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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대에서 조강(祖江)을 보면서

한국문인협회 로고 윤백중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10월 68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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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시 서북단에는 몇 년 전까지 크리스마스 때면 북쪽 개풍군이 가까이 보이는 곳에 크리스마스 트리를 세워 불을 밝히던 애기봉이 있다. 한동안은 이산가족의 설움을 달래는 장소가 되기도 했다. 정상에는 지금도 애기봉비(愛妓峰碑)가 서 있다. 전직 대통령의 친필이란 기록도 있다. 누군가의 아기를 애타게 그리던 사연이 담긴 봉우리는 확인 안 된 야사도 있다. 병자호란 때 평양 감사와 기생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전해 오는 장소로 이별과 전설이 담겨 있는 곳이다. 지금은 아무런 내용도 없는 이름 없는 묘비가 북녘땅을 보고 있다. 출입구에 넓은 주차장이 있다. 관광객 수에 따라 평화 생태공원이 있는 애기봉까지 들어갈 때도 있다. 신분증 보이고 허락받아야 출입할 수 있다.
전망대 북쪽을 흐르는 강은 철원에서 발원하여 경기도 연천군 왕징면 듬밭강을 거쳐 임진강으로 내려오다 한탄강을 만나고 한강 하류 관산포에서 조강을 만나고 예성강을 지나 서해로 들어간다. 조강은 북한과 남한이 마주한 강으로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다.
애기봉 평화 생태공원과 주변 유서 깊은 장소들을 찾아보았다. 전망대 유도, 쌍마고지 해물선 마을, 애기봉비 망배단 평화의 종 등이다. 모두 한반도의 아픔과 희망을 품은 공간들로 단순한 관광지를 넘어 문학적 상상력과 정서가 깃든 상징성이 있는 지형들이다.
조강은 한강 하구가 서해로 흐르는 끝자락으로 김포 서북쪽 변에 위치한 애기봉과 평화 생태공원 눈앞에 있다. 1.4킬로 거리 건너쪽에는 북한 개풍군의 산과 들이 선명하게 보였다.
한국전쟁 때 피난 내려온 한 여인이 북쪽에 두고 온 아기를 그리며 봉우리를 바라보다 ‘애기봉’이라 불리게 되었다는 속설도 있다. 이곳은 이름부터가 통일되지 못한 민족사의 상처를 안고 있다. 공원은 그 자체가 ‘기억의 조경’으로 생태와 평화, 안보와 통일이 교차하는 시대를 묵상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애기봉 커피집 앞 전망대에 서면 확대 망원경이 여러 개 있다. 강 건너 들판 너머 북녘땅 개풍군의 4∼5층 집들이 선명하게 보인다. 내가 간 날은 운 좋게 화창한 날씨가 즐거움을 더해 주었다. 낮은 산 너머 뒤쪽에 송악산이 눈앞에 있고 북쪽 마을 굴뚝에서 연기 같은 것도 보이고 사람들의 움직임도 희미하게 보였다. 건물 안에 있는 전망대는 단순한 관광의 목적만은 아니고 북에서 피난 나온 이들의 한을 풀고 영혼의 귀환을 소원하는 목적도 있는 장소로 보였다.
쉽게 갈 수 없는 섬 유도는 애기봉 서쪽 바로 옆에 있는 작은 섬이다. 한강 하구를 따라 흐르는 물 위에 있는 이 섬은 사실상 중립 수역에 가까운 묘한 경계선에 있다고 설명했다.
유도(踰島)의 소 이야기는 유명하다. 농부가 유도에서 소를 키우며 살고 있었는데 소 한 마리가 강을 따라 내려오다 유도로 들어왔다. 주인 없는 소로 몰려 죽게 되었다. 농부는 죽는 것을 볼 수 없어 소는 말도 못 하니 살려 달라고 관계 기관에 애원했단다. 눈물로 호소한 농부의 뜻이 통하여 유도에서 오랫동안 새끼를 낳고 잘 살았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생겼다. 분단은 소도 마음 편히 오갈 수 없는 세월이 계속되고 있다.
조강 서북 방향에 쌍마고지(雙馬高地)가 있다. 말 두 마리 언덕으로도 부르는 이곳은 지형이 두 마리의 말이 마주 보는 것 같은 형상의 언덕인데 한국전쟁 때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고지였다고 설명했다. 형상이 마치 말 한 마리는 남쪽을, 다른 말은 북쪽을 바라보는 모양이다. 서로 싸우고 싶었는지는 모르지만, 땅의 모양이니 움직일 수가 없다. 바람만 왔다 갔다 할 뿐이다. 후인들이 남북의 갈림을 애달파하며 상징으로 지은 이름 같이 생각되었다. 애기봉 근처에 평화의 종은 아직 울리지 못하고 있다. 통일의 순간에만 만천하에 울려 퍼질 것이라고 한다.
애기봉 북쪽에 북에서 남서로 흐르는 조강(祖江)은 역사적, 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 지역이다. 임진강과 한강이 모여서 서해로 내려가는 길목이다. 고려와 조선 시대의 수도인 개성과 한양으로 가는 주요 물줄기로 활용되고 곡물, 어업, 상업 활동의 중심지였다. 지금은 전쟁과 분단의 상징이 되었다.
한국전쟁 때에는 조강이 북한군의 남침 경로로 이용되었으며 3년 후 정전 협정으로 한강 하구 중 조강 지역이 중립 지역으로 결정되었다고 한다. 조강은 이때부터 군사적 긴장 속에서 선박의 통행은 물론 작은 배로 고기도 못 잡게 되었다. 근처 어민들은 삶의 터전을 잃고 어려움을 겪으면서 긴 세월을 살아가고 있다.
전쟁 후 7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어선은 물론 어떤 배도 다니지 못하는 조강을 보고 북이 고향인 나는 북쪽 가까운 동네를 보면서 평화와 공존의 중요함을 절실히 느꼈다. 2월 말의 청명한 날씨인데도 찬바람은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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