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10월 68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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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보고 싶다는 내 말에 남편은 영흥도로 차를 몰았다. 비린내가 퍼지는 선착장을 지나 산 넘어 해안가 쪽으로 접어드니, 처음 보는 소사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는 십리포 해수욕장이었다.
울컥울컥 토해내던 해풍은 잠이 들었는지 아기 같은 숨을 고르고 있었지만, 벼랑에 남은 뚜렷한 흔적은 파도의 그악스러움을 가늠할 수 있었다. 산책길 늙은 소사나무 아래 임승훈 시인의 「어미 소사나무」 비문이 세워져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맨 처음 어미를 찾을 텐데/ 숨결조차 잠든/ 천사 같은 아기들아/ 이별이 아닌 걸 슬퍼하지 말자
어미 소사나무는 성목 후 군락지에서 이곳으로 이식되었다고 한다. 간택을 받아 이곳으로 옮겨진 것이라면 분명 이유가 있을 텐데 의아했다.
고목의 마른 껍질은 누더기처럼 바람만 불어도 떨어질 것 같다. 속살마저 드러낸 둥치는 차가운 시멘트로 보강되었고 버팀목 몇 개를 세워 줄로 쓰러지지 않도록 감아 놓았다. 혹독한 삶의 굴곡이 여실 드러난 소사나무는 삶과 죽음, 그 경계에서 필사적으로 안간힘을 다해 서 있다. 움켜쥔 힘을 풀어 버린 듯 겨우 견딜 만큼의 잎만 매달고 있다. 새들도 기력이 쇠한 나무에 더는 둥지를 틀지 않았다.
나이테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속을 드러낸 둥치는 삶보다는 죽음을 연상케 했다. 어쩌면 사람들의 욕심에 의해 소사나무는 겨우 연명하고 있지 않을까. 안타까운 생각에 내 시선은 머물렀다.
상상을 초월하는 의학 발전으로 사람이나 동물, 하물며 식물까지 평균 수명이 늘고 있다. 예전에는 환갑이 큰 잔치였는데 지금은 백세를 넘긴 분들이 활동하고 있다. 요즘 노인정에서조차 일흔의 나이에도 동자라 불리며 심부름을 한다는 우스갯소리를 들었다. 스스로 걷고 활동할 수 있다면 수명 연장에 좋을 것이다. 하지만 치료 불가능한 병에 걸렸거나 대소변조차 감당할 수 없을 때는 상황이 다르다.
몇 년 전 입원 치료를 받고 계시던 할머니가 이른 새벽에 심정지를 일으켰다. 담당 의사는 나에게 연명치료를 물었다. 할머니가 중환자실로 들어가시기 전, 나는 시댁 식구들과 연명의료에 대해 논의를 했다. 만약 미리 의논하지 않았다면 그 새벽,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하기 바빴을 거다. 아흔다섯 연세에도 결정이 쉽지 않은데 일흔, 예순 그보다 적은 나이라면 또 환자가 부모나 배우자, 자식이라면 결정은 더더욱 어려울 게다. 나는 결정에 대한 무게를 의식해, 아니 어쩌면 그 원망을 피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요즘은 여러 매체를 통해 홍보되었음에도 연명의료 중단을 살인이나 방조로 여겨 중단 결정자를 비난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나 또한 잘 모르고 있어 이해를 돕고자 담당 코디네이터 선생님을 만나 자세한 설명을 들었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등록은 회복 불가능한 단계가 되면 치료 중단 시점을 명시할 수 있다고 했다.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얘기와 함께 유보나 중단은 심폐소생술이나 인공호흡기만 중단된다는 설명을 몇 번이나 했다. 임종 과정에 마지막으로 연명의료 결정은 가족이나 환자 본인에게 선택케 하지만, 의료진의 진단 없이는 진행될 수 없다는 말을 덧붙였다.
호전 없이 고통만 연장된다면 살아 있어도 살아 있다고 하지 못할 것이다. 죽음 또한 살아온 삶의 연장선은 아닐까? 그렇다면 연명치료 중단 선택을 누가 해야 옳은 걸까? 환자의 고통을 보면서 힘들겠다고 짐작할 뿐 다 알 수는 없다. 연명의료 중단은 몸과 마음의 고통을 멈추게 하는 것이 우선이며 목적이라고 했다.
끝까지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과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붙잡을 수 없음을 알면서도 이별의 상실감과 두려움은 더하고 덜하고가 없기에 중단은 절대로 포기가 아니다. 그러기에 스스로 결정할 수 있음을 존중하고 싶다. 환자 본인의 의사가 존중되지 않는 연명은 얼마만큼의 의미가 있을지 고민할 필요성을 가지게 하는 자리였다.
나는 3년 전 폐동맥 고혈압 진단을 받았다. 아직은 완치가 없지만 새로운 치료법이 개발되고 있다는 좋은 소식도 듣고 있다. 하지만 언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마음이 조급해짐은 어쩔 수 없다.
가보지 않은 곳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까? 준비 없는 가족의 이별 앞에서 슬픔보다 더 깊은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풋내 나는 열무에서 여물지 않은 옥수수를 보며 그렇게 소소한 일상에서 나는 많이 힘들었었다. 가족들은 부재를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했고, 떠나는 사람은 살아온 삶을 정리할 마음이 필요할 것이다.
할머니 임종 앞에서 선택을 망설였던 나는 십리포에 다녀온 후 내 앞날에 대한 의향서에 서명했다. 나의 선택이 옳고 그름을 떠나 가족들에게 힘든 결정을 떠넘기지 않게 되었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하다.
계절과 계절이 비껴가고 있다. 가지에 촘촘히 짜인 거미줄이 볕에 반짝거리고 그 거미줄에 걸려든 잠자리는 벗어나려 바동거린다. 아직 남아 있는 염원의 바람은 생명의 연소를 불씨로 만들고 있다.
땅에 뿌리 박고 거센 해풍과 비릿한 냄새에 익숙해져 살아온 소사나무의 옅은 그늘은 내 삶의 의미 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