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10월 68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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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집 담장 밖으로 뻗어 나온 감나무 가지에 눈길이 머물렀다. 윤이 나는 잎사귀 사이로 동글동글 풋감이 자라고 있는 게 아닌가. 감나무라면 가을볕에 발갛게 불 밝히듯 익어가는 풍경이 먼저일 테지만 어려서부터 늘 보고 자라서인지 풋감이 주렁주렁 열린 모습은 내게 친근한 풍경이다. 잠시 눈 맞추는 사이 감나무의 사계절이 스쳐 갔다.
고향 집 뒤꼍에는 두 그루의 감나무가 늠름히 서 있었다. 이미 다른 나무들은 꽃도 피우고 잎사귀를 키워 가는데 잠잠하던 감나무는 늦은 봄이 되어서야 잎을 틔우고 연노랑 꽃을 피웠다. 어린 시절 감꽃이 바닥에 떨어지면 떨떠름하고 별맛 없는 줄 알면서도 하나씩 입에 넣어 보곤 했다. 구멍이 뚫려 있는 꽃을 실에 꿰어 꽃목걸이를 목에 걸고 놀았다. 한동안 떨어지던 감꽃도 없어지고 허전한 마음에 감나무를 올려다보면 꽃받침엔 앵두만 한 열매가 맺혀 푸른 잎 사이사이에서 몸집을 불려 가고 있었다.
맏딸인 나는 휴일이면 동생들을 돌보아야 했다. 동생들은 대문간 그늘에서 병뚜껑, 사금파리 등을 가지고 풀잎이나 풀씨로 밥을 짓고 상을 차리며 놀았다. 소꿉놀이가 싫증 날 즈음이면 티격태격 다투는 소리가 들렸다. 때마침 이를 지켜보던 감나무가 풋감을 툭 하고 떨어뜨려 동생들을 불러갔다. 바닥에 떨어진 풋감을 치마폭에 잔뜩 주워 오면 동생들의 소꿉놀이 판이 다시 화기애애해졌다. 아직 덜 자란 풋감은 동생들 손에서 새콤달콤 자두나 복숭아로 변신하고 때로는 사과로 과일장수 마음대로 바뀌었다. 감잎도 그릇이나 보자기가 되고 동생들이 만져 보지 못한 지폐 역할도 해냈다.
감이 익어 가면 엄마는 더 바빠졌다. 누런색에서 주황색으로 감이 익어 보이지만, 한입 베어 물면 떫은맛이 입 안 가득한 땡감이다. 엄마는 감을 따서 항아리에 담고 소금물을 부은 다음 한 이틀쯤 기다려 우려내면 떫은맛이 없어지고 단감 맛이 났다. 추석 상에도 올리고 운동회 날도 가지고 가 이웃과 나누어 먹었다. 엄마는 인근 사찰 입구로 감을 이고 가 팔곤 하셨다. 엄마에게 감나무는 아침이면 손 내미는 시동생들과 딸들에게 학용품 살 돈을 줄 수 있는 든든한 존재였을 게다. 홍시가 되기 직전 아버지는 날을 잡아 긴 장대로 감을 땄다. 그때는 우리도 감나무 밑에서 고개를 뒤로 젖히고 아버지 손에 장대가 감을 향해 이리저리 움직이는 대로 시선을 주어야 했다. 장대 끝에 달린 감을 받거나 바닥에 따 놓은 감을 주워 담고 감나무가 없는 이웃집에 가져다주는 일은 우리 몫이었다.
감나무는 친구들의 관심을 많이 받았다. 신작로와 큰밭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집인데 윗마을 친구들이 오며 가며 집 뒤뜰에 서 있는 빨간 홍시를 눈여겨보고 “너 감나무 집에 살지?”라고 부러운 듯 말하였다. 감이 먹고 싶어 그리 말했을 수도 있는데 친구들에게 흔한 감을 좀 가져가 나눠 줬으면 얼마나 좋아했을까. 부끄럼이 많은 나는 그런 나눔을 할 줄 모르는 아이였다. 우리는 해마다 감을 수확했으니 귀하게 느끼지 못했을뿐더러 달콤한 홍시도 즐겨 먹지 않았다.
시댁에도 감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친정집 감나무가 오래된 고목이라면 시댁 뒤란에 있는 감나무는 그리 크지 않았다. 이제 막 감이 달리기 시작한 듯 시어머니를 비롯하여 남편이나 시누이들이 감을 매우 소중히 여겼다. 결혼 첫해 겨울, 시댁에서 살게 되었을 때 저녁이면 식구들은 TV를 보다가 감을 쟁반에 수북이 담아와 이야기를 나누며 감을 먹곤 했다. 처음엔 선뜻 손이 가지 않았지만, 그냥 있기도 머쓱해 한 번 두 번 먹다 보니 차츰 나도 달콤한 홍시 맛에 빠져들었다.
감나무는 한 해가 다르게 쑥쑥 커 갔다. 감이 익어 가면 남편과 바쁜 틈을 내어 어머니 집에 가 종일 감을 땄다. 시누이들이 결혼해 흩어져 살아도 모두 감을 가져가도 될 만큼 해마다 감은 늘어났다. 차츰 사촌형제들한테도 돌아갈 만큼 넉넉하게 열매를 생산해 냈다. 시어머니는 풍성하게 달리는 감나무를 보며 흐뭇해하셨다.
감나무가 나이를 먹어 가는 만큼 어머니는 노쇠해지셨다. 몇 해 전 어머니는 남편한테 긴 세월 많은 감을 내어 준 감나무를 베어 내라고 말씀하셨다. 점점 커진 감나무가 장독대에 그늘을 만들었다. 과일이 흔하다 보니 예전처럼 감을 따 놓아도 자식들이 가져다 먹지 않으며 감은 아들이 따 준다지만 떨어지는 감나무 잎을 치우는 일도 힘겨워하셨다.
이젠 정든 감나무를 볼 수가 없다. 이미 오래전에 친정집이 수해로 집을 잃고 이사를 하게 되고 우리 남매들 유년을 지켜보던 감나무도 새 주인이 없앴다. 고향 마을을 지날 때면 “저기쯤 감나무가 있었는데” 하고 가늠하며 언제나 저절로 그곳을 바라보게 된다. 큰길에서 이랑 긴 밭을 지나 집터가 있던 자리까지 가 보았다. 곡식이 자라고 있는 터에서 잠시 눈을 감고 동생들을 돌보는 소녀를 불러내고 소꿉장난하느라 바쁜 동생들도 불러내 보았다. 이랑 긴 밭에서 일하다 허리 펴시는 부모님과 할머니의 모습도 저절로 뒤따라왔다.
시댁 뒤란에 사십여 년 보아 오던 감나무도 없어진 지 몇 해 되었다. 어머니는 미리 길 떠날 채비를 하셨던 것일까. 작년 가을 시어머니는 다시 못 올 먼 길을 가셨다. 어머니가 사시던 집은 이제 비어 있다. 빈집 텃밭에 지난봄 형제들이 모여 고구마를 심었다. 뒤란 장독대에는 장을 담가 시누이들과 나누어 먹는다. 꽃들도 어머니가 계실 때처럼 계절을 바꿔 변함없이 피어났다.
감나무가 있던 자리는 너무나 고적하다. 우리는 수시로 빈집을 찾는다. 어머니가 떠나신 가을이 가고 겨울도 봄도 그곳에 머물다 갔다. 여름도 절정에 이르렀지만, 아직도 어머니의 부재는 익숙지 않다. 고부(姑夫) 간의 인연으로 사십여 년을 훌쩍 넘어온 세월이 너무도 빨리 지나간 듯하다. 어머니도 감나무도 아직은 떠나보내지 못한 듯하다. 고개를 들어 감나무 가지가 펼쳐져 있던 곳을 올려다보았다. 파란 하늘에 솜털 같은 구름이 펼쳐져 환하게 웃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