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11월 68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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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에 있어 문학은 자신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새로운 깨달음에 자아를 찾아가는 순수 정화 그 자체였다.
지나간 30대 후반쯤 젊은 날들을 병마와 맞서야 하는 홀로의 시간이 있었다. 십여 년 이상 고등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일이 천직이라 생각하며 그 말에 아무 불만 없이 만족하게 살아오던 중 의외의 작은 병치레에서 새로운 큰 병을 만나게 되었다. 병원과 집을 왕래해 가면서 때로는 입원도 하는 일이 잦았다.
그 지루한 시간 속에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를 고민했다. 드디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글 쓰는 일이라는 생각에 도달하게 되었다. 매일매일 몸의 상태를 기록해야 하는 일로 글쓰기가 익숙해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물론 문학으로서의 쓰기는 아니라 해도 펜과 종이가 늘 옆에 있었다. 병원에 갈 때마다 그동안의 기록을 의사에게 보여야 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차츰 글을 쓰는 일이 나 자신에게 말을 건네는 일상이 되어 버렸다.
그러던 1980년도 라디오를 통해 마로니에 백일장 소식을 듣게 되었다. 전국 주부 백일장, 한국 여성 문인회 주최란 말에 호기심이 생기기도 했다. 여성들만 모여 글을 쓰는 단체가 있다는 사실도 처음 알게 되었다.
교편 생활을 하는 동안 국어 시간에 교과서에 나와 있는 시와 산문들을 가르치면서 가끔 습작을 했던 일 외에는 제대로 글 쓰는 일을 해보지 않았다.
또한 나는 시인이나 작가가 되겠다는 생각도 해본 적이 솔직히 없었다. 나는 이미 교사를 천직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 일에 만족하고 안주하며 생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랜 시간을 병원에 다니면서 불현듯 글을 써 보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대학로에 있는 한국문예진흥원 2층 강당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다. 백일장은 중학교 시절 간혹 학교에서 치렀던 일밖에는 없던 내가 전국 백일장에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그때 몇 개의 제목이 있었는데 나는 ‘거울’이란 제목을 골라 시를 쓰기 시작했다. ‘거울’을 통한 내 안의 나를 찾는 시 한 편을 제출하고는 오후 발표도 보지 못하고 집에 돌아와야 했다. 이미 나는 극도로 지쳐 있었다. 결과 역시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틀 후 당선 통지서가 왔다. 발표할 때 본인이 없어 집으로 보낸 것이다. 그때의 흥분과 설렘은 나를 마치 시인이나 된 것처럼 기쁘게 했다.
그때부터 당선자들이 모여 생활 동인회를 결성했고 한 달에 한 번씩 을지로 입구 ‘호수 그릴’이라는 경양식집에 모여 원로 선생님들의 강의를 들으며 문학 공부에 열공했다. 시작법, 수필 작법, 소설 작법 등 다양한 장르의 강의를 들었으며 때로는 문단 동향에 호기심으로 이야기를 듣는 문단 초보자의 걸음마를 떼기 시작했다. 동인들은 나를 제외하고는 거의 오랫동안 글을 써 온 사람들이었다. 다만 등단만 남은 사람들이었다. 말 그대로 그들은 1년이 되자 시인, 수필가, 소설가로 각자의 장르에 등단하여 정식 문인의 명찰을 달고 활동하기 시작했다. 동인들 중에 등단을 못한 사람은 나 한 사람뿐이었다.
당시에는 권위 있는 문예지에 가작까지 오르면 등단이 되는 일이 많았다. 나는 실력도 부족한 까닭도 있었지만 등단은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하고 싶은 욕망 때문에 5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조금 변명을 하자면 병원 다니느라 무척 힘들었다. 가족들은 힘들게 글 쓰는 나를 만류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기에서 멈추고 싶지 않았다.
드디어 1987년 『예술계』에 신인상 수상으로 문단에 들어서게 되었다. 얼마나 갈망했던 일이었는지 그 감격은 말할 수 없이 컸다. 등단 시 한 편을 소개한다.
아침
눈을 뜨게 한
바다의 목소리로
이야기를 듣는다
한 올의 걸침도
거부한 채
알몸의 태양을 안는다
하얀 빛나는 밤을
갈망으로 하여
바다의 노예가 되리
운명의 날과 올을 짜는
낮 동안의 바다는
숨찬 몸부림
아아! 물거품으로 솟아오르는 허무
이끼 위에 누운 요정처럼
몸살 앓는
순결만이
살을 헤집는 아픔으로 산화한다
—「여름바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때 먼저 문단에 들어선 동인들보다 나는 많은 작품을 썼다. 물론 5년이란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시를 썼기 때문이리라. 하루하루 거르지 않고 습작해 왔던 시간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고 황금찬 스승님의 격려가 컸기 때문이다. 시인이 시를 쓰지 않으면 죽은 것과 같다는 말씀이다. 그러기에 적어도 시인이라면 2∼3년에 한 권씩 시집을 내는 시인이 부지런한 시인일 뿐 아니라 진정한 시인이라고 늘 말씀을 하셨다.
나는 그 말씀을 새겼다. 점차 건강도 회복되기 시작했다. 비록 등단은 늦었지만 등단 2년 후 첫 시집 『창가에 심는 그리움의 나무』가 세상에 얼굴을 내밀게 되었다. 남편은 시 쓰기를 시작하면서 건강이 회복되어 간다고 믿으면서 무척 기뻐했다. 가족 모두의 응원이 나에겐 천군만마였다.
남편은 첫 출판을 기념하여 자기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을 주었다. 1989년 프레스센터 19층 홀에서 출판기념회를 열어주었다. 8월의 한가운데 아침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지난밤 설렘으로 꼬박 새웠던 일이 지금도 생생하다. 문인 손님보다는 남편 친구들이 거의 출판기념회장을 채워 주었던 일, 햇내기 문인이 된 아내를 위한 그의 사려 깊은 마음이 지금도 고맙다.
문단 손님으로는 스승이셨던 황금찬 선생님, 조경희 한국예총 회장님 외 원로 몇 분과 동인들이 축하해 주셨다. 누구나 그렇듯이 ‘첫’이란 말엔 시간을 너머 전율과 흥분이 오래도록 남아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미 문인으로 이름을 내놓고 활동하는 친구들이 내 부족한 시를 낭송해 줄 때의 그 가슴 두근거리던 순간들이 자꾸 떠오른다. 사실 시인이란 이름 앞에 부끄러움이 더 컸던 나에게도 점차 그 이름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시인이란 이름의 뿌리가 조금씩 자라기 시작했다. 그 후 많은 문인들과의 교류 속에 문학은 키를 세우고 있었다.
내 문학은 덧살로 생겨난 시간들의 흔적이요, 지나간 풍경이 서로 몸비벼 마주 보며 빛나는 불빛이다. 뜸 잘 든 기억의 항아리에 햇빛 잦아들어 이미 멀어져 간 깃발로 손 흔들며 서 있는 하나님의 시간 위에 항시 처음이 되는 그리움의 낙관들.
1992년 한국문인협회에서 주관하는 윤동주문학상(우수상)의 영광도 얻게 되었다. 심사 당시 대학로 문협 사무실에서 5명의 후보자를 놓고 심사를 할 때 많은 문인들이 문협 건물 지하 카페에서 심사 결과를 3시간 이상 기다렸다는 일화를 들었다. 그 후 여러 문학상을 받았지만 나는 이 문학상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며 아끼고 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나무들이 나이테를 늘려 가듯이 내 글쓰기의 지평도 영역을 넓히는 일에 힘써 왔다. 시력 40여 년이 다가오는 동안 시집 16권, 영역 시집, 일역 시집 각 1권씩과 시낭송 이론서 2권 등, 이외에 시선집을 엮어낼 수 있었던 것은 내 안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 말 ‘부지런한 시인이 되고 싶다’라는 생각이 현재진행형이라는 것과 문학은 내 삶의 구원자라는 말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러버크가 말했듯이 ‘태양이 꽃을 물들이듯이 예술은 인생을 물들인다’라는 말을 가슴에 새기며 등단 이후 늘 이 길을 걸어오고 있기 때문이다.
‘등단’이란 말은 아직도 잠잠하던 가슴을 다시 출렁이게 하는 말이다. 내 생 마지막까지 되새김질하여도 결코 권태롭지 않은 말. 참으로 나를 끝까지 찾아가는 신비로움을 건네주며 그 말 영원히 지워지지 않도록 몸에 낙관을 찍어두는 일이 등단이란 말이 아닐까 생각한다.
오늘 하루도 가슴이 설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