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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머무는 곳

한국문인협회 로고 이일훈(희곡)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10월 68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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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_ 우진|미려|수정|능구
때_ 현대 
곳_ 어느 산속
무대_ 울창한 숲 가운데 꽤 넓은 네모진 공간 ‘영혼의 정원’. 이곳은 전에 마을 사람들이 다툼이 있을 때 와서 화해를 하던 곳이다. 근자에는 사람들이 이용하지 않아 칡넝쿨 얽서리로 뒤덮여 있던 것을 걷어내고 ‘영적 친족 4인회’가 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 3시 임간 피정 장소로 이용하고 있다. 일정한 간격으로 젊은 소나무들이 네모 공간을 에워싸고 있다. 잘 다듬은 잔디 위에 돌의자 대여섯 개가 적당한 간격으로 놓여 있다. 중앙에 멋진 추사체의 ‘영혼의 정원’ 나무 팻말이 서 있다. 오른쪽 우람한 대장 소나무 아래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을 연상케 하는 바위가 자리하고 있고 그 뒤에 아래에서 올라오는 풀숲 길이 보인다.

 

막이 오르면, 6월 어느 날 아침나절. 미려와 수정, 앞서거니 뒤서거니 작은 가방을 들고 등장.

 

수정   (가방에서 주스와 컵을 꺼내 미려에게 주스를 권한다) 올라오느라 힘들었지? 목 축여.
미려   (받아 마시며 시계를 본다) 고마워. 시간 잘 지키는 바오로가 웬일이지?
수정   혹시 김 사장이 오기 싫다고 뻗대는 거 아닐까?
미려   진실의 화신으로 통하는 바오로의 초대를 거절하긴 쉽지 않을걸.
수정   나는 김 사장이 꼭 오길 바라.
미려   와줘야 돼. 초대를 받는 건 사랑받는 것 못지않게 좋은 일인데 안 오면 누구 손해야?
수정   김 사장이 입을 손해를 사전에 알려줄 걸 그랬나?
미려   기가 센 사람이니까 깜짝 충격을 주는 게 나을 거야. 기다려 보자.
수정   난 미려가 40년 만에 만난 나를 알아봐 주고 하느님께로 인도해 준 그날을 잊을 수가 없어.
미려   오래 안 만나고 살아도 막연히 한번 보고 싶은 친구가 있지. 어떻게 살고 있나 궁금하기도 하고. 그게 한수정이었어. 맑고 선한 미소가 보는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들던.
수정   미려는 옷을 잘 입어서 더 예뻐 보였지. 그림 잘 그리기로 전교에서 1등이었고. 화가는 맡아 놓은 셈이었어.
미려   수정인 반에서 노래를 제일 잘했잖아.
수정   가수가 꿈이었지만 일찍 결혼을 하는 바람에 노래자랑 한 번 못 나가 보고 말았지.
미려   타고난 소리가 어디 가? 그대로인 걸 증명해 봐.
수정   진짜 예술가가 띄워 주니까 기분이 묘한데 한 번 불러볼까? (두 손을 모으고 <동심초>를 부른다. 낭랑하게)
미려   (박수를 치며) 성악가가 되고도 남을 솜씨인데 아까워라.

 

각자 가까운 돌의자에 앉는다. 사이.
우진과 능구 등장. 미려와 수정, 능구를 보고 반가워서 득의의 미소를 주고받으며 일어서서 능구에게 환영의 인사를 하고 돌의자에 앉는다.

 

수정   김 사장님, 반갑습니다.
미려   어서 오세요.
수정   (우진과 능구에게 주스를 권한다.) 드세요.
우진   (받아 마시며) 고마워. 잘 마실게.
능구   (단숨에 마시며) 어디 생전 못 가본 좋은 데를 데려온다더니 겨우 여기야? 여기 뭐 볼 게 있어? 나무뿐이잖아.
우진   나무보다 좋은 게 어디 있어. 푸른 나무를 항상 눈여겨 보며 사는 사람은 마음이 평화롭고 온화한 행동을 한다는 말이 있어.
능구   누가 학교 선생 아니랄까 봐 오나 가나 남 가르치려는 버릇은 여전하군.
우진   김 사장도 등산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어? 꼭 먼 데 유명한 산을 오르는 것만 등산인가. 가까운 산에 올라 내가 나고 자라 사는 곳을 정다운 눈길로 내려다보는 게 한 재미지.
능구   (왔다 갔다 하며) 미장원 하는 한수정이는 알겠는데 그 옆의 분은 누구신가?
미려   나 안미려야.
능구   이 김능구를 안다는 거요?
미려   쌍령초등학교를 같이 다녔으니까. 교장 선생님 막내딸.
능구   아, 중학교부터 서울로 간 그 새침떼기? 많이 변해서 몰라봤다.
우진   꽤 유명한 화가야. 옛집으로 이사 와 영원미술관을 열었어.
능구   너 그림 잘 그렸던 거 생각난다.
수정   우리 같은 초월성당 다녀.
능구   그럼 너희 셋이 일당이냐?
우진   형제자매지.
능구   성(姓)이 다 다른데 어떻게 형제자매가 되냐?
미려   이미 우리는 그렇게 살고 있어. 영적(靈的)으로.
능구   말이 안 통하는 걸 보니 역시 우리는 사는 세계가 달라, 그치?
미려   우리가 몰라서 못 누리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야. 그중 가장 아쉬운 게 서로 도울 수 있는데 도울 생각을 하지 않고 무심히 사는 거야.
능구   급이 다른 사람들끼리 도울 게 뭐 있냐?
우진   뭘 기준으로 급을 나누는지 모르지만 우리 모두 인간으로서의 기초 체급은 튼튼해.
능구   누리고 사는 거 뭐냐, 수준을 말하는 거야.
수정   영혼만은 누구보다 건실하니까 기죽지 않아.
능구   영혼이 뭐길래 만나자마자 들이대냐?
미려   우리 인간은 영혼과 육신으로 된 존재야. 몸 안에 지니고 사는 게 영혼이야.
능구   너희 영혼 타령이 돈 버는 문제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모르겠는데.
우진   ‘빵만으로 살 수 없다’는 말 들어봤지?
능구   너희는 배가 고픈데 먹을 것이 없어 물로 배를 채워본 적이 없지? 난 있다. 우리 식구는 배를 많이 곯았거든. 그래서 난 어려서부터 돈을 많이 벌어서 내 가족을 배불리 먹여야겠다고 이를 악물고 피땀을 흘렸어.
우진   자네가 20대에 인천 가서 계란 장사해서 큰돈을 벌어 식구들 가난을 면하게 해줬다는 소문이 자자했던 거 생각나.
능구   땅을 한 마지기씩 사서 부모 형제에게 주어 배부르고 등 따숩게 살게 하는 게 내겐 더없는 보람이었지.
수정   아마 하는 일마다 돈이 붙는 재복(財福)을 타고난 것 같아. 재복을 타고났다는 건 대단한 행운이지. 죽어라고 노력을 해도 가난을 면치 못하는 사람들도 많으니까.
능구   수정이 너두 30년을 미장원 해서 많이 벌지 않았니?
수정   먹고 살고 삼층집 한 채 장만한 정도.
우진   수정이의 남다른 보화는 이웃을 따뜻이 보듬는 심성이야.
미려   베테랑 미용사가 한결같이 남의 머리를 아름답게 만져 주면서 손님들의 이야기를 다 들어주고 있어. 연세 드신 할머니들의 사랑방이 되어 드리는 거지. 혼자 사는 할머니들 중엔 수정이를 딸처럼 의지하시는 분도 많아.
수정   귀는 들으라고 열려 있는 거니까 들어 드리는 거지 뭐.
미려   맞장구를 치니까 속마음을 여는 거지. 아파트에서 10년을 이웃해 살아도 한 번도 마주치지 않고 인사도 없이 사는 사람들이 흔한 세상에 수정이의 공감 능력은 대단한 거야.
우진   천성이 착한데 신앙심이 더해진 덕분이지.
능구   난 단독주택에 살아서 마주칠 이웃이 없어.
우진   여간 사람이 범접하지 못하게 높은 담장에 유리 조각과 철망을 친 저택에 사니 얼마나 좋은가?
능구   집이 크긴 하지. 기분이 어떠냐구? 어떨 것 같애?
미려   한을 풀었으니 의기양양하겠지.
능구   없이 살아본 적이 없는 사람은 결코 모를 성취감이라고나 할까? 째지게 흐뭇해.
우진   그만큼 이뤘으면 좀 느긋하게 내려놓고 살 때가 되지 않았어?
능구   난 아직 대한민국 상위 5% 안에 들지 못하는 사람이야.
미려   부의 관성 법칙이 가지면 더 갖고 싶은 거지.
능구   누리고 사는 사람만이 아는 만족감, 성취감을 모르면 아는 척 좀 하지 마.
우진   (조심스럽게) 어떻게 그래. 친구가 신문에, TV에 크게 났는데.
능구   (돌변하여 사납게) 그거 다 오해야. 난 잘못이 없어.
우진   그 뉴스를 보고 마음이 아팠어.
미려   나두.
수정   나두.
능구   왜들 이래. 아니라니까.
우진   잘나가는 사업가로 우리 동창들이 모두 자랑스러워했잖은가.
능구   내가 자주 한턱을 쏘니까 그런 거지.
우진   친구 중에 크게 성공한 사람이 있다는 건 기업가든 예술가든 자랑스러운 거야.
능구   배 아프지 않구?
수정   그랬다면 이번 일로 우리가 고소해 해야 맞지. 우리는 전혀 그렇지 않았어.
우진   자네를 도와줘야 한다는 데 뜻을 모은 거야.
능구   김능구는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라구 진정서를 넣어 준다면 나야 고맙지.
미려   이리 앉아 봐. 우리 얼굴 마주 보고 이야기하자. (능구를 가운데 자리에 앉게 한다. 능구, 마지못해 자리에 앉는다. 우진, 능구와 마주하고 앉는다.)
수정   왜 그랬어?
능구   거기 4차선 도로가 뚫리면 땅값이 어마어마하게 뛸 거야. 내 촉이 틀린 적이 없어. 내게 굴러들어온 절호의 찬스를 번히 눈뜨고 놓쳐야 돼?
우진   문제는 남의 묘를 허락도 받지 않고 무연고(無緣故) 묘라고 파서 없앤 거잖아.
능구   없앤 게 아니야. 이장했는데 긴 장마에 산사태로 떠내려간 거지.
미려   원상 복구한다고 했다면서?
능구   복구하려고 했어.
우진   사실은 묘를 아주 없앤 것이어서 복구가 불가능한 게 시쳇말로 팩트라드먼.
능구   산사태로 떠내려간 걸 나보고 어쩌란 말이야?
우진   자네 부모 묘 같으면 그런 데 묻었겠어?
능구   우리 부모님은 왜 들먹여? 건방지게스리.
우진   내 부모가 귀하면 남의 부모도 귀하지. 부모 없는 사람이 어디 있나?
능구   내겐 그 땅값 몇 배를 보상할 능력이 있어. 그것들이 처벌을 원한다고 뻗대고 있는 거지, 내가 몰라라 하는 거 아니라구.
우진   우리 어렸을 때 동네 형이 뒷동산에 있는 남의 묘에 불장난을 해서 동네가 발칵 뒤집혔던 적이 있어. 잔디를 조금 태운 거였는데 자칫 두 집안의 큰 싸움으로 번질 뻔했었지.
능구   요새 화장이 대세야. 너두나두 화장을 하는데 그까짓 뼛조각 몇 개 뭐 대단하다구 난리야. 그자들은 나한테서 돈을 왕창 뜯어내려는 속셈인 거야.
우진   이미 많은 땅을 가지고 있으면서 남의 묘지 10여 평을 욕심내 훼손한 게 문제라며?
능구   무연고 묘지로 버려져 있었어. 풀숲에 봉분도 없이 평토(平土)로 있었다구.
우진   신문에 가끔 무연고 묘지 연고자를 찾는다는 광고가 나던데 광고를 내봤나?
능구   묘지라는 흔적이 없었다니까.
미려   처음부터 무덤 같은 게 없었다고 하면 될 걸 이장을 했다고 해서 들통이 난 거라며?
능구   이장했다고 하면 유실(流失)을 막아줘서 고맙다고 할 줄 알았지.
우진   한 번도 피해자 측에 사과를 하지 않았다는 게 사실인가?
능구   에이, 재수 없어. 하필 거기 뼛조각이 묻혀 있을 게 뭐야. 그 사람들, 찾지도 않고 있다가 도로가 뚫린다니까 땅값 챙기려고 나타난 거잖아. 공돈이라면 눈이 벌개서.
미려   남의 땅에 묘를 쓴 게 잘못이라고 맞고소를 했다며?
능구   그렇게 걸면 승산이 있겠더라구.
우진   그 무덤은 애초에 땅 주인과 막역한 친구가 부모님 유해 모실 묏자리가 없다니까 거저 준 거라던데.
능구   문서가 없어요. 증명 불가야. 당사자들은 다 죽고 없어, 전해지는 이야기밖에.
우진   사자(死者) 명예훼손에 걸리면?
능구   그까짓 다 삭은 뼛조각에 무슨 명예가 있어? 난 하나두 겁 안 나.
우진   비싼 변호사 사서 자네가 이긴다 쳐. 자네만큼 돈이 없어 소송에 진 쪽의 슬픔과 분노에 대한 책임은 어쩔 건가?
능구   승자만이 콧노래 부르며 사는 세상에 패자에게 책임을 져야 한다는 법 있어?
우진   법이 있지. 양심.
능구   너희들 성당에 다닌다고 양심을 무슨 즈이 전유물로 아는 모양인데 세상에 양심 없는 사람이 어디 있냐?
미려   얼굴에 철판을 깔아 나 몰라라 하는 사람이 쌨지.
능구   나를 매스컴에 노출시켜 내 명예 훼손된 건 어쩔 거야? 죽은 자보다 산 사람의 명예가 소중한 거 아니냐구.
수정   조상의 묘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걸 알고 가만히 있을 거야? 김 사장 같으면?
능구   나 우리 조부모님, 부모님 납골당 폼나게 조성해 놓은 것 못 봤냐? 자손이라면 그 정도 능력은 있어야지. 아마 근처에 그보다 멋진 납골당은 없을걸. 이태리 대리석을 썼거든. 조상 무덤에 외제 비석 하나 세울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 어때, 너희들 있어?
우진   납골당 크기와 효성이 정비례하는 건 아니지. 부를 과시하려는 사심(邪心)이 없어야지.
능구   자네 착한 줄만 알았더니 은근히 나를 깎아내리려는 심보가 보이네. 대학 나온 너희보다 야간 고등학교만 나온 내가 성공한 게 밸 꼴리냐?
우진   자네가 부를 쌓는 데 무리수를 두어 남에게 피해를 입히는 일이 있다는 소문이 돌아도 나는 사업을 하는 데 있을 수 있는 일이겠지 하고 넘어갔어.
능구   애들이나 가르치는 골샌님이 사업을 알아?
우진   남에게 피해를 입히고 아무 양심의 가책도 없이 사과를 하지 않고 돈으로 방차하려는 태도는 아무리 친구라 해도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이야.
미려   친구가 영혼을 깨끗이 유지하며 살 수 있는 길을 우리가 알려 줄 수 있어. 우리 셋이 할 수 있는 일이고, 해야만 하는 일이기도 해.
능구   (자존심이 상하여 가려고 일어선다) 상대할 가치가 없는 것들이야, 너희들.
수정   (능구를 끌어앉히며) 잠깐만 내 얘기를 들어 봐. (미려를 정겹게 바라보며) 2년 전 어느 봄날, 한수정 미용실에 처음 보는 손님이 찾아왔었지. 수정아. 오랜만이다. 40년 만에 만난 나를 먼저 알아봐 주고 나를 성당으로 이끈 사람이 바로 안미려야.
미려   난 항상 말이 통하는 영혼을 확 잡아당기는 낚싯줄을 가지고 다니거든. 첫눈에 반하듯 확 끌리는 사람과 조그만 가능성이 보이는 사람 두 종류가 있는데 수정이는 전자였어. 어서 오세요 하는 인사말부터 머리를 만지는 솜씨가 정이 넘쳤다고 할까. 그 나긋나긋한 말소리는 마치 음악처럼 듣는 사람을 즐겁게 했어.
수정   화요일만 쉬기 때문에 주일 미사 참례가 쉽지 않아 망설이는 나에게 돈 버는 것보다 중요한 게 구원을 받는 거라고 어찌 간절하게 설파하든지 내가 단번에 넘어갔다니까.
미려   (웃으며) 혹시 후회하는 거야?
수정   아니, 너 소피아 아니었으면 난 맨날 미용실에서 남의 머리나 만지며 살다 그냥 갈 뻔했잖아.
능구   그냥 가지 뭐 잔치하고 가냐, 도대체 미려가 하는 일이 뭔데?
미려   서로를 알아보고 영적 친족이 되는 기쁨을 살게 도와주는 것.
우진   미려가 수정이를 알아본 건 크나큰 은총이지. 서로의 영혼에 물을 대어준다고나 할까. 팍팍한 생활 속에서도 수로에 물이 콸콸 흐르게 해주어 잘살게 도와주는 사람을 만나는 건 행운이니 세상에 둘도 없이 값진 인연이지.
능구   도대체 너희들이 잘산다는 게 뭔데?
우진   ‘가장 가까운 이웃에게 선을 베푸는 것’.
능구   너희들이 하는 이 짓거리가 그럼 잘 살기 위한 연습 같은 거냐?
미려   연습? 좋은 말이네. 무슨 일이든 익숙해지려면 무지 많이 연습을 해야 되는 거니까.
수정   하느라고 해도 늘 모자란 게 느껴져. 아직 아직 멀었어.
미려   영혼을 아무렇게나 내버려두면 아무리 엄청난 부를 쌓아도 잘사는 게 아니거든. 성경에 어느 부자가 곳간이 넘치도록 부를 쌓아 세상에 부러울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했는데 그날 저녁 하느님이 그를 그만 살게 하셨어. 죽음 앞에 장사 없는 거야.
우진   우린 같은 영적 친족 멤버니까 화제가 자연 같을 수밖에.
미려   한 우물 파기도 바빠. 영적 친족이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려.
능구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며) 이 바보들아. 그런데 들일 노력 있으면 돈 버는 데 써라. 심우진, 요새 세상에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거 부끄럽지도 않냐? 내가 차 한 대 뽑아줄까?
우진   이산화탄소 안 뿜고 다리 운동하는 게 뭐 어때서?
미려   차가 무슨 인형 뽑기 머신인가? 뽑아주게?
우진   어때. 마음을 돌릴 거지?
능구   지금 조상 무덤 보존회라는 웃기는 단체에서 나에게 뭘 요구하는지나 알아?
수정   ‘웃기는 단체’에서 뭘 요구하는데?
능구   내가 산 땅을 포기하라는 거야. 내가 어떻게 돈을 벌어 여기까지 왔는지 알면 그딴 소리 못하지. (한껏 불쾌한 표정을 짓는다)
우진   자수성가한 내막을 남들이 어떻게 속속들이 아나?
능구   고소를 취하하고 내가 주는 걸 받겠다면 그걸로 끝내고 싶어. 난 사업가 마인드를 중시하는 사람이지 세상 체면에 연연하는 사람이 아니야. 어,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나? 안 가? 나 가는 길에 태워다 줄게.
미려   몇 억짜리 외제차 타는 걸 그렇게 자랑하고 싶어?
능구   사람들이 조심하는 게 눈에 보여 짜릿해. 조그만 상처를 내도 수리비가 엄청 나오거든.
우진   그렇게 무서워하는 상처를 오십 평생 살면서 얼마나 많이 남에게 끼쳤는지 생각해 보기로 할까? 오늘 같은 날 이 좋은 공간에서,
능구   (벌컥) 나보고 성당도 안 다니는데 고해성사를 하라는 거야?
우진   자네도 진성을 알지?
능구   그 지독한 짠돌이? 남한테 얻어먹는 것만 좋아하는 놈.
수정   여자가 살림을 헤프게 하면 집안이 망한다고 아내에게 경제권을 전혀 안 주고 반찬 가짓수까지 간섭하고 자유를 안 주던 친구.
능구   먹는 것이 아까우면 살지 말아야지.
수정   사는 데 낙이 없는 서연 씨를 내가 성당에 다니도록 이끌었지. 진성이가 우리 미용실에 와서 몇 번이나 난리를 쳤는지 몰라.
능구   볼 만했겠다. 어려서부터 남 해코지하는 재주가 있었는데.
수정   내가 사 준 십자고상을 밟아 부수고 성모상을 던져서 깨뜨려 버리고 묵주를 발로 밟았어. 서연 씨가 무슨 나쁜 짓을 하려고 성당에 다니느냐는 거야. 진성이의 의처증은 하는 일이 잘될 때는 잠잠하다가 안 될 때는 거의 살인적이 되는 패턴이었어. 괜찮은 회사를 다니다 떼돈을 벌겠다고 사표를 내고 나와 이 일 저 일 사업을 한다고 일을 벌였는데 사기만 당하고 퇴직금을 다 날려버리고는 생활이 어려워졌어. 서연 씨가 식당에 나가 일을 해서 살림에 보탰는데 그걸 딴마음 먹고 나다닌다고 트집을 잡고 폭력을 휘둘렀어.
우진   내가 아이들하고 살려고 식당에 나가 힘든 일을 하는 아내를 고맙게 생각해야 한다니까 남의 여편네한테 엉큼한 생각하느냐고 성을 내더라니까.
수정   서연 씨가 너무 불쌍해.
능구   나한테도 몇 번 손을 벌렸지. 사업 자금을 빌려 달라기에 사업은 아무나 하느냐고 딱 거절했더니 제 인격을 모독했다고 고소를 한다고 하더라고.
우진   손수 작성한 고소장 수십 장을 가지고 다녔어. 자기한테 잘못한 사람을 응징한다고 칼을 가는 건데 듣고 보면 별 고소 요건이 되는 게 아니었어.
능구   학교 때 공부는 제법 잘했는데 어쩌다 거지꼴이 되었는지 창피해.
미려   창피한 데 그치면 안 되지.
수정   서연 씨를 보아서도 진성이의 추락을 막을 책임이 우리에게 있었어.
우진   새 사람이 되어 열심히 사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아.
능구   (짐짓 놀라며) 진성이가 너희들하고 어울린다는 거야?
우진   우리 <영적 친족 4인회> 신입 멤버야. 오늘은 당직이라 못 왔어. 수정, 서연 씨가 더는 참지 못하고 자살을 하려고 하자 아이들이 엄마, 같이 죽자, 엄마 없이 아빠랑 사는 건 지옥이라 싫다고 통곡하더래. 그걸 보고 하느님이 진성이의 우매하게 추락한 정신을 붙잡아 올려주셨어. 아이들 통곡하는 걸 보고 정신이 번쩍 들더래. 일자리를 구하고 성당 다니며 서연 씨와 아이들에게 엄청 잘해.
능구   취직을 했다구? 그 게으름뱅이가?
우진   소망아파트에 경비원으로 취직했어.
능구   진작 권할 때는 ‘남한테 굽실거리는 일을 어떻게 하느냐’구 뻗대더니.
미려   처자를 잃게 생겼는데 못할 게 뭐 있어.
능구   제 마누라 성당 다니는 걸 극구 반대하던 작자가 성당에서 봉사 활동을 많이 하기로 호가 났다는 소문이 정말이냐?
우진   어려서부터 손재주가 좋았잖아. 공고두 나왔구. 고칠 데가 있으면 알아서 뚝딱 고쳐 놓으니까 성전 관리 담당 위원이 되었지.
능구   벼슬한 거네.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변할 수 있지?
미려   진성이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친척 손에 자라 부모 사랑을 받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세상과 타인에 적대적인 경향이 있어.
수정   부모의 정이 그리웠으면 처자한테 잘해야 하는데 모진 게 이해가 안 됐어. 정을 줄 가족이 생기면 기뻐서도 아끼고 사랑해야잖아.
미려   두 가지야. 하나는 혼자였던 사무친 외로움에 대한 기억을 지우고자 정도 이상으로 잘하는 사람이고. 하나는 사랑받은 적이 없어 어떻게 하는 줄을 몰라 나누지 못하는 사람.
능구   걘 원래 그런 놈이야.
수정   우진이가 ‘친구는 함께 나누는 존재다. 주님께서 우리를 친구로 불러주신 것처럼 너는 우리에게 소중한 존재다. 주님은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서로 사랑하여라.’ 주일마다 신부님 강론을 그대로 필기해서 전해 주었어.
능구   안 믿는 사람에게 통한다는 거야?
미려   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를 큰 글자로 써서 액자에 담아 주었어. 거실에 걸어 놓고 아침, 저녁, 기쁠 때, 슬플 때 언제든지 보라고.
능구   이딴 거 필요 없다고 내동댕이치지 않았어?
미려   내가 서연 씨를 세뇌시켰다고 처음엔 나를 엄청 미워하더라구. 근데 딸아이 경진이가 미술에 소질이 있는데 뒷바라지해 줄 자신이 없다고 슬퍼하는 서연 씨를 보고 내가 미술 실기를 자청하고 봐준 거야. 경진이는 그림 재주를 타고났어. 색채 감각이 뛰어나고 생각이 깊어 아주 잘 그려. 대회에 나가 상도 타고 하니까 나에 대한 미움을 접더라구.
능구   예체능 그거 돈 많이 드는 거 아니야? 진성이네 형편에 미대 보낼 헛꿈을 꾸라고 부추기는 건 아니겠지?
수정   김 사장이 장학금 좀 희사하면 되겠네.
능구   (손을 저으며) 나 장학사업에 취미 없어.
미려   있어도 지금 상태로는 안 돼. 남의 묘에 대한 송사가 진행 중이니까.
능구   너희는 내가 사회적으로 매장되기를 바라는 거지?
우진   그렇다면 우리가 자네를 이곳으로 초대하지도 않았어. 사람들에게 지탄을 받거나 말거나 관심을 갖지 않으면 그만이야.
능구   난 너희들이 이러는 이유를 도무지 모르겠다. 세상에 죽일 놈이네, 못 봐줄 놈이네 하는 대죄인들도 시간이 지나면 거 뭐냐, 내가 본때 있게 한 번 써먹으려고 외운 건데, (사이, 힘주어) ‘사회적 죄의 희석(稀釋) 법칙’에 따라 흐지부지 없던 일이 되고 마는 게 부지기수야.
우진   진짜 잘못된 건 죄인 자신이 무슨 죄를 저질렀는지 알지 못하고 알아도 모르는 채 눈 질끈 감고 만다는 걸 모든 사람들이 아는데 좀처럼 그 잘못이 시정되지 않는 거야.
능구   지가 무슨 도덕군자야?
미려   우리는 좋은 영적 말씀을 듣거나 읽으면 그것을 나누고 싶어 전화를 하거나 만나서 이야기를 해왔어. 그 작은 마음씀이 모여 우리가 영적 친족을 이룬 거고.
능구   영적 친족이 뭐 계 같은 거냐? 낙찰계?
미려   늘 영적 건강과 성숙을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안 돼. 인간의 뜻만으로는 안 되고 하느님, 예수님께 전적으로 의탁하는 가운데 행해야 하는 지고한 영적 과업이야.
능구   (짐짓 눙치며) 뭘 팔고사며 이문은 얼마나 남는 일인데?
우진   성당에 다니면서 미지근한 사람도 대상이 될 수 있지만 무신론자, 하느님 모독에 앞장서는 대상에게 하느님을 알고 믿게 해 주는 일은 전력투구할 가치가 있어.
능구   이 사람이다 싶으면 확 나꿔채는 거지?
우진   결정적인 계기가 있어서 반응을 보이는 사람도 있지만 누가 알려주지 않았는데 스스로 성당에 가고 싶어하던 사람은 즉각 응답하고 고마워해.
능구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사람이 있다구?
우진   그런 사람은 하느님으로부터 먼저 부르심을 받은 거야.
미려   사람은 하느님의 자비에 의탁하고 사는 자녀니까. 감사를 백날 해도 모자라.
능구   너희들이 다리 놓은 사람이 몇이나 되냐?
우진   많진 않아. 일곱 명 정도.
미려   난 네 명.
수정   난 남편이 바람을 피자 정신이 오락가락하던 웅기 엄마를 잊을 수가 없어. 어디 하소연할 데도, 갈 데도 없어 막막하던 어느 날 발걸음이 성당을 향해 옮겨지더래. 성당에 들어가서 한참을 울고 나왔더니 후련하더래. 나보고 자기도 성당에 다녀도 되느냐고 묻기에 되고말고. 예수님이 정말 좋아하실 거다. 축하한다. 내가 교리반에 인도하고 주일마다 교리 교육을 6개월간 같이 받고 영세하는 데 대모를 섰지. 남편이 잘못을 뉘우치고 가정으로 돌아오고 안젤라는 건강해져 반찬가게를 하고 있어.
우진   (능구에게) 우린 친구지?
능구   친구란 아쉬울 때 도와주는 사람 아니냐? 난 너희들에게 손 벌릴 일이 없어. 절대.
우진   위험에 처했을 때 손잡아 주기도 하지.
미려   안 좋은 사람이라는 평판을 받지 않고 사는 게 보통 사람들 이상(理想)이지. 그동안 김 사장의 평판은 그리 나쁘지 않았어.
능구   (의외라는 듯) 나를 나쁜 놈이라고 몰매를 치려고 오라고 한 거 아니야?
우진   여기에 아무나 초대하는 줄 알아? 이곳은 빛을 향해 나아가 영적으로 초월적인 사람이 되도록 돕는 우리들의 복된 땅이야.
능구   좀 알아듣게 말하라구.
우진   저 하늘을 봐. 무슨 소리가 들리지 않아? 귀 기울여 봐. 능구야. 너 그렇게 살지 말아라, 하는 소리가 안 들려?
능구   (못 들은 척 고개를 돌린다.) 소리? 찍찍 새 소리?
우진   여기에 와서 봐. 저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빛이 세상에서 제일 찬란한 것 같아. 내게 있는 모든 어둠이 말끔히 가시는 기분, 최고야. 이 산속 탁 트인 공간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것, 행복해. (제일 큰 소나무 가지 사이로 비치는 태양을 우러러보며 마냥 행복해 한다.)
미려   하늘을 우러러 감사하며 사는 사람은 마음이 평안하고 너그러워져.
능구   (냅다 뛰어 달아나려 한다) 튀어!

 

우진, 미려, 수정 동시에 일어나 능구의 앞을 막아선다.

 

우진   고향을 아끼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거든 고향 사람을 아껴주게. 피해자 박정욱 씨도 우리 고향 사람 아닌가. 박정욱 씨의 눈에 피눈물을 흘리게 하지 말게.
능구   난 너희처럼 하느님을 믿는 사람도 아니고 자연이네 예술이네 감정 타령을 하는 한가한 사람도 아니야. 시간이 곧 돈인 사람이라구.
우진   찬란한 광명의 날을 살아야 해. 어둠 속에 있지 말고.
능구   누가 어둠 속에 있다고 그래?
우진   눈만 뜨면 하늘을 보며 사는 사람으로서 하늘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느님께 돌아가는 날까지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산다고 할 수 있어?
능구   너희는 부끄러움 없이 산다는 거냐? 아닐 걸. 아니지?
미려   부끄러움 없이 산다는 건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도록 노력하고 부끄러운 일을 했을 때 뉘우치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는 거야.
능구   지겹다. 양심 타령. 난 돈을 많이 벌어 우리 가족을 잘살게 하기 위해 태어났어. 하느님이 나 밥 먹여 주고 돈 많이 벌게 해 준 거 아니라구.
우진   자네는 살아 있어도 죽은 것과 같은 사람이 되고 싶은가?
능구   너희들보다 내가 열 배, 백 배 잘살고 있어.
미려   물론 김 사장은 부자야. 허지만 물질 부자에 정신 가난이 정비례하는 것 같아 안타까워.
능구   이것들이 CEO 대학을 나온 나를 뭘루 보고 지적질이야? 부자로 사는 게 얼마나 좋은지 모르지? 너희는 아마 땅띔도 못할 거다. (한껏 으스댄다)
수정   앞으로 닥칠 일은 아무도 모르는 거야. 그러지 말구 우리 말 좀 들으면 안 돼? (간절한 표정으로 능구의 소매를 잡는다)
능구   이거 왜 이래. (수정을 확 뿌리친다.)
수정   (수정, 앞으로 넘어진다. 돌의자에 다리를 세게 부딪힌다) 아야!
우진   (수정을 잡아 일으키며) 일어날 수 있겠어?
수정   (주저앉은 채 피가 흐르는 정강이를 수건으로 닦으며) 주님, 저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의 고통을 이 상처를 통해서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능구   (눙치며) 보다보다 별 감사를 다 보네. 다친 게 감사하면 더 다치게 해줄까?
미려   수정이 감사하는 마음을 모르겠어?
능구   난 너희들에게 감사할 마음이 요만큼도 없거든.
미려   우리에게 하라는 게 아니야. 수정이처럼 하느님께 하라는 거야. 
능구   너희와 난 번지수가 다르다니까. 난 하느님 안 찾고도 잘만 살아. 너희는 잠시라도 하느님 안 찾으면 굶어 죽을까 겁나는 모양인데 불쌍하다야. 거지 같은 것들.
우진   누가 자네 영혼에 관심을 가져 준 적 있어?
능구   (‘영혼의 정원’ 팻말을 발로 세게 툭 차 쓰러뜨린다) 없다, 왜?
우진   (능구가 쓰러뜨린 팻말을 주워 안으며) 이건 우리 셋이 한마음으로 가꾸는 영혼의 모습을 표시하는 건데.
능구   내 황금 같은 시간을 도적질한 너희 세 명 성당 도사. 하느님 빽 믿고 설쳐봤자 겨우 밥 먹고 사는 거밖에 더 돼? 겨우 먹고 사는 거 누군 못하냐? 내가 우리 집에 너희들 한번 초대하지 않는 이유를 알아? 위화감(違和感) 느낄까 봐서야.
미려   (간절히) 위화감 느낄 집에 굳이 초대하지 않아도 좋은데 우리와 같이 서로를 알아보는 영혼의 따스함을 주고받는 행복을 맛보고 가면 안 돼?
우진   한번만 ‘너희 권고를 받아들이겠다’ 하면 ‘고맙다,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어.
능구   나는 너희들의 어떤 말, 어떤 호의도 필요 없는 사람이라니까.
수정   (애써 일어나며 지궁스럽게) 김 사장을 위해 날마다 기도할게.
능구   나 사업 잘되라구?
수정   가장 가까운 친구들이 권하는 선한 행실을 해 보게 도와주십사 우리 주님께.
능구   우리 아들 둘이 이번에 미국 유학 가는 거 알아? 몰라?
우진   그래? 그거 잘됐네. 축하한다. 친구야.
능구   여간 부자 아니곤 힘든 일을 하는 나 부럽지 않은 사람 있으면 나와 봐.
미려   김 사장 사업가로 성공한 거, 자식들 미국 유학 보내는 거 모두 장해. 입지전적 인물이야.
수정   그렇게 대단한 인물에게 양심에 흠결이 있어선 안 되잖아? 억지 고소 취하하는 게 뭐이 그리 어려워?
능구   (있는 대로 화를 내며) 네까짓 것들 셋, 이 김능구에겐 한팔잽이야. 비켜! 비켜! 이 개떡 같은 영혼에 목매는 것들. 다시 보나 봐라. 퉤! (씨근거리며 아래로 뛰어 내려간다.)
수정   (털썩 주저앉으며) 그냥 가면 어떡해? (안타까워 눈물짓는다.)
우진   자신이 잘못을 범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데 능구에겐 그것이 전혀 없어.
수정   돈 버는 재주 몇 분의 일만 있어도 될 텐데.
미려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친구가 잘되기를 바라는 일념뿐인데. 우리가 잘못한 건가?
우진   우리의 장점은 꾸준히 노력한다는 거야. 나야 수정이와 미려 덕에 묻어가는 거지만.
수정   무슨 소리야. 우리가 우진이 덕에 영혼에 때 안 묻히고 살고 이웃의 아픔에 귀 기울이며 살려고 애쓰는 거지.
미려   나야말로 그림밖에 모르던 그림쟁이가 언감생심 영적 친족이 된 게 다 두 사람 덕이지.
우진   난 미려의 작품을 볼 때마다 그 안에 어려 있는 아련한 기운이 바로 진정한 영혼의 모습이 아닐까 감동하곤 해. 고마워. 미술관 하나 없는 곳에 영원미술관을 열어 좋은 그림을 보게 해줘서.
수정   나도 영원미술관에 가서 따뜻하고 밝은 그림을 보는 게 좋아. 수심에 잠겼다가도 미려의 그림을 보면 환하게 웃고 싶어진다니까.
미려   우리 영혼은 빛을 향하도록 만들어졌는데 능구는 왜 굳이 외면하고 어둠 속에 계속 머물려고 할까?
우진   빛이 얼마나 좋은지를 모르기 때문일 거야.
미려   (<생각하는 사람> 바위를 가리키며) 우리 다음에는 저 <생각하는 사람> 바위 앞에 능구를 세우고 좀 더 자기 인생을 깊이 들여다볼 수 있게 하면 어떨까?
우진   그래. 김능구 하면 돈 버는 재주가 비상한 것만 떠올려 포커스를 잘못 맞춘 거 같애.
수정   자기 기준보다 윗길의 다른 인생도 있다는 걸 알게 해 줘야 해. (핏자국이 마른 손수건을 어루만지며) 이 핏자국을 한 영혼의 눈뜸을 위해 봉헌하겠어.
미려   저 소나무 친구들이 바람에 살랑살랑 불러주는 노랫소리 들리지? 문득 사람의 영혼을 꿰찌르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저 영혼이 오늘 차 버린 도움의 은총이 아쉬워 돌아서는 날 마련해 주실 날이 머잖아 오리라 믿어도 좋다고 하시는 것 같지 않아?
우진   (아래를 향하여 크게) 김 사장아! 고소 취하하고 박정욱 씨에게 미안했다고 전화해라.
수정   커다란 몸집에 어울리게 마음결을 넓혀! (메아리 길게)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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