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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수필가가 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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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가·한국문인협회 고문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10월 68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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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수필 창작과 이론12

 

우리는 더러 어떤 훌륭한 소설이나 시, 또는 수필 등과 같은 글을 읽게 되면 ‘나도 저렇게 좋은 글을 쓸 수 없을까, 나도 이 작가처럼 훌륭한 작가가 되어 수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안겨 줄 수 있는, 그런 멋지고 좋은 글을 쓸 수는 없을까’ 또는 ‘나도 수필가가 되어 정말 멋지고 수필다운 수필을 써 보았으면…’ 하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또한 ‘청년기에는 누구나 시인이며 작가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청년기에는 누구나 감정이 풍부하고 문학에 관심이 많으며, 문학 서적을 통해 감동과 공감을 받는 수가 많다. 또한 뜨겁고 격렬한 ‘문학의 열병’을 앓는 수도 적지 않으며, 작가가 되기 위한 꿈을 불태우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면서도 많은 사람이 ‘작가는 아무나 될 수 없다. 천부적인 재능과 글에 대한 소질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난 아무래도 그러한 재능이나 소질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난 작가가 되기 틀렸다’고 생각하는 수가 있다. ‘나는 작가가 되고 싶고 문학에 대한 재능이나 글재주는 어느 정도 있는 것 같지만, 과연 내가 그토록 어렵다는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작가가 될 수 있을까? 설령 그 어려운 관문을 통과해서 작가가 된다고 해도 내 인생을 과연 글 쓰는 일에만 바칠 수 있을까? 뼈를 깎고 피를 말리는 일이 글 쓰는 일이라는데, 그러면서도 글만 써 가지고는 먹고 살기 힘든 것이 우리네 현실이라는데 그 정신적·육체적·경제적 고통과 어려움을 극복하고 과연 작가로서의 길을 훌륭히 갈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며 ‘작가의 길’에 대한 불안함과 두려움 같은 것을 갖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사실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글에 대한 소질이나 천부적인 재능이 필요하다. 뿐만 아니라 많은 양의 독서와 꾸준한 습작, 많은 사고와 수양, 각성과 고뇌, 다양한 경험과 풍부한 지식, 깊은 사색과 예리한 관찰력, 사물을 올바르고 정확하게 볼 줄 아는 능력, 훌륭한 인품과 원만한 인간관계, 끈질긴 인내와 집념 등 많은 것들이 요구된다.
또한 정식으로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수많은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신문의 신춘문예나 잡지의 신인상 모집 등에 응모하여 당당히 당선되거나 신인 추천 등의 방법을 거쳐야 한다. 요즈음에는 기존의 이러한 형식과 틀을 거부하고 자신의 책을 직접 발간하고 ‘작가의 길’로 나서는 경우도 있으나, 정식으로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신춘문예나 신인상 모집 또는 신인 추천 등을 통해 권위 있는 기관이나 심사위원들의 평가와 인정을 거쳐야 하는 것이 관례이다.
그만큼 작가가 되기 위한 관문은 좁고도 어려운 것이다. 더욱이 이 어려운 관문을 뚫고 정식으로 작가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전문적인 작가의 길’은 참으로 어렵고 갖가지 갈등과 고뇌, 고통이 따르는 것이 현실이다. 문학이 소외되고 문인이 우대받지 못하는 우리나라의 암울한 문학 현실 속에서 작가가 겪는 정신적·육체적·경제적 고통과 어려움이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작가가 되고 난 후에 계속해서 좋은 글을 쓰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또한 애써 좋은 글을 쓰더라도 그것을 발표할 지면이 부족하거나 독자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외면당하는 수도 적지 않다.
이같이 어렵고 고통스러운 현실로 인해 어렵게 작가가 되고 나서도 작가로서의 길을 계속 걷지 못하고 중도에 포기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 같은 예는 심사위원들의 극찬을 받으며 등단한 작가가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스스로 작가의 길을 포기하고 전혀 다른 분야에서 일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는 것이다.
또 작가의 길을 계속 가고 있는 사람 중에도 다른 일은 하지 않고 전문적으로 글만 쓰는 사람은 드물다. 대개는 다른 직업을 갖고 일하면서 더러 자신들의 작품을 발표하는 것이 보통이다. 글만 써서 생활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문학에 대한 뜨거운 열의와 의욕 속에서 작가로서의 길을 가다가 이에 대한 고통과 어려움, 갈등과 회의 등으로 고민하고 괴로워하다가 마침내는 붓을 꺾고 다시는 글을 쓰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이처럼 어렵고 고통스러운 것이 바로 작가의 길인데도, 또 이 같은 현실은 누구나 잘 아는 것이면서도 아직도 작가가 되겠다는 사람들은 많다. 신춘문예 등에 응모하는 사람들의 수만 보더라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물론 이것은 문학적 토양이 척박하고 문학이 소외된 현실 속에서 그나마 다행스럽고 기쁜 일이다. 또한 그들의 뜨거운 문학적 열의와 문학에 대한 깊은 애정은 실로 고귀하고도 값진 것이다.
작가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꼭 갖추어야 하는 건 양심과 도덕, 그리고 진실과 올바른 가치관이다. 이런 것들을 충분히 갖추고 있어야만 비로소 작가로서의 기본적인 자격 요건을 갖추는 셈이다.
설령 글재주가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이러한 것들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면 그는 작가로서의 기본 요건 미달이다. 또한 그런 사람이 쓴 글은 잠시 독자들의 마음을 현혹시킬 수 있을지는 몰라도 독자들에게 진정한 감동을 오래 안겨 줄 수는 없다.
따라서 작가, 또는 수필가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의 마음을 바르고 깨끗하게 갖추고, 진실한 마음으로 글을 써야 한다. 그래야만 독자들에게 진정한 감동을 안겨 줄 수 있는 글을 쓸 수 있다. 아울러 작가로서의 사명감과 역할이 무엇인지를 깊이 인식하고, 그에 따른 어떠한 고통이나 역경도 극복할 수 있는, 강인한 의지와 신념을 가져야 한다.
그런 다음 많은 독서와 많은 사고, 꾸준한 습작과 끊임없는 노력 등을 계속해야만 비로소 작가다운 작가가 될 수 있고, 작가의 길에 따르는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으며, 작가로서의 생명 또한 길다. 또 그렇게 해야만 좋은 작품들을 많이 남길 수 있다. 비록 타고난 재능이나 작가로서의 소질이 좀 부족하더라도 이것은 끊임없는 노력으로써 충분히 극복될 수 있는 것이다.

 

1.독서
보다 좋은 수필, 보다 훌륭한 수필을 쓰기 위해서는 많은 습작과 깊은 상념, 다양한 체험과 폭넓은 사고, 또는 천부적인 문학적 소질이나 글재주 같은 것도 필요하겠지만, 기본적으로는 많은 독서가 필요하다. 다양한고 깊이 있는 독서는 훌륭한 수필을 창작하는 데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기본 요건이다.
비단 수필을 쓰는 것뿐 아니라 소설이나 시, 희곡 등 다른 문학 장르의 글을 쓰는 데도 마찬가지이다. 굳이 이러한 전문적인 글을 쓰지 않더라도 우리 인간의 삶에 있어서 독서는 필요하고도 중요한 것이다.
독서를 통해 우리의 지식과 지혜의 영역이 넓혀지고, 우리의 영혼은 보다 성숙하며 풍요로워진다. 또한 우리의 삶을 보다 가치 있고 올바른 길로 가도록 인도해 준다. 그야말로 독서는 우리의 삶과 인생에 있어서 훌륭한 길잡이 역할을 해 주고, 영혼을 밝혀주는 ‘등불’과 같다. 나아가 선 삶의 희망과 보람을 안겨 주고 독서를 통한 깨달음과 즐거움까지 선사한다.
특히 좋은 수필, 훌륭한 수필을 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많은 독서부터 할 필요가 있다. 비단 좋은 수필 작품들뿐만 아니라 소설이나 시, 희곡, 철학, 역사, 종교 등 여러 분야의 글을 다양하게 읽고, 또한 깊이 있게 읽어야 한다.
그래야만 지식과 지혜가 넓어지고, 사고가 깊고 다양해지며, 영혼이 보다 성숙하고 풍요로워져 보다 좋은 수필, 훌륭한 수필을 쓸 수 있게 된다. 특히 수필을 처음 쓰는 초보자들은 좋은 수필 작품들을 많이 읽음으로써 좋은 수필이란 것이 어떤 것인지, 또 어떻게 수필을 써야 할 것인지를 깨닫고 배우게 된다. 이와 함께 수필 창작에 관한 이론서나 연구 논문, 수필 문학에 관한 여러 가지 평론이나 발표문도 많이 읽으며 깊이 있게 공부하는 자세가 요구된다.
또한 이 같은 일을 꾸준히 계속해야만 자유자재로 붓을 휘두를 수 있으며, 훌륭한 수필 작품을 빚어낼 수 있다.
이처럼 꼭 필요한 독서를 소홀히 하고 글부터 쓰려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심지어 ‘수필은 붓 가는 대로 아무렇게나 쓰면 되는 글’이라고 생각하여 충분한 독서도 필요 없이 그저 생각나는 대로 쓰면 수필이 되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마저 있다.
이러한 자세나 생각은 쌀과 물만 있으면 저절로 밥을 지을 수 있고, 총만 있으면 저절로 총을 잘 쓸 수 있으며, 자동차만 있으면 저절로 운전을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또한 이러한 자세나 생각은 수필에 대한 경시 풍조에서 나온 것이며, 수필에 대한 모독이 아닐 수 없다.
하물며 밥을 짓는 데에도 노력과 정성, 그리고 밥을 짓는 기술이 필요한 법인데, 인간의 삶과 인생의 의미를 다루는 고도의 문학 작업에서 어찌 최소한의 노력과 정성, 그리고 기본적으로 필요한 기술마저 외면하고 가볍게 여길 수 있단 말인가. 이처럼 그릇된 자세나 생각을 가진 사람은 설령 그 학벌이 뛰어나고 지식이나 경험이 풍부하며 문학적 소질이 뛰어나다 해도 결코 좋은 수필, 훌륭한 수필은 쓸 수 없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수필은 기본적으로 수필을 쓰는 사람의 삶의 자세, 올바른 가치관, 노력하는 자세와 겸허한 태도, 훌륭한 인품과 충분한 독서를 통해 나오며, 그 우열이 가려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독서를 많이 한 사람이 쓴 수필과 독서를 하지 않은 사람이 쓴 수필은 분명한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흡사 아무리 감추고 위장해도 좋은 향기를 지닌 것에서는 좋은 향기가 나는 것처럼 말이다.
프랑스의 유명한 사상가이자 뛰어난 수필가이기도 한 몽테뉴는 특히 『수상록』으로 더욱 유명하다. 그의 훌륭한 수필 작품들과 『수상록』도 결코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가 이처럼 훌륭한 수필 작품들을 많이 쓰고 불후의 명저로 불리는 『수상록』까지 남기게 된 데에는 깊은 명상, 예리한 관찰력과 함께 많은 독서가 밑거름이 되었다. 특히 그는 천여 권의 장서로 둘러싸인 그의 서재에서 많은 독서를 하고 깊은 명상을 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자신의 서재 창을 통하여 보이는 바깥 모습을 많이 관찰한 것은 물론 여행을 통해 많은 사람을 만나고 견문을 넓혔다. 그의 이러한 다양한 독서와 관찰 및 명상은 그의 위대한 수필 작품들을 빚어낸 산실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독서를 하는 동안에는 얻은 느낌이나 생각 등을 꾸준히 기록해 놓았으며 이러한 기록들을 글을 쓰는 데 적극 활용하였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물론 책을 읽더라도 아무 책이나 마구 읽기보다는 정말로 유익하고 훌륭한 책, 안목을 넓혀 주고 올바른 지식과 지혜를 줄 수 있는 책,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사람에게 깊은 감명을 안겨 주는 책, 다시 말해 양서良書나 고전적 가치를 지닌 책들을 많이 읽어야 할 것이다.
또한 그런 책들을 단순히 읽는 데에만 그치지 말고 책 속에 담긴 내용의 의미나 작가의 의도, 진리와 가치 등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서 그 책이 지닌 의미나 실체를 냉철하게 판단하고 깨달으며, 진리와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지, 삶의 가치와 인간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며, 나아가서는 자신의 삶에 이를 충분히 활용하여야 할 것이다. 아울러 글을 쓸 때에는 이런 것들을 모두 융합하고 나름대로 발전시키며 참고 자료로 삼아 보다 훌륭하고 가치 있는 글, 보다 원숙하고 호소력이 있는 글이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많은 독서와 올바른 독서법, 그리고 이를 통한 각성과 자기 혁신은 훌륭한 수필을 창작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이고도 중요한 요소이며, 만일 이를 무시한 수필 창작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무의한 창작 행위에 불과하다.

 

2.그 열매는 그 나무에서 난다(수필은 인품으로 빚어지는 글)
수필을 보면 대개 그 수필을 쓴 사람의 인격과 품성, 교양이나 교육 수준, 또는 지식 수준이나 지성미, 삶에 대한 의식 등이 어느 정도인지를 쉽게 알 수 있다. 수필 속에 이런 것들이 그대로 담겨져 은연중에 풍겨 나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필을 쓴 사람의 인격이나 품성, 교양이나 교육 수준, 또는 지식 수준이나 지성미, 삶에 대한 의식 등이 부족하거나 결여되어 있으면 그것이 수필 속에서 그대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겉으로 아무리 꾸미고 치장하더라도 그 부족함은 결국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이유는, 수필이 원래 인간의 내면을 그대로 투영시키는 자기 노출의 문학일 뿐만 아니라 작가 자신의 인격·품성·교양·교육 수준·지성미 등이 작품 속에 크게 반영되어 나타나는 문학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수필은 금붕어가 노니는 것이 다 보이는, 투명한 어항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투명한 어항을 통해 그 속에서 움직이는 금붕어들을 다 볼 수 있는 것처럼, 수필을 통해 그 수필을 쓴 사람의 내면세계를 충분히 엿볼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인품이 훌륭한 사람이 쓴 수필 작품을 보면 대개 그 문학적 품격도 높다. 작가 자신의 훌륭한 인품이 그가 쓴 수필 작품의 품격을 자연스럽게 높여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필을 가리켜 ‘인품으로 빚어지는 글’이란 말도 있다.
따라서 보다 품격 높은 수필, 훌륭한 수필을 쓰기 위해서는 작가 자신이 스스로의 인품 향상을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다. 이와 함께 지성미나 지식 향상 등을 위해서도 부단한 노력이 요구된다.
물론 인품이 훌륭해야만 반드시 좋은 수필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특히 상상력이 많이 요구되는 소설이나 시 등은 반드시 인품이 훌륭하지 않더라도 문학적 재능을 발휘하여 얼마든지 좋은 문학 작품을 창조해 낼 수 있다. 그리고 수필에서도 자신의 부족한 인품을 가식 없이 드러내 보이며 진솔하게 자신의 심경을 밝히고 문학적 재능을 발휘한다면 역시 좋은 수필을 빚어 낼 수 있다. 그러나 수필은 소설이나 시 등과는 달리 허구가 별로 용납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작가 자신의 인품이 작품에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에 아무래도 훌륭한 인품이 좋은 작품으로 연결되는 수가 많은 것이다.
‘그 열매는 그 나무에서 난다’는 말이 있다. 좋은 열매는 좋은 나무에서 나기 마련이고, 나쁜 열매는 나쁜 나무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는 뜻도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좋은 인품, 훌륭한 인품에서 좋은 수필, 훌륭한 수필이 나올 수 있다. 때문에 다른 문학 장르의 작가들보다 수필가나 수필을 쓰고자 하는 사람들은 더욱 스스로의 훌륭한 인품을 위해 힘써야 한다.
그런데 이것을 자칫 잘못 생각하여 자신이 쓴 수필에 자신의 인품이나 지식, 지성미 등을 과시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 즉 자신의 인품이 훌륭하고 해박한 지식, 또는 지성미를 갖고 있는 것을 드러내 보이기 위해 의도적으로 애쓰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순수하지 못한 동기에서 자기 과시를 위해 쓰인 글은 우선 독자들의 공감을 얻지 못하고 오히려 거부감만 갖게 한다. 이러한 불순한 의도는 작품 속에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나기 마련이므로 수필로서의 가치와 품위, 문학성을 잃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의도함이 없이 순수하고도 꾸밈없이 수필을 쓸 때 그 작가의 훌륭한 인품이 은연중에 흘러 나와 더욱 돋보일 뿐만 아니라 독자들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으며 이렇게 될 때 그 수필은 보다 품위 있고, 문학성이 뛰어난 수필이 된다.
좋은 향기를 지닌 꽃은 구태여 그 향기를 드러내려고 애쓰지 않아도 자연히 퍼져 나가게 마련이다.

 

3.자기 내면에서 끊임없이 울부짖는, 그 야수적인 외침에도 귀를 기울여라

 

1
내 안의 울 속에서 
밤낮없이 으르렁대는

 

저 사나운 짐승의 
정체는 무엇일까

 

무슨 먹이라도 보았는가
오늘은 길길이 뛰고 있다.



2
내 안의 바다 위를
정처 없이 표류하는

 

저 달 없는 쪽배의
기항지는 어디일까
파도가 거센가 보다

 

오늘은 몹시도 흔들린다

 

3
내 안의 허공 속에
끝없는 나래 펴는

 

저 파랑새의 꿈은
언제 어디서 이뤄질까

 

불멸의 그 동산을 그려 본다
영원히 오늘은 내 안에 있다

 

구상(具常) 시인이 쓴 「오늘은 내 안에」라는 시다.
이 시 1연에서 표현되고 있는 것처럼, 우리들 인간의 마음속에는 밤낮없이 으르렁대며 그 무언가를 찾아 헤매는 한 마리의 야수와도 같은, 길들여지지 않는 야수성이 존재한다. 아무리 교육 수준이 높고 지혜와 지식, 그리고 지성과 인품이 훌륭한 사람일지라도 그 마음속에는 언제 어떻게 뛰쳐나올지 모르는 동물적 야수성이 엄연히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다만 그것을 스스로 억제하고 있을 뿐이다. 또는 교육과 자기 정화, 양심이나 인품, 혹은 종교적 심성으로 이를 제어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이러한 야수성은 기존 질서를 부정하고 현실의 모순이나 부조리를 물어뜯는 힘이 있다. 그리고 이것이 문학적 생명력으로 발휘될 때 그것이 곧 문학인 것이다.
수필 또한 자기 내면에서 끊임없이 으르렁대는 그 무엇을 찾아 수필이라는 문학 형식을 빌려 표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현대인들은 복잡하고 치열한 삶의 경쟁 속에서 자신의 감정을 억제당하고, 일상적 삶의 황폐함 속에서 갈등과 고뇌를 느끼면서도 이를 제대로 표출할 수가 없는데 수필이 그 문학적 돌파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으르렁대는 그 소리를 애써 외면하거나 억제하려고만 할 게 아니라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포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부정적인 것이든, 긍정적인 것이든 크게 상관할 바 없다. 다만 나의 내면에서 끊임없이 울부짖고 있는 그 소리가 지닌 의미, 그 내면의 외침에 깊이 귀 기울이며 여러 앵글로 포착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다시 치열한 내면의 여과 과정을 거쳐 성숙시키고 문학적으로 승화시킨다면 틀림없이 좋은 수필이 되는 것이다. 내면의 깊은 상처와 아픔, 고통과 슬픔, 인간적 고뇌와 갈등, 동물적 본능이나 욕망 같은 것들도 모두 좋은 수필의 재료가 된다.
때문에 지금 내 마음이 깨끗하지 못하다거나 구상 시인의 시구처럼 “내 안의 바다 위를/ 정처 없이 표류하는/ 저 달 없는 쪽배”와도 같이 지금 내 마음이 평온을 잃고 혼란스럽다 할지라도 상관이 없는 것이다.
흔히 좋은 수필을 쓰기 위해서는 마음이 맑고 깨끗하며 평화로워야 한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라는 게, 또 삶이라는 게 깊은 숲속에 있는 잔잔한 호수처럼 늘상 맑고 깨끗하며 평화로울 수만은 없지 않은가.
오히려 치열한 사람의 현장 속에서 다양한 인간들과 부딪치며 살아가야 하는 우리네 삶은 맑고 깨끗함, 평화보다는 다툼과 분열, 갈등과 미움, 욕망이나 욕심, 적대감이나 경쟁심 같은 것들로 가득 차 있는 경우가 많다. 이것이 어쩔 수 없는 평범한 인간들의 삶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부정적인 마음, 깨끗하지 못한 마음으로는 수필을 쓸 수 없다는 말인가? 결코 그렇지가 않다. 그런 부정적인 마음, 깨끗하지 못한 마음, 거칠고 세파에 지친 마음, 야수처럼 밤낮없이 으르렁대는 마음속에서도 얼마든지 쓸 수 있는 것이 수필이다. 다만 그런 감정들은 즉흥적으로, 또는 원색적으로 그대로 표출하지 않고 그런 속에서도 끊임없는 여과와 정화 과정을 거쳐 표출해야 하는 것이 수필이다. 오물을 그냥 방출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정화조를 통해 정화시켜 방출하는 것처럼 말이다.
좋은 수필과 그렇지 못한 수필의 차이점도 여기에 있다. 자기 마음, 또는 자기가 보고 느끼고 생각한 것들을 얼마만큼 잘 정화시켰느냐에 따라 그 문학적 차이가 생겨나는 것이다.
자판기에 동전을 넣으면 자동식으로 깡통 음료가 튀어 나온다. 기계적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마음은 이처럼 기계적인 것이 아니다. 기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똑같은 상황일지라도 인간은 각기 나름대로의 판단과 생각 등을 거쳐 여러 가지 형태의 결과를 내놓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여러 사람이 똑같은 주제나 소재를 가지고 수필을 쓰더라도 그 결과는 다르게 표출된다.
「오늘은 내 안에」 3연에서 구상 시인이 “내 안의 허공 속에/ 끝없이 나래 펴는” 하고 읊었듯이, 수필가는 자기 안의 허공 속에서 끝없는 상념을 통해 문학의 나래를 펴는 사람이다.

 

민주는 답십리에서 조그마한 구멍가게를 하고 있다. 남편이 갖다 주는 쥐꼬리만 한 월급으로는 아이들 대학 공부는 꿈도 못 꿀 형편이어서 생각하다 못해 시작한 장사였다.
친구와 친척 집에서 약간씩 돈을 융통해서 가게를 시작한 지 7개월이 되었다. 목이 좋은지 다행히 장사는 할 만했다. 비록 코흘리개들이 내미는 적은 돈이지만 다달이 저금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한 가지 걱정은, 길 건너에 대형 슈퍼마켓이 들어설 예정이라는 소문이어서 민주의 애간장을 다 녹이고 있었다. 슈퍼마켓은 100원짜리는 90원에, 500원짜리는 450원에 팔고 있기 때문에 손님을 다 빼앗기게 생겼기 때문이다.
제발 그것이 헛소문이기를 바라며 하루하루를 지내는 중 민주네 가게에는 이상한 단골손님이 하나 생겼다. 여섯 살이나 혹은 일곱 살 정도 먹은 사내아이가 그 단골손님인데 아주 이상한 아이였다.
그 아이는 가게에 오면 이것저것 손대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로 여러 가지를 만지작거리다가 가는 것이었다. 며칠을 계속해서 그런 행동을 했지만, 아무것도 사지는 않았다. 먹고 싶어서 그러는가 보다 하고 옆에서 지켜보기만 하고 별 꾸중은 하지 않았다. 아이가 간 뒤에 물건을 이것저것 체크해 보아도 없어진 것은 없어서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아이가 다녀간 뒤 초콜릿 하나만큼의 자리가 움푹 들어가 있었다. 민주는 설마 하는 생각에 상자를 엎어서 그 개수를 세어 보았더니 열 개가 있어야 할 초콜릿이 아홉 개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민주는 믿는 도끼에 발등이 찍힌 기분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곳엔 어제 없어진 초콜릿이 제 위치에 얹어 있는 게 아닌가. 기가 막혔다. 도대체 저 아이 어떻게 생겨 먹은 아이일까, 웃지도 울지도 못할 희극이 가게에서 벌어졌다. 저녁식사를 하면서 민주는 또 이 사실을 가족들에게 알렸다. 모두들 고개를 갸우뚱했다.
“엄마 이상한 아이네요. 초콜릿을 좋아하는데… 자기가 먹고 다른 데서 사 가지고 도로 가져온 것인지도 몰라.”
남편도 그 말에 동조했다.
“그러나 훔친 것을 왜 도로 가져왔을까? 그것도 이상한 일인걸?”
……그러나 그다음, 그다음 날도 그 아이는 나타날 줄을 몰랐다. 사탕 한 봉지에 천 원 하지만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고, 다만 아이의 신상에 무슨 일인가 일어났을 것 같아 그것이 걱정이 되어 민주는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렇게 닷새가 흘러갔다. 그리고 엿새째 되는 날, 어느 젊은 여자가 사탕 봉지를 돌려주었다. 여자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죄송합니다, 이제야 아들이 말하더군요.”
아이는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데도 불구하고 사탕을 되돌려주려고 뛰어오다가 빗속을 과속으로 달리던 차에 치였다는 것이다.
“사실 그 아이는 당뇨병을 앓고 있어요. 그래서 일체 사탕이나 과자류를 안 주고 있어요. 돈을 주면 가게에 가서 몰래 사 먹을까 봐 돈도 전혀 주지 않아요. 어린 아이라 식사 조절도 힘들고… 당이 많이 나와요. 아주 많이.”
아이의 엄마 눈에서 눈물이 댕그렁 떨어졌다. 민주는 그 훨씬 전부터 울고 있었다. 그랬구나… 아, 그랬구나
—이철호, 「단골손님」

 

이 글은 구멍가게에 매일 오는 꼬마 단골손님에 대한 이야기를 3인칭 시점으로 쓴 작품이다. 아이는 가게에 와서 초콜릿을 가져가고, 다음 날이면 제자리에 다시 갖다 놓았다. 아이의 기이한 행동은 알고 보니 당뇨병 때문이었다. 초콜릿을 먹을 수가 없어 그런 식으로라도 심리적 욕구를 풀고 있었다. 이 작품은 민주네 가족들이 물건을 훔쳐가는 아이에 대해, 무조건 처벌을 하려기보다 무슨 사연이 있을 거라며 관용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는 것이 특이점이다. 아이에 대한 안쓰러운 마음이 가식 없이, 또 조금도 미화시키지 않고 있는 그대로 표출되고 있는 작품이다. 아이에 대한 부정적인 마음과 그러면서도 애틋하게 걱정하는 마음이 독자로 하여금 공감대를 형성한다. 인간의 내면에 함께 존재하는 선과 악의 심리에 깊이 귀 기울이며 이를 여러 앵글로 포착해 문학으로 승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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