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트맵

이십 년 걸렸다

한국문인협회 로고 신미선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10월 680호

조회수18

좋아요0

어머님을 모시고 한의원에 왔다. 오래된 듯 삐걱대며 소리를 내는 낡은 의자에 앉아 순서를 기다린다. 접수를 받아 주는 직원 뒤로 벽면 가득 누렇게 바랜 종이 묶음들도 눈에 들어온다. 이 한의원을 다녀간 이들의 흔적이지 싶다.
어머님이 이 한의원에 드나든 지도 어언 오십 년은 넘었다지. 혼사를 치르고 몇 해가 지나도록 애가 생기지 않아 다니기 시작했다는 한의원은 그렇게 새댁이 백발의 노인이 되기까지 함께 세월을 먹으며 구석구석 연륜을 쌓아 왔다.
우리 앞으로 순서를 기다리는 예닐곱의 사람들을 헤아리며 창밖을 내다본다. 길 건너 건널목에 한 노인이 서 있다. 철지난, 색이 바랜 남루한 코트를 걸치고 온통 하얀 머리칼에 한 손에는 지팡이가 들려 있다. 몸을 지탱하는 지팡이의 노력은 잠깐이라도 방심하면 금세 넘어질 듯 아슬아슬하다.
신호등이 초록으로 바뀌고 사람들이 길을 건너기 시작한다. 바삐 내딛는 젊은이들 사이로 점점 뒤처지고 있는 노인의 걸음, 세상의 속도는 노인이 살기엔 너무도 급진적이다.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이 노인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고 보폭을 맞춰 걸어준다면, 마음과 달리 쉴 새 없이 흔들리는 노인의 손을 잡아 따스한 온기를 나눠 준다면 좋으련만…. 어느새 사람들은 점점 ‘옆’보다는 ‘앞’에 집중하는 시절에 살고 있다.
어머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정신이 든다. 꾸벅꾸벅 무거운 머리를 겨우 지탱하며 졸고 있던 어머님도 순간 놀라는 눈치다. 의사 앞에 앉아 내미는 가녀린 손목. 섬섬옥수 백자 같던 살결 대신 종잇장 같은 피부 위로 선연한 실핏줄이 도드라져 있다.
의사가 어머님의 손목을 잡고 이리저리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맥이 거의 잡히지 않는단다. 측은지심이 인다. 또 한 뼘 늙으셨구나. 몇 년 전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홀로 당신의 집을 지키며 사시는 동안 대쪽처럼 꼿꼿했던 허리도 많이 굽었다. 나이 먹은 사람이 잘 살려면 남의 힘을 빌리지 않아야 한다던 어머님. 가능한 한 웬만한 일은 스스로 해결하며 지금까지 잘 버텨내셨는데 이젠 그 한계점에 도달하신 듯하다.
한의원을 나와 근처 공원에 앉아 함께 봄볕을 쬔다. 한껏 벙글어진 목련이 화사하니 눈을 돌려 바라보는 어디든 봄으로 가득하다. 꽃 한 송이로 봄의 아름다움이 절정에 다다르는 계절이다. 어머님이 조근조근 옛이야기로 꽃을 피운다. 철쭉이 흐드러진 사월에 가마를 타고 시집을 오셨단다. 음식도 쉬지 않고 시원하니 날이 아주 좋았다며 마치 그 시절로 돌아간 듯 모처럼 환하게 웃는다. 어머님과 이렇게 마주 앉아 편안하게 웃기까지 참으로 긴 시간이 걸렸다.
지금의 남편과 결혼을 약속하고 처음 시어른들께 인사 가던 날이었다. 어머님은 시댁과 가까운 거리에 신혼집을 마련해 줄 터이니 주말마다 함께 성당을 다닐 수 있냐 물으셨다. 사랑에 눈이 멀어 뭐든 할 수 있다고 했다.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걸 깨닫는 데에는 결혼 후 몇 개월이 채 지나지 않아서였다. 매주 시부모님과 함께 성당을 다녀오고 주말 내내 함께했다. 살림의 대가셨던 어머님 뒤에서 이것저것 삶의 지혜를 얻은 대신 일상의 불편함도 더불어 얹혔다. 직장생활로 전쟁처럼 평일을 정신없이 살았으니 그저 주말만이라도 편하게 쉬고 싶은 마음이 조금씩 저 깊은 마음속으로부터 올라왔다. 남편을 채근했다. 성당만 다녀오고 각자 집에서 쉬는 걸 말씀드려 보라고 설득했지만 소용없었다. 가차 없이 나의 의견이 무시되었다. 분명히 한결같은 남편이 좋아 결혼했는데 때로는 변하지 않는 남편이 힘들기도 했다.
어느 해 겨울 남편이 출근길에 교통사고가 났다. 다행히 큰 사고는 아니었지만, 시부모님은 그것을 계기로 남편 직장 가까이 이사를 하라고 했다. 두말없이 지금 살고 있는 이곳으로 이사를 왔다. 그리고 시댁은 명절과 집안 대소사에만 참석하며 며느리로서 해야 할 최소한의 도리만 하고 살았다. 어느 때엔 시댁 근처로 볼일이 생겨도 들리지 않고 그냥 지나치는 때도 있었다. 그러면 어머님은 서운한 기색을 드러내고 남편과는 싫은 소리도 오갔다. 강산이 두 번 바뀌는 동안 그렇게 우리의 고부 사이는 갈등도, 훈풍도 없이 그저 그런 관계가 되고 말았다.
누구든 직접 경험해 보지 않고는 아무도 모른다. 내 아이가 자라서 품을 떠나 객지에 있을 때 비로소 나는 어머님의 마음을 이해했다. 딱 이십 년이 걸린 셈이다. 아이가 내려온다고 하면 그 전날부터 마음이 들뜨곤 한다. 아들이 뭘 좋아할까? 이것저것 장을 보고 평소엔 하지도 않는 음식 솜씨를 부린다. 절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어깨를 들썩인다. 그 시절 어머님도 그리했을 것이다.
몇 해 전 추석이었다. 해마다 큰댁에 모여서 차례를 지내고 시댁에 들러 점심을 먹곤 했는데 그날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친정에 언니들이 이미 모두 와 있다는 전갈을 받고는 마음이 들떠 버렸다. 큰댁에서 차례 설거지를 끝내자마자 전화 한 통 어머님께 툭 던지고 남편을 앞세워 친정으로 내달았다. 훗날 어머님은 지나가듯 한 말씀하셨다. 그날 당신께서는 당연히 우리 내외와 손자가 오리라 예상하고 전날부터 음식을 해 놓았다고. 당신 아들이 좋아하는 장떡, 내가 잘 먹는 더덕무침, 손자 입맛에 딱 맞는 갈비찜까지 늦은 밤까지 자식 먹일 생각에 홀로 즐거우셨단다. 돌아보니 다 같이 모여 밥 먹는 일을 평생 큰 낙으로 여겼다는 당신께서 그날 아주 많이 서운하셨을 것이다. 난 그때 어머니께 살가운 말 한마디 건네지 않은 것을 죄스럽게 생각한다. 다정하게 손 맞잡고 시장 한 번 함께 다니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 함께 밥을 먹고 별일 아닌 일로도 전화를 일상처럼 주고받으며 친부모 같은, 딸 같은 관계를 만들지 못한 지난날을 자책한다. 어느 방송 작가가 그랬던가. 늙어 가는 부모님에 대한 연민이 없는 자식은 부모를 쓸쓸하게 한다고….
이제는 날짜보다 겪은 일로 그 해를 기억하는 팔순의 나의 어머님. 돌고 돌아 이십 년이란 긴 세월이 걸렸지만, 모녀처럼, 친구처럼 나란히 한곳을 바라보며 그 끝에 평안을 드리고 싶다. 그리하여 더 이상 당신의 남은 생이 쓸쓸하지 않기를….

광고의 제목 광고의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