예요.”
“우사가 어디 있습니까? 제가 뵈러 가겠습니다.”
“아니에요. 잠깐 기다리세요. 제가 불러올게요.”
아주머니가 손사래를 치고는 밖으로 나갔다.
“이거 마치 영화처럼 척척 맞아떨어지는군. 오랜만에 찾아온 부대에서 다시 옛 상사를 만나다니!”
우사가 가까이 있는지 김용필 상사, 아니 김용필 씨는 곧이어 나타났다. 나는 단번에 그를 알아보았다.
“김 상사님! 저를 알아보시겠습니까? 저 오민현 병장입니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거수경례를 했다.
“어, 오 병장! 알고말고! 참으로 오랜만이군.”
김 상사가 손을 내밀었다. 나는 공손히 두 손으로 그의 손을 잡고 허리를 굽혔다. 우리는 한동안 손을 놓지 못했다. 우리는 참으로 오랜만에 술자리에 마주 앉았다.
“전역은 언제 하셨습니까?”
“보자, 내가 제대한 지 몇 년이나 됐지? 여보, 내가 제대한 것이 구 년 됐나, 십 년 됐나?”
김 상사가 아주머니를 돌아보았다.
“올해로 십 년이잖아요.”
“전역하시고 바로 여기에서 터를 잡으셨어요?”
“그렇지, 현지 제대를 하고 부대 가까이에 주저앉은 셈이지.”
“예에, 그러셨군요. 이제 새 고향을 잡은 셈이군요.”
“고향이 어디 따로 있나, 나야 부모님의 고향을 갈 수 없으니….”
김용필 상사는 10년 전에 퇴역하고 부대 주위에 아예 터를 잡은 것이었다. 그는 6·25 때 부모와 함께 월남했다가, 자라서 하사관으로 군대와 인연을 맺은 사람이었다. 고향이 이북이라 북한과 가깝고 마지막 군대생활을 한, 여기 연천의 의무중대 인근에다 터를 잡은 것이었다.
“축산업을 하시는 모양이지요?”
“뭐, 축산업이라고 할 것까지야 있나. 겨우 젖소 몇 마리 키우는 것 가지고.”
이야기 때문에 미처 시키지 못한 사이에 아주머니가 새로 술을 한 항아리 내오면서 그냥 서비스로 드리는 것이라고 했다. 남편의 옛 부하가 찾아왔다고 그녀가 보인 예의인 셈이었다.
“그래, 오 병장, 웬일로 여기까지? 설마 이 김 상사를 보러 온 건 아니겠지?”
김 상사가 웃으면서 농담을 했다.
“김 상사님이 여기 계시리라고는 전혀 생각 못했어요. 그런데 어제 갑자기 여기 와 보고 싶어지더군요.”
“서로 텔레파시가 통한 것이 아니겠나.”
잠자코 김 상사와 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친구가 둘의 대화에 참여했다. 그제야 내가 김 상사에게 친구를 인사시키지 않은 것을 깨닫고 급히 김 상사에게 친구를 소개했다.
“김 상사님, 이 친구 서지원이라고, 아주 잘나가는 소설갑니다.”
“그래요, 유명한 소설가가 우리 집에 다 오시다니, 영광입니다.”
우리 셋은 각자의 잔을 비우고는 잔을 돌리며 본격적으로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제대 후 복학하여 대학을 마치고 몇 개의 회사를 옮겨 다니다가 지금은 화학회사에 다니는 나의 신상도 이야기했다. 그러나 요즘 회사 일이 어렵다는 이야기는 굳이 하지 않았다.
다시 동동주가 바닥이 나고 새 항아리가 들어오는 사이 신상 안부는 대강 나눈 셈이었다. 그러고 나니 다음 화제는 자연스럽게 군대 시절로 거슬러 올라갔다. 이제야말로 본격적인 추억의 술자리였다.
“김 상사님, 제가 있을 때 중대장님이셨던 배태욱 대위님은 아직 군에 계신가요? 그분도 이제는 전역했겠지요?”
김 상사는 내 물음에 잠시 말이 없었다. 그의 태도로 보아 중대장의 소식을 전혀 모르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얼마 뒤에 김 상사가 입을 열었다.
“배태욱! 그 친구, 죽었어!”
“예에? 중대장님이 죽었다니요. 나이도 김 상사님보다 적은데….”
“미아리에서 교통사고로 죽어버렸어.”
“저런! 그것 참 안 되었네요.”
옛 군대 시절로 돌아가 있던 나는 중대장의 사고사 소식에 적잖게 놀랐다. 그러나 곧바로 터져 나온 김 상사의 일갈은 나를 더욱 놀라게 했다.
“안 되기는 뭐가 안 돼. 그 친구, 본마누라 버리고 술집 여자하고 붙어서 까불다가 둘이 함께 교통사고로 황천객이 됐지.”
“아이고, 어쩌다 그런 사고를,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군요.”
나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김 상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안타깝기는 뭐가 안타까워, 내게 그렇게 못살게 굴더니 결국 그 꼴이 됐지. 필사귀정이지 뭐!”
흥분해서 그랬는지 아니면 잘못 알고 있는지 김 상사는 ‘사필귀정’을 ‘필사귀정’이라고 했다. 오랜만에 옛 부하를 만나 군대 시절을 추억하면서 마침 미운 상관의 소식을 전하게 된 그로서는 흥분할 만도 했으리라. 죽은 사람을 두고 그가 한 말이 과하다 하더라도 나는 충분히 이해할 만했다. 중대장 배 대위는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김 상사를 배려하지 않고 사병들 앞에서도 함부로 대하곤 했었다. 나이 어린 장교에게 시달리다 보니 김 상사로서는 배 대위에게 감정의 앙금이 쌓였을 수도 있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세월이 많이 흘렀고 또한 상대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니 미워할 수도 없지만, 나도 한때는 배태욱 중대장에게 상당히 서운한 감정을 품고 있었다.
병장 때였다. 그해에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대강 예상은 했지만, 중대장이 너무나 노골적으로 여당 후보를 찍도록 유도하는 것에 나는 상당한 저항감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 중대원을 대하는 중대장의 말투부터가 여느 때보다 달라졌다. 평소에는 “야, 오 병장!” 하고 부르던 것을 “어이! 오 병장!” 하고 한결 부드럽게 부르는 것이었다. 그리고 중대장은 정훈교육이라는 명분으로 여당 후보가 당선되어야 한다는 것을 드러내 놓고 선전하였다. 중대장은 나름대로 당위성에 열을 올리고 있었지만, 내가 듣기에는 전혀 설득력이 없었고 횡설수설에 불과했다. 그러고 난 뒤에는 먹을 것이 나왔다. 막걸리 파티가 벌어지기도 하고 빵이나 과일이 나오기도 했다. 물론 그 값은 중대장의 개인 호주머니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었고, 그런 일은 우리 의무중대뿐만 아니라 다른 부대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굳이 고마워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군인들은 부재자 투표를 하는데, 이 또한 상식에서 벗어난 식으로 이루어졌다. 주민등록지에서 투표용지가 우송되어 오면 부대 내에서 투표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그 투표 진행이 여간 엉터리가 아니었다.
그날도 나는 병실에서 입원 환자들을 관리하고 있었는데 부재자 투표용지가 도착했으니 투표를 하라는 연락이 중대본부로부터 왔다. 내 비록 푸른 제복을 입은 육군 사병이지만 드디어 당당히 내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순간이 온 것이다. 그것도 처음으로 행하는 투표였다. 하여 나는 일종의 사명감마저 느끼며 중대본부로 갔다. 기표소는 중대장실 안쪽에 커튼을 드리워 만들어져 있었다. 나는 중대장실로 들어갔다. 중대장은 책상 위에 주간지를 펴놓고 있었다.
“충성! 병장 오민현, 투표하려고 왔습니다.”
“응, 오 병장, 투표용지가 왔어.”
중대장은 부드러운 목소리에 미소까지 띠며 말했다. 중대장 책상 옆에 앉아 있던 서무계 이진우 병장이 투표용지를 내밀었다. 나는 투표용지를 들고 가벼운 흥분마저 느끼며 중대장실 뒤쪽 구석에 있는 기표소로 걸어갔다. 바로 그때 등 뒤에서 중대장이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어이, 오 병장!”
“예, 중대장님!”
“이리 오게.”
나는 되돌아가 중대장 책상 앞에 서서 다음 명령을 기다렸다.
“그냥 여기서 찍어!”
커튼으로 가려서 만든 기표소에서 투표하지 말고 그냥 중대장 책상 위에서 중대장이 보는 앞에서 기표하라는 것이었다. 기표소는 그냥 폼으로 설치한 것이었다.
서무계 이진우 병장이 인주와 붓두껍을 나에게 내밀었다. 중대장 책상 위에서 투표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중대장의 책상 위에 투표용지를 펴놓았다. 그러고는 붓두껍을 내가 마음먹은 야당 후보의 이름 밑으로 가져갔다. 그때 짐짓 주간지를 보는 척하던 중대장이 한 손을 내저으며 자리에서 급히 일어섰다.
“어, 어, 오 병장! 누구 꽂을 대 부러뜨리려고 이래!”
여기서 머뭇거리면 곤란하다. 나는 얼른 내가 찍을 야당 후보에 붓두껍을 눌러버렸다. 그 후에 나는 한동안 어려움을 당했다. 내가 특별히 범법한 것도 아니고 단지 정당한 투표권을 행사한 것뿐인데 중대장은 내게 여러모로 불이익을 주었다.
그 뒤 석 달 동안 나의 외출·외박 신청은 번번이 거절되었다. 지금에야 웃으면서 이야기하지만, 당시의 나로서는 상당히 심각했다. 자유, 정의, 진리, 이런 가치를 가슴에 안고 있던 내 불타는 젊은 시절의 일이었다.
투표라면 또 한 가지 사건이 있다. 내가 고참 병장일 때의 일이었다. 군대에서의 내무반장은 중대장이 임명하는 것이 당연한 철칙이다. 그런데도 우리 중대에서 사상 처음으로 내무반장을 중대원들이 직접 투표해서 뽑자는 의견이 나왔다. 그런 의견이 나온 것은 아마도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얼마 되지 아니한 시기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군에서는 의무병과 사병들의 교육 수준이 다른 병과에 비해서 대체로 높다. 효율적으로 병력을 운용하기 위해서 교육 수준이 높은 징집 대상자에게 의무 병과로 부여하는 관례가 있었다. 이렇게 의무 병과를 부여받은 입영자는 훈련소에서 기본 훈련이 끝나면 대구에 있는 군의학교에서 의무교육을 받는다. 그런 뒤에 기성 부대로 배치받게 된다. 우리 사단 의무중대원들의 약 삼분의 일 정도가 대학물을 먹은 사람들이었다. 이런 중대원들이 내무반장을 직접선거로 뽑자고 한 것이다. 결국, 중대장과 부관이 우리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내무반장을 중대원들의 직접투표로 뽑기로 했다. 하지만 스스로 내무반장을 하겠다고 자진해서 출마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군대에서의 내무반장은 책임이 많고, 마음 놓고 고참의 특권으로 놀러 다닐 틈도 없다. 이런 사정 때문에 자진해서 내무반장을 하겠다는 고참이 한 명도 없었다.
그래서 중대원 각자가 내무반장에 적임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이름을 써내는 방식으로 투표를 해서 내무반장을 뽑기로 한 것이다. 투표의 진행은 부관이 했다. 위병소 보초 한 명만 남기고 전 중대원들이 연병장에 모였다. 부관 맹 중위가 명함 크기로 종이를 잘라서 한 장씩 나눠 주고는 거기에다 내무반장으로 선출할 사람의 이름을 적도록 했다. 투표가 끝나자 부관이 이름을 적은 메모용지를 수거해서 중대본부 들어갔다. 그때 몇몇 고참 병장들이 나를 보고 조금만 있으면 내무반장에 당선될 것이라고 농담을 하였다. 나는 긴장했다. 정말로 내가 뽑힐 위험이 많다는 것을 나도 알고 있었다. 중대원들이 직접 내무반장을 뽑으면 무서운 고참보다 덜 무서운 고참을 뽑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주로 나와 김을생 병장이 내무반장 물망에 올라 있었다. 김 병장은 나와 군의학교 교육 동기면서 사단 의무중대 전입 동기다. 그는 체격이 당당하고 좀 거친 성격의 소유자다. 상대적으로 부드러운 내가 뽑힐 가능성이 높았다. 졸병들은 당연히 덜 무서운 내무반장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걱정이 되었다. 나는 불안했다. 제대 말년에 고참의 특권으로 열외를 하면서 복학을 위해 실력이 취약한 영어 공부나 하면서 좀 편안하게 보내고 싶은 것이 내 속셈이었다. 그런데 만약 내무반장에 뽑히면 이런 계획에 차질이 생기게 된다. 그래서 나는 내가 내무반장에 뽑히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었다. 잠시 후에 부관 맹 중위가 다시 연병장에 나왔다.
“자, 그러면 지금부터 내무반장 투표 결과를 발표하겠다. 김을생 23표, 오민현 22표, 조용길 5표, 강승모 3표, 이태길 1표, 이로써 김을생 병장이 내무반장에 당선됐다.”
부관이 김을생 병장의 당선을 선포하자 중대원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자, 자, 조용히! 김을생 병장! 빨리 나와 당선 인사말을 해!”
술렁거림을 잠재우기 위해서 부관은 서둘러 김을생 병장을 불러냈다. 김을생 병장이 기다렸다는 듯이 성큼성큼 걸어 나가 중대원들 앞에 서서 의욕에 찬 당선 인사말을 했다. 그의 태도로 보아서 그는 무척이나 내무반장을 하고 싶었던 것 같았다. 해산하면서 투표 결과가 이상하다고 중대원들이 술렁거렸다. 특히 이태길 병장이 흥분했다. 그 역시 김을생 병장과 마찬가지로 나와 같이 군의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의무중대 전입도 함께한 사이다. 숙덕거리면서 중대원들이 해산하고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도 기분이 좀 나빴다. 투표 결과도 이상했지만, 김을생 병장이 당선 소감을 발표하는 태도에 기분이 상했다. 나는 병실로 돌아가 찜찜한 기분을 떨치고 내 본연의 병실 임무를 보고 있었다. 해산한 지 10여 분 지나서 이태길 병장이 상기된 얼굴을 하고 병실로 뛰어 들어와 내 앞에 메모 종이를 펼치며 흥분했다. 그것은 좀 전에 부관이 투표 결과를 발표했던 메모였다. 이태길 병장이 중대본부 부관 책상 옆의 휴지통을 뒤져서 부관이 버린 메모를 가져온 것이었다. 거기에는 ‘오민현 29, 김을생 16’을 긋고 ‘오민현 22, 김을생 23’이라고 고쳐 쓴 글자가 적혀 있었다. 이태길 병장은 이 증거를 가지고 사단사령부의 감찰부에 고발하겠다고 흥분했다. 나는 이태길 병장을 만류하느라고 진땀을 흘렸다. 내가 떨어졌기 때문에 복학을 대비해 틈틈이 영어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는 나의 내심은 말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태길, 김을생 둘 다 고졸 학력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태길이를 말리면서도 부관의 행위에 기분 나빴던 마음이 조금 풀리기는 했다. 이런 내무반장 선거 사건이 있고 석 달쯤 지나, 내무반장 김을생 병장은 구타 사건으로 두 주간 사단 헌병대 영창에 수감되는 일이 발생했다. 이렇게 되자 배태욱 중대장이 나보고 내무반장을 맡으라고 했다. 나는 내가 내무반장을 할 능력이 없다고 말했다. 나는 내무반장직을 회피하기 위해서 약간의 머리를 굴렸다. 진심을 보이기 위하여 나는 초등학교에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책임자의 자리에 있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내무반장을 맡을 수 없다고 했다. 나는 내 말에 설득력을 부여하기 위하여 약간의 트릭을 썼다. 국민학교 때 미화반 부반장을 한 것이 유일한 간부직이었다고 했다. 그런 말을 쉽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국민학교 5학년 때 실제로 미화반장을 했었고, 부반장은 윤순기라는 여자애가 한 일이 있기 때문이었는데, 반장을 부반장으로 급을 낮추어 말한 것이었다. 나는 이렇게 꾸며서 말하는 내 머리가 참 좋다는 자부심까지 느꼈다. 윤순기는 나보다 나이가 한 살 많았고 얼굴이 동글납작했는데, 누나도 여동생도 없는 나는 순기를 조금 좋아했었다. 하여튼 그렇게 머리를 써가며 내무반장 자리를 피했다. 그러나 중대장도 보통이 아니었다. 연 3일간을 불러 설득해도 내가 무능력과 무경험을 강조하면서 고사하자, 이번에는 김용필 상사까지 동원했다. 김용필 상사는 자신의 체면을 보아서라도 내무반장을 맡으라고 했다. 김용필 상사의 진심 어린 설득에 나는 결국 항복했다.
“능력이 없지만,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진작 그럴 것이지!”
중대장이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이렇게 맡은 내무반장을 제대 일주일 전까지 해야 했다. 그러느라 나는 제대 말년의 자유를 제대로 누리지도 못했고, 취약한 영어 실력을 보완할 시간도 없었다.
“사실 저도 배태욱 중대장님께 서운한 감정이 그때는 조금 있었습니다마는 그 양반도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니 좋지 않은 기억들은 이제 털어버리세요.”
“오 병장이 중대장 소식을 물으니 내가 말한 것이네.”
김 상사도 자신의 언사가 조금은 마음에 걸리는 눈치였다. 잠시 썰렁해진 술자리의 분위기를 돌리기 위해 나는 과거 군대에서 현실의 문제로 화제를 돌렸다.
“요즘 축산은 좀 어떠세요?”
“뭐, 요새 어렵지 않은 일이 어디 있나. 젖소도 영 재미가 없어. 사료 가격이 무섭게 오르고 있어 키우기가 점점 어려워. 그렇다고 소를 내다 팔 수도 없어. 팔려고 해도 누구 살 사람이 있어야지. 제값 받고 팔 수가 없으니 그냥 키우는 수밖에 도리가 없지 뭐.”
어디 가나 어려운 현실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것은 오랜만에 우연히 해후한 김 상사나 나나 마찬가지인 듯 보였다. 그때 젊은 부부가 남자아이의 손을 잡고 가게로 들어섰다. 아주머니가 반갑게 그들을 맞았다.
“아이고, 너희들 왔구나. 바쁠 텐데 올 시간이 있었나?”
“아버지 회갑 준비에 의논드릴 일도 있고….”
부부는 김 상사 앞에 인사를 올리고 아주머니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들어가고 나자 김 상사가 설명했다.
“아들, 며느리, 손자야. 서울에서 살고 있지.”
“자녀들은 다 결혼시키셨어요?”
“딸 둘도 다 시집보냈네.”
나는 문득 아까 젊은이가 한 말이 떠올랐다. 아버지 회갑. 그렇다면 김 상사가 벌써 회갑 나이가 되었단 말인가.
“회갑 준비라니, 김 상사님, 벌써 그렇게 되셨습니까?”
“오 병장, 자네 나이를 꼽아봐.”
“하긴 저도 이제 마흔이 넘었으니 김 상사님께서 회갑을 맞으실 때도 되셨군요. 회갑은 언제입니까?”
“왜 자네가 내 회갑에 오기라도 할 텐가?”
“아, 당연히 가야지요.”
“괜스레 무리하지 말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김 상사는 두 달 뒤의 회갑 날짜와 장소를 알려 주었다. 그는 나의 참석을 기대하는 눈치였다. 월남한 사람으로서 일가친척이 거의 없으리라는 것을 생각하고 나는 꼭 참석하겠다고 마음먹었다. 내가 김 상사의 회갑에 참석하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단순히 술기운 탓만은 아니었다.
“자, 우리는 이제 일어서지. 자제분도 오셨으니.”
잠자코 둘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친구가 말했다. 그때야 나는 가져온 카메라가 생각났다. 그리고 웬일인지 이 옛 상사의 사진을 꼭 한 장 찍어두고 싶었다. 우리는 밖으로 나갔다. 마침 집 앞으로 파란 보리밭이 펼쳐져 있었다. 나는 차에서 니콘 카메라를 들고 나와 김 상사를 보리밭에 세워 놓고 사진을 몇 장 찍은 뒤 친구에게 카메라를 넘기고 김 상사 옆에 섰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어깨동무하고 사진기를 노려보았다. 상사와 병장의 어깨동무. 현역 시절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세월이 우리 두 사람을 어깨동무하게 했던 것이리라.
김 상사와 나는 조금 취해 있었다. 김 상사와 아쉬운 작별 인사를 나눌 때였다. 김 상사가 느닷없이 나에게 물었다.
“오 병장, 자네 물건 지금도 갈고리야?”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미처 알아듣지 못했던 나는 다음 순간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아! 하하하, 예, 아직 갈고립니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술을 적게 마신 친구가 운전대를 잡은 채 말했다.
“어이 오 병장, 김 상사의 필사귀정은 정말 압권이야. 그 도치법이 기가 막히거든.”
친구의 말을 들으며, 나는 왠지 오늘의 외출이야말로 바로 사필귀정이라고 생각했다. 부대를 갔다 온 다음 날부터 나는 또 회사 일에 내몰렸다. 여전히 판매와 수금은 부진하고, 업계의 경기는 계속 내리막이었다. 나는 늪에서 빠져나오려고 안간힘을 썼다. 부지런히 거래처를 방문하고 부하들을 독려했다. 그런 와중에 김 상사의 회갑은 지나가 버렸다. 미안한 마음으로 서랍 속에서 꺼낸 사진 속에서 김 상사는 보리밭을 배경으로 나와 어깨동무를 한 채 불그레한 얼굴로 환하게 웃고 있다. 우리는 변함없는 상사와 병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