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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구가 있는 풍경

한국문인협회 로고 권나은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10월 68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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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구를 손바닥 위에 올려 귀를 기울이면, 계절의 숨소리가 천천히 맴돈다. 껍질의 가느다란 솜털은 잘 보이지 않아도 손끝은 알아차린다. 솜털을 따라 손가락으로 살짝 더듬으면, 그 위를 흐르는 햇살의 결이 느껴지는 듯하다. 보드라운 촉감은 벼가 익을 무렵 들판을 스치는 바람처럼 조용하다.
살구의 색은 황톳빛을 중심으로 점점 연하게 가장자리를 향해 번진다. 햇살이 가장 오래 머문 부분은 살짝 그을린 듯 붉게 익어 수채화처럼 서로 스며들며 경계를 지운다. 어떤 살구는 작은 점들이 불규칙하게 박혀 마치 여름 내내 들은 말들이 표면에 점처럼 남은 것 같다. 세상에 똑같은 살구는 없다. 전체적인 형태는 둥글지만, 한쪽이 살짝 눌린 듯 비대칭이다. 서로 다르기에 더 귀하게 와닿는 법이다.
나이 듦에 따라 살구는 추억의 맛이 되어 즐겨 먹지 않았다. 반가운 친구 보듯 눈길을 주며 생전 처음 먹는 양 노란 알전구를 닮은 살구의 맛을 음미했다. 한 입 베어 물면, 과육이 입 안에서 스르르 무너진다. 단맛과 산미가 입 안 가득 춤을 추며, 혀끝까지 여운이 남는다. 마치 아련한 여름날의 기억처럼, 금세 사라질 듯하면서도 쉽게 잊히지 않는다. 살구는 그렇게 짧고도 깊은 계절의 맛을 품고 있다.
오래전 방문교사로 일하던 때였다. 소서 즈음이라 학생들 수업하러 이곳저곳 가정 방문을 다니니 등줄기에 수시로 땀이 흘러내렸다. 정해진 시간에 맞춰 수업해야 하니 늘 긴장감의 소용돌이 속에 종종걸음으로 뛰다시피 다녔다. 내가 맡은 지역 가운데 황남동이라는 동네가 있었다. 그곳은 기와집에 살던 주민들은 하나둘 이주하고 공원이 조성되기 시작했다.
초록 대문을 들어가면 아름드리 키 큰 나무가 있었다. 나무 아래에는 아기 주먹만큼 굵은 살구가 나뒹굴었다. 살구나무의 몸피와 열매 크기가 범상치 않아서 인상적이었다. 떨어진 살구를 밟지 않으려 이리저리 피해 발을 옮기며 집 안으로 들었다. 한 주에 한 번 친구 사이인 주인집 아이와 문간방 아이를 차례대로 가르쳤다.
주인집 아이를 가르치며 마당에 떨어진 살구를 왜 빨리 줍지 않느냐고 물었다. 단맛이 코를 자극해 살구는 꽤 탐이 났는데 아이는 심드렁하게 자기는 별로 먹고 싶지 않아 관심이 없다며 퉁명스레 말을 뱉었다. 그 주택에는 해마다 과숙한 살구의 썩어 가는 냄새가 진동하겠구나라는 생각이 스쳤다. 아이의 눈에는 귀한 과일이 아니라 마당을 더럽히는 두엄 정도로 보였으리라.
문간방 집은 출입문을 열면 간이부엌이 자그마하게 보여 초라했다. 한 칸 남짓한 방을 두 개로 나눈 열악한 환경이었다. 얼마 전 아이가 이사 간다며 기뻐해서 내심 기대를 했었는데 이사 온 집도 이전 집이나 매한가지였다. 아빠가 계시지 않는 아이에게는 어쩌면 몸 누일 곳이 있고 이사한 집의 도배지나 장판이 깨끗하단 게 행복이었을지도 모른다. 아이 엄마는 허리를 다쳐서 일을 쉬고 있다며 숨비소리 같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인사했다.
“마당에 떨어진 살구 먹어봤니?” 내가 묻자마자, 아이는 “살구 냄새가 좋아 맛이 궁금한데 엄마가 주인집 거라고 만지지도 말래요”라고 대꾸했다. 전부터 주인집과 세입자로 좋지만은 않은 관계인 걸 눈치챈 나는 말을 멈췄다. 자꾸 씁쓸한 생각이 들어 그 대답 한마디를 끝으로 더는 아이에게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저 아이의 가슴에 가난이 반흔으로 남지 않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아이에게는 살구가 넘보아서는 안 되는 과실이기도 하지만 이뤄지기 힘든 온전한 가정과 같은 의미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황남동은 문화재 보호구역이라 개발이 불가했다. 부동산 가격이 오를 때도 그곳은 제한이 많다 보니 매매가 힘들어 생활 여건이 열악했다. 어둠사리가 내린 후 좁은 골목길 따라 걸으면 한 줄기 바람에도 섬뜩해서 뒷골이 서늘했다. 신문 기사에 실리는 흉흉한 사건 사고들이 밤길 걸을 때마다 내 뒤통수를 갈겼다. 숱한 사건들이 수시로 떠오를 만큼 오래된 동네는 음산해 보였는데 그 아이 같은 처지의 학생들이 많았다. 각자 나름의 각다분한 사연과 설움을 품고 셋방살이하는 어른들의 자식이었다. 그때의 나는 내심 아이들이 신설 아파트의 결핍 없는 아이들보다 더 열심히 공부해서 물질적으로나마 풍요로운 미래를 맞이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바랐다.
자연이 주는 풍요를 기꺼이 이웃과 나누는 것도 사랑의 표현이다. 허기를 채워주는 열매나 음식뿐 아니라 아름다운 풍광이나 나무 아래 그루터기, 너른 바위까지도 자기 소유라며 주장하지 않고 이웃과 함께 누릴 일이다. 쉽게 내 것, 네 것이란 경계를 짓고 분할해버리는 습관은 어디서 시작된 걸까. 관습의 틀을 벗어나려면 먼저 이웃을 향한 관심의 싹부터 작게나마 틔워 나가야겠다. 작은 싹은 줄기가 나고 자라나 서슴없이 나누고 양보하는 공존의 삶으로 우리를 데려다 줄지도 모른다.
남을 아끼며 배려하고 나아가 보살피고 도와주면, 내가 어른이 되고 속이 여물어 삶의 주인으로까지 성장한다고 한다. 그 일은 자기 내면을 가장 아름답게 가꾸는 방법이기도 하다.
이따금 마음결이 고운 사람을 그리워하는 버릇이 생겼다. 따스한 말 한마디가 새처럼 날아가서 누군가의 가슴에 닿으면, 그에게는 삶의 기쁨을 노래하는 기적이 생겨난다. 온기 어린 위무의 말들이 힘든 이의 심장에 총총 박힐 수만 있다면, 잡초처럼 성기고 질긴 인생이어도 분명 살구꽃처럼 환하게 피어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기억의 선상 어디엔가 이웃끼리 둘러앉아 함박웃음 지으며 밥 먹던 유년이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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